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이순신 전도사'된 김종대 헌법 재판관"왜 충무공이냐고? 병든 세상 고칠 약재거든"

淸山에 2012. 4. 29. 19:46

 

 

 

 

 

 '이순신 전도사'된 김종대 헌법 재판관"왜 충무공이냐고? 병든 세상 고칠 약재거든"

 

[조재우의 공감]

 

 

  • 김종대 헌법재판관은 "충무공처럼 국가라는 공적 가치를 항상 당의 가치, 개인의 가치 앞에 놓는 사람, 국민 사랑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며 "이순신 정신을 이해하는 멋진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37년전 운명적 만남
법무장교 시절 교육 준비하다 우연히 집어든 책이 그의 생애 점점 빠져들며 마음의 귀감으로


국민 70%가 존경한다는데…
이순신에 대한 지식은 초등 수준… 인격·리더십 등 그릇이 다른 인물… 파고 들다보니 네 번째 책까지

사랑, 정성, 정의, 자력
확고한 선공후사 정신 밑바탕 돼… 지도자 고를 때 네 가지 봐야… 어린이대상 교육 학교 만들고파

김종대 헌법재판관은 '이순신 전도사'이자 '이순신 전문가'다. 이순신에 관한 책만 네 번째 발간했다. 충무공 탄신 467주년을 하루 앞둔 27일에는 네 번째 저서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에 대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역사학자가 아닌 법관인 그가 왜 이순신 장군의 신봉자가 되었을까. 그는 '운명'이라는 말로 응답했다. 법무장교 시절 서점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의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우연히 접한 이후 이순신에게서 헤어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순신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던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는 지금이 이순신 정신과 리더십이 절실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사랑, 정성, 정의, 자력 등 4개의 가치가 이순신이라는 인간 내면에서 그의 인격을 형성했고, 승리의 리더십도 거기서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병든 이 세상이 이순신 정신이라는 약재에 의해서 처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이순신이라는 약재를 먹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순신 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는 그를 만났다.

-왜 이순신에 몰입하나.

그냥 좋아서다. 그런 말을 많이 묻는데 답을 정말 하기 어렵더라. 1975년 법무장교로 지낼 때였는데 장교와 사병 50명을 상대로 교육을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제목도 내가 정해야 했다. 그래서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때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한번 읽고는'와 이순신이 이런 사람이었나. 굉장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서점에서 이순신을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뭐 결혼도 그렇게 우연히 이루어지듯 한 두 장 읽은 뒤 책을 바로 샀고, 두 번 읽고 강연을 했다. 그때부터 헤어나질 못하고 계속 빠져들었다. 신문에서 나는 거, 문제가 됐거나, 뭐 발견됐다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았다. 노산 선생의 책은 1년에 한번쯤은 꼭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하고, 내가 일을 하는 것도 거기에 관련해서도 생각해봤다. 이순신에 대해서 간명하고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책을 썼다.

-1차 자료는 주로 뭘 사용했나.

제일 중요한 자료가 정조 임금이 만든 <이순신 충무공 전서> 두 권이다. 이순신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가 완전 이순신 팬이어서 자료를 다 모았더라. 난중일기는 물론이고, 이순신 조카가 쓴 이순신의 행로, 이순신에 관해서 사람들이 평한 것, 이순신이 만든 시, 이순신을 칭송한 시, 사랑의 시 등등. 이순신에 관한 전국에 있는 모든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게 이순신 자료의 90%다. 사실은 유성룡의 <징비록> 같은 것들도 보조 자료다. 이들을 이용해서 이순신이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기록을 했다.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고 해야 된다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국민들 중 70%가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이순신으로 꼽지만 그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으로 알고 있다. 이순신의 일화가 내 책에 있는 것만 40~50개가 되는데 일반인도 한 두 개쯤은 남한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왜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이기고, 감옥 가고, 과거시험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졌다는 이야기 정도가 이순신에 대해 보통사람이 아는 수준이다. 어디서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좀 알리자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책이 너무 길면 지루하니까 250페이지를 안 넘기려 했다.

-이미 세 차례나 발간했는데 또 발간할 이유가 있었나.

