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발이 서다 1961년 1월12일 육군본부 본청 2층 정책회의실에서 개인 보안심사위원회가 열렸다. 군 방첩 기관에서 적색, 혹은 회색으로 분류해 온 군인들에 대한 사상적 성분 검토를 하여 ‘전역’, ‘無睾(무고)’ 판정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이 위원회는 甲班(갑반)과 乙班(을반)으로 나뉘어져 갑반은 중령 이상 장교들을 다루고, 을반은 그 이하를 취급했다. 갑반 위원회의 구성은 참모차장을 비롯한 작전, 군수, 관리참모부장, 육군방첩대장, 그리고 1, 2군 사령부의 보안 책임자였다. 1958년부터 방첩대의 전신인 특무부대에선 사상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들에게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전역시키는 案(안)을 상부에 건의해 왔다. 여기에 해당하는 장성급 인사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미군이 박정희를 내몰려고 하는 가운데 이 보안 부적격자 처리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날
비밀회의는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 좌익전력자로서 비밀 취급 인가를 받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예편시키기로 결의했다’고 이낙선은 5·16 직후에 쓴 手記(수기)에서 주장하였다.
만주 사관 학교 시절 후배와 함께
<이 결의가 즉각 탐지됨으로써 혁명 촉진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은 전화위복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이지만 5·16 혁명이 일어나자 이틀 후에 육본에서는 모 처장의 제의로 개인 보안 심사를 재심의하여 박 소장의 거세를 위한 정책적인 조치이던 엉터리 결의를 무효화하고 관계 서류를 감쪽같이 지워 버렸으니
허무한 세상이랄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광복 직후의 좌우익 對決期(대결기)에 좌익 모험을 한 것이 평생 꼬리표가 되어 그를 따라다녔다. 막판에는 이로부터 오는 강박관념이 그를 절박하게 혁명의 길로 몰아붙였다. 혁명이냐, 전역이냐의 시간싸움이기도 했다. 혁명 모의엔 박정희의 구국일념에 못지않게 이러한 개인적 이해관계도 걸려 있었다. 목숨을 던지는 일대 승부를 결단하는 데는 내면적인 요인에 못지않은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작동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오랜 친구이던
具常(구상)은 당시의 박정희를 <木瓜(목과)옹두리에도 사연이> 란 自傳詩(자전시)에서 이렇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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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路(귀로), 大邱(대구)서 만난 將軍(장군) 朴正熙(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내가 避靜(피정: 가톨릭 용어로 묵상의 뜻)의 餘韻(여운)으로 화제를 灑落(쇄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여 연발하며 鞭聲肅肅夜渡河曉見千兵擁大牙(편성숙숙야도하효견천병옹대아: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구절. 그 뜻은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大將旗(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이다)란 일본 詩吟(시음)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 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2군 부사령관은 1개 소대도 동원할 수 없는 자리였다. 박정희가 직책과 직권에 의존하여 쿠데타를 계획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는 것만으로 後患(후환)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개조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인맥을 구축한 것이지 직책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박정희에게는 2군 부사령관이란, 실권이 없는 대신 시간이 많은 자리가 오히려 혁명 모의에 적합했다. 2군 참모장은 만주군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주일 소장이었고 대구에 이웃한 영천의 정보학교장은 박정희가 군에서 추방되어 불우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도 그를 따랐던 육사 2기 동기인 한웅진 준장이었다. 이 두 사람은 4·19 이전의 이승만 타도 쿠데타 모의 때부터 가담하였다. 한웅진은 박정희와 함께 포섭
대상자들을 고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의 ‘인물 지식’에 놀랐다고 한다. “이 친구는 입이 가벼워. 이 친구는 ○○○ 사람이야. 이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어도 우리 편을 들 사람이니 굳이 포섭할 필요가 없어.”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장교들의 특성과 자질을 줄줄 꿰고 있더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好(호), 不好(불호)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박정희이지만 그는 예리한 인간 관찰을 해왔고 혁명 조직을 짜는 데 그 축적된 지식이 한몫을 했다. 공자는 ‘지식’을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이라고 요약했다. 