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勉 총리 서울대학교 시설을 이용하여 국토 건설대 요원들을 교육하는 책임자로서는 월간잡지 《思想界(사상계)》 사장 張俊河(장준하)가 나섰고
咸錫憲(함석헌), 朴鍾鴻(박종홍), 李萬甲(이만갑) 같은 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무질서한 민주주의 실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었다. 1960년 12월에 실시된 서울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투표율은 38%에 그쳤다. ‘이제부터는 경제 개발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1961년 고려대 학생 377명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 86%는 ‘서구 민주주의는 한국에 적용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약 40%는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고, 30%는 ‘한국과 서구 간의 사회, 문화적인 격차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들이 한국에서 아직은 실현될 수 없다’고 답했다. 이 격동기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장면 총리는 깔끔하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정치인보다는 성직자가 더 어울렸을 사람이란 평을 들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그린 박정희와는 정반대의 인생 항로를 탔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평양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장기빈)는 3남 3녀의 여섯 자식을 모두 외국으로 유학시켰다. 장면의 두 남동생 중 張勃(장발)은 서울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화가, 張剋(장극)은 세계적인 항공물리학자가 되었고, 둘째 누이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천주교 수녀원장이 된 사람이다(6·25 때 납북). 장면 부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震(진)은 서강대학 교수, 차남 建(건)은 미국에서 건축가로 활동, 3남 益(익)은 신부, 4남 純(순)은 보스턴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 5남 興(흥)은 프랑스 파리은행 근무, 장녀 義淑(의숙)은 미국 노트르담회 수녀이자 미술 교사, 차녀 明子(명자)는 작고했다. 이런 명문가 출신인 장면은 公(공)과 私(사)에 엄격하고 작은 일에 성실한 이였다. 일제 시절 동성상업학교 교장이던 장면은 滿員(만원) 전차를 탔다가 밀려 내리면서 전차표를 내지 못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꼭 전차표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장면 총리는 비서실장으로 金興漢(김흥한) 변호사를 기용했다. 그는 검찰총장을 지낸 金翼鎭(김익진)의 아들이자 서울 법대 학장을 지낸 金曾漢(김증한) 교수의 동생이었다. 김 실장도 깐깐하고 깔끔한 사람이었다. 비서실의 모든 직원에게 공용으로는 ‘國務總理(국무총리) 秘書官(비서관) 宋元英(송원영)’, 私用(사용)으로는 ‘宋元英’식으로 쓴 두 가지 명함을
갖고 다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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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주미 대사, 국무총리, 부통령, 내각제하의 총리로 순탄한 출세를 한 데는 천주교와 미국의 지원이 컸다. 1952년에 이미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장면이라고 확신하여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밀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에 반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미국과 장면의 도전을 꺾었다. 최근에 비밀이 해제된 미국 외교, 정보 문서는 장면이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대해 사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장면에 대해서 미국 정부 요인들은 속으로는 다소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1956년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이던 렘니처 장군은 장면 당시 부통령을 ‘허약한 보수적 기회주의자’라고 평하는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 1957년 9월에 허터 미 국무차관이 來韓(내한)하자 장면은 민주당의 정책에 관한 각서를 제출했다. 무력에 의한 통일 정책의 포기, 한국군 병력 삭감, 對日(대일)
강경 정책의 완화, 민간 부문 중시의 경제 정책 등 미국 측이 좋아할 만한 내용의 각서였다. 이 각서를 읽어본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은
“너무 미국 정책과 비슷하기 때문에 장면의 眞意(진의)를 의심하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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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부통령에 취임한 직후에는 다울링 주한 미국 대사에게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1957년 4월 장면은 다울링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중요한 요청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有故(유고)로 내가 대통령직을 계승할 경우 미국 측이 최장 24시간 나의 신변 보호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다. 이 요청을 국무부에 보고하면서 다울링 대사는 장면의 지도력에 회의를 나타낸다. ‘이승만의 사망과 같은 혼란 사태에선 대담하고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한데 특정 정치인을 위해서 미국이 개입하면 역효과를 부르기 쉬우므로 장면 부통령에 대한 피신처의 제공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면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도 미군병원에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한 전력이 있다. 그의 뇌리엔 ‘위기 때는
미국의 도움을 받는다’는 행동 절차가 입력되어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미국 CIA 서울지부장은 피어 드 실버. 그는 동서 냉전의 뒤안길을 누빈 공작 전문가였다. 1950년대 말 서울로 부임한 그는 장면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실버는 《서브로자》란 제목의 회고록에서 장면과의
첫 만남에 대해서 설명했다. <1959년 말 한국 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리셉션을 열었을 때 나는 연회장 한 구석에 참석자들에게 외면당한 채 홀로 서 있는 그를 보고 놀랐다. 나는 북적대는 사람들을 헤집고 그에게 다가가서 내 이름을 대고 최근 서울에 왔노라고 소개했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써 내가 CIA를 대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자 그는 미국 정부가 알아야 한다고 느끼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가까운 장래에 사적으로 만날 수 있겠느냐면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자주 접촉한다.