동료들 중에 그렇게 묻는 경우도 있다. 법이 개정이 되면 개정판이 나온다. 이순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된 사료가 뭐가 있기에 또 개정판을 쓰느냐는 말이다.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데 나는 책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돈도 안 되거니와 여기 나오는 수입은 단 한 푼도 내가 안 쓰고 이 책의 발간을 맡아준 사단법인 청목문화재단에 기부한다. 100만원이 나오건 10만원이 나오건 수입은 전부 그리 간다. 내가 처음 책을 쓸 때 결론은 이순신은 '공직자의 사표'라고 생각했다. 공직자의 사표가 되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쫙 쓴 것이다. 그런데 책을 쓰기 전에는 내 머리 속에 이순신은 하루에 평균 1분 정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쓰고부터는 달라졌다. 강의도 했고 방송도 나갔다. 또 사람들이 나를 이순신 전문가라고 불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순신 연구를 제일 많이 했다고 하더라. '야~ 이거 허명만 높아지겠구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10~20분, 어떤 때는 한나절 내내 이순신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등과는 어떤 차별성이 있나.

칼의 노래에 대한 감상을 얘기하면 부패하고 썩은 기성세대와 당파싸움으로 백성과 국가는 안중에도 없는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부르는 칼의 노래는 그 분노를 참아내는 것이다. 김탁한의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이 불멸하는 길은 자살을 하는 것처럼 생의 마지막을 묘사한 것 같더라. 그것들이 문학작품으로는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이순신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순신은 분노를 안을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이순신에게 분노를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벼슬을 아무리 빼앗아도,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아도 그 마음에 원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능히 자신을 이긴 인격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이순신은 자기를 이길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외적을 다 깼다. 그 힘을 바탕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업무, 부당한 처우도 웃으면서 받았다고 본다. 그러니까 분노의 노래를 부를 사람은 아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뭔가.

이순신의 목표가 왜적을 무찌르고 국가를 지킨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최악의 조건에서 역경을 헤쳐나간다. 이순신이 치른 전투는 대개 20대1 아니면 10대1로 불리한 전투였다. 그럴 때 마다 승리했다. 원균은 엄청난 전력을 갖추고도 졌는데 이순신은 찌꺼기를 모아서 싸웠는데도 이겼다. 이것이 내 마지막 공부의 주제다. 성공한 사람으로서의 리더십이 무엇일까. 도대체 이순신의 리더십이라는 것은 그의 내면에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을까. 이순신의 내면을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내면을 공부하자니 그가 공부한 <논어>도 읽어봐야 하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다. 우리 학자들은 거북선이 좋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하지만 마지막 시점에 거북선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을 볼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이순신을 수양을 쌓은 선비와 같았다고 말을 한다. 이순신 초상화를 보면 전부 고운 선비처럼 그려져 있다. 우락부락한 장군 같은 모습은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은 이 사람은 공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적인 가치의 근간이 되는 게 이순신에게는 성품이다. 이순신은 타고난 성품을 수양을 통해 잘 키웠다. 사랑이 충만한 정신,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자기 자신, 가족, 후학, 국토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백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것들을 모아보면 이순신은 지극히 사랑이 충만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이순신은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이다. 타고난 정성스러움을 증폭시켰다. 일이 있기 전에는 철저히 준비하고 목숨을 걸고 그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일이 끝나면 상벌은 하늘에서 주는 거니까 허허하고 다 놔버린다. 이게 정성스러운 사람의 모습이다. 명량해전이 끝난 뒤에 부하들은 전부 특진하지만 이순신은 승진하지 못했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이미 벼슬이 높아서 안올려준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선조에 대해서 불만이 하나도 없었다. 서운하다는 말도 비치지 않았다. 나라를 구했으면 됐다는 것이다. 사심이 없고 공심 하나만으로 버틴 것이다. 이걸 해야 내 백성이 산다. 내 땅이 산다. 이것으로만 싸우는 거였다. 사실 정성과 사랑만 있으면 모든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 열정이 나오고 기적이 나올 수 있다. 모든 성공한 사람을 보라. 목표에 대한 열정, 사랑이 있다. 또 지극히 변하지 않고, 꾸준하고 정성스럽다. 이 정성이 지극해야 변화를 준다. 정성이 극진하고, 일심이 변하지 않고, 정열과 사랑이 있을 때 성공한다는 거다. 이것은 기업가도 마찬가지다. 특이한 이순신식 성공법이 또 있다. 첫째는 오로지 바른길로 승부한다는 것이다. 약간 그릇된 길로 가서 성공할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는 사람도 많다. 이순신은 성공 안 해도 좋으니 그릇된 길로는 안간다. 이순신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두 번째는 스스로 힘으로 한다. 배경을 동원하지 않는다. 내 실력, 내 신용으로 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사회생활 적응능력이 굉장히 미흡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순신은 사랑으로 충만한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랑, 정성, 정의, 자력 등 4개의 가치가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 속에 함의됨으로써 그의 인격을 형성했다. 이순신은 이 인격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하고 모든 사람과 소통해서 그 사람들의 힘을 아우를 수 있었다.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첫번째 책에서는 이순신을'공직자의 사표'라고 정리했는데, 한 발자국 더 나가보니 이순신은 승리한 자였다. 두번째 책이 그런 내용이었다. 이순신의 승리 리더십이 뭔가에 대한 것이 세 번째 책이다. 그렇다면 그 리더십의 밑바탕엔 무엇이 있었을까를 생각한 것이 인격이었다. 이순신식의 성공은 인격이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네번째 책의 주제다.

