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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태백산맥 전곡 듣기--국악명상

淸山에 2010. 9.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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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ttracks Album Review -

 

태백산맥 (太白山脈, 1994)

01.  산맥 (대금)
02.  떠도는 혼
03.  어긋난 세월 (피리,대금)
04.  깊은물 (대금)
05.  돌아눕는 산 (태평소, 피리)
06.  슬픈 골짜기 (타악기)
07.  상흔 (대북)
08.  징조

 

Credits 

기획 / 김수철
작곡, 편곡 / 김수철

대금 / 박용호
피리, 태평소 / 김성운
국악 타악기, 양악 타악기 / 배수연, 박영용 외..
오고북 / 20인 오고북 연주단
아프리카 타악기 / 박영용
공, 심벌, 꽹가리 / 배수연
바라 / 김수철
코러스 / 남성30인 합창단
신디사이저 / 김수철, 최태완
녹음 / 이용준
믹싱 / 임창덕
사진 / 구본창
디자인 / 조앤조

 

김수철의 영화음악은 서편제를 거쳐 1994년 태백산맥의 영화음악으로

음악적으로 완성된다.

"태백산맥" 영화 태백산맥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김수철 작곡의

다른 국악곡들보다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높은 앨범으로 김수철 본인도 아끼는 작품이다.

 

 앨범 전체에 실험성이 높고, 민족의 비극에 대한 묘사를 장엄하고 비장하게 표출하고 있다. 대금곡, 피리, 태평소, 오고북, 타악기, 대북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곡마다 곡의 변주가

예측을 불허하는 소리로 작곡되어 있다.

 

이 음 반에는 태평소와 피리가 어우러진 메인 테마 '돌아눕는 산', 대금연주곡으로 영화의 첫 장면에 삽입된 '산맥', 오보에 연주가 잔잔하게 펼쳐지는 '떠도는 혼', 전통 타악기와

서양의 타악기가 조화를 이룬 '슬픈 골짜기' 등 8곡 전곡이 수록되어 있다.

 

태백산맥 영화음악은 94년 제33회 대종상 음악상과 제16회 청룡상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영화 태백산맥은 영화보다 음악이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후일 넘버3로 스타덤에 오른 송능한 감독이 시나리오를 맡은 이 영화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그 어마어마하게 장대한 서사구조에 미리부터 질식한 듯 하다.

 

원작 소설을 읽어본 사람도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기 힘든 판에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에겐 2시간이 넘는 런닝 타임이 고역이었을 듯. 당연히 영화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처절하게 망가졌고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덕분에 건진 몇몇 인상적인 풍경과

장면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했다.

(물론 정경순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우리나라에서 대종상만큼 권위없는 상도 또 있으랴싶지만 어쨌든 이 사운드트랙은

청룡상과 대종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했던 그 해에 나왔던 사운드트랙 중 최고로

인정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 밖에 없는 게 김수철은 십여년 전부터 그가 일관되게 탐구해온 한국과 서양의

음악의 크로스오버를 가장 적절하게 살려서 표현했다.

 

남과 북이 충돌하던 그 시기가 바로 서양의 것과 우리의 것이 충돌하던 시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공교롭게도 김수철의 오리지널 스코어들은 그 사이의 합의점을

놀랍도록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표현해낸 스케일은 태백산맥의 그것과 맞먹는 장쾌하고도 웅장한,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기운이 충분히 느껴지는 것이다.

 

 

태백산맥 (太白山脈, 1994)

원작 / 조정래

감독 / 임권택

각본 / 송능한

출연 / 안성기(김범우), 김명곤(염상진), 김갑수(염상구), 오정해(소화),

        신현준(정하섭), 최동준(심재모), 정경순(죽산댁), 방은진(외서댁), 이호재(전원장)

음악 / 김수철

촬영 / 정일성

정성일 (영화평론가, 한겨레신문 1994. 09. 16.)

 

역사 앞에 선 우리는 아무도 면죄부를 받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조국이 둘로 나뉘어 두 개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을 하나로 읽기 위하여 해방 공간의 시간으로 이끄는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로 옮겨 그것을 하나로 보려는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은 통일에

대한 성찰이며 근심이다

 

영화 태백산맥은 소설과는 달리 19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으로

벌교가 보성군 군당에 접수되었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과 함께 산으로 다시

쫓겨 올라가는 것으로 끝난다.

 

벌교의 낮은 우익들의 빨갱이 사냥으로 비명으로 가득 차고, 벌교의 밤은 좌익들의 반동

색출로 피로 물든다.

증오와 구호와 약탈과 살인이 무시무시하리만큼 일상생활이 되어버렸던 시대가

2시간 50분 내내 화면을 메운다.

