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연제 - '시(時)의 기념일' & 26, 29, 30, 32, 33, 34

淸山에 2012. 5. 4. 08:06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72) 사이렌과 종 울리며 캠페인 벌인 '시(時)의 기념일'

김영철 발행일 : 2011.10.26 / 여론/독자 A37 면

▲ 종이신문보기

1921년 6월 10일 정오, 경성부 내 모든 교회와 사찰에선 종을 울리고 북을 두드렸다. 공장에선 긴 기적을, 관공서에선 '싸이렌'을 울렸다. 일본에선 이미 치른 경험이 있지만, 조선에선 처음인 '시간' 관념을 드높이기 위한 '시의 기념일' 행사를 알리는 소리였다.

조선일보 1921년 6월 8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는 일본에서 치르는 '시간 존중을 대선전'하는 취지를, "장래에 일층 시간을 존중히 하고 정각을 려행(勵行)코자 함"이라고 밝히면서, 행사 계획과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특히 '선전문'에 실린 시간관념의 '5대 요건' 전문을 싣고 "아침에 긔침하는 시간을 일정하게 정하고, 식사를 마치는 시간을 정하야 반다시 려행하며 매일 운동 시간을 정하야 둘 일. 출퇴근 시간을 지키고 근무와 휴식 시간을 구별하고, 약속한 시간을 준수할 일.… 시간 준수에는 정확한 시계가 필요하니, 정확한 시간을 맞추려면 오포(午砲·정오에 울리는 대포 소리)로 맞추거나, 전신국 정거장 시계를 표준할 일" 등을 소개했다. 특히 '오포 소리는 삼정(三町·약 327m) 거리에 1초씩 지연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경기도는 이 선전문을 '전차와 자동차 등에 첨부하고, 배달하는 각 신문 지면에도 끼워' 돌리도록 했다.(6월 9일자) 경성부는 처음 '시간 선전'을 한 뒤 "자금 이후로는 매년 행하야, 아조 경성에 년중행사로 삼을 의향"임을 밝혔다.(6월 10일자) 이후 '시간 기념일'은 연중행사로 치러졌고,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삐라' 배부와 정확한 시간을 맞추도록 시보나 사이렌을 울리고, 사람 통행이 많은 곳에서 통행자의 시계를 무료로 조절해 주거나 수선해주는 '써-비스' 행사가 단골로 치러졌다.(1933년 6월 6일자)

오랫동안 '닭 울음 소리'나 '태양의 위치', 달의 뜨고 지는 '때'로 읽혔던 조선의 '시간'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4월 1일부터 칙령 제5호에 따라 동경 127도30분을 '대한국 표준시'로 정하면서, 비로소 '세계 시간' 속에 편입됐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총독부는 "1912년 1월 1일부터 한국 표준시를 일본 동경 표준시(동경 135도)에 맞춰 오전 11시 30분을 정오로 개정"했다.

'시 기념일'까지 만들어 "시간에도 소비절약의 정신을 집중하자!"(1939년 6월 7일자) "시간을 아껴 써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1939년 6월 11일자) "시간을 직힙시다, 일분의 착오로 승패의 길" 같은 훈화나 구호가 강조되면서, '시간은 금'을 넘어 '시간은 생명'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1940년 6월 11일자) 조선의 두루뭉술한 시간은 점점 정확한 기계 시계에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 9년 뒤인 1954년 4월 21일 춘분을 기해 시간을 30분 늦추면서 '대한국 표준시'를 되찾기도 했으나 '5·16' 후 군사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8월 10일 0시를 기해 표준시를 동경 표준시로 바꿨다. "경도 15도에 따라 한 시간 차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한 국제 관례에 따른 것"으로, 오늘에 이른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26] 조선美展 '나체습작 파손 사건'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기사100자평(2)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03 03:11

 

1925년 5월 3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제4회 '조선미전(선전·鮮展)'의 입상작이 전시를 앞두고 파괴된 '조선 미술계의 중대한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5년간 동경 유학을 마치고 이해 귀국한 김복진(金復鎭)의 출품작 2점 중 '나체습작'이 전시를 앞두고 파손된 것.