-이순신의 정신 중 정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은 없나.

우리가 지도자를 뽑을 때 네 가지를 보면 될 것 같다. 우선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다. 국가라는 공적 가치를 항상 당의 가치, 개인의 가치 앞에 놓는 사람, 국민 사랑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두 번째는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정성스럽게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는 국민을 사랑하되 옳은 길로만 가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람이다. 남의 나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실력이지만 남의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안된다. 선조처럼 명나라에 의존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렇게 자주력을 갖춘 사람, 바른 길을 가는 사람, 정성스러운 사람, 그리고 우리 국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으면 된다. 그게 진심이라면 소통이 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면 우리 국민들이 다 이해를 한다. 앞으로 이순신 정신을 이해하는 멋진 지도자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선공후사를 강조했다.

이순신이 모함을 당했을 때 선조는 '나는 사형이라 생각한다. 신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논하라'고 했다. 그게 사실상 사형을 하라는 말이 아닌가. 신하들도 일단 고문을 하자고 한다. 보통 고문을 하면 죽는다. 그 때 이순신이 나이가 52살이었다. 그런데 다행이 살아난다. 결국 목숨을 살려주고 백의 종군을 하도록 한다. 계급장 다 떼고 합천에 있는 권율 막하로 간 것이다. 그 때 원균이 전쟁에 패해 이순신이 만들어놓았던 전력을 다 망쳤다. 졸병이건 장수건 다 죽은 거다. 남해 바다는 일본 것이 되어 버렸고 일본은 칠천량에서 대승을 거두고 승승장구하면서 서해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그런데 재임명장에 보면 선조가 미안하다고 한다. '내가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다. 하여튼 그 때 이순신이 재임명을 받아들인다. 나 같으면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얼 가지고 싸우라는 건가. 거느릴 군사도 없다. 듣기에 따라서는 싸우다가 죽으라는 말이다. 선조가 당쟁에 휘둘려서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다가 이제 또 싸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령을 받아들인다. 그릇이 다른 것이다. 사적인 감정이 없는 거다. 만약 왕에 대한 사적 감정이 있다든지 당파싸움에 대한 감정이 있다면 아마 아무 일도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을 이야기할 때 '공직자의 사표'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의 사적인 감정 앞에 항상 공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적인 가치를 앞에 두었다가도 가끔은 수정을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꾼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은상 선생은 이순신을 '정돈된 인격자'라고 평했다. 정돈을 한번 딱 하면 안 바뀐다. 공은 사의 앞이다. 이순신은'부인이 죽을 것 같다'는 편지를 받는다. 보통사람이면 빨리 가서 임종이라도 할 것 같지만 그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는데 내가 지금 나라 일이 급한데 못 간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과 사가 분명했다. 부인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공과 사가 바뀌지 않을 만큼 정돈이 되어있다.

-이순신에 관한 책은 이게 마지막인가.

지금 이 세상은 병든 세상이다. 이 병든 세상은 이순신 정신이라는 약재에 의해서 처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정신을 어떻게 하면 약재로 만들어서 우리 사회에 접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 세상이 이순신 정신에 의해서 좀 더 건강한 사회로 갈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여건이 되면 이순신 학교도 만들고 싶다. 서울에 본교 두고, 아산 여수 한산도 등에 분교를 두는 것이다. 거기서 주로 어린이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싶다. 내가 아니라도 힘있는 사람이 학교를 세웠으면 좋겠다. 단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문학적 소양도 없고 재미있게 글을 쓰지 못해 답답하지만은 마음만은 그렇다. 또 만화를 그린다든지 동화를 만든다든지, 어린이를 위한 것들도 만들고 싶다. 이 책이 불씨가 되어 이순신의 사상을 우리 사회에 좀 퍼뜨렸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이순신이란 약재를 먹고 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 김종대는 누구

