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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칠정론(四端七情論)
1. 사단 칠정 논쟁의 시작
4단 7정론(四端七情論)이란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을 말하는데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 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 (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 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 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과(畿湖學派) 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2. 맹자의 사단에 대한 기본 입장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착하다’는 입장은 유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특히, 맹자는 인간의 공통적 경향성은 선을 지향하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소체(小體), 정신적인 면을 대체(大體)라 하고, 소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별 차이가 없으나 대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독특함 내지 우수성이 있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선을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시켜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性)은 이(理)로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지성(四端之性)이며, 맹자가 말하는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서,
四端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謝讓之心禮之端也
是非之心智之端也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부끄럽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 (羞惡之心), 양보하는 마음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에서는 이러한 것이 없고 본능적 ‘식색(食色)의 성(性)’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성리학자들도 인간과 동물은 다 같이 기〔陰陽, 五行〕로써 신체를 이루지만, 인간의 기와 다른 동물의 기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정욕(情欲)에 의한 불선(不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선악의 기로(岐路)에 서게 되어 악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욕구로 지향하는 감성적인 마음을 인심(人心)이라 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마음을 도심(道心)이라 한다.
3.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기본 입장
七情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퇴계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퇴계(退溪)는 인심을 7정(七情)으로 기(氣)의 발(發)이라 하였고, 도심을 사단(四端)으로 이(理)의 발이라 하였다.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고 천명에 귀의〔天人合一〕하기 위해 수양(修養)이 요구된다. 특히 퇴계는 참되려고 노력하는 인지도(人之道)를 이(理)에 대한 경(敬)에서, 율곡(栗谷)은 기질의 변화에 의한 입지(立志)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3. 기대승과의 4단7정 논쟁
1)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1527~1572)
조선시대의 문인·서예가.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나주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대사간(大司諫)까지 이르렀다. 사승(師承)한 바 없이 스스로 학문에 힘써 널리 고금(古今)에 통했으며 특히 이퇴계(李退溪)와 12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했던 당대의 유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잘 안다. 그는 奇大升(기대승)과 4단7정 논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논쟁이란 참여자 모두에게 논리적인 주장을 요구한다. 논리적이지 못하면 결국은 상대의 주장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봉 선생을 배향한 월봉서원 현판.
退溪(퇴계)는 일찍부터 朱子(주자) 이후 諸儒(제유)의 설을 折衷(절충)하여 陽明(양명) 王守仁(왕수인)과 象山(상산) 陸九淵(육구연)의 그릇된 학설을 논변 하였을 때, 高峯(고봉)과 왕복한 글이 가장 많기도 하였거니와, 가장 精深(정심)한 경지에 이르렀음으로 후학들은 우리나라 性理學(성리학)이 退(퇴) 高(고) 두 선생에 이르러 크게 완결되었고, 退溪(퇴계)의 수많은 門生(문생) 중에 高峯(고봉)이 가장 得意(득의)弟子(제자)라 일컬었던 것이다.
退溪(퇴계)는 일찍이 高峯(고봉)에게 英發(영발)의 氣(기)와 棟梁(동량)의 具(구)로 동방의 絶學(절학)을 천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또 朝臣(조신)가운데 누가 학문을 하고 있느냐.?라는 宣祖(선조)의 물음에 奇大升(기대승)이 능히 文字(문자)를 博覽(박람)하였고, 理學(이학)에 있어서도 뛰어난 識見(식견)을 지녔는 만큼 가히 通儒(통유)라 이를 수 있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 또 혹자가 퇴계에게 高峯(고봉)은 행하는 것이 知(지)에 미치지 못하는 듯싶습니다.?라고 하였을 때 退溪(퇴계)는 ?高峯(고봉)이 능히 正義(정의)로서 임금을 섬기어 그 進退(진퇴)가 모두 禮(예)에 알맞으니 어찌 行(행)이 知(지)에 못하였다 하겠는가.?하여 사람들의 의문을 풍러 주기도 하였다.
월봉서원 전경 高峯(고봉)역시 退溪(퇴계)에 대하여 실로 마음으로 감복하고, 退溪(퇴계)의 盛德(성덕)과 大業(대업)이 우리 동방의 先哲(선철)에 으뜸이 됨을 當世(당세)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學問的(학문적) 充積(충적) 發越(발월)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測量(측량)하기 어려움을 밝혔고, 또 스스로 선생의 권장을 받아 학뭄을 성취한 그 은덕을 부모 처지 보다 더하다고 말 하였다.
이에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을 중심으로 그 속에 담긴 그들의 논리를 살펴보자. 이 논쟁은 1559년부터 8년 동안 9통의 便紙(편지)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이황의 이웃에 살던 정지운이 <천명도설>을 만들어 퇴계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지운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 네 가지는 항상 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理(리)’에서 시작되고,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 내는 일곱 가지 감정은 알맞으면 선이지만 모자라거나 지나치면 악이기 때문에 ‘氣(기)’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황이 이 부분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4단은 理(리)가 움직여서 드러난 것이고 7정은 氣(기)가 움직여서 드러난 것이라고 고쳐주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뒤 기대승이 문제를 제기해 오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기대승은 4단과 7정 모두 감정이기 때문에 7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 뽑아내면 4단이 되며, 두 가지 모두 언제나 理(리)와 氣(기)가 함께 있는 것이므로 둘을 갈라보아서는 안되고, 4단이든 7정이든 감정의 움직임은 기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뿐 4단을 가리켜 움직일 수 없는 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 논리를 펴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 이황은 4단과 7정의 관계가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때 말이 간다고 할 수도 있고 사람이 간다고 할 수도 있으며, 정신 잃은 사람을 말이 제 멋대로 싣고 가는 경우와 정신이 맑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말을 모는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주장에 기대승은 달을 비유로 맞선다. 사람의 순수한 본성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지만 화를 내기도 하고 온화해지기도 하는 현실의 모습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우 하늘에 있는 달만 달이라고 하고 물속에 비친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이 합치점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상대의 논리가 지닌 정당성을 서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본 모습과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하려 한 두 사람의 노력이 더욱 빛나는 까닭은 분명한 입장과 논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退(퇴) 高(고) 辯論(변론)의 요점을 열거하면 다음 5항으로 나눌 수 있다.