실버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의 집이나 우리 집, 또는 공식 행사장이나 반도호텔에 있는 그의 사무실
(편집자 注─장면은 총리로 취임한 이후 반도호텔 안에 집무실을 두었다)에서 만났다’고 했다. <내 아내 마릴린은 이 온화하고 기품 있는 사람을 무척 좋아했으며 우리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면 장 박사가 즐기는 미국 음식인 옥수수가루 머핀과 새콤달짝지근한 소스에 뼈를 추린 싱싱한 송어 냄비 요리를 잊지 않았다> 장면 총리는 1961년 5월16일 새벽 시내로 진입하는 혁명군의 발포소리를 듣자 반도호텔을 벗어나 제일 먼저 실버의 집을 찾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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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都暎의 구원 《5·16 혁명사》의 기초가 된 미공개 자료집 《革命實記(혁명실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11월9일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신당동 박 소장 집 응접실에 모여든 젊은 그들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마저 풍기는 여유가 보였다. 박 소장이 자기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혁명 계획을 확인한 9명의 장교들 앞에서 그들의 壯擧(장거)를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뜻을 밝히고 함께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재건에 있는 힘을 다하자고 다짐하는 훈시로 모임은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 “…오직 악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 애국애족하는 청년 장교들의 단결만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군 수사 기관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지만 모든 책임은 나 한 사람이 지겠으니
여러분은 맡은 부서별로 熱(열)과 誠(성)을 다해 주기 바란다.” 숨 가쁜 회합을 파하고 이어 박 소장의 요청으로 일행 10명은 깊어가는 가을밤이 아쉬운 듯 소공동 일식집 ‘남강’으로 향했다. 투명한 술잔을 들고 말없는 맹세를 되뇌며, 또한 내일을 모르는 푸른 생명을 술의 낭만 속에 파묻고 싶은 심경이었을지 모른다. 가을밤은 깊어만 갔다.
뒷그림자만 남기고 흩어져가는 그들의 이름은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김동환, 정문순, 신윤창, 우형룡 중령 등 육본의 중견 장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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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 장교들과 박정희가 처음으로 만나 혁명을 다짐했다는 이 모임은 그 뒤 여러 기록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데 이 모임의 實在(실재)는 의심스럽다. 우선 김종필 전 총리가 “그런 모임이 그때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적혀 있는 오치성도 “박 장군과 우리 장교들이 한 자리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했다. 5·16 후에 일부 문필가들이 거사 모의를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오치성은 이런 증언을 했다. “우리 아홉 명이 처음부터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혁명을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영관 장교들의 힘만으로는 혁명이 성사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한 뒤 누구를 지도자로 모실 것이냐로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거명된 인물이 박정희, 박병권, 그리고 韓信(한신) 장군이었습니다. 한신 장군은 그냥
한 번 언급되고 넘어갔고,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두 박 장군이었습니다. 김종필 중령이 박정희 장군을 추대하자고 말을 꺼냈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본능적으로 공산당을 싫어하는데 박정희 장군이 한때 좌익과 연루되어 옷을 벗었던 사실을 아는 우리로서는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종필 중령이 역시 아주 슬기롭게 대처하더군요. 그가 박정희 장군의 조카사위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김종필 중령이 박 장군을 추대하자고 고집을 피웠더라면 우리는 情實(정실)에 흐르는 처사라고 하여 김 중령을 불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 중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의견이 다르니 우선 시간을 갖고 박 장군에 대해서 알아본 다음에 다시 모이지.’
