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의 역사
정확한 '1m'를 위해 프랑스 원정대는 7년을 헤맸다 김기철 기자 이메일kichul@chosun.com
영주들 도량형 악용하자 프랑스혁명 때 개혁 요구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 4000만분의 1을 1m로… 세계 미터법 통일은 '현대의 바벨탑' 사건
측정의 역사
로버트 P. 크리스 지음|노승영 옮김 에이도스|356쪽|1만8000원
1999년 1억2500만달러를 들인 무인 화성기후탐사선이 화성 궤도에 진입하다 폭발했다. 사고 원인은 어처구니없었다. 공학자들이 로켓 프로그램을 짤 때, 한 집단은 야드(yard) 단위를 쓰고 다른 집단은 미터(meter)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측정 단위를 쓴 탓에 엄청난 손실을 입자, 미 항공우주국(NASA)은 앞으로는 미터법만 쓰겠다고 발표했다. 로버트 P. 크리스(Crease) 뉴욕 스토니브룩대 교수는 세계 각지 척도(尺度)의 역사를 살피면서 18세기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해 애써온 과학자·정치인들의 분투를 보여준다.
◇인체에서 시작된 측정 단위
중국에선 발 길이를 '척(尺)', 엄지손가락 굵기를 '촌(寸)'이라 했고, 1척은 10촌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선 발 길이를 '푸스', 손가락 굵기를 '닥틸로스'라 하며 1푸스는 16닥틸로스였다. 최초의 측정 도구는 이렇듯 인체에서 시작됐다. 한 줌, 한 움큼 같은 단위는 지금도 요리할 때 쓴다. 문제는 이런 단위가 사람마다 달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길이와 무게의 표준을 확정하고, 통일하는 것은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확보하는 징표였다. 로마인은 카피톨리노 사원에, 그리스인은 아크로폴리스 신전에, 유대인은 성전에, 미국은 워싱턴 인근에, 프랑스는 파리 근처에 척도의 표준이 되는 원본을 보존했다.
고대 중국은 악기의 음높이를 정확히 맞춰 왕조 제례(祭禮)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도량형을 개혁했다. 여기엔 이전 왕조의 예법이 옳지 않았음을 증명함으로써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개입됐다. 가나·토고·코트디부아르에 사는 아칸족은 금가루 무게를 달 때, 놋쇠 저울추를 썼다. 금가루는 아칸족의 화폐였다. 아칸족 가장은 누구나 금 무게를 달 때 쓰는 저울추와 도구를 담은 주머니 '푸투오'가 있었다. 이 저울추의 무게는 세금·벌금·서비스·상품 등에 대해 금가루를 얼마나 내줘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가격의 표준이었다. 저울추는 아칸족 지식의 총체를 담은 백과사전이었다.
◇프랑스의 미터법 제정
지방마다, 나라마다 다른 측정 단위를 쓰던 도량형을 통일하게 된 계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었다. 영주들이 기존 도량형을 멋대로 악용해 농민을 수탈했다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사람들은 '길이도 하나, 무게도 하나'를 요구했다. 혁명세력은 도량형 개혁이야말로 봉건제와 구체제를 타도하고,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며 농노제를 타파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아카데미는 새로운 도량형 표준을 제정하는 임무를 정치인 탈레랑에게 맡겼다. 귀족 출신의 노회한 정치가 탈레랑은 시류에 편승하고 손해를 피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도량형 개혁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왼쪽 아래 작은 사진)미 연방물리기술청이 2011년 1킬로그램 표준으로 만든 실리콘 공. /corbis/토픽이미지
"도량형의 난맥상은 정신을 혼란시키며 상거래를 저해한다." 1790년 탈레랑이 아카데미 회원과 의논해 국민의회에 제출한 도량형 개혁안 첫 구절이다. 아카데미는 1791년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의 4000만분의 1을 1m로 정했다. 자오선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메생과 들랑브르는 원정을 떠났다. 혁명정부 공식대표인 메셍은 스페인에서 간첩 혐의로 붙잡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원정은 7년이나 걸렸다. 원정대의 측정 결과를 토대로 1799년 미터 표준기를 만들었고, 증류수 1㎥의 무게를 재서 킬로그램 표준기를 공식적으로 제정했다. 하지만 미터법 이외의 단위를 사용할 때마다 10프랑씩 벌금을 매겨 미터법을 강제한 것은 1840년 이후의 일이었다.
◇미터법의 세계화
'미터법은 인쇄술 이후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이다.' 1821년 미국의 도량형 개혁을 추진하던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미터법을 극찬했다. 그러나 미터법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19세기 전반을 지났을 무렵, 영국 및 영국 전·현 식민지국들은 야드파운드법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프랑스 영향을 받은 몇몇 나라들은 미터법을 쓰며 각축을 벌였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가 국제사회가 미터법을 받아들이는 데 박차를 가했다. 박람회에 전시된 각국 기계를 관람한 사람들은 정밀도를 높이고, 측정 단위를 표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1875년 5월 20일 미국을 비롯한 17개국이 국제미터위원회를 창설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독일 포르투갈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이 미터법을 채택했다. 미터법은 처음 등장한 지 2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만국 공통의 측정체계로 등극했다. 저자는 이를 '현대의 바벨탑'으로 불릴 만한 혁명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측정의 과학'이 빚어낸 함정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능이나 행복, 자존감, 교육 수준처럼 근본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것까지 측정하려 들고 이것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국민 개개인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 것처럼 숫자로 계산된 지표에는 진실을 감추는 속임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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