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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50년 JP ‘3700명의 레볼루션’을 말하다

淸山에 2011. 5. 14. 13:27

 

 

 

 

“혁명은 숫자가 아니다 의지·민심으로 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2011.05.13 01:53 / 수정 2011.05.13 02:04

 

5·16 50년 … JP ‘3700명의 레볼루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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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한국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건국의 사명을 완수한 이승만 시대의 바통이 박정희 시대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박정희의 5·16세력은 산업화와 자주국방을 내걸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주도했다. 5·16 50주년을 나흘 앞둔 12일 당시 박정희 육군 소장을 도와 거사를 성공시킨 김종필(JP·85·사진) 전 총리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만났다. 역사의 무게가 쌓여도 ‘혁명가의 시선’은 그때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3700명밖에 안 되는 소수 병력으로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습니까. 20개 사단을 가진 1군에서 반격작전을 폈다면 실패했을 텐데요.

 “이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했을 때(※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박승규 민정수석이 내게 울면서 전화해 빨리 들어오라는 거야. ‘큰일 났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세상에, 거기서 내가 놀란 게 그렇게 삼엄했던 청와대에 아무도 없더라고. 다 뚫렸어. 3700명이 적은 숫자야? 혁명은 숫자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12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만난 김종필 전 총리. [변선구 기자]

 -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5월 16일 새벽 한 시, 두 시쯤인가 한강 다리를 건널 때지. 그 직전에 6관구사령부에 있던 박정희 소장에게 장도영 참모총장이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야단했는데 그때 박 소장이 흔들렸으면 다 끝났어. 박 대통령은 장도영 총장한테 단호한 의지로 ‘우린 행동 개시했습니다’라고 밝혔지. 6군단 포병단이 서울로 진격하고 해병대가 들어오고 그러고 있었거든. 난 종로에서 혁명공약을 인쇄하고 있었고.”

 - 5·16은 혁명입니까, 쿠데타입니까.

 “내가 격동기를 헤쳐왔는데…. 5·16을 쿠데타니 레볼루션(혁명)이니 막 얘기하는데 뭐, (언성을 높이며) 쿠데타라고 하면 자기가 올라가는 거야? 쿠데타는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 변란을 일으키는 거고, 레볼루션은 민심을 기초로 아래에서 일어나 권력을 바꾸는 거야. 그렇게 따진다면 5·16은 레볼루션이오.” 대담=전영기 편집국장

-아래 계층 출신 하급장교들이 권력을 바꿨다는 뜻인가요.

 “아니. 5·16은 서민층이 지지한 혁명이란 얘기야. 서민은 지지했어.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반대했어. 일반 서민들이 은연중에 세상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혁명한다는 소문이 좌악 퍼져도 어쩌지 못했던 거요.”

 -거사 소문이 퍼졌는데도 장면 정권이 막지 못한 건 미스터리입니다.

 “장면 총리는 소문에 신경도 안 쓴 거 같았어. 그때 이런 얘기가 이후락(※장면 국무총리실 직속 정보위원회 실장)씨 같은 사람 귀에 왜 안 들어갔겠어. 다 듣고 있어도 설마 그러랴, 하는 정도의 인식이었겠지. 이한림 1군 사령관은 보고를 받고 혁명군을 칠 준비를 했어. 그런데 우리가 먼저 가서 잡아왔지. 민심이 우리 편이었어. 아, 저 윤보선 대통령도 5·16 보고를 받고 ‘올 게 왔구나’ 첫마디가 그거였어. 현직 대통령이 올게 왔구나 했으면 알 만하지. 허허.”

 

 

 

 

    


 

젊은 날의 JP(김종필 전 총리). 1952년 첫 딸 예리를 안고 아내 박영옥 여사와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로부터 9년 뒤인 61년 그는 5·16의 기획자로 나선다. 그해 516이 성공한 뒤 아들 진이 태어났다. 쿠데타냐 혁명이냐의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근대화와 산업화의 출발점이기도 한 5·16이 나흘 후 50주년을 맞는다. [중앙포토]



 앉자마자 쉴 새 없이 5·16 얘기를 나눴다. JP는 점퍼의 편한 복장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종필 전 총리의 좌우에 고색창연한 소파가 있고 맞은편 벽 위에 ‘笑而不答’(소이부답·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바깥 정원의 풀들은 50년 역사의 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1968년 한 집회에 참석해 웃고 있다. [중앙포토]

 # 쿠데타냐 레볼루션이냐

 -중앙일보가 올해 한국사 과목을 필수로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어요.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화해도 제안했습니다.