'처음으로 조선 여자 모델을 구해 한달여 동안 고심력작'해 탄생한 '나체습작'은, "외인편 팔이 불어지고 배와 국부에 경미한 상처가"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했다. 미전 주최자인 총독부 관계자는 "고의로 엇더한 사람의 악행이라고는 볼 수 업스며, 아마 인부들이 일을 하다가 상한 것을 그저 둔 듯"하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현장' 발견자가 조각 부문 입선자로 '나체습작' 옆에 자기 작품('편물하는 여자')이 전시될 일본인인 데다, 총독부가 한사코 파손된 실물 공개를 거부, "당국의 변명은 도리혀 의심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김은 "누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닌가" 의심도 가지만, '예술가라는 처디'와 '예술가의 량심'을 신임해 "인부의 잘못으로 생각하려"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5월 30일자)

기자의 강력한 요청으로 후에 공개된 '나체습작'은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 팔이 어깨로부터 떨어졌고, 국부와 다리에 손톱 자국 같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파손된 작품의 '사진 박히는 것'은 완강히 거절했다. 한 전문가는 물체에 부딪힌 흔적도 없이 '조각의 생명인 삼각형'의 한 변을 이루는 팔이 떨어진 점을 들어, "상당한 미술안(眼)이 잇는 사람의 고의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5월 31일자)


 
 소녀를 모델로‘조선 소녀의 좌상’이란 동경 미술학교 졸업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김복진<왼쪽>.(1925년 2월 22일자)

 

조선일보는 1면 '시평'을 통해, "빈약한 조선 조각계에서 조선인의 작품이 일본인의 작품을 능가하게 우수하다는 것은 저들 국민성으로 능히 시기심을 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전(鮮展)의 존재가 과연 우리 예술계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치 안을 수 업다"고 통박했다.(6월 1일자)

 

1924년 가을 동경 제국미술전람회(제전·帝展)에 입선한 '조선미술계의 자랑'(1925년 2월 22일자) 김복진이, 귀국하자마자 항상 일본인들 독무대였던 '선전 조각 부문'에서 입선한 것은 충분히 시기할 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이자 팔봉 김기진(金基鎭)의 형인 그는, 조각뿐 아니라 극단 토월회와 카프(KAPF)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폈다. '4차 공산당 사건'으로 복역하기도 한 그는 1940년 8월 39세에 요절했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29] "라듸오 체조, 시~작!" 日帝가 심은 '집단주의'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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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100자평(2)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12 03:33

"방송협회, 체신국, 학무국, 조선체육협회 등 각 관계단체 련합으로 올여름을 기하야 전 조선 '라듸오' 체조회를 조직, …회기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로, 매일 아침 6시부터 시작한다…"

조선일보 1934년 7월 20일자는 여름 한 달 동안 전국 40여 곳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는 '라듸오 체조대회'를 시행한다고 전했다.

일본 체신성 간이보험국이 피보험자의 건강증진을 위해 미국에서 도입한 '라디오 체조'는, 1928년 8월 1일 오사카에서 첫 방송을 탄 이래 11월 1일에는 동경(東京)에서, 1929년 2월에는 일본 전역으로 확대됐다.

 



1933년 8월 19일자에 실린 체조 모습. 옥외에서 함께 모여‘라디오 체조’를 하는‘라디오 체조 대회’는 1934년부터 조선 전역으로 확대됐다.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것은 1928년 12월. 일본처럼 아침 기상과 함께 '라디오 체조'를 방송한 게 아니라, 오후 10시쯤 방송 종료시에 내보내는 형식이었다.(1928년 12월 20일자)

 

이후 방송되다 말다, 시간도 오후 9시 45분 혹은 5시 45분 등, 들쭉날쭉 하더니(1929년 7월 10일자, 10월 2일자 등), 1930년 말부터 잠시 오후 5시 45분부터 15분간 상시 편성되기도 했다.

당시 방송은 조선어와 일본어를 교대로 했는데, '라디오 체조'는 일본어 방송에 편성됐다가 1933년 4월 26일 독립된 조선어 방송에선 사라졌다. 라디오가 워낙 비싸 소유자 2만5000여명 가운데 조선인은 4000여명에 불과해(1933년 9월 10일자)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일제는 '지나사변'(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듬해(1932년)부터, 여름 한 달간 장충단 공원 등 경성 17곳에서 옥외 '라디오 체조대회'를 개최했고, 1934년부터 전국으로 확대한 것.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제5회 대회부터 '매일 아츰 6시 전에 국기게양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를 제창, 집단·군국주의 의식을 강화했다. "전 조선을 건강일색으로"라는 미명 아래 실시된 '라디오체조 대회'는, 1937년 전국 642곳에서 351만7980명이 참가, 성공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했다.(1938년 6월 21일자)

