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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레이스에서 장남과 차남은 이미 탈락? 권력세습 지배체제의 원조인 "위대한 지도자"라는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과, 한국전쟁에서는 미국과 싸운 것으로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획득했다. 이것은 2천만명의 북한주민을 호도하기에는 충분한 경력이었다. 그의 아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은 수 십년간이란 시간을 공들여 가며, 아버지 밑에서 세습에 관한 견습기간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갈고닦아 왔다.
제1대 "위대한 지도자" & 제2대 "친애하는 지도자", 제3대 "英明한 동지"는 정운이로 낙찰될지?
배다른 형제 김평일(平日)을 대사로서 유럽으로 좌천시킨 적도 있다. 1994년 김일성이가 죽은 수년 뒤에는 "선군정치"를 내세워 권력기반을 강화해 왔다. 군 고급간부들에게 외국제 시계나 고급차를 선물한 것도 권력장악에 도움이 되었다고 서방에는 보고 있다.
김정일의 세 아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스위스의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92년 가을 스위스 수도 베른에 있는 "베른 인터네셔날 스쿨"(IBS)에 두 명의 남자가 방문했다. 여기서 수 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북한 대사관에서 리무진을 타고 두 사람은 4학년에 편입했다.
1975년1월 어려서부터 "차세대 장군감"으로 키우려고 정성들이다 망가진 장남 정남이와 할머니
두 사람이 북한 출신 외교관의 자녀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IBS 관계자는 미국 뉴스위크 기자의 취재에 대답한 적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생도 개인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는 것이 룰이다"라고... 이 두 명의 소년 가운데 한 명은 김정일의 차남 김정철(正哲)이였다.
IBS 재학시정 차남 김정철(正哲)
다른 한 사람은 정철이 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는 소년으로 그는 보디가드역임에 틀림없다. 정철이는 농구에 열중하며 특히 NBA 시카고 불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러나 선수로서는 별 볼 일 없어, 정작 IBS 농구부에서 들어가 활약한 것은 보디가드쪽이었다고 한다.
"차세대 장군감"이 성장한 최근 모습, 마카오에서 두문불출하는 정남이, 당뇨병을 앓고 있는 듯...
IBS에서 "박철"이란 가짜 이름으로 통했던 정철이는 비교적 어른스럽고 조심스러운 소년이었던 것 같다. IBS 관계자를 통해 얻은 자료에서는 6 - 7학년생 무렵의 정철이가 쓴 "나의 이상의 세계"라는 제목의 작문에 "나의 이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무기나 원자폭탄을 없애고, 할리우드 스타 쟝 클로드 반 담과 함께 테러리스트를 전멸시키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약물사용을 없애게 하겠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유령이었다."라는 단편소설도 썼다. 즉 자기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항상 자기 주위를 감돌고(감시)있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사족(蛇足) : 북한의 차세대 권력승계에서 미끄러진 장남 정남이의 일본 나리따 공항 밀입국 모습. 2001년5월1일, 일본 나리따 공항으로 밀입국 기도로 국외추방처분으로 북경행 일본 ANA 항공을 타고 떠났다. 정남의 처로 알려진 신정희(, Sin Jong-Hui, 29세)와 아들 김솔(Kim Sol, 4세) 그리고 선글래스 모습의 여성 이경희(Lee Kyong-Hui, 32세)는 신정희의 친척이라고 한다. 그러나 5월8일자 연합뉴스와 5월24일자 마이니찌 신문 보도에 따르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여성(신정희)은 유모역으로 김정남의 친척이며, 선글래스의 젊은 여성은 북한 외무성의 일본어 통역이라는 정보도 있다.
나리따 공항에 설치된 구두심사실 3곳으로 각각 분산 수용되어 4명에 대해 공항특별심사관이 대응했다. 김정남은 영어로 여자와 남자아이는 한국어로 통역을 통해 실시되었다. 당시 김정남을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여자 한 명은 "남자 아이를 데리고 동경 디즈니랜드에 가려고 일본에 왔다"고 대답했다. 취재 중에 김정남은 1만원권 지폐를 심사원에게 주면서 4명분 도시락을 사다 줄 것을 부탁해 도시락을 사다 주자, 거스럼 돈은 "팁으로 받아 두라"고 했다고 한다.
위조 여권으로 디즈니랜드를 포함해 수 차레에 걸쳐 이미 일본을 다녀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 동경 미나또구 아까사카(東京都 港區 赤坂)에 있는 칸 나오또 현 수상이 출입하던 한국 클럽까지 출입한 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김정남의 중국명은 "月+半 熊"(Pang Xiong, 살찐 곰이란 뜻)이란 이름으로 일본에서 구속수용되었으며, 그의 등에는 용 문신이 새겨진 것이 판명되었다. 2002년12월 파리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기 위해 프랑스 입국을 신청했으나 거부되었다.
