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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칼럼] '안철수 정치' 감상기

淸山에 2011. 9. 7. 13:42

 

  

 

  

[홍준호 칼럼]

 '안철수 정치' 감상기

 

 

홍준호 논설위원 

 

후보 경쟁 물고 뜯는 정치판인데 한 번 만나고는 홀연히 양보…
시장선거 나선다며 市 얘긴 없이 '역사의 물결' 운운할 때부터 이상
여야 지도부 '허약한 사람' 만들고 내년 대선 도전 과정 밟나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난 3일 국민일보가 실시한 3자 가상대결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55.4%를 얻어 24.6%의 나경원 의원, 9.1%의 박원순 변호사를 가볍게 제쳤다. 다른 기관의 조사결과들도 비슷했다. 그런데 출마를 고심해왔다던 안씨는 출마설(說)이 나온 지 닷새 만에 지지도가 자신의 6분의 1에 불과한 박씨에게 후보를 양보한다고 발표했다. 서로 후보를 하겠다며 물고 뜯는 정치판에선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광경이다.

안씨는 열세인 박씨를 앞세우고 강자인 자신이 뒤로 물러섬으로써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신이 박씨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이란 이미지를 심어줬다. 큰 그릇처럼 행동하는 그의 거침없는 면모는 그간의 언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났다.

안철수씨는 출마설이 한창이던 며칠 전 한 인터넷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서울시의 무상급식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데 대한 분노 때문에 보궐선거 출마를 생각하게 됐다면서 "이상한 사람들이 또 서울시를 망치면 분통 터질 것이다"고 말했다. 높은 지지를 등에 업은 그의 분노에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주도한 오세훈 전 시장은 졸지에 '정상이 아닌 사람'이 돼버렸다. 안씨처럼 오 전 시장의 선택이 잘못됐다며 못마땅해한 사람들은 한나라당 안에도 많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안씨는 오씨, 박씨 같은 구분엔 별 관심없다는 듯 한나라당 전체를 뭉뚱그려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나쁜 투표를 착하게 거부하자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낙인(烙印)을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했다.

그는 "나는 1970년대를 경험했다"면서 "(현 집권세력을 보면서) 아, 이거 거꾸로 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는 말도 했다. 1970년대는 박정희 시대다. 1962년생인 안씨는 10대였던 때다. 그 나이에 박정희 시대의 구석구석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지 알 순 없으나 어쨌든 그가 2011년의 정치를 보면서 40년 전의 어두운 기억을 되살리게 됐다고 하니 대통령부터 그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안씨는 "한나라당을 응징해야 한다"면서도 민주당을 자신과 동렬에 놓지는 않았다. 그는 "이번 (주민투표) 문제의 촉발은 한나라당이 시작했지만 민주당이 그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은 없다"면서 "민주당도 '역사의 물결'의 대표가 아니다"고 말했다.

안씨는 자신에 대한 지지가 높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선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나를 통해 대리표현된 것 같다" "정치 한 번도 안 하고 출마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여·야) 양쪽이 지각변동이 일어나 흔들린다" "이렇게 허약한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겼다는 건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 황당하다"고 말했다. 솔직한 말이긴 한데 그 솔직 한방에 내로라하는 여·야 지도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정치인들이 돼버렸다. 이 대목에서 뒤따르는 "제발 자각했으면 좋겠다"는 안씨의 훈계를 듣는 건 작은 정치인들이 감수해야 할 또 다른 몫이다.

정치가 국민을 많이 실망시켜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후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나라를 이만큼 먹고 살도록 키우고 세계가 인정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한국현대사를 정치사를 빼놓고 설명할 순 없다. 윤여준씨는 그 정치사의 고비고비를 목격해 온 몇 안 되는 원로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안씨는 그 윤씨가 자신의 멘토로서 자신이 제3정당을 할 것처럼 말한 것으로 보도되자 즉각 부인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 역할을 하는 분은 300명 정도 된다. 아마도 그분은 청춘콘서트에 게스트로 초청된 뒤에 저에게 기대를 갖기 시작한 것 같다. 3000명 정도가 와서 의자가 다 차고 계단 다 차고, 무대까지 다 차는데 그걸 보고 감동했을 것이다. 아마 그분도 평생 경험 못해봤을 것이다." 한때 정계의 책사(策士)로 불린 윤씨도 새로 떠오르는 스타인 안씨에겐 김제동·김여진 같은 연예인을 포함한 300명의 게스트 중 한 사람일 뿐이란 말이다.

안씨가 좋게 평한 건 박원순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당선이 아슬아슬할 수는 있지만 정말로 그분이 원하면 그쪽으로 밀어드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더니 박씨와 한번 만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말 양보를 해버렸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안씨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다면서 서울시 얘기는 하지 않고 역사의 물결을 말하고 기존 정당들을 꾸짖더니 홀연히 뒤로 물러섰다. 일각에선 그가 내년 대선에 도전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역사의 물줄기' 같은 큰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 그에게 스티브 잡스빌 게이츠 같은 위대한 연구자, 훌륭한 사업가의 길을 가지 않는 이유를 묻다간 묻는 사람이 자잘하다는 말을 듣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