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淸山에 2012. 6. 22. 21:36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전쟁 이유와 원인 >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로마에 패망하고 ?겨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죠).유대인들이 떠난 팔레스타인 땅에 정복자 로마인들이 살게 됩니다. 하지만 내부적 원인으로 로마인들은 철수를 하고 그 땅에 지금의 아랍인들이 들어와 살게 됩니다. 전쟁에 패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자기 땅을 꼭 찾으리라는 소망을 잊지 않고 살아가죠. 세계에 흩어진 백성들은 그 나라에 완전히 동화되어 자기 언어 자기문화 자기종교를 잊기 마련인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전세계 어디에 가든지 종교적 전통을 가지면서 남의 문화를 따랐던 것이죠 솔로몬시대에 중국 윗 지방으로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위험 처해지자 이스라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이 연합군을 도와주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승낙하였죠 그리고 신의 도우심인지 전쟁은 승리하고 미국은 약속대로 세우기로하고 진행하였습니다. 그때 일본이 중국 북쪽에 이스라엘을 세우자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많이 있으니(모택동도 이스라엘피가 있습니다) 그렇게 제안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거절하였고, 자기땅은 아브라함때부터 약속된 가나안,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건국 할 수 있게 도와주었죠 그러나 그것이 분쟁의 불씨의 시작입니다. 남의 땅을 아랍인들이 뺏은것은 아니지만 들어와 차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들도 분명히 유대인들 땅이라는 것을 압니다. 누구의 땅이라고 참 애매한 땅입니다
강력한 제3자의 개입이 없는한 불씨는 영원할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 [Diaspora]


('분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히브리어로는 Galut : 유대 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 또는 '유배되어' 팔레스타인 곧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한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과 자신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철학적·정치적·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에 '유배당한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전통적 유대교의 메시아 희망에서부터, 하느님이 세계 전역에 순수한 유일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다는 개혁 유대교의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초의 중요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BC 586년의 바빌로니아 포로 때문에 생겼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노예로 삼아 끌고 갔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머물러 살았다.
 
  초기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성했는데, BC 1세기 그곳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대인들이었다. AD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 바깥에 살던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 4/5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보았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뒤 유대교의 주요중심지는 바뀌었으며(예를 들면 바빌로니아·페르시아·스페인·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미국), 유대인 공동체들은 점차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의식·문화 들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어떤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비해서 비유대교적 환경 속으로 보다 철저히 빠져들어갔다. 어떤 공동체들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다른 공동체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anti- Semitism)의 희생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역할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성 및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운동)을 지지하는 반면,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때에 자기의 메시아를 보내려는 뜻을 방해하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국가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하는 '셀릴라트 하갈루트'(shelilat ha-galut:유배를 부정함) 이론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는 동화(同化)와 문화적 특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유대인들만 유대인으로서 존속할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입장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다른 어떤 입장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곳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1937년 미국 랍비 중앙협의회는 유대인들이 더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조국 수립을 지원하도록 적극 장려했다. 그러나 1943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미국 유대교 협의회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고국에 주는 일체의 지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불충스런 행위라고 선언했다.
 
  유대인 국가 설립을 위한 지원은 종종 박애적인 이유만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전세계에 사는 약 1,45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310만 명 가량이 이스라엘에, 590만 명 이상이 미국에, 그리고 21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살고 있다.
 
                                                 

 바빌론 유수 [Babylonian Exile]


Babylonian Captivity라고도 하며 BC 598(또는 597)년과 BC 587(또는 586)년 바빌로니아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을 바빌로니아에 강제로 억류시킨 사건.


    바빌론 유수는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BC 538년에 공식적으로 끝났는데,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성서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다. 역사가들은 다음의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① 팔레스타인에서 몇 차례 폭동이 일어나자 그때마다 추방 조치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이 조국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② 귀향이 허용된 후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수차례에 걸쳐 바빌로니아를 떠났고,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계속 남아 있었으며, 이결과 최초로 많은 공동체가 형성되어 디아스포라 의 형태로 계속 살게 되었다는 사실 등이다
 
많은 학자들은 최초의 추방 시기를 BC 597년으로 추정하는데, 이해가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어 그의 가족, 신하, 수천의 부하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해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학자들은 586년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직후를 최초의 추방시기로 보는데, 만일 이러한 주장에 따른다면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기간이 48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유수 기간이 70년이었다는 전승(예레 29:10)을 받아들이는 학자들 중 일부는 이 기간을 BC 608~538년으로, 또다른 학자들은 BC 586~516년경(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해)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심한 고통을 겪고 강력한 문화적 압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민족정신과 종교적인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장로들이 유대인 공동체를 관리했고, 예언자 에제키엘은 언젠가 이루어질 귀향의 희망을 계속 일깨워주었다. 유대교 회당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유대교 절기를 지켰고, 할례를 수행했으며, 성전에서는 그 이전에 했던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 대신에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키루스 대왕을 은인이자 하느님의 종이라고 보는 견해가 히브리 성서 몇몇 구절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사야〉(45:1~3)에서는 실제 키루스 대왕을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