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翰林의 경고 현석호 국방장관은 1961년 2월 초 장도영 2군 사령관을 불렀다. “장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을 맡아 주어야겠소.” 장도영은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사양했다고 한다(현석호 회고록). “3·15 부정선거 때 제가 2군 사령관이었고, 이기붕 씨와 가까웠다는 것을 군내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배석하고 있던 禹熙昌(우희창) 정무차관과 金業(김업) 사무차관이 “장 장군! 모처럼 부탁이니 ‘예’ 하고 받으시오”라고 거들기도 했다. 장도영 장군은 그 전에 여러 경로로 총장 운동을 했는데도 그런 태도를 보였다. 국회에선 李必善(이필선) 의원이 “특별법으로 처벌받아야 할 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4·19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닌가”하고 따졌다. 박정희가 ‘다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장도영 중장을 장면 총리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5·16 쿠데타를 스스로 부른 결정적인 인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이한림 육사 교장이 총장이 되었더라면 5·16 거사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한림은 장면, 현석호와 같은 가톨릭 신도였기 때문에 총장으로 유력시되었으나 1군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이한림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유학생 때 박정희와 생활을
같이 한 동기였다. 청년 장교 시절부터 박정희가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성격이 단호한 이한림은 위기 때 장도영 중장처럼 처신할 인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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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이한림이 서울에 들렀다. 부관이 오더니 “육사 군수참모부장 白文(백문) 대령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원주 1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길에 집에 들렀다. 백 대령은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 아래서 참모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박정희 장군이 군 사령관을 만나서 할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이한림은 ‘예상한 대로 그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가는 일이니 만나나 마나요. 그러니 내 말을 박 장군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박 장군이 지금 쿠데타를 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하지 말라고 하시오. 민주 정치가 선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이를
도와야지 딴 생각을 말라고 하시오. 그리고 쿠데타를 용납할 수 없다고 전하시오.” 이한림은 따끔하게 주의를 주고는 일어서서 비행장으로 향하면서 ‘서울에 있는 여러 정보기관이 적절히 대처하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0년 친구 박정희를 스스로 고발할 생각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로 내려간 뒤 본격적으로 쿠데타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서울의 김종필 중령(당시 육본 첩보부대 행정처장)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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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초 김 중령, 석정선 중령이 헌병대에 붙들려가서 구속 수사를 받기 시작했다. 1960년 말에 일단락된 16인 항명 사건이 재조사되면서 김, 석 두 중령이 ‘숨겨진 주모자’로서 체포된 것이다. 이 재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6인 사건의 표면상 지휘자인 육사 7기생 金東馥(김동복) 대령이 파면된 뒤 ‘우리의 배후엔 박정희,