그의 추방은, 북한 외교문제로 발전할 가능성과 당시 북한을 방문중 인 일본 관광객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당시의 외상 다나카 마키꼬(田中 眞紀子, 다나까 전 수상의 딸)씨의 정치적 판단으로 다음날 ANA 항공 보잉 747-400형 비행기의 2층석을 전세내어 중국 북경으로 강제출국을 허용했다. 정남이의 일본 밀입국은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 純一郞) 내각이 출범한 6일째 발생한 최대 사건이었다.
복수의 정보에 따르면 정일이는 정철이에 대해 "너무 연약해 권력의 자리에 앉히기에는 무리"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한때 장남 정남(正男이가 "후계 최유력 후보"로 지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남이는 2001년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 여권으로, 유모차에 태운 아이와 여자 2명을 거느리고 일본 나리따 국제공항을 통해으로 밀입국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곧 중국으로 강체추방형식으로 쫒아냈으나, 이때 불법입국 목적은 동경 디즈니랜드를 관광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후로 정남이는 보도진의 질문에 대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반복해 대답하고 있다. 상당히 비만형(당뇨병이라는 설도 있음)인 정남이는 정치보다는 일류 브랜드를 좋아하고 있다. 아르마니의 모자에 폴로 라우렐의 티셔츠에 베르사치 선글래스라는 모습으로 마카오에 출몰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정일이의 아들들 가운데 정보가 가장 부족한 것이 삼남 정운(正雲)이의 정체이다. 미국 정보기관에 따르면 정철이와 같이 정운이도 어린시절 스위스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특히 정운이에게 관한 미디어에 자주 인용.등장하는 정보의 출처는 대부분이 전 김정일 전속 일본 요리인이었다고 하는 후지모또 켄지(藤本 健二)이다.
사족(蛇足) : 후지모또 켄지(藤本 健二), "장군의 요리사"(스시)로 13년간 근무하고 2001년 구사일생으로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1982년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시내의 일본 요리점 "안산관"(安山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시 귀국 뒤로 다시 방북해 김정일 본인의 직접요청으로 전속 요리사가 되었다고 한다. 참치(마구로) 구입을 위해 가끔 일본을 왕복하면서 총 13년간 북한에서 생활했다. 1996년에는 일본에 일시귀국 중 "출입국관리위반법 및 난민인정밥위반법방조"의 용의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석방 뒤로 다시 방북했다. 2001년4월에 탈북에 성공, 2003년에 "김일성의 요리사"를 일본에서 발간해 베스트 셀러로, 현재 일본국내에 있으며 북한의 "자객"을 두려워 해 은둔생활을 보내고 있다. 손에 든 사진은 김정은(당시 11살)이라고 하는 사진으로 사진 자막에는 "김정은 왕자님으로부터 받음(2001.3.11, AM 1:30 원산)"이라고 쓰여 있다.
2001년 북한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해 베일에 싸인 김씨 일족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미디어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김정일은 특히 삼남 김정운이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한다. "정철이는 마음이 너무 햑해서 안되고, 정운이는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언젠가 김정일 자신이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본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기도 한 후지모또 켄지(藤本 健二)의 북한관련 폭로 책자
후지모또(藤本)가 "중앙일보"에 밝힌 내용에 의하면 김정일은 정운이를 "스케일 크게..." 키웠다. 어렸을 때부터 술을 마시게 해, 7살때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운전하게 했다. 그리고 12살 때는 "작은 오빠"라고 여동생에게 불리며 정운이가 큰 목소리로 화를 내기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주위로부터 자신을 "대장 동지"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한 한편 언젠가는 국민의 생활에 대해 걱장한 적이 있었다 그가 18세 때 "나는 언제나 젯트 스키를 타고 해양 스포츠 즐기며, 인라인 스케이트나 승마를 하고 있으나, 일반 국민들은 무엇을 하고 여가를 보내고 있는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김일성 부부와 장남 김정일의 어렸을 무렵 사진, 일본어 자막에는 "젊은 지도자로서"라고 쓰여 있다.
사실은 후지모또(藤本)의 말을 어디까지 신용할지는 의문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는 언제나 돈을 요구해 그렇지 않으면 취재에 일체 응하지 않는다. (실제의 예로 미국 뉴스위크 기자가 취재를 요청했으나 돈을 주지 않는 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게다가 그가 진술한 정보 가운데는 앞뒤가 맞지않는 부분도 있다.
