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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 막은 토지개혁 주도… 6·25전란속 정치거물로 각인

淸山에 2012. 5. 5. 10:00

 

 

 

 

 

 

 

공산화 막은 토지개혁 주도… 6·25전란속 정치거물로 각인

[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9> 죽산의 토지개혁과 대통령선거 출마

  • 이원규 소설가
  •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임시수도 시절의 조봉암 국회부의장과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5월 영구 집권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는 등 정치 파동을 일으켰는데, 당시 죽산은 정권의 위협 속에 발췌개헌안 표결에 동의해 줌으로써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조호정 여사 제공
명예와 함께 온 시련
지주들 지지받던 한민당의 음해… 농림장관 취임 6개월만에 낙마…
아내 납북… 평양갔지만 허사로


부산정치파동과 美비밀문서
발췌개헌안 동의로 정치적 타격… 이승만과 대선 맞섰지만 낙선…
쿠데타說속 "여건 미성숙" 발빼


죽산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공로는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토지개혁을 추진한 일이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부분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이 자녀 교육으로 집중됐고 그것이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 운동 전력이 있는 죽산을 전격적으로 기용했다. 뒷날 죽산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그와 두 번이나 대결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법살당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단명 농림부장관에도 토지개혁 업적

박태균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는 친일 지주계급 중심 정당인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것. 죽산은 반(反) 한민당 경향이 강했다. 둘째는 이범석 총리 국회 인준을 위한 정치적 타협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죽산은 무시 못할 무소속 단체인 6ㆍ1구락부를 이끌고 있었다. 셋째로는 미군정이 요구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미군정은 남한이 전적으로 우익에 의해 유지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죽산은 취임하자마자 농지개혁법기초위원회를 만들고 농촌 실태조사에 들어갔으며 현지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그는 젊은 날 신흥청년동맹의 논객으로 활동할 때처럼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사랑방 대화에 참여해 농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농림부 안은 절묘했다. 3정보 이상 소유한 대지주의 땅을 유상 몰수하여 그 땅을 소작해 온 소작농, 영세농에게 분배하고 평년작 1.5배의 값을 5년 분할 상환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재산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토지는 천부성(天賦性)을 가진 자원이므로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평등지권의 의의를 실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다.

죽산은 농지개혁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다. 지주들의 지지를 받던 한민당은 강력한 정치공세를 펼쳤다. 그런 과정에서 공금유용과 독직혐의를 쓰게 되었다. 정부의 양곡 매입
자금 일부를 관사 수리에 썼고 농민일보 창간에 썼다는 것이었다. 결국 오늘날 감사원과 같은 감찰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고 법정에 서게 되자 취임 6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내 김조이 여사의 납북

장관직을 떠난 뒤 죽산은 의정활동에 전념했다. 인천에서 다시 출마해 압도적 득표로 당선, 제2대 국회에도 진출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은 제헌의회와 달리 5ㆍ10 단독정부 선거에 불참했던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고 민족주의 좌파 우파 인사들이 대거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이승만 지지파는 20여 명, 야당인 대한국민당 20여 명이고, 태반이 이승만과 정통 보수노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좌파 우파들이었다. 끊임없이 개혁을 주장해온 죽산에게 좋은 기회였다.

제2대 국회는 6월 19일에 개원했고 죽산은 이날 장택상과 함께 국회부의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엿새 뒤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한의 정치지형이 바뀌어 버렸고 죽산은 크게 발돋움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전쟁으로 인해 가정에도 비극적인 일이 생겼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가운데 그는 국회부의장으로서 국회 피난을 준비하느라 한강
인도교 폭파 직전 아슬아슬하게 서울을 떠났다. 그러는 바람에 가족을 챙기지 못했고 결국 아내 김조이 여사가 납북되었다. 조선 여성 최초로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나와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김조이 여사는 광복 후 남편이 공산당을 떠나 전향하자 뒤를 따랐고 장관 부인, 국회부의장 부인으로 살아왔는데 그로 인해 북한군의 체포 목표가 되었다.