김종필이 있다’는 요지의 폭로 문건을 군 당국뿐 아니라 총리실에까지 돌렸기 때문이었다. 김동복 대령은 육본 전사감실 전사과장이었다. 그의 보좌관은 김형욱 중령. 배짱이 두둑하고 말솜씨가 좋은 김 대령 방은 4·19 이후엔 불평분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른바 항명 장교 16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韓周弘(한주홍) 대령은 육본 작전참모부 기획예산과장이었다. “매일 수십 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김동복 대령 방을 들락날락하면서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김종필 중령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데모로 날이 새고 날이 지는 시국과 부패하고 무능한 군 상층부를 비난하다가 ‘그러면 어떻게 하지’란 話頭(화두)로 발전합니다. 강경파는 ‘뒤집어버리자’는 말을 하고 온건파는 ‘그게 쉽게 되나’라고 반박합니다. 장면 총리가 減軍(감군) 방침을 발표한 뒤로는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과 불안은 더욱 높아갔습니다.” 감군이 되면 군대를 떠나야 할 사람들 가운데는 육사 5~8기 출신의 고참 영관들이 많았다. 특히 육사 8기 출신 장교들은 “6·25는 우리가 소모품 소대장, 중대장이 되어 지켜 낸 전쟁인데… 전쟁이 끝난 뒤에는 8년이나 중령
계급장을 달게 해놓고 이제 와서 집에 가라니, 이런 대우를 할 수 있나” 하는 울분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한주홍 대령은 6·25가 터졌을 때는 중대장으로서 8기 출신 장교들을 소대장으로 여섯 명을 받아 썼다. 전쟁이 끝날 때 보니 생존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민주당 정부가 출범했을 때 육본에만 해도 감군 대상자로 꼽힌
영관 장교가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김동복 대령은 1960년 9월24일 오전 육본의 영관급 장교들 수십 명을 이끌고 연참 총장 최영희 중장을 찾아갔다. 출발할 때는 10여 대이던 지프가 도착해보니 다섯 대로 줄어 있었다. 한주홍 대령은 김종필, 석정선, 김형욱 중령을 불러서 “너희들은 빠지는 게 좋겠다. 너희들까지 구속되면 누가 뒷일을 책임지겠나” 하고 타일러
육본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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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복 대령은 최영희 중장에게 용퇴와 정군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최영희 장군은 이들 장교를 잘 타일러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이 사실이 신문에 났다. 헌병대가 수사에 착수하여 16명 장교들을 모두 중앙징계위원회에 넘겼다. 최영희 장군도 증인으로 나와서 선처를 요청한 때문에 김동복 대령 등 세 명만 정직 3개월과
감봉 처분을 받고 나머지 장교들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16인 장교들은 ‘일은 똑같이 했는데 왜 처분이 이렇게 다른가’ 하며 또 시비를 걸어서 불복, 모두 군법회의에 넘어가기를 자원했다. 16인 중에는 법률에 밝은 李錫濟(이석제) 중령 같은 장교들이 있어 공판 중에 재판부 기피 신청 등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였다. 요사이 기준으로는 운동권 같은 집단행동이었는데 재판부는 김동복 대령을 제외한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동복은 불경죄로 파면 및 1년간의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김동복은 군복을 벗은 뒤 혼자서만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동료들이 자신을 섭섭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는지
김종필과 석정선을 물고 들어가는 폭로를 하고 나온 것이다. 그 결과 김종필과 석정선은 헌병대 감방에 갇혔다. 마루 틈으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모포를 네 장이나 포개 놓고 잤다. 헌병대에선 그들을 잡아넣어 두고는 조사도 하지 않고 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헌병감
曺興萬(조흥만) 준장이 김종필을 찾아왔다. 金鍾泌, 군복 벗다 헌병대 감방에서 수염이 검게 자란 김종필 중령에게 조흥만 헌병감이 말했다. “자네, 자진해서 사표를 내주어야겠어.” “못 냅니다. 군법회의에 넘기십시오. 법정에서 남길 말을 다 하고 나가겠습니다.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다 털어놓겠습니다.” “지금까지 자네들이 저지른 일들은 다 군을 사랑해서 한 것이라고 이해를 하네. 그래서 많은 선배 장군들이 군복을 벗고 나간 것 아닌가. 이제는 정군 문제 같은 것은 총장님에게 맡기고 군대가 조용해져야 돼.