'라디오 체조'는 해방 후 사라졌으나, 6·25전쟁 뒤 대한체조연맹이 보급한 '국민보건체조'(1952년 8월 16일자)로, 군사정권 시절 1961년 8월부터는 '재건체조'(1961년 7월 18일자), 신군부 시절인 1983년 4월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분위기를 고양한다며 전 공무원의 '국민체조'(1983년 4월 12일자)로, 라디오나 관공서 등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0] '거리의 오아시스' 茶房의 출현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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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100자평(2)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17 03:09

 


 1934년 2월 9일자에 실린, 안석영이 스케치한 다방 풍경.

 

석영이 보기에 다방은 실업자와 부랑자, 부랑녀의 집합소였다. "안국동 네거리를 나가려면 못 미처 이길에 처음 생긴 양옥집(옛날 이성용씨 병원 밋층)에 '카카듀'라는 찻집(茶房)이 생겻스니, 이것이 서울의 원조요 찻집의 야릇한 풍속의 시초다."(1940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 만평가이자 영화인인 안석영의 '은막(銀幕)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에 관한 언급이다. 물론 이보다 앞서 일본인 밀집지인 남촌에는 일인(日人)이 운영하는 다방이 있었지만, 북촌에서 조선인이 운영하고 조선인들이 즐겨 찾은 '첫' 다방이란 의미다.

1928년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는 개점 기념으로 9월 27~28일 무료 '예술 포스터 전람회'를 여는 등 의욕을 보였으나, 몇 달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면 "요사이에 누구든지 심심하면 언듯 말하기를 '커피'한잔 마시러 가자고 합니다"고 할 정도로(1932년 5월 26일자) 경성 곳곳에 다방이 들어섰다.

다방에선 "칼피스, 파피스도 조커니와 잠 오지 안케하는 컵피에도 '아이스컵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 먹는" 풍경도 볼 수 있었지만(1930년 7월 16일자), 대개 "인테리의 총본영, 거리의 사교실"이자 "대학은 맛 지만―하는 분들의 약소한 백동화 몃닙으로 천하대세를 개탄할 적호의 구락부"로(개벽 1934년 1월호), "폭신한 분위기 속에서 마시는 가배(珈琲)나 홍차의 미각은 하로하로 생활에 피로된 심신을 위로식혀" 주는 '거리의 피난처'로 인식됐다(1933년 10월 6일자). 그래서 소설가요 평론가 홍효민(洪曉民)은 "다방의 유한장적(悠閑長適)의 아담(雅淡)한 맛을 몰라서는 비문명인"이라 주장했다.

특히 '카카듀'처럼 유명 인사가 관여한 경우가 많아 다방은 인텔리들의 집합소였다. '뿌라탄'은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낙랑파라'는 동경미술학교 출신 화신 디자이너 이순석(李順石)이, '제비'는 총독부 건축기사 출신 김해경(金海卿=李箱)이 경영했다.(삼천리 1934년 5월호)

그러나 '거리의 오아시스'란 예찬을 받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점점 '부로커―'들이 다방을 점령, "연막가치 자욱한 담배 연기와 숨이 턱턱 매킬 '케스' 속"이요(1940년 3월 1일자), '문인이나 예술인들의 값싼 전당'인줄 알고 소시민들은 찾지 않았으나, 너도나도 드나들면서 '풍기문란한 처소'가 된 것이다.(1940년 7월 15일자).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2] "홀딱 반하도록 재미잇는 노리"… '다마'가 조선 땅을 휩쓸다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기사100자평(1)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24 03:12

 

 

당구장에서 '껨도리'로 일하는 직업여성이 당구 '맛세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1939년 4월 27일자)

 

"넓다란 껨상 우엔 맑아코 흰 탐스런 다마가 매낀매낀 구을고, 젊잔흔 신사가 가느다란 막대로 톡톡 냅다 지르는 모양은 차므로 화사(華奢)와 우미(優美)를 함게한 포-즈…."(1939년 4월 27일자)

'옥돌장(玉突場)', 즉 당구장 모습이다. 일찍이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도 '당구에 한숙(嫺熟·단련되어 익숙함)'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별건곤 1926년 11월호), '일본 유학을 갓다온 사람치고 당구를 못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별건곤 1929년 4월호). 일본인 밀집지역인 남촌에만 있던 신식 '카페'나 '빠'가 1920년대 후반 들어 북촌으로 유입될 때, 당구장도 덩달아 일본 유학생을 넘어 일반인에게도 퍼졌다.

