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의 이해

LA Phil의 말러 프로젝트와 친구의 죽음

淸山에 2012. 2.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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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hil의 말러 프로젝트와 친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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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에게 말러는 '가까이 가기엔 아직은 머나 먼 당신'임을 고백합니다.

아직도 베토벤, 모짜르트, 브람스, 슈베르트, 드볼작, 쇼팡...등등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만 전전 긍긍하는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도 하지만

말러는 그의 작곡의 산실이고 원천이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불운한 생애 때문에라도

가까이 가고 싶은 작곡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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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ature of Gustav Mahler

말러와 부인과 딸들 (images from web)

예술가들...예술의 원천은 아무래도 행복보다는 불행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술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인지,

불행해서 예술을 하게 되는지, 예술을 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지

아무래도 정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의 음악은 아직도 머나 먼 당신이지만...

얼마 전 "BOSE" heaphone을 선물로 받고 말러를 듣기 시작했더니

조금은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입니다.

천재가 아닌 이상 이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음악도 듣고 또 듣고...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없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연주자나 지휘자들에게도 말러는 난해한 테크닉을 요구하는 어려운 곡으로

일생을 통하여 풀어야 할 과제이며 넘어야 할 높은 산이라고 합니다.

Walt Disney Concert Hall

월트 디즈니 컨서트 홀 (image from web)

지난 해 2011년이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서거 100년이 되는 해,

2010년은 말러 탄생 150년, 그러므로 2011년을 전후로 세계의 유수 오케스트라들이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는고 있는 가운데

지난 달 1월 13일부터 2월 5일까지 엘에이 필의 두다멜(Gustavo Dudamel)이

"말러 프로젝트 The Mahler Project"라는 이름으로

말러 교향곡 1, 4, 6, 9번과 미완성인 10번을 엘에이 필과

2, 3, 5, 7번을 베네주엘라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월트 디즈니 홀에서, 8번 교향곡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는

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대규모 합창단이 동원되어야 하므로

슈라인 오디토리움에서 연주를 하는 대장정을 펼쳤습니다.

phil_dudamel[1].jpg

엘에이 필의 지휘자 구스타브 두다멜

두다멜에 대한 포스팅, "빈민가교육에서 세계 정상에..LA필과 두다멜"

http://blog.chosun.com/triocavatina/5461378

말러는 생전에는 지휘자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지만

현재는 많은 지휘자들이 앞 다투듯 말러의 교향곡 연주에 심혈을 기울일 정도로

그의 교향곡이 날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말러리안"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젊은 지휘자이지만 2004년 제 1회 말러 국제 지휘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베네주엘라 출신의

엘에이 필의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라는 야심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비록 "머나 먼 당신"이지만

꼭 한번이라도 만나러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월을 분주하게 지내다 보니 한번도 가지 못해서

마지막 공연, 말러 제 9번 교향곡을 연주하는 2월 5일 티켓을 검색하니

물론 솔드 아웃, sold out!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한 두장이라도 남아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아침에 전화를 하니 한장도 없다고 헛수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보같이, 티켓을 미리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티켓을 미리 사지 않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할까봐

그 때 그 때 마지막 티켓을 사는 버릇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두다멜이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9번 4악장 Adagio

"마지막 숨이 꺼져가듯 사라져가는 음"이라고 작곡자가 썼다는

4악장 Adagio의 일부입니다. (music from youtube)

말러의 제 9번 교향곡 4악장의 나머지 부분입니다.

허전한 마음으로 오후에 유투브를 찾아보니

두다멜이 지휘하는 9번 교향곡이 있어서

아쉬운대로 유투브에서 감상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말러(1860 -1911) 교향곡 제 9번 D장조 <이별>,

베토벤, 슈베르트, 드볼작, 브르크너가 그랬듯이

9개의 심포니를 작곡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음악계에는 "마(魔)의 9"이라는 미신적이 징크스가 있다고 합니다.

말러도 "魔의 9"라는 숫자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의 9번째 교향곡을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라는 제목을 붙였고

10번째인 이 교향곡이 9번 교향곡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도 역시 9번째의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그 후 10번째 교향곡은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1908년에 그의 아홉번째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작곡한 후

1909년 여름에 9번 교향곡의 작곡을 착수하여 1910년 4월 1일에 완성하고

그 다음에 5월 11일에 생을 마감하여

이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 1912년 6월 12일에

빈에서 그의 제자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향곡의 악장마다 어떻게 연주하라는 말을 썼다고 하는데

9번 교향곡의 1악장에는

"오! 나의 사라져 버린 젊은 나날들이여, 오! 모두 흘러가 버린 사랑이여..."라는

글을 쓰기도 하고 3악장에는 "아폴로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라고 기록했고

4악장의 마지막은 "죽는 것처럼, 마지막 숨이 꺼져가듯 사라져가는 음"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 곡을 쓰면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병인 심장병과 어린 딸의 죽음과 아내 알마 쉰들러 말러의 외도로 인하여

일생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고 하는 그에게 죽음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보헤미아에서 유대인 상인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말러,

유럽인들과는 반유대주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였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을 지휘할 때는 오페라 위원들과의 불화로

고통스러워 했다는 말러가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체코)인으로,

유럽에서는 유대인으로,

세계 어디에서나 이방인으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한 말은

이민자로 미국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합니다.

