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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난 김창묵 동찬기업 회장(오른쪽)과 김병민 중국 연변대 총장. 김 총장은 연변대 조선족민족박물관
건립에 6억원의 기부금을 낸 김 회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김 회장은 "나도 어린 시절 배고팠다"고 기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만주로 떠났다. 당시 '선진 농업 개척단'이란 이름으로 조선인들을 만주로 보내 농사일을 시켰던 일본 정부는 "개척단 생활을 마친 사람들에게 9만9000㎡씩 토지를 배급하겠다"고 했다.
행상을 하다 빚을 진 아버지 대신 두부 장수를 하고 광산촌 밥집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렸던 어머니는 "거긴 도적떼가 들끓어서 가면 죽는다더라"고 말렸지만, 외국서 돈을 벌어 와 훗날 닭치고 소 키우며 단란하게 살리라 결심한 아들을 말리지 못했다.
꿈을 품고 7년여간 허리가 휘게 일하는 와중에 광복이 됐다. 빈손으로 귀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에 찌들린 고향 대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책을 가득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며 책 장사를 하고, 노점상도 했다. 등대지기 모집 광고를 보고 갔더니 이미 연줄로 채용이 결정돼 있어서 낙담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 무렵 만주에서 돌아온 개척민들을 대상으로 영등포 인근에 정착촌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가 운 좋게 선정됐다.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하며 몇 년간 쏠쏠하게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6·25전쟁이 터져 모두 물거품이 됐다.
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와 보니 농지는 비행장으로 바뀌었고, 다 타버린 집에 남은 건 시계 하나가 고작이었다. 다시 공사 현장에서 날품팔이하고 행상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찾은 곳이 남대문시장이었다.
있는 돈 모두 털어 좌판 하나 구했다. 높은 자릿세에 허덕이고, 달러 빌려주는 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월 30%'라는 살인적 이자율 때문에 한밤중에 업자를 찾아가 이자율을 내려 달라고 애걸한 적도 있다.
못 견디게 힘들 때도 있었지만 '여기서 3년만 꾹 참으면 길이 열리겠지'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돈이 모여 작은 점포를 샀고, 1976년엔 동찬기업을 세울 수 있었다.
2000년대 초, 김 회장은 그토록 어렵게 일군 재산 중 100여억원을 '동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유적지 조성사업에 기부했다. 동창만세운동은 1919년 그의 고향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일명 '동창마을'에서 5개 면 주민 1000여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 8명이 순국한 사건. 운동을 주도했다가 고문으로 실명한 김덕원 의사는 김 회장의 3종조부이기도 하다.
"장돌뱅이 하면서 모은 돈이 박물관이나 유적지 조성 등 민족정기를 살리는 데 쓰인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남은 생도 그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