그 뒤 며칠간 우리는 박정희 장군에 대한 평판을 수집하러 다니면서 일종의 신원조회를 해보았습니다. 한결같이 ‘깨끗하고 능력 있는 분’이란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는 자연스럽게 혁명 지도자로 박정희 소장을 추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더군요. 그 뒤 박정희 장군과의 접촉은 김종필 중령에게 맡겼기 때문에 박 장군의 집에 우리가 몰려가서 회합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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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2월8일 육본 작전참모부장 박정희 소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2군 사령관은 장도영 중장. 장도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마침 부사령관이 논산 훈련소장으로 전출되어 공석이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 소장이 예편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1950년 6월 장도영 당시 육본 정보국장은 인민군이 서울로 밀고 들어왔는데도 전투정보과의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가 월북하지 않고 한강을 건너 국군과 합류한 것을 보고는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풀게 된다. 그는 상부에 건의하여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직시켰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장도영 장군은 그 뒤 두 번 박정희를 직속 부하로 쓴 적이 있었다. 선한 심성을 가진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가 예편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동정심이 발동하여 다시 한 번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그는 전시 근무를 거쳐 장성으로 승진했는데 확고한 증거도 없이 좌경 위험인물이라고 낙인을 찍어 예편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육본에 연락하여 마침 부사령관직이 공석이니 박 장군을 2군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도영보다 여섯 살이 위였다. 장도영은 부하이지만 박정희를 어렵게 대했다. 부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박정희에 대한 의혹을 풀어 주려고 장도영 중장은 애쓴다. 미국에 갔다가 미국 정부 요인으로부터 박정희를 예편시키라는 압력을 받고 돌아와서 장면 총리한테 전달한 바 있는 김영선 재무장관은 당시 장면 내각의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이 센 장관이었다. 장도영은 김영선 장관과 박정희를 식사 자리에서 만나도록 해 舊面(구면)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김영선은 박정희 정권 때는 駐日(주일) 대사로 중용되었다. 이 무렵 장도영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이러했다. <그는 원래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언행에는 禪的(선적) 가치관이 내재해 있었다. 과묵하고 매서운 눈으로 항상 앞을 직시하며, 똑바른 자세로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몸가짐은 얼핏 보면 일본의 무사를 연상케 했는데, 흠 잡을 데 없는 전형적 군인이었다. 그러나 평소 그 얼굴에는 수심이 끼어 있었고 욕구불만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간혹 웃을 때도 종종 냉소적인 표정을 띠었다. 그 냉소는 군에서 그를 오해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하는 데 대한 반발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 냉소는 부패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그가 보고 있던 우리 사회를 비판 또는 백안시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가 별로 없었다. 상하 관계상 자신을 존경하는 추종자는 있었겠지만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친구가 되고 상호 신뢰와 존경으로 협조하여 공동 목표를 달성한다는 개념은 많이 결여되었던 것 같다. 이런 점은 그가 흉금을 터놓고 자기 자신을 露呈(노정)하지 못하는 성격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보다는
그의 비범한 영웅심이 사회 생활에서 자기 소외를 가져온 것으로 나는 보았다>
Giuseppe Verdi
Nabucco
'Va Pensiero' Bass.Ivan Rebr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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