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廳을 들어 옮긴 '철도의 힘'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5]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경남도청 이전 문제는 금(今)에 시(始)한 사(事)가 아니오, 도청이전 문제가 운(雲)과 여(如)히 기(起)하고 무(霧)와 여히 소(消)하야, 문제가 기할시마다 진주 재유민(在留民)의 경악됨이 일재(一再)에 부지(不止)한 설(說)이로다. …철도가 개통되면 본 문제는 자연 소멸될 것시로다."(1921년 1월 5일자)
진주에 있는 경남도청 이전 문제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안개처럼 사라져, 그때마다 주민들이 크게 놀란 게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진주까지) 철도가 연결되면 자연 사라질 것으로, '도청이전은 절대 없다'고 밝힌 경남지사의 발언을 전한 기사다.
경남 도청의 부산 이전설은 1905년 경부선이 운행된 뒤 근 10여년 이상 계속 나왔고, 그때마다 총독부는 '불가' 방침을 밝혔다. 진주는 '이전설'이 부산의 '운동' 때문이라고 보고, 부산과 상거래를 거부하기도 했다.(1921년 8월 5일자)
1925년 4월 1일 부산의 관립병원인 자혜의원 신축 건물에 둥지를 튼 경남도청 전경.(1925년 4월 2일자)
1924년에도 이전설이 등장, 주민들은 격렬한 '도청이전 결사 방지' 운동을 폈으나(1924년 7월 28일자 등), 총독부는 12월 8일자 관보를 통해 도청의 '1925년 4월 부산 이전'을 확정했다.
이에 수만 군중이 "제각기 붉은 기를 들고, 선뎐 비라를 돌리며"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련일 살긔충텬한' 진주 시가는 전쟁터나 다름 없었고(1924년 12월 14일자), 시위는 인근 사천·통영·고성 등으로 확대됐다.(12월 16일자) 그럼에도 이듬해 4월 11일, 부산에선 '도청이전 축하음악회'가 열렸다.
경부선이 비켜가 비슷한 처지였던 충남도청 소재지 공주는, '도청 이전은 경남뿐이니 미리 놀랠 필요는 없다'는 총독부의 언명에도(1924년 12월 15일자), 역시 이전설이 나도는 황해도 해주, 충북 청주, 강원도 춘천과 연합, 경성에 대표단을 파견했다.(1924년 12월 18일자)
한동안 잠복했던 충남도청 문제는 도청 신축 예산이 잡히고(1930년 11월 13일자), "도청을 도세와 위치 여하를 불구하고, 다만 교통이 편리하다는 견지에서 경부선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풍설이 퍼지면서, 공주와 대전 시민은 치열한 '방지!' '탈취!' 운동을 전개했다.(1931년 1월 13일자 등)
일본 의회에서 도청 이전비가 삭제됐다가 부활되는 등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으나, 1932년 10월 1일 도청은 결국 대전으로 옮겨졌다.(1932년 6월 17일자) 철도가 새로운 도시를 낳고 그 주변에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조선의 오랜 행정중심지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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