당구에 대한 이미지는 건전한 취미보다는 도박에 가까웠다. 당구에 빠져 매일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둔 주부가 '도대체 당구가 뭐냐'고 '부인난'에 묻자, "얌전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반하면 날마다 안 치고는 못백일만치 자미잇는 경기"요, "너무 골돌히 반하면 딴 볼일이 전페가 되므로 살림사리가 자연 억망이 될 수도" 있다고 답한 '오락'이었다.(1937년 2월 17일자)

실제로 '신사 도박단의 탄로로 시내 각 옥돌장에 대철퇴(大鐵槌)' '신사도박단 수십명 검거' 같은 기사도 자주 등장했다.(1926년 8월 15, 25일자) 그래서 원산에선 주민들이 '결국은 도박이 되는 동시에, 근처에 불량배가 위집하야 아동교육상 공중풍긔상 해를 끼치는' 일이 많다며, '옥돌장' 허가취소를 진정하기도 했다.(1935년 7월 27일자) 그럼에도 총독부의 1938년 4~11월 '입장세액을 통해 본 도시인 취미'를 보면, 연극이나 영화 같은 '관람적 오락물'의 입장료와 입장세의 최고는 연극, 마짱(마작)이나 당구 같은 '기술적 오락물'의 최고는 당구였다. '구경은 연극이 좋고, 놀기는 당구가 제일'이었던 것.(1939년 1월 27일자)

당구 인구가 많았던 것은, "가장 깨끗하고 점잔허서 가위 신사의 유희인 까닭도 잇고, 또 돈이 적게 들어 불과 일원 이내로 머리와 육체를 함께 쉴 수 잇고, 더 큰 이유는 아주 홀딱 반하도록 재미잇는 점"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해도 조흘 노름'으로 실제로 여자도 당구장을 찾았다.(1939년 4월 27일자)

그러나 학생 기강확립을 위해 인천부가 '불량학생 청소 공작'을 실시하면서 카페나 바는 물론 당구장도 출입을 금지한 것을 보면(1940년 2월 9일자), 당구에는 '불량'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3] '원조 韓流스타'는 첼로 연주자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기사100자평(1)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25 22:27

조선일보 1934년 2월 15일자는 '절문 조선 청년 음악가로 미국의 여러 대도시에서 폭풍과 가튼 인기를 집중하고 잇다'는 '명랑한 쾌소식'을 전했다. 4년전 동경고등음악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간 '첼리스트' 안익태(安益泰) 소식이었다.

기사는 "미국에서 첫 독주회는 유명한 '씬씨나틔 씨빅 씸포니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열어, 미국 악단의 일각에 머리를 들게 되엿다"며, 특히 "만여명을 수용하는, 전 미국에서도 유명한 굉대한 집회장소인 뉴욕의 '카네기홀' '스테지'를 밟게까지 되엿다는 것은" "우리 악단 내지는 조선 청년의 명예를 위하야 다시 업는 쾌사"라고 평했다.


 

안익태의‘쾌소식’을 전한 지면. 사진은 뉴욕서 열린 안익태의 첼로 연주회 포스터와 연주 모습.(1934년 2월 15일자) 
 
그 2년 뒤 안이 '악도(樂都) 윈나(Vienna)를 필두로 구라파 연주 행각(行脚)'에 나선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왔다. "미국서도 유수한 교향악단의 하나인 '필라델피아 클럽 씸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미국 악단에 완연 두각을 드러내여 인끼를 한몸에 모흐고 잇는, 첼로이쓰트인 동시에 작곡가로 지휘자로 유명한" 그가 "대서양을 건너 구라파 일대로 음악 행각의 길을 떠낫슴은… 의미기픈 장거"라고 전했다.(1936년 6월 8일자) 이 연주 여행 중 헝가리에선, "부다페스트 방송국의 초청을 바더 유명한 '부다페스트 씸포니'를 지휘하야 약 한시간동안 방송"하면서, "서양 곡조를 주로 연주하는 중 특히 양곡으로 편곡한 조선 민요 '방아타령'을 연주케 되여 널리 구라파에 소개"했다.(9월 8일자)