1992년 평양 축구 경기장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후지모또(藤本)는 어렸을 때의 정운이의 사진이라며 미디어에 공개했으나 - 본인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한다 - 사실은 다른 인물로 판단해도 틀림없는 사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과 같은 사진이 베른의 ISB 졸업 기념앨범에는 한국 유학생의 사진으로 게제되어 있었다. 정운이가 다녔다고 하는 학교는 베른에서 가까운 리베펠트 마을의 타인횔츨리라는 공립학교였다는 사실이 2009년8월5일 미국의 뉴스위크지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서도 수상한 점이 있다.
북한은 이미 "영명한 동지"로 부르며 "위업" 조작에 착수 차남 정철과 삼남 정운은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평양에 있는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에 진학했다. 물론 이 대학에서는, 스위스에서 자유분방한 서양 사상이 몸에 배었다며 철두철미하게 털어 내 북한의 일방적인 정치철학을 머리에 주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한국이나 미국의 정보기관에서는 올해 27살인 정운이가 다음 북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서방의 어느 정보기관 관계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김정일 주변에서는 정운이를 "영명(英明)한 동지"로 부르도록 지시되어 있다고 한다. 정운이가 "차기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하는 보도는 "정말이라고 생각한다"고, 장남 정남이가 일본 "TV 아사히"의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적이 있다.
서울의 대북민간 라디오방송 "열린 북한방송"에 따르면 북한 병사들은 지난해 1월 정운이의 "혁명적 위업"에 대해 세뇌교육 받았다고 한다. 정운이는 "김정일장군의 이념과 지도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젊은 장군"이라는 칭송과 "예술과 철학의 천재"로 불리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53년 무렵 화진포 해변의 한 빌라에서 김정일의 어렸을 때의 사진.
"장래를 생각해..." 주위의 어린이들과 비교해 볼품없는 꼴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글어 버렸다. Useful Link : 독재자들의 감촉 같은 조작술
북한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리고 있는 "2010년 월드컵 출장"을 달성한 것도 정운이의 공적이라고 치켜 세우고 있다. "젊은 장군"이란 이미지를 북한 주민에게 "새로운 카리스마적 인상"을 심기위해 필사적인 것 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천안함 사고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젊은 장군"의 업적으로써 권력승계의 프리미엄으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남 정운이의 스위스 사립학교 시절 사진 1998년6월 촬영한 16세 무렵으로 동급생 조아오 미카에로씨가 정운이의 추정되는 인물로써 제공해 공개된 사진.
김정일은 아직 빈사의 상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이전에 비교하면 쉽게 화를 내고, 초조해 한다"고 한국 국가안전 전략연구소의 南成旭 소장은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뇌졸증의 후유증으로 최근들어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기억상실과 입 주위와 팔다리의 경련이 심해졌다"고 한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이 보도한 삼남 정운이에 관한 기사 스크랩
2000년에 김정일과 만난 서방 외교관의 한 사람은 "상당히 지적으로 자신가이며 웅변에 능한 남성", "박식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고 그의 인상을 밝혔다. 후계자 물망이 회자되고 있는 정운이가 아버지를 이어 "그 정도 자신을 갖고 행동하게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삼남 정운이를 낳은 생모 김정일의 세번째 여자 "고영희", 1953년 일본출생.
아직도 정운이에게는 넘어야할 장애가 많이 있다. 나이와 지혜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이 뿌리깊은 북한에서 "정운이 시대"가 준비되기까지 "섭정"(외세를 포함)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최고 유력후보는 조선노동당행정부장 장성택(張成澤)이다. 한때 그는 부패를 이유(진짜 이유는 장남 정남과 너무 접근한 점) 실각되었으나, 현재는 복권되어 실세로 활동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김정일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젊은 영명한 동지" 정운이에게 충성을 나타나내 될 것이다.
그러나 "친애하는 지도자"가 없어지고 나면 심각한 권력투쟁에 돌입 그 결과 돌파구를 어디서 찿게될지 이것이 가장 우려되는 문제이다.
29일 한국의 각 신문들은, 삼남 정운이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3월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 중이라고, 북한정세에 밝은 서방측이 보도한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정운의 직무가 보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 선거 2개월 뒤에는 한 초등학교에서 정운이를 칭송하는 노래 "발걸음"을 가르치는 등 정운이의 우상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정일 동상이 북한군 기관지인 "조선인민군"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대북 단파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이 16일 입수한 5월11일자 "조선인민군"은 1면에 "백두산 혁명강군의 최대의 특전, 최상의 영광" 제목의 기사를 싣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김정일 위원장 생모)의 군복 동상과 함께 김정일 위원장이 군복을 착용한 동상 사진을 공개했다. 그동안 김 위원장의 동상이 노동당 청사와 인민무력부 등 주요기관에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있었지만 동상 사진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왼쪽부터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일성이의 처 김정숙의 동상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아직 어린 아들을 애써가며 발버둥 치며 3대 세습 후계자로 서두르는 것을 보면 김정일 앞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디 2, 3년만 참고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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