 “국사 교육을 없앴다가 새로 넣은 것은 그거 잘한 거요. 역사를 있는 그대로 하지 않고 고약하게 표현해야 자기가 올라가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이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다 왜곡시켜 놓았어.”

 -4·19때 박정희 소장이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이었죠. 1960년 4월 24일 대구 범어사에서 합동 위령제가 열렸는데, 박정희 소장이 조사를 읽어요. “여러분들의 영결은 자유를 위한 우리들과의 자랑스러운 결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5·16 혁명 취지문에 4·19 정신을 계승한다고 했잖아. 4·19가 혁명인데 그것을 계승한 5·16은 쿠데타? 좀 웃기지 않아? 취지문은 내가 썼지. 이런 얘기 지금까지 일절 안 했어.”

 -이집트의 나세르, 터키의 케말 파샤, 버마(미얀마) 네윈 등 신생국 군사혁명을 참고했다는데요. 가장 강렬한 느낌을 줬던 롤모델은 누구입니까.

 “나세르지. 시간적으로 많이 지나지 않았고(※이집트 혁명은 1952년 발생), 나세르가 함께 혁명을 한 나기브(※1인자)를 제치고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봤지.”

 -나세르와 나기브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5·16이 성공하고 한참 후의 일인데 그와 관련된 일이 있어. 우리 집 네 귀퉁이를 중앙정보부가 감시했어.(※박정희 대통령이 김 전 총리를 견제했다는 뜻) 내가 참다 참다 청와대로 가 박 대통령에게 불평을 했어. 아니, 제가 나세르입니까? 뭘 감시를 합니까. 저 그런 놈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 자리를 넘보겠느냐, 그렇게는 안 한다 하는 것을 나세르를 인용해 표현했지.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눈 감고 아무 말 않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뭘 그럴 수도 있지…’ 그러는 거야. 내가 그 장면을 잊어버리지 않아.”

 -권력의 냉혹함이군요.

 “나 일관되게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고 도와 드렸어. 중앙정보부장 맡은 것도 나 외에 그런 일 할 사람 없으니까 그 많은 욕 먹으면서 한 거야. 나도 그냥 최고위원하고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 혁명을 뒷받침할 일을 한 거야. 시종일관.”

 -지금도 젊어 보이시는데, 그때가 30대였죠.

 “서른다섯 살 때야.”

 - 그 나이에 어떻게 역사의 변화를 기획했는지….

 

로버트 케네디 전 미 법무장관(왼쪽)과 가말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남의 도움이 필요 없이 편안하게 살수 있는 나라 만드는 거밖에 없어. 62년 미국 건너가서 그때 로버트 케네디를 만났어. 쿠바 사건이 10월 22일인데, 3차 대전이 일어나느냐 마느냐 하던 그날이야. 케네디 대통령이 안보회의 주재한다고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더러 만나라고 한 거지. 법무장관실에서 만났어. 그런데 아, 이 친구가 자기 책상 빼랍(서랍)을 빼내고 두 발을 올려놓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한 첫 말이 ‘온 목적이 뭐냐’는 거야. 내가 속이 상해서,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딨어, 내가 조그만 나라 일꾼이지만, 발 올려놓고 내려다보며 뭐 하러 왔느냐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날 테스트하는구나, 생각했지. 감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거라고, 뭐라고 해야 짧은 말로 좋은 대답이 될까. 벌떡 일어나서 ‘여기 온 것은 너희가 오라고 해서 왔다. 이건 너희들이 소위 혁명을 왜 했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걸로 이해한다. 그 질문 잘 했다. 대한민국이 미 합중국의 짐이 되지 않는 나라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얘기했지. 그랬더니 빙그레 웃어, 발 내려놓고 손으로 빼랍을 닫고. 그러더니 저쪽으로 가서 책을 가져와 지가 쓴 책이야. 내 이름의 스펠링을 묻고는 친애하는 제이피 김(JP Kim)이라고 쓰더니 이걸로 용서해 달라고 그래, 그리고 죽을 때까지(68년) 친하게 지내, 한국에 두 번 왔어.”