여사의 남동생 김영순 선생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납북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인공 치하 7월 말일이었어요. 내가 매형(죽산을 말함)의 조카인 조규진과 인천에서 양조장 박 과장한테 보리쌀 한 말을 받아 둘이 나눠 등에 지고 비 맞으며 서울까지 걸었어요. 매형은 서울에서 탈출했지만 남은 식구들은 먹어야 하잖아요. 보리쌀이 퉁퉁 불어서 명륜동 집 복도에 널고 있는데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어요. 어둑어둑할 때 트럭에 실렸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님 목소리가 들렸어요. '영순이 아니냐. 나도 이미 붙잡혔다.'했어요. 중부
경찰서로 끌려가 지하실에 갇혔지요. 나와 규진이는 석방되고 누님은 풀려나지 못했어요. 나중에 목격자에게 들었어요. 딴 곳에서 붙잡힌 우리 형님과 함께 철사 줄로 묶여 미아리 고개를 넘어 끌려갔다구요."

김영순 선생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야기도 했다. 그 후 죽산과 재회했을 때 죽산이, "국군이 북진할 때 내가 강원명(姜元明) 비서관과 함께 집사람 찾으러 비행기 타고 평양에 갔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처남인 선생을 붙잡고 울었다는 것이었다.

부산 정치 파동과 2대 대통령 입후보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8월 자신을 직접 지지할 신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원외자유당이었다. 죽산도 정당 조직에 착수했다. 서중석 교수의 저술을 보면 그의 비서 이영근(李榮根)을 책임자로 한 신당사무국을 차렸으며 여러 세력을 끌어당겼다. 그 중 하나가 농림부장관 시절에 관계를 맺은 농민조직이었다. 당명은 뜻밖에도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의 명칭은 죽산의 신당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영근과 조직원들을 '대남간첩단사건'으로 체포해 재판에 넘겼다. 죽산을 실각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양심적인 판사인 김용식(金龍式)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고 이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한 것은 알려진 바이다.

1952년 5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영구 집권을 위한 처사로 국회의원들을 체포구금하고
통근버스에 태운 채 헌병대로 연행해 갔다. 죽산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위협 속에 강압적으로 추진된 말썽 많은 발췌개헌안에 대해 신익희 의장과 조봉암 김동성 두 부의장은 표결에 붙이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연구자들은 이 발췌개헌안과 정치파동이 미국 측의 정치공작으로 보고 있으며, 죽산 등 의장단이 동의한 것이 무초 미국 대사의 요구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죽산은 정치적 위상이 한껏 커진 상황에서 현실에 타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가로서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우여곡절 속에 통과된 발췌개헌안에 의해 1952년 8월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죽산은 출마했다. 7월 25일 그는 국회 산회 후 의원들에게 입후보
동기와 소신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진정 민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기를 바랐으나 그런 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미숙한 나라도 고쳐보겠다는 생각으로 입후보한 것이다. 나는 국가의 원수라는 지위를 꿈꿀 처지도 아니며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도 아니다. 또 높은 지위를 탐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믿는 바 일을 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다. 여러분에게 미리 의논치 않은 것을 섭섭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달리 믿는 바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성공 여부는 모르나 힘껏 싸울 것이며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나의 신념에 공명하면 열렬한 원조가 있기를 바란다." (
조선일보 1952년 7월 27일자)

아직 전선에서는 남북이 싸우고 있었다. 반공 멸공을 앞세우는 이승만과 맞서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구호로 선거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80만 표 가까이 득표하여 차점자로 낙선했다.

쿠테타에 관한 미국 비밀문서 속의 죽산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 1952년 쿠테타가 계획됐고 1953년에는 미국 정부가 또 다른 쿠테타를 지원하려 한 미국 비밀문서 기록들이 있다. 양쪽에 죽산의
이름이 나온다.

첫째는 신동아 1995년 8월호에 실렸다. 1952년 대통령 선거 직후 흥사단과,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보수주의자들이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쿠테타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장면(張勉) 전 총리와 함께 죽산도 옹립 대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종찬 이용문 등 군부 지도자들이 지지했다 한다. 죽산은 이에 대해 '실행에 들어가기는 시기가 성숙하지 않다'며 발을 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하나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발굴 공개한 자료이다(
중앙일보 2011년 1월 28일자 기고). 1953년 6월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한 데 대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소집, 이승만 제거를 제안하며"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신속한 방법은 쿠테타"라고 발언했으며 내세울 지도자로 신익희 조병옥 장면 조봉암 등을 검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누구보다도 미국에 가까운 이승만이 그 정보들을 몰랐을 리 없다. 전쟁 중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이렇다 할 조직도 없이 80만 표를 얻은 죽산을 제거할 결심을 이때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변신에 성공하여 거물 정치가로 부상한 죽산, 그의 앞에는 더욱 냉혹하고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