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0~15:30 달실마을 ‘충재 선생의 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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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가 자랑하는 음식이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송이버섯을 밥 위에 얹은 송이돌솥밥(위 왼쪽), 내성천에서 잡은 고기로 끓인 매운탕(아래 왼쪽), 각종 버섯과 채소를 담뿍 넣은 송이전골(위 오른쪽), 양념 맛이 환상인 더덕구이(아래 오른쪽).
석천정사를 지었다는 충재 선생의 고택으로 갈 시간이다. 도보로 15분쯤 걷자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 같다(金鷄抱卵·금계포란)’고 하여 지어진 달실마을이 나타난다(달실은 경상도 방언으로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푸른 산이 기와집들을 뺑 둘러싸고 있으니 ‘알을 품은 산’이 맞다. 석천계곡부터 석천정사, 달실마을까지 이 근방은 사적 가치가 높아 명승 60호로 지정돼 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이곳은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1519·중종 14년) 때 낙향해 터를 잡았다. 그의 지조는 참으로 대쪽 같았던 터라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를 때 “그만 내려가시라”고 고했던 분이다.
충재 선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청암정에 이르자 거북이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정자 한 채가 그림같이 서 있다. 쪽빛 연못이 바위를 감싸니 거북이가 정자를 등에 업고 연못을 헤엄치는 형상이다. 고향을 지키며 종가의 명맥을 잇고 있는 충재 선생의 18대손 권종목(69)씨는 “이곳에서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음란서생’ ‘스캔들’을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권씨 가문의 유물을 모아 놓은 박물관(054-674-0963)을 도는데 문화재 담당 이영희 기자의 눈매가 슬프다. 이 기자는 “야유회가 아니라 일하러 온 것 같다”며 수첩을 꺼냈다.
여기서 잠깐. 권씨 가문의 총명함은 그 여종까지 미쳤는데, 바로 시인 설죽이다. 충재 선생의 손자 권래의 여종인 설죽은 어깨너머로 한자를 깨쳤다. 당시 양반들은 딸에게도 글을 못 배우게 했는데 설죽이 얼마나 똑똑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주인과 함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양반 사대부들과 시를 교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 168수의 주옥 같은 한시를 남겼다. 여기 ‘이른 봄(早春)’이란 시를 읊어 본다. “봄비 내리자 배꽃이 하얗게 피고/ 봄바람 불자 버들개지 노랗게 피었네/ 누가 피리를 부는지/ 매화향기 흩날리누나(春雨梨花白/東風柳色黃/誰家吹玉笛/搖揚落梅香).”
15:30~17:00 오록마을 ‘살아 있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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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록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 가운데가 ‘오록 김 마담’ 김진남씨.
이번엔 풍산 김씨의 집성촌인 오록마을이다. 영주 부석사와 닮은꼴인 축서사를 찍고 고택 체험을 하러 들른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운명 같은 만남을 하고 만다. 바로 봉화의 여인, 오록 김 마담이었다. 야트막한 돌담길을 걷다가 오록1리 노인회관을 지날 때였다.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들을 본 박 부장이 갑자기 오지랖을 부려 본다. “할머니, 저희 서울에서 왔어요.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주세요.” 웃는 얼굴이 그대로 주름이 돼 버린 할머니들은 “아이고, 학생들인가벼?”라며 반갑게 맞아 준다.
“자자, 오록 김 마담이 타 온 커피 한 번 드셔 봐요.” 다섯 할머니 중 막내라 일을 도맡아한다는 김진남(68) 할머니다. 배고프겠다며 뒤 창고에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센베과자’를 내온다. 일행은 할머니의 윤허하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김씨 가문의 옛날옛적 이야기를 듣는다. 조용한 마을이 북적거리자 지나가던 이장님도 발걸음을 멈춘다. 이장님은 “자식들이 모두 서울로 가서 이 동네 30가구 중 가장 젊은 분이 58세”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신문에 나가면 우리 마을에 사람이 많이 오겠네. 내일부터 미나리랑 산나물 좀 뜯어다 손님 맞을 준비해야겠다”며 부담을 주신다.
할머니들과 더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회관을 나서는데, 돌담 위에 부처의 두상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은 ‘불두화’가 수국처럼 피었다. 자잘한 꽃차례들이 할머니 얼굴의 주름 같다. 부처가 살아 있다면 저 모습이겠다.
17:00~18:00 국립수목원 조성 예정지
아, 볼 건 많고 시간은 없다. 특히 2014년 개장할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조성지는 꼭 들러야 할 터. 봉화는 태백산·청옥산·청량산 등 높은 산이 많아 ‘경북의 오지’로 불리지 않았던가. 춘양면 서벽리 금강소나무숲에 들어서자 높이 20m가 넘는 소나무가 하늘을 보고 쭉쭉 뻗어 있다. 일련 번호가 적힌 소나무가 무엇인가 했더니 문화재 재건용 목재로 쓸 것들을 체크해 놓은 것이었다. 정강현 기자는 언제 문화재가 될지 모를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정기를 받는 시늉을 한다. 이런, 동그란 얼굴 탓에 곰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것 같다. 정곰현 기자, 진정한 물아일체다.
