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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5년] 독일 통일… 한국에 주는 교훈

淸山에 2009. 8. 16. 10:25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베를린의 제국의회 건물 앞에서 환호하는 인파에 손을 흔드는 동서독 지도자들. 오른쪽부터 로타 데메지에르 동독 총리, 리하르트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 헬무트 콜 총리, 콜 총리 부인인 한네로레 여사, 한스디트리히 겐셔 독일 외무장관. [AP]
독일 통일 15주년을 맞아 지난달 30일 본지와 특별 인터뷰를 한 로타 데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는 "한반도의 통일은 독일보다 어렵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반도 통일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있다면.

"남북한은 오랜 기간 단절돼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할 것이다. 독일에 비해 통일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으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외부로부터 정보가 차단된 채 살아온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기 위해선 남한이 많이 도와줘야 한다."

-독일의 경험에 비춰 한반도 통일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보나.

"독일의 경우에도 동.서독의 내적 갈등 극복이 상당히 어려웠다. 같은 독일인이라지만 오랜 기간 떨어져 살면서 서로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한국인들 역시 같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남북한이 적대감을 갖거나 상호 정치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어디서 처음 들었나.

"1989년 11월 9일 저녁 나는 동베를린 시내 한 교회에서 기독교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 중이었다. 각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나라의 앞날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막 연설을 시작했을 때 한 젊은이가 뛰어 들어와 '장벽이 무너졌다'고 외쳤다. 모두가 크게 놀랐다. 회의를 마치고 장벽으로 달려갔다."

-장벽이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었나.

"1년 전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동독인이 오스트리아나 동구권을 통해 동독을 대거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은 있었지만 설마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소련군 전차 부대가 한 시간 내 베를린 시내에 출동할 수 있는 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지켜보고만 있었나.

"동독 주재 소련대사에게서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다. 그는 장벽이 붕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잠적했다. 의도적으로 모스크바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그 소식을 접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이 화가 나서 그 대사를 질책했다고 한다. 그는 '만일 그 사실을 즉각 보고할 경우 크렘린 내 강경파를 자극해 발포 명령을 내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가 신속하게 보고를 받았다면 진압 명령을 내렸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내세우던 고르바초프가 무력 진압을 지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귀하와 에곤 크란츠 공산당서기장 등 동독 수뇌부는 왜 장벽 붕괴를 용인했나.

"상황을 통제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솔직히 속수무책이었다."

-동독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계속 논란거리다. 최근 슈타지(옛 동독 정보기관) 문서관리청장은 이번 독일 총선 출마자 가운데 일부가 슈타지의 밀정 노릇을 했다고 비난했는데.

"슈타지 문서관리청이 있는 한 그런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의사에게는 환자만 보이고, 변호사에게는 이혼을 하려는 사람만 보인다. 물론 슈타지 문서를 보관키로 한 결정은 옳은 것이다. 역사 연구를 위해서나 당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을 모함하거나 뒤를 캐내려는 의도로 문서를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서관리청에서 흘러나오는 확인 안 된 정보가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9.18 총선 결과가 화제다. 연정 협상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대연정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재선거는 어느 당도 원하지 않는다. 총리직에는 앙겔라 메르켈 기민당 당수가 적임이라고 본다. 나는 메르켈을 위해 10회 이상 찬조연설에 나섰다. 그는 여성이자 첫 동독 출신 총리후보다. 그래서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를 펼 수가 있다. 각 정당의 대다수 정치인은 서독의 정치문화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통일 후 갑자기 정계 은퇴를 결심하게 된 배경은.

"총리직에 있을 때도 통일조약이 발효하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무를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통일 후 몇 개월간 정무장관직을 맡다가 1991년 9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주변에선 만류했지만 나는 할 일을 다했다고 판단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데메지에르 전 총리는

데메지에르는 동독의 변호사이자 음악인이다.

음악이 먼저다. 그는 1965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비올라를 전공하고 졸업한 다음 전문연주인으로 활동했다. 연주 활동을 하면서 훔볼트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75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청소년 범죄와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변호 활동을 하다가 통일을 위한 평화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 10월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90년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거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통일 협상에 나서 6개월 만에 대업을 이뤘다. 91년 의원직을 떠나 정계에서 은퇴했다.

'통일 독일' 지금은 …
동독지역 실업률 18.4% … 서독 지역 두 배
체감경기 격차 커지고 '동서 갈등'도 여전


독일인들은 통일 자체에 대해 긍정 평가했다. 공영 ZDF방송의 지난달 29일 조사 결과 독일인의 84%가 "통일이 옳았다"고 응답했다.

동.서 지역차도 많이 줄었다. 통일 전 낙후됐던 동독 지역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시설 투자가 꾸준히 이뤄진 덕분이다. 현대적인 통신망과 교통시설이 갖춰져 서독 지역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 정부는 지난 15년간 동독 지역에 약 1조2500억~1조5000억 유로(약 1625조 ~1950조원)를 쏟아부었다. 현재 독일 정부가 안고 있는 재정적자를 모두 털어 버릴 수 있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그러나 경제체질을 바꾸지는 못했다. 통일비용의 75%가량이 동독 주민의 사회보장 비용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산업기반 시설은 여전히 취약하다. 그 결과 동.서 지역의 체감경기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특히 실업이 심각하다. 동독 지역 실업률은 지난 9월 기준으로 18.4%다. 서독 지역 9.9%의 두 배다. 그나마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 실업률은 30%로 치솟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동독 1인당 연간총생산은 아직 서독의 64%에 불과하다. 매년 서독 연방주들은 총생산의 4%를 동독 경제 지원에 쓰고 있다. 동독 경제의 서독 의존 비율은 45%에 이른다. 이를 가리켜 클라우스 폰 도나니 전 함부르크 시장은 '독일 경제의 끝없는 수혈'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은 울분을 쏟아 놓는다. 일자리가 없어 몸살을 앓고 있는데 자신들을 '2등 국민'이라거나 '의붓자식' 취급한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18일 총선에서 이런 불만이 잘 드러났다. 동독에선 옛 공산당 계열의 좌파 정당이 25.4%의 득표율을 기록해 사민당(30.5%)에 이어 둘째다. 반면 서독에선 4.9%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서독 주민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인식이다. 동독 주민들의 요구는 끝이 없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불만이다. 지난 15년간 정부의 사회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골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고 있다. 통일은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