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호남 사림의 영수, 비참한 민생을 품어

淸山에 2012. 5. 7. 19:48

 


 

 

 

호남 사림의 영수, 비참한 민생을 품어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29〉송순

 

 


'면앙정가(�]仰亭歌)'는 유명하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이 가운데 정자라니, 흥취도 호연하네. 풍월을 불러보세, 산천을 당겨보세. 명아주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리라.' 이렇듯 면앙정은 산하를 품고 우주에 안겼다. 송순(宋純·1493∼1582)이 지었다. 전남 담양군 봉산면 출생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일찍이 장성의 청백리 송흠에게 배웠다. 9촌 족숙이었다. 21살(1513)에 진사가 되고, 마침 담양부사로 부임한 박상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519년 10월 별시문과에서 조광조에게 "이런 문장은 김일손 이후 처음이다"는 극찬을 들었으나, 남곤이 훼방하여 갑과 장원을

놓쳤다.

 

그리고 한 달 후 기묘사화, 무등산에서 박우에게 토로하였다. 박상의 아우로서 한동안 술로 울분을 달랬다는데, 훗날 사림 재상에 오른 박순의 부친이었다. "홀로 가득 술 채워도, 시름이 풀리지 않더이다."

 

송순은 정예 문신으로 뽑혀 휴가받고 독서하는 은전을 받고도 매양 심란하였다. 독서당에서 지었던 '모사(暮思)' 즉 '해질녘 그리움'은 유명하다. '해가 지고 달이 나오지 않으니, 장공의 뭇별들이 서로 밝다고 다투네. 산천은 기운 잠기고 빛깔마저 사라졌으니, 누가 이내 외로운 마음이 아파하는 줄을 알까?'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 면앙정에 오르면 추월산·삼인산·불태산·어등산·용진산이 훤하고, 제월봉에 오르면 무등산이 다가온다. 정자 아래는 대덕면 만덕산에서 내려온 오례천이 흐르는데, 용추산 가마골에서 발원하는 극락강을 만나 무등산 계곡을 타는 증암천을 품고서 넉넉하게 남녘 들판을 적신다. /이종범 교수

 

 

그런데 남곤과 심정의 추종자가 알아차려서 경칠 뻔했다. 벼슬살이는 힘들었다. 그래도 스승인 박상의 곤욕(困辱)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멀리서 잠깐이라도 뵈올 수만 있다면, 누구한테 앞산이라도 빌려서 오르고 오르렵니다.…저에게 맑은 바람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어두움을 벗어날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심정을 꺾고 조정에 복귀한 김안로는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부마임을 앞세워 '동궁을 보호하겠노라'고 떠들며 언론을 조작하고 인사를 전횡하였다. 실로 참기

어려웠다. "동궁은 모든 신민이 받들어야 하거늘, 어찌 왕실의 인척이 혼자 떠맡는다고

할 수 있는가!"

 

결국 파직이었다. 그리고 10년 전에 마련한 땅에 면앙정을 올렸다. 이때 시조는 강호(江湖)의 일품이다. '십년 경영하여 초가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때 '남중후배영수(南中後輩領袖)'로 불렸다. 기묘사림을 따르는 남녘 선비들의 지도자라는 뜻이다. 한때 위기였다. 1534년 가을 문신들의 재시험에서 김안로를 '지록지간'으로 지목한 나세찬의 배후로 몰린 것이다. 김안로는 나세찬을 고문하면서 송순까지 얽고자

하였으나 결국 무사하였다.

 

송순은 정녕 평안하지 못하였다. 거듭되는 흉년, 비참한 민생을 차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집 곡성을 듣고[聞隣家哭]'나 '거지의 노래를 듣고[聞��歌]'에 기록하였다. 장편 서사시 '농가의 원성[田家怨]'은 읽기조차 민망하다.

 

'아전인들 어쩌겠나?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을 묶어서, 원님 앞에 바치니, 원님 또한 인정도 없구나. 죽여주십사! 하늘에 외쳐도, 누가 들어줄 것인가?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니 슬프고 슬퍼라, 시체 되어 빈 구덩이를 메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