1. 存在論(존재론) 存在論(존재론) 곧 實存(실존)에 관한 理論(이론)에 있어서 高峯(고봉)은 ?太極生兩儀?에 대하여 충실한 관점을 지닌 인설(因說), 곧 原始的(원시적)으로는 ?기생어리(氣生於理)?였으나 과정(過程)에 있어서는 이기(理氣)가 대대(對待)한다는 점을 固守(고수)하였음에 비하여, 퇴계(退溪)는 처음에는 인설(因說)과 대설(對說)을 겸섭(兼攝)하였던 것을 후일에 대관(對觀)으로 정착(定着)되었다. 그 대관(對觀)은 ?無極而太極?과, 始原(시원)의 氣(기)가 애당초부터 對待(대대)하였고, 과정에서도 理氣(이기)는 對待(대대)하였다는 관점을 지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高峯(고봉)은 朱子(주자)의 因說(인설)만을 固守(고수)하였음으로 退溪(퇴계)의 對觀(대관)의 境地(경지)에 대하여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인 듯싶다.
2. 人性論(인성론) 人性論(인성론)에 있어 高峯(고봉)은 理氣共發(이기공발)의 境地(경지)에는 이르렀으나 理發而氣隨之(이발이기수지)요, 氣發而理乘之(기발리승지)를 透徹(투철)히 辨別(변별)하는 경지에까지는 到達(도달)하지 못 하였던 것인 듯하다.
3. 一元(일원) 二元論(이원론) 高峯(고봉)은원시적으로 말 하면 一元的(일원적)인 理論(이론)을 지녔다고 볼 수도 없지 않으나, 과정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二元論(이원론)에 비하여 退溪(퇴계)는 始原(시원)과 過程(과정)을 一貫(일관)하여 理(이)과 氣(기)는 二而一(이이일)이며 一而二(일이이)의 觀點(관점)을 지났기 때문에 一元(일원) 二元(이원)을 명확히 구분해 볼 성질은 아니다. 그러나 그 ?道卽器(도즉기) 器卽道(기즉도)?라는 한 句語(구어)를 보아서도 그 歸趣(귀취)에는 二元論(이원론)이 아니다.
4. 形而上(형이상) 形而下說(형이하설) 理(이)를 形而上者(형이상자) 氣(기)를 形而下者(형이하자)라고만 한 한 이는 高峯(고봉) 뿐만 아니고, 伊川(이천) 程?(정이)나 栗谷(율곡) 李珥(이이)가 모두 그리하였다. 그러나 退溪(퇴계)의 경우는 勿論(물론) 理(이)는 形而上者(형이상자)요 氣(기)는 形而下者(형이하자)이기는 하지만 始原(시원)에 있어서는 氣(기)라 할 지라도 西洋哲學(서양철학)에서 이른바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槪念(개념)임에는 理(이)와 다름이 없다 하겟다. 다시 말하면 理(이)와 氣(기)가 근원에서는 서양철학의 용어를 빌리면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것이지만, 流行(유행)에서는 理(이)와 氣(기)가 모두 비형이상학적인 것으로 展開(전개)된다는 意義(의의)이다.
5. 唯心(유심) 唯物論(유물론) 이것은 退溪(퇴계) 뿐만 아니라 程(정) 朱(주) 내지 高峯(고봉) 栗谷(율곡)을 포함한 諸家(제가)의 說(설)이 모두 唯心(유심) 唯物(유물)과 槪念(개념) 經驗(경험)의 兩論(양론)을 綜合(종합)한 이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理(이)와 氣(기)가 過程(과정)에서는 恒時(항시) 서로 對待(대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凝結(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서도 또 하나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최근에 이르러 高峯(고봉)의 理氣說(이기설)을 가르켜 栗谷(율곡)과 함께 一元論(일원론)이니, 또는 氣學(기학)이니 하고 분분하고 있으나, 이는 退高往復書(퇴고왕복서)의 원전도 다 살피지 못한 채 斷案을 내린 느낌이 없지 낳다. 이는 비단 최근의 諸說이 그러 할 분만 아니라,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의 高峯神道碑(고봉신도비)와 玄谷(현곡) 朴世采(박세채)의 高峯行狀(고봉행장)에서 이미 그릇 전하여, 그릇 기록된 것은 高峯集(고봉집) ?양선생칠정왕복서? 끝에 附刊(부간)된 奇亨燮(기형섭)의 辯錄(변록)에서 먼저 喝破(갈파)되었으므로 이제 蛇尾(사미)를 달지 아니하기로 한다.
高峯(고봉)은 재주가 많은 분이며, 글씨를 잘 썼으며 그와 이행(李荇)·신광한(申光漢)·심수경(沈守慶)·심희수(沈喜壽) 등 5명이 쓴 것들에서 시격(詩格) 및 필법이 다 잘된 것을 추려 모아놓은 《좌해쌍절(左海雙絶)》이라는 것이 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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