박정희는 주변에 다양한 인물들을 모아서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일을 맡길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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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박종홍과 같은 철학자와 金正濂(김정렴) 같은 모범생과 이후락 같은 智謀人(지모인)과 김형욱과 같은 거친 인물을 상호 모순 없이 쓰고 부렸다. 그를 두고 ‘청탁을 함께 들이마신 사람, 그러나 자신의 혼을 오염시키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안목의 다양성과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나라를 뒤집고 새로 세우는 일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만 있어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전략과 정보에 밝은 박정희는 5·16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도 그 작전의 원리를 적용했다. 서울에 소재한 정권의 사령탑을 기습하여 그 기능을 일거에 마비시키는 집중의 원칙이 그것이었다. 장면 총리의 체포와 방송국 및 육군본부의 점령이 쿠데타 작전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또 이 쿠데타가 군부 내의 일파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되면 작전 지휘권을 쥔 미군에 의해서 손쉽게 진압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는 육군 참모총장이 지휘하는
全軍(전군)의 거사라는 간판을 걸어야 했다. 이 때문에 참모총장을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경록 총장은 박정희에게 비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조종할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장도영 2군 사령관을 총장으로 밀려고 했다. 1960년 말 박정희는 한웅진과 張坰淳(장경순·국회 부의장, 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을 방첩부대장과 9사단장으로 보내 비밀의 누설에 대비하고 수도권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데 쓰려고 인사 운동을 했으나 실패했다. 5·16의 결정적인 요인은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 관계였다. 나이는 여섯 살 아래인 직속상관 장도영은 박정희의 磁場(자장) 안에 들어 있었다. 장도영의 박정희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뒤섞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숙명적 관계는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선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리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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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극복해야 할 두 사람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총리 장면이었다. 두 張 씨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둘 다 정치적이었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회에선 좋은 관리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亂世(난세)에서 박정희와 같은 奸雄(간웅)을 만나면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박정희는 혁명 모의와 실행 과정에서 장도영을 이용하여 장면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썼다. 두 장 씨를 한꺼번에 보내 버리는 방법이었다.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나와 박정희의 다른 점’을 언급했는데 이는 장도영과 같은 인간형이 왜 박정희한테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나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청소년 학도시절에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공부한 일도 없고, 자율과 자제도 많이 부족했던 것이 나의 생활 모습이었다. 나는 규율과 단련이 결여되었다. 박정희 장군과 나는 상통하여 친밀해질 수 있는 요소도 있었지만 대조적인 요소가 더 많았다.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육군의 육성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나는 미군에서 本(본)을 떠서
우리에게 맞게 적응해 나가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일본 군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의 편제와 훈련 교육에 관한 논의가 나오면 일본 군대에 관한 예를 많이 들었다. 그는 또 술을 좋아했다. 술 마시고 울분을 토하고 그의 무인 기질과 영웅심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곤 했지만 나는 술이 몸에 맞지 않아 많이 못 하고 또 호언장담도 할 줄 모르는 성품이라 한 부대에서 같이 근무하면서도 허물없는 술좌석을 같이 해본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물욕적 부패를 혐오했고 청빈을 군인의 자랑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계를 가깝게 한 것은 그에 대한 나의 깊은 동정이었다> 박정희는 사람 좋은 이 장도영 장군을 바람막이로 이용한다. 박정희는 대구에서 자주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그는 청계천변에 있는 단골 요정 ‘봉우리’에서 김재춘 6관구 참모장을 불러냈다. 박정희는 교제 범위가 넓고 활달한 김재춘 대령에게는 마음 편하게 대했고 생계나 돈과 관련한 문제로 신세를 많이 졌다. ‘봉우리’에서 박정희는 술을 마시곤 항상 외상으로 달아 두었는데 이것을 갚는 일은 김 대령의 몫이었다. 이날 박정희는