그런데 생각보다 숲이 울창하지 않다. 숲해설가이자 영주국유림관리소 이상을 보호팀장은 “워낙 목재가 좋다 보니 일제의 산림 수탈과 근대의 남벌 타깃이 됐다. 그나마 토질이 좋아 소나무가 금방 자라 다행이다”고 했다. 2년 후 수목원이 개장하면 이곳에 백두산 호랑이 열여섯 마리가 방사된다. 부디 그 옛날 ‘숲의 왕좌’ 자리를 되찾기를.
이틀째 9:00~12:00 청량산 등산과 김생굴
지난밤 찜질방형 민박집인 인하원(054-672-8289)에서 오리고기(1마리 3만5000원)로 배를 가득 채웠는데도 아침이 되니 금세 배고프다. 특히나 아랫목에서 자느라 불타는 고구마가 됐던 하현옥·이영희 기자는 목이 탈대로 탔다(바닥이 매우 뜨거울 수 있으니 취향에 따라 온도 조절을 부탁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정성스레 끓인 북엇국(1인분 6000원)을 한 사발 먹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다.
자, 이제 봉화여행의 화룡점정, 클라이맥스 청량산(높이 870m) 등반이다. 봉화 사람들은 슬리퍼를 신고도 오른다고 했는데, 이거 뭐 주변 등산객을 둘러보니 히말라야에 오를 기세다. 평소 마라톤으로 체력을 단련해 온 강기헌 기자는 날다람쥐처럼 휙휙 앞서 나간다. 경사가 심한 계단 코스에 들어서자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하 기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를 본 권혁재 기자, “어느 때보다 예뻐 보인다”며 때아닌 칭찬을 한다.
산 중턱 김생굴에 이르니 재미있는 설화가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는 이렇다. 통일신라의 서예가인 김생이 이 굴에서 9년간 명필 수련을 하고 하산하려는데 청량봉녀가 나타나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불을 끄고 내 길쌈 솜씨와 네 서예 솜씨를 겨뤄 보자.” 김생은 자신만만하게 “도전!”을 외쳤으나 불을 켜 보니 글씨가 삐뚤빼뚤하더란다. 깨달음을 얻은 김생은 1년을 더 연마해 10년을 채운 뒤 하산해 명필이 됐다. 한석봉 일화와 비슷하다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정곰현 기자가 중대 발표를 한다. “먼저들 내려가세요. 10년간 기사 수련하고 내려가겠습니다.”
12:00~13:00 청량사 찍고 하산
청량산 중턱에 오롯이 앉아 있는 청량사는 매년 10월 산사음악회가 열릴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게다가 28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색색 연등이 열 맞춰 걸려 있어 운치를 더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사진이 되고 시가 되는 곳이었는데, 하물며 전통찻집의 이름은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었다. 절에서 무료로 주는 된장차(된장에 쑥을 넣어 묽게 우린 차)까지 얻어 마신 뒤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산을 오를 땐 안 보이던 야생화며 기암괴석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청량산이 세 번째라는 권혁재 기자는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아름다운 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청량산 매니어였던 퇴계 이황 선생은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는 시조를 남겼을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이에 질세라 지난해 중앙일보 노조 노래경연 1등 송지혜 기자가 읊조린다. “가슴에 청량산을 안고 가고 싶다. 산 천지가 내 안에 들어왔다.”
14:00 서울로 출발 ‘안녕! 봉화’
봉화를 떠나기 직전 청량산 기슭에 까치소리식당(054-673-9777)에서 송이전골로 배를 채웠다. 1박2일 동안 내내 가이드를 해 줬던 이 고장 출신의 문화관광해설사 방유수씨는 "봉화는 초코파이다”라고 했다. 인정의 마을이란 뜻이다. 원래 안동에 속했던 봉화는 조선시대까지 양반 마을이었다. 양반의 몰락과 함께 이곳도 쇠락할 수밖에 없었는데 근대 들어 영주나 울진, 안동이 관광지로 각광받았던 반면 봉화는 산세가 험해 그러지 못했다. 경남 김해에 있는 ‘봉하마을’과 헷갈려하는 경우도 그래서다.
봉화를 떠나면서, 그동안 이곳이 관광지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악한 간판이 달린 펜션이 없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도 없고, 다음 관광객을 받기 위해 서둘러 내치는 민박집 주인도 없으니. 만약 어딘가에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봉화이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