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 면앙정에 오르면 추월산·삼인산·불태산·어등산·용진산이 훤하고, 제월봉에 오르면 무등산이 다가온다. 정자 아래는 대덕면 만덕산에서 내려온 오례천이 흐르는데, 용추산 가마골에서 발원하는 극락강을 만나 무등산 계곡을 타는 증암천을 품고서 넉넉하게 남녘 들판을 적신다. /이종범 교수
그런데 남곤과 심정의 추종자가 알아차려서 경칠 뻔했다. 벼슬살이는 힘들었다. 그래도 스승인 박상의 곤욕(困辱)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멀리서 잠깐이라도 뵈올 수만 있다면, 누구한테 앞산이라도 빌려서 오르고 오르렵니다.…저에게 맑은 바람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어두움을 벗어날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심정을 꺾고 조정에 복귀한 김안로는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부마임을 앞세워 '동궁을 보호하겠노라'고 떠들며 언론을 조작하고 인사를 전횡하였다. 실로 참기
어려웠다. "동궁은 모든 신민이 받들어야 하거늘, 어찌 왕실의 인척이 혼자 떠맡는다고
할 수 있는가!"
결국 파직이었다. 그리고 10년 전에 마련한 땅에 면앙정을 올렸다. 이때 시조는 강호(江湖)의 일품이다. '십년 경영하여 초가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때 '남중후배영수(南中後輩領袖)'로 불렸다. 기묘사림을 따르는 남녘 선비들의 지도자라는 뜻이다. 한때 위기였다. 1534년 가을 문신들의 재시험에서 김안로를 '지록지간'으로 지목한 나세찬의 배후로 몰린 것이다. 김안로는 나세찬을 고문하면서 송순까지 얽고자
하였으나 결국 무사하였다.
송순은 정녕 평안하지 못하였다. 거듭되는 흉년, 비참한 민생을 차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집 곡성을 듣고[聞隣家哭]'나 '거지의 노래를 듣고[聞��歌]'에 기록하였다. 장편 서사시 '농가의 원성[田家怨]'은 읽기조차 민망하다.
'아전인들 어쩌겠나?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을 묶어서, 원님 앞에 바치니, 원님 또한 인정도 없구나. 죽여주십사! 하늘에 외쳐도, 누가 들어줄 것인가?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니 슬프고 슬퍼라, 시체 되어 빈 구덩이를 메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