1948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임용된 김 재판관은 창원지방법원장을 역임했고 2006년 9월 이후 헌법재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순신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2002년 <이순신 장군 평전>을 시작으로 <여해 이순신>,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 두 척이 있습니다> 등을 출간했고, 이번에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소재로 한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발간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목숨 버렸나’ 400년 논란 추적한다

 

갑옷·투구 벗었다? 본래 방탄효과 없어
정쟁 희생될 바엔? 생사 초연했던 장군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동아일보 DB

 

 

1598년 음력 11월 19일 오전 2시경 노량 앞바다 관음포에서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일본 수군의 조총에 맞아 숨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패퇴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은 자칫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서해를 당시 일본이 장악했다면 베이징(北京)까지 쳐들어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는 게 사학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 서해를 사실상 이순신 혼자서 막아냈다. 한 군사학자는 이 때문에 이순신을 ‘동아시아 평화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중국 대륙까지 전화(戰禍)가 번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 세계대전을 미연에 막은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전몰(戰歿)에는 오래전부터 어울리지 않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는 설(說)이 그것이다. 24일 충남 아산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주최한 ‘제14회 이순신 학술세미나’에서도 자살설에 대한 논박이 하나의 발표 주제를 차지할 정도였다. 왜 민족의 영웅인 그의 죽음에 대한 이설(異說)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李舜臣防戰免 自丸而死(이순신은 바야흐로 적과 싸울 때 면주·免하여 스스로 탄환을 맞고 죽었다)’
뉴스이미지화보[화보] 이순신 장군 탄생 466주년leftright
뉴스이미지[동영상] 세종대왕함 “전투기 출...PLAY


-이민서(李敏敍), ‘김장군전(金將軍傳)’

사실 ‘이순신 자살설’의 모든 발단은 위의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면주(免)’라는 단어가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이조·예조·호조 판서를 지낸 이민서(1633∼1688)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모함을 받아 숨진 김덕령(1567∼1596)을 기리는 평전 ‘김장군전’을 썼다. 그중 한 대목에서 이순신이 면주하였다고 쓴 것이다.

이순신의 자살을 논하는 사람들은 김장군전의 면주 대목을 ‘갑주(甲·갑옷과 투구)를 벗다’ 내지는 ‘갑옷을 벗다’고 풀이한다. 그전까지의 전투에서는 갑옷과 투구를 벗은 적이 없던 이순신이 왜 마지막 전투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느냐는 주장이다. 그것도 추운 겨울바다에서 말이다. 그때까지 연전연승했던 그가 자기 목숨을 지키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도 적의 탄환에 맞은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견해이기도 하다. 스스로 삶을 등지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있겠느냐는 논지다.

또 다른 근거는 이순신과 당시 조정(朝廷)과의 불화에서 찾아진다. 이순신은 최후의 승전을 거둔 뒤에는 당쟁의 결과로 어떤 모함이나 모략을 받아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기 쉬울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목숨을 내놓았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1993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李舜臣의 戰死와 自殺說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고(故) 박혜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동족의 모함과 박해, 그리고 조국에 배신당한 비극의 영웅 이순신’이라며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자살설의 역사는 길다. ‘이충무공전서’를 편역한 노산 이은상은 ‘공(이순신)이 죽음을 스스로 취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그것을 반박하는 견해는 충무공이 전몰하던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민서의 ‘김장군전’ 같이 자살설에 기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숙종 때 우의정까지 지낸 이이명(李命·1658∼1722)처럼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하고 나라가 살면 같이 살려 했거늘 공(이순신)이 어찌 차마 스스로 죽음을 취하여 길이 국가를 중흥하려는 큰 뜻을 저버렸을까보냐’(이은상 역)고 반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이 숨을 거둔 이래 약 100년 동안 그의 죽음을 놓고 조선사회에서 논박이 있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순신이 사실상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는 설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묘하게 변용되어 나타났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 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

-김훈, ‘칼의 노래’(2001년) 표지 글

1990년대 이전까지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이었다.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 놓여 있던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순신전’에서 이순신은 민족의 위기를 타개한 영웅으로 그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이순신을 영웅의 모범으로 떠올린 데에는 동아일보의 역할이 컸다.