'조선이 나흔 세계적 첼리스트요 컨덕터'인 안은 이듬해에도 유럽 연주여행을 떠났고(1937년 8월 7일자), 그의 '음악행각'은 대성공은 물론 1937~1938년 파리 교향악단과 영국 방송교향악단의 컨덕터로 초빙됐다.(1937년 12월 4일자) 이어 헝가리 부다페스트,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유고 베오그라드, 이태리 로마 등 각 도시에서 순연(巡演)하는 활약상이 지면을 장식했다.(1938년 8월 21일자, 1940년 4월 24일자 등)

구미에서 활동하던 안은 조국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 1955년 3월 19일 귀국, 이승만 대통령 생일에 맞춘 해군 정훈음악대의 연주회에서 자작 교향곡 '환상곡 한국'을 지휘했고(3월 20일자), '애국가' 작곡의 공로로 우리나라 첫 문화포장을 수상했다.(4월 19일자)

스페인에 거주하면서 유럽·남미·극동 등지를 오가며 극동의 불행했던 코리아를 세계 구석구석에 알린 '음악 순회대사'였던 그는, 1965년 9월 17일 스페인 현지에서 사망했다.(9월 19일자)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4] "공중전화에선 '볼일' 보지 마시오"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기사100자평(0)    크게 작게요즘싸이 공감조선블로그MSN 메신저입력 : 2012.04.30 22:27

 

조선일보 1938년 9월 15일자에 실린 초기의 공중전화 박스.

 

"경성 시내 20개소에 배치된 자동전화의 이용상태를 문(問)하건대, 최다는 남대문 역전의 것이니 매월에 50원이나 되고(1천통화), 그차(其次)는 본정 1정목 경성우편국 방(傍·곁)의 것과(5백~6백통화)…, 기타는 모다 매월에 십원(2백통화) 이내에 불과하다더라."(1921년 5월 9일자)

'자동전화 수입(收入)'이란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경성 시내에 설치된 무인 공중전화의 이용 실태를 전한 것.

무인 부스에서 동전을 넣고 거는 공중전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총독부 관보(1912년 12월 28일자)의 '1913년 1월 1일부터 경성 동대문 일한 와사(瓦斯)전기회사 발전소측, 경성 동대문통 2정목(총독부의원 동물원)에 이르는 곡각 등에 자동전화기를 설치'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일병합(1910년) 직후로 추정된다.

당시 '과학'란 기사에 따르면, '자동전화기'엔 동전 투입구 2개가 있어, 5전 투입구에 해당 동전을 넣으면 '뎅그렁', 10전 투입구에선 '퐁' 소리가 났다. 이용자가 수화기를 들면 교환수가 나오고, 동전을 넣고 번호를 대면 교환수는 이 '뎅그렁' '퐁' 소리를 듣고 금액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원하는 상대방과 전화를 연결해 준다고 했다.(1925년 3월 16일자)

1925년까지 설치된 공중전화는 전 조선에 모두 65개.(6월 23일자) '여의도 경마장에 공중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임시 자동전화 설치'(1921년 9월 23일자) 혹은 여름철 '부산 송도해수욕장에 자동전화 설치'처럼(1923년 8월 2일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임시로 가설됐다.

공중전화는 통행이 많은 곳에 세워져 "자동차 마차 등속을 벌녀노와, 혹은 류리창을 깨트리고, 혹은 기둥을 분질르고" 하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남대문 공중전화는 "마치 변소로 대용하여, 대소변을 누는 것이 한두번이 안이얏"다. 이에 체신국은 '공중도덕 방해가 발견되면 엄중 처벌'을 선언하고, 이용객에게도 "자택에서 사용하는 전화와 갓치 사용하기를" 당부하면서(1922년 12월 3일자), '공중전화 예절'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자동교환식 전화'가 등장하면서 혼동을 피하려 체신국은 '자동전화'를 '공중전화'로 개칭(1927년 6월 2일자), 비로소 '공중전화'란 이름이 탄생했다. 6·25전쟁 후 값비싼 '공중전화기'는 구멍가게 등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위탁 관리되다, 1962년 10월 서울역과 서울 시청 등 7곳에 50환 주화를 넣고 이용하는 무인 공중전화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1962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