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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 미인계 ‘꿀단지 작전’에 빠져 18년형

淸山에 2012. 4. 23. 03:24

 


 
 
 
모사드 미인계 ‘꿀단지 작전’에 빠져 18년형
[중앙선데이]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이스라엘 핵시설 폭로한 모르데카이 바누누


1945년 7월 16일은 세계가 핵시대에 진입한 날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실시된 핵실험 ‘트리니티 테스트’의 성공으로 이 대량살상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이 입증됐다. 그해 8월 핵폭탄은 일본 두 도시를 ‘현세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후 더 이상의 핵무기 실전 사용은 없었지만 인류는 잠재적 핵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공인된 핵 국가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가 보유한 핵무기 숫자는 지구를 일시에 파괴할 수 있는 ‘오버 킬’ 수준이다.
 
2009년 노벨평화상 후보 올랐지만 사양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은 비공식 핵 보유 국가다. 이 중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핵 보유사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않는(NCND) 입장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런데 모르데카이
바누누(사진)란 한 전직 이스라엘 원전기술자가 1986년 이스라엘 핵시설 사진을
한 영국 주간지에 제공했다.
 
바누누는 54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태어난 세파라디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유대교 초정통파 랍비였다. 63년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모로코엔 오래전부터 이슬람 국가 중 가장 많은 숫자의 유대인이 살았다. 바누누는 73년 군에 입대해 공병대에 배속됐다. 골란 고원에서 복무하며 4차 중동전인 ‘욤 키푸르’ 전쟁을 목격했다. 제대 후 텔아비브대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학년 말 시험에 낙제해 퇴교했다. 그러다 76년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디모나 핵시설에 기술자로 들어가 9년간 근무했다.
 
바누누는 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때부터 이스라엘의 대아랍 강경정책에 회의를 느꼈다. 좌파 성향 평화운동 단체에 가입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 촉구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언젠가 해고될 것임을 예감한 그는 근무 중 몰래 디모나 핵시설 사진을 찍어뒀다. 85년 그는 해고됐다.
 
퇴직 후 바누누는 호주 시드니로 가 1년간 택시 기사를 했다. 이때 유대교를 버리고 호주 성공회로 개종했다. 그의 기독교 개종으로 부모는 그와 의절했다. 그는 호주에서 콜롬비아인 프리랜스 기자 오스카 게레로를 만나 자신이 이스라엘 핵시설 자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바누누는 게레로의 주선으로 86년 9월 초 런던으로 가 영국 주간지 선데이 타임스와 접촉했다. 소정의 사례금과 함께 자서전 발간 약속을 받은 그는 자료와 사진을 신문사 측에 넘겼다. 대특종을 얻기는 했지만 사안이 너무 중대하므로 선데이 타임스는 한 달여에 걸친 심층 확인 작업을 벌였다. 여러 명의 핵전문가들은 사진이 진본임을 확인했다.
 
바누누의 행각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포착됐다. 보고를 받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바누누의 납치를 모사드에 지시했다. 런던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대형 국제도시다. 아울러 당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런던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우호국에 대한 ‘결례’라고 판단했다. 대신 로마를 택했다. ‘꿀단지 작전’이란 코드명의 미인계로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해 납치한다는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정예 여성 공작원 셰릴 벤토프(60년생·공작원명 신디)가 투입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인계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바누누는 신디의 유혹에 걸려 런던을 떠나 그녀와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의 한 호텔방에서 신디와 약물 섞인 술을 마시다 쓰러진 그는 86년 9월 30일 호텔에서 대기 중이던 모사드 요원에게 인도됐다. 이후 이스라엘 해군 함정에 실려 10월 6일 하이파항에 도착했다. 갑자기 바누누와 연락이 끈긴 선데이 타임스는 극비리에 보관 중이던 이스라엘 핵시설 사진을 10월 5일 독점 공개해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반역죄와 간첩죄로 비공개 재판에 회부된 바누누는 88년 3월 18년 형을 선고 받았다. 18년 중 11년은 독방 수형이다. 2004년 4월 외국인과의 접촉과 휴대전화·인터넷 사용 금지를 조건부로 석방됐다. 이후 그는 영국 BBC방송 특파원 등 외국인과 접촉하다 다시 체포돼 재판을 받고 몇 달씩 수감되다 석방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아직도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스웨덴·아일랜드에 정치망명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2007년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양심수’인 그의 석방을 촉구했다. 2009년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는 바누누를 평화상 후보군에 포함시켰으나 그는 사양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노벨상이 아니고 외국으로 나가 남과 같이 결혼도 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란 이유에서다. 2010년 11월 국제인권연맹(ILHR)도 바누누의 석방을 탄원했다.
 
이스라엘이 폭로 방관했다는 의혹도
바누누 사건은 후일 몇 가지 추측을 불러왔다. 우선 그의 변절 행위엔 이스라엘의 전통적 국내 문제가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인구 분포를 볼 때 아시케나지와 세파라디의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지중해·중동계 세파라디는 이스라엘 건국 주역인 유럽계 아시케나지에 비해 국가 요직 진출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파라디인 그가 배신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사에 용의주도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핵시설과 같은 민감한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수상한 동태를 사전에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스라엘 측이 바누누의 변절 행각을 방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즉 국제사회에서 공인되지 않은 이스라엘의 핵무장 사실을 그가 폭로한 것은 결과적으로 주변 이슬람 국가에 대한 위협성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추리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주장이 설령 그럴듯하다 한들 누구도 이를 확인해 줄 수는 없다.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