▼ 조선사회에 대한 불신-편견이 ‘충무공 자살설’ 확대 재생산 ▼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1598년 11월 17일(음력)자가 마지막이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출전 준비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동아일보는 1931년 아산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처분될 위기에 이르자 사설과 기획기사를 연속 보도해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을 주도했다.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충무공 유적지를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직접 썼고, 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이광수는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이며 충성스러운 애국자로 묘사했다. 노영구 국방대 국가안전보장문제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영웅은 영웅이되 충의(忠義)를 강조하며, 인격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성웅(聖雄)으로 자리매김한 이순신은 1990년대 들어 점점 인간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소설가 홍성원의 ‘달과 칼’(1993년)에서 탈(脫)영웅의 면모가 나타났던 이순신은 ‘칼의 노래’(2001년)와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1998년) ‘불멸의 이순신’(2004년)을 통해 한 개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가 바로 ‘이순신 자살설’이었다.

자신의 적(敵)을 일본 수군과 임금으로 설정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항상 자신이 죽을 자리와 그 방식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내가 수락할 수 없는 방식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칼의 노래, 261쪽),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 자연사인 것이다.’(칼의 노래, 301쪽)

이를 두고 허명숙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설령 목숨을 보존했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패했다면 정치력에 의해 다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한 개인의 실존적 위기인 것이다”라고 풀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이는 300여 년 전부터 자살설의 한 배경이 되는 ‘조정과의 불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이처럼 자살설이 ‘유행’한 것은 이전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다양한 면모, 고뇌하는 이순신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분출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행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역사학계의 조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여파로 그만큼 이순신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영구 실장은 “조선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같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했다. 조선이 위대한 영웅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버렸다는 것이다.

‘후인의 얕은 견해를 가지고 공의 죽음에 대하여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은상, ‘李忠武公全書’ 부록

한 조선시대 전공 역사학자는 “몇 년 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2회까지 보다 TV를 끄고 말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고증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사실에 어긋나는 내용을 참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서도 학계는 비슷한 반응이다. 사실 박혜일 교수의 글 이후로 자살설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학문적인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살설의 근거 중 하나였던 ‘면주’에 관해서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노승석 교수가 일찌감치 논박을 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면주의 주()자는 ‘투구’나 ‘갑옷’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옛 문헌상으로는 갑옷보다는 투구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관용적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 면주의 출전인 ‘춘추좌씨전’ 희공 33년 4월 기록에서 나오는 고사에서도 면주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적과 싸우면서 격분한 나머지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형용한 말로 귀결된다고 노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면주라는 행위가 있기까지는 그 사람의 내면에 우국충정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따라서 그 동기가 자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설령 이순신이 갑옷을 벗었다 해도 이를 자살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있다. 정두희 전 서강대 역사학과 교수는 동짓달 추위에 갑옷을 벗은 것이 의아하다는 자살설의 주장에 대해 “순천과 사천 양쪽에서 일본군의 협공을 받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추위를 문제 삼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반박했다.

더욱 결정적으로 당시 갑옷에는 방탄효과가 없었다. 그때까지 갑옷은 화살을 막기 위한 것이지 총탄을 막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을 하기 위해, 일부러 총탄을 맞으려고 갑옷을 벗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사실상 군사사 전공 박사 1호인 노영구 실장은 “노량해전은 전함들이 근거리에서 난타전을 벌인 싸움이었다”며 “20∼30m, 길게는 50m 이내에서 쏘았다면 갑옷을 입었어도 충분히 관통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밑에서 녹도 만호로 복무했던 정운(鄭運)은 대조총(구경이 좀 더 큰 조총)을 맞고 숨졌다. 그런데 이 탄환은 정운이 몸을 가리고 있던 나무 방패를 뚫고 그의 몸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승전 후 닥칠 ‘죽음’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주장도 일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노 실장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싸웠다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그걸 자살설로 연결하는 건 무리”라고 했다. 이순신의 사생관이 분명했던 것에 비추어 그는 오히려 죽음에 초연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선조와의 갈등을 그렇게 염려했다면 그 전에 출정하라는 왕명을 죽음을 무릅쓰고 어길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 조선이 이순신을 낳았다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과거 ‘칼의 노래’에 대한 글에서 “식민사관에서 우리를 집중 세뇌시킨 당쟁론이 여과 없이, 아니 더욱 심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약간의 우려를 표시한 적이 있다. 이순신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현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려다 보니 조정 내부의 당쟁과 갈등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자살설이 주장하는 대로 그렇게 조선사회가 썩어 있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전쟁을 사실상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만 조선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면 어떻게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그 체제 안에 나타나서 높은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한 연구자의 지적대로 자살설은 조선이라는 숲을 보지 않고 이순신이라는 나무만 보는 데서 나타난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