그러니 자네가 나가주어야겠어. 그러면 이 사건도 불문에 부치겠어.” “그래도 못 냅니다.” “그러면 박정희 장군이 편치 못하게 되네. 자네들이 박 장군을 업고 혁명한다면서.” “한번 알아보십시오. 제가 지금 여기 들어앉아 있는 것도 모르시고 있습니다.” “내가 부하들을 다 동원하여 뒤지면 얼마든지 박정희 장군을 집어넣을 수 있어. 자네가 정말로 박 장군을 존경한다면 조용히 군복 벗고 나가. 자네만 나가면 박 장군 문제도 덮어 두겠어.” 김종필은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40분 생각해보다가 그는 사표를 쓰는 길을 선택했다. 1961년 2월15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자진 예편 형식으로 13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김종필이 감방에서 풀려나 집에 가니 동기생들이 와 있었다. 그들에게 김종필은 “이제는 시간이 많을 테니 좀 뛰어다녀 보겠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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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인 2월20일 김종필은 형 金鍾珞(김종락)에겐 “삼촌한테 가서 용돈이나 뜯어와야겠다”고 말한 뒤 대구로 내려갔다. 조카사위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깜짝 놀랐다. “이거 안 되겠군. 이래 가지곤 안 돼. 나도 결심을 할 때가 된 거야. 그동안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보고 나대로
준비는 해왔어. 서울 사정은 어떤가.” “서울 주변에 있는 예비사단을 동원할 정도는 되어 있습니다.” “나도 전방의 2개 사단 정도는 동원할 수 있도록 해놓았어. 조용히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김종필 전 총리는 자신의 예편이 5·16 준비를 본격화시켰다고 말한다. 군복을 벗으니 홀가분한 마음에서 거사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전에는 구상 단계였고 사실상의 준비는 내가 군복을 벗고 뛴 석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고 말했다. ‘5·16은 나의 작품’이란 자의식이 강한 김종필의 이런 시각에 대해 박정희 측근에선 “5·16 때 서울로 들어온 해병대, 공수단, 6군단 포병단, 5사단 병력은 모두 박정희 장군이 직접 포섭한
부대였다”면서 ‘박정희의 충실한 작전참모로서의 김종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박정희가 말한 ‘동원 가능한 전방 2개 사단’ 중 하나는 채명신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이었다. 채 준장은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일 때 생도였고, 1군 참모장일 때는 그 밑에서 작전참모로 있었다. 개혁엔 의기투합하는
사이였다. 채명신은 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이비 기자들의 등쌀에 시달리면서 시대의 모순에 울분이
쌓여 가고 있었다. 당시 영외 거주를 하는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땔감을 사는 데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채명신 사단장은 일요일엔 전 장교, 하사관들을 부부 동반으로 집합시켜선 도시락을 싸들고 산으로 땔감을 찾으러 갔다. 꼭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기자들에 의해서 ‘사단장 이하 장교들이 군용트럭을 이용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먹는다’로 왜곡되는 바람에 상부에서 나온 감찰반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물을 먹여서 납품한 소를 적발하여 업자를 혼내주었더니 이들이 상부에 투서를 하여 또 조사반이 내려왔다. 채명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오는 조사에 진절머리가 나면서 ‘4·19로 얻은 자유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하는 회의가 생겼다고 한다. 이런 채명신은 박정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육본의 장경순 준장, 청주 37사단장
金振暐(김진위) 준장과 함께 자주 만나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거 무슨 조치가 있어야지 이러다간 빨갱이한테 먹히는 게 아닌가 몰라.” 이런 걱정을 함께 나누던 박정희 소장은 1961년 새해에 들어서면서는 대구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직접 5사단을
찾아오곤 했다. 사단 비행장에서 만나 잠시 잡담을 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대로 앉아서 빨갱이들한테 당할 수는 없소. 그렇잖소, 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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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두 사람의 대화 중에는 ‘쿠데타’란 말이 섞이기 시작했다. 채명신 준장은 그러나 기름을 넣기 위해서 잠시 기착한 박정희가 순수한 우국충정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채명신은 박 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비행장에 나가니 황량한 활주로로 인해
더욱 춥게 느껴졌다. 박정희가 탄 L─19 경비행기가 착륙 선회를 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박정희를
비행장에 있는 비행대장실로 안내했다. 박정희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이젠 방법이 없습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북괴에 먹히고 맙니다. 일단 우리 군부가 주동이 돼 하루빨리 개혁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벌써 8기생들 중엔 많은 움직임이 있소. 청년 장교들은 거사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하는데 채 장군 생각은 어떻소.” “안 됩니다. 쿠데타를 논의하는 건 해방 이후 처음일 겁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한국군이 미군 지휘하에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자칫 했다간 미군과 충돌할 우려도 있습니다. 차라리 미국도 장면 정권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떻습니까.” “역시 장군이라 신중하오. 젊은 장교들이야 혈기만 왕성해 가지고….” “다음달부터는 우리 사회가 또 시끄러워질 겁니다. 4·19 발발 1주년에 즈음해선 과격한 데모가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조건이 성숙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겠군. 시기는 차후에 의논하도록 합시다.” 박정희의 포섭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시간을 두고 자주 만나 잡담을 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시국관을 확인한 다음 결정적인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Finlandia - Be still my soul
리베라소년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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