김재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혁명을 하는 데는 장도영 장군을 참모총장으로 앉혀야 유리해. 참모장이 政界(정계)에 힘을 한번 써봐.” 김재춘이 듣기엔 장도영 장군도 이런 로비에 대해서 허락을 한 것 같았다. 김재춘은 박정희 2군 부사령관과 이주일 참모장이 함께 장도영 2군 사령관을 설득하여 참모총장 추대 공작을 하는 데 양해를 얻었다고 본 것이다. 김재춘은 서울 지구를 관할하는 6관구에서 참모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여 정치인들을 많이 알았다. 그는 우선 명동 메트로호텔 안에 있던 민주당의 실력자 吳緯永(오위영) 의원을 찾아갔다. 김재춘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군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장도영 장군이 책임감이 강하고 소신이 있습니다. 참모총장으로 밀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오위영 의원은 군내 사정엔 어두웠고 김재춘의 말을 믿었다. 그는 “장 장군을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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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월, 김재춘의 연락을 받은 장도영 2군 사령관은 대구에서 군용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전속 부관 김동수 소령을 데리고 왔다. 김재춘은 장도영만을 안내하여 오위영 의원을 찾아갔다. 장도영 장군은 모자를 벗더니 오위영에게 큰절을 했다. 오위영 의원은 점잖게 물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군 창설 당시부터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전번 4·19 혁명 때 우리 군은 중립을 잘 지켜 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군이 중심이 되어
이 난국을 잘 끌고나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군을 잘 결속시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참모총장 물망에 오르고 있는 모양인데 참모장이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이렇게 뵙게 된 것입니다.” 며칠 뒤 오위영 의원이 김재춘을 부르더니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아무래도 장면 총리는 여러 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것 같은데… 朴順天(박순천) 의원 알지요? 그분한테 한번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장 장군도 모시고 가서 선을 보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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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춘은 장도영을 모시고 서대문구에 있던 박순천 의원 집을 찾아갔다. 박순천 의원도 인상이 좋은 장도영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장면 총리에게 장도영을 총장으로 추천했을 것이라는 게 김재춘의 추측이다. 장면 총리가 장도영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데 있어서 오위영, 박순천 두 의원의 말을 어느 정도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재춘에 의한 ‘운동’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당시 국방장관은 현석호. 장면 1차 내각의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한 달도 못 되어 물러났던 현석호는 1961년 1월30일 민주당 내각의 제3차 개각 때 다시 국방장관으로 기용되었다. 현석호는 16인 사건 등 이른바 하극상 사건으로 어수선한 군내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선 최경록 총장을 바꾸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장면 총리한테 건의하니 장면 총리도 동의해 주었다. 현석호 장관은 우선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다. 이승만 정부 때부터 육군 참모총장의 인사에 대해선 미 8군 사령관과 사전에 협의를 해왔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불과 몇 달 전에 최경록 장군을 총장으로 임명했는데 왜 또 바꾸려고 하는가”하고 반대했다. 현석호 장관은 “현 시점에선 과단성 있는 총장이 있어야 겠다”면서 “나는 우리 군 장성들의 성분과 능력을 잘 모르니 사령관이 추천하는 대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매그루더의 태도가 누그러졌다고 한다. 현 장관은 김종오 연참 총장, 이한림 육사 교장, 장도영 2군 사령관을 거명했다. 매그루더는 대뜸 “제너럴 장이 어떨까요”라고 했다. 현석호 장관은 장도영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선뜻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장 장군은 자유당 때 이기붕, 박마리아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는 이기붕 씨의 양자라는 구설수가 많았다. 그러나 과거 일은 어쨌든 현재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는 매그루더의 추천에 즉각 동의하였다>(현석호 회고록 《한 삶의 고백》)
Song Of Peace(평화의 나팔소리) - 빌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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