("영원한 이방인..folk festival에서" http://blog.chosun.com/triocavatina/5713859 참조하세요.)

"마의 9"라는 숫자를 두려워 했던대로 작곡한 후 일년 뒤에 생을 마감한

말러의 교향곡 9번을 들으며 지난 달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기억하였습니다.

5년전 말기 폐암 진단을 받고도

믿음으로 씩씩하게 투병하던 친구가

지난 달 23일, 겨울비가 조용히 내리는 아침에 숨을 거두웠습니다.

내과의사인 남편과 외아들, 형제들,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겨우 내내 따뜻했던 날씨때문에 때 이른 배꽃이 하얗게 피어있는

골프장이 내려다 보이는 병상에서 편안히 마지막 숨을 거두웠습니다.

요란한 산소 호흡기도 멈추고,

혈관을 타고 들어가던 ivy fluid도 빼 버리고,

방 안은 성도들이 조용히 부르는 찬송과 기도 소리만 조용한 정적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언니를 하루라도 더 살게 하기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던 동생들도

울지도 못하고 허탈하게 언니의 창백한 얼굴을 맥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행운이었는지 학교를 졸업하고 30년도 더 지난 후에 외국 땅에서 만난 친구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어서

매주 서너번씩 새벽이면 서로 먼저 일어난 사람이 전화를 해서

"걸을래?", "그럴까?"라는 말로 전화를 놓고 이내 걸어나가

중간쯤에서 만나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을 두서너번씩 걸었습니다.

때로는 동네 아래에 있는 멕도날드까지 걸어가서 아침을 먹기도 하고...

그러나 최근 2, 3개월 동안에는 음식을 잘 넘기지도 못해서

거의 먹지 못하여 움직이기도 힘들었는데 지난 성탄절에는 이웃 친지들에게

비타민을 선물하고 싶다고 나가서 쇼핑을 했던 친구...

성탄절에 빨간색 마후라를 가지고 가서 친구에게 메어주니 고맙다고 하면서

궂이 궂이 비타민 C를 한 병 주던 다정하였던 친구였는데

막상 숨을 거둘 때는 그토록 고생하느니 오히려 잘 갔다는 생각 밖에는

눈물도 나지 않고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호원이 와서 친구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나니

장의사에서 와서 짐을 실듯 훌쩍 데려가더니

이틀 후 입관예배, 또 이틀 후 부활의 소망을 가지라는 설교로 유가족과 친지들을 위로하는

하관예배를 드리고 양지바른 묘지 장미동산(Rosehill Memorial Park)에 친구를 묻었습니다.

머나 먼 이국 땅에서 그동안 여러가지 고생을 하던 친구,

약학 대학을 나온 남편이 미국에 와서는 전공과는 관계없는 사업을 하느라 고생했고

그 어떤 일도 만족하지 못한 남편이 뒤 늦게 의과 대학을 들어가

어렵사리 졸업을 하고, 내과 전문의까지 마쳤을 때는 50세가 다 되는 나이였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사무실을 차리고, 남편 사무실에서 사무일을 하며

남편의 환자들을 가족같이 돌보며

질병으로 고통하는 교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기도해주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가는 맥시코 의료 선교에도 동참을 하며

믿음으로 살던 친구...

본래 타고 나기를 약하게 태어나서 먹성도 좋지 않고 약해서 잘 먹지를 않는 친구에게

이것 저것 가리지 말고 아무거나 먹으라고 핀잔만 주었었는데...

그런 약한 체질에 항암치료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 견디었는지, 그러나 무심하게도

암세포는 머리와 다른 기관에 까지 번져서 더 이상 항암치료는 효과가 없었고

드디어는 눈물도 고통도 없고 어둠도 슬픔도 없는 그 곳으로 간 것입니다.

이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고

그토록 고생하느니 차라리 잘 갔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지만

막상 이제는 함께 걸을 친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허전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있기에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임을 새기면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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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놀프의 추억

-헤르만 헤세-

방랑의 길에서

슬퍼하지 말아라, 곧 밤이 오리라.

그러면 우리들은 파리해진 산 위에서

몰래 웃음짓는 것같은 시원스러운

달을 보리라.

그러면 손을 잡고 쉬자.

슬퍼하지 말아라, 곧 때가 오리라.

그러면 우리는 쉬리라,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길가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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