 # 박정희의 권력의지

 -5·16을 성공시킨 배경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의 국가 개조를 위한 권력의지가 있기 때문 아닌가 보는데요.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시고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박 대통령의 구국의 기초가 된 것은 유신이었어. 유신체제를 만들어서 비난을 하건 말건 밀어붙여서 70년대 중화학공업화 기반까지 만들어놔야겠다, 그러고서 유신을 했어.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인제 박 대통령과 더불어 유신체제는 없어졌다, 80년대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승계하는 세대가 아니라 민주화하는 세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헌법 바꾸자고 했어. 결과적으로 안 됐지. 최규하 전 대통령하고 그 뒤에 있던 신현확 전 총리의 협조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5·16 당시 박정희 소장의 매력,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나요.

 “내가 한때 박 대통령을 좌익이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어요. 6·25전쟁이 나고 나서 그 의심이 풀렸어. 6·25가 났을 때 그가 빨갱이라면 한강을 넘지 않을 것이고, 아니라면 한강을 넘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최후로 한강을 넘었는데, 그때 강 너머가 채소밭이거든, 바지 타고 넘어갔어, 가는 도중에 쭉 그 생각이야. 수원에 도착하니까 거기 계시단 말이야. 야, 거기서 의심이 완전히 풀렸지. 하지만 CIA 서울지부장 실버는 5·16 당시에도 박정희 소장을 빨갱이로 의심했지.”

 # 참여자 모두 1등공신

 -혁명을 구상한 장교들은 박정희의 어떤 점에 반했을까요.

 “강직, 청렴이야. 정군(整軍)운동이 혁명으로 발전했지만, 그때 장군들 다 썩었다구. 박정희는 웬만큼 생각 있는 장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어. 이분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퍼져 있었지. 그땐 내가 (박정희의) 조카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이야.”

 -청렴과 강직이군요.

 “게다가 유능하고, 그건 뭐냐면, 1949년 종합적정(敵情)보고서라는 걸 만든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박정희가 이북이 곧 쳐들어온다고 하는 거야. 공격 준비 1단계가 됐기 때문에 쳐들어올 거다 그러는데 그대로야. 6·25전쟁 때 보니까 박 대통령이 6개월 전에 예상했던 침투경로 그대로 내려왔어.”

 -거사의 1등공신은 누구입니까. 김윤근 해병여단장, 박치옥 공수단장 등 실병력 지휘자들의 공적순서는요.

 “그런 거 없어. 다들 순수한 생각에서 했어. 모두 1등공신이야.”

 JP는 5·16 거사 전날, 집을 나서면서 아내 박영옥 여사에게 “살아서 못 볼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에게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은 언제 갖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그는 “5월 19일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을 만나고 나서”라고 답했다. 미군의 작전지휘권이 침해당했다고 서슬 퍼렇게 달려들던 매그루더에게 JP는 “그럼 혁명할 때 병력을 출동시키겠습니다, 하고 혁명하느냐”고 대차게 받아쳤다. 이 담판이 미국 측으로부터 5·16 주체 세력의 존재를 인정받는 한·미 공동성명이 나온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JP는 61년 2월 15일 정군운동을 하다 옷을 벗었다가 5월 16일자로 중령에 복귀했다. 준장으로 예편한 건 이듬해 민주공화당을 창당할 때다. 혁명을 얘기하는 김 전 총리의 눈에 청년 같은 빛이 났다. 그가 “우리는 순수했어. 이것 저것 구차하게 설명하는 게 없었어”라고 말할 땐 주먹을 쥐기도 했다. “혁명을 하자, 다 때뤄 부수자”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군말 없이 대부분 합류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뒤 그는 걷기 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JP는 2008년 12월 15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초인적인 재활운동을 통해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대담=전영기 편집국장,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