그것은 우리들의 부모의 영혼과 만나는 목이 메이는 시간이며 피와 살이 되어버린

우리 근대사의 첫 장을 여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세 명의 주인공은 다른 입장으로 갈등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이며, 임건택이 자신의 시선으로 역사에

개입하는 방법이다. 민족주의자 김범우 (안성기)는 회색빛 지식인으로 자기의 역사가

지닌 모순을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망설인다.

 

좌익 염상진(김명곤)은 신념에 따라 산에 들어가 투쟁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벌교에

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망연자실해진다.

우익 염상구(김갑수)는 형에 대한 미움으로 그저 맹목적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선다.

 

 

임권택은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에게는 좌익도 우익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그가 묻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다.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제사상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에게 그렇게 펄럭였던 구호와 굳은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었냐고 ...

그리고 그 자신이 개벽 이후 꾸준히 추구해 온 인본주의의 목소리로 낮고 침울하지만

단호하게 다시 묻는다. 왜 서로 용서(!)할 수 없었냐고...

 

그러나 그 자신도 결코 화해할 수 없음을 안다.

김범우가 벌교의 근본 모순은 땅이며 그것이 풀리지 않는 한 싸움은 계속될 것 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막으로 숨가쁘게 친일 지주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해방정부가

패배했는지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더럽혀졌고, 인본주의자는 고통스러운 시간의 영겁회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그저 첫 번째 발걸음이 옮겨진 것뿐이다.

아버지 세대로서의 태백산맥에 이어 그 자식들은 하나의 역사가 될 때까지 그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역사이며, 또한 역사 속의 예술의 몫이기 때문이다.

 

 

조정래와 <태백산맥>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조정래는 대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1983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89년에 완간하였다. 이 작품은 분단극복의 의미를 적극화하기 위해서 민족 사회의 내재적인 모순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의 이념적 혼란기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사회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구조적 모순을 규명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데올로기 문제에 내재해 있는 역사적인 모순의 극복 없이는 분단 극복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이 작품은 분단 극복을 위한

문학적 성과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10권으로 완간된 것은 1989년 11월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책은 물경 500만부가 팔려나갔다.

평론가와 작가, 출판인들에 의해 해방 이후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으며,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 1위를 기록했는가 하면, 서울대 신입생들이 뽑은 '가장 읽고 싶은 책'에서도

1위에 선정되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태백산맥은 최상의 문학적 평가와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이 그런 '신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태백산맥은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서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53년의 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작가의 고향인 전남 벌교를 무대로 삼은 이 소설은 농민 출신 빨치산들을 전면에

내세워 이들의 문학적 복권을 꾀한다.

좌익 지식인 염상진과 농민 전사 하대치로 대표되는 이들은 작가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

역사의 주체로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총체성을 목표로 삼는 대하소설로서 태백산맥이 이들에게만 주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염상진의 동생인 우익 깡패 염상구, 사려깊은 중도파에서 좌익으로 선회하는 김범우와

이학송, 부패한 우익 대표 최익승과 최익달, 양심적인 국군 장교 심재모,

 

그리고 무당 소화와 외서댁, 들몰댁 같은 여성들....

좌에서 우까지, 권력 상층부에서 기층 민중까지, 지주와 자본가에서 지식인과 농민까지,

다양한 신분과 성향의 인물이 나름의 몫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우선적인 관심은 어디까지나 염상진과 하대치 같은 빨치산들에게로

향해 있다.

그런 '편애'의 근거는 태백산맥 제4권에 붙인 '작가의 말'의 다음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는 '힘있는 자들의 기록'이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분단된 삶, 통일을 찾아가야 하는 우리의 민족적 삶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역사의 그런 허위가 파괴되고, 역사가 '자각하는 민중의 소유'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민족의 '허리잇기'인 통일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 중간 과정에 문학이 해내야 할 몫이 있다고 확신하며, 나는 소설로써 그 일을

이루어보려고 욕심부리는 것이다.

 

인용문에서도 짐작되지만, 작가는 태백산맥으로써 무엇보다도 역사의 재해석을

의도하였다.

역사를, 힘있는 자들이 아닌 자각하는 민중의 소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간의 우리 역사가 힘있는 소수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는 인식을 전제로

삼고 있다. 역사학 쪽의 용어로 같은 얘기를 다시 하자면,

친일 및 분단 고착 세력이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민중 세력을 억눌러온 것이 해방 이후

우리 역사였다는 것이다.

작가는 해방 공간을 무대로, 민족 분열과 민중의 착취를 꾀하는 세력에 맞서

'자각하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염상진과 하대치 같은 빨치산을 내세운 것이다.

 

빨치산에 대한 이런 적극적인 해석은, 소설은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이후 반세기 가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반공 이데올로기에

따르자면 빨치산은 북의 김일성 정권만큼이나 금기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념의 금기에 굴하지 않고, 역사의 사실을 발굴하고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를 위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

 

작가는 1991년에 쓴 태백산맥 창작보고서'라는 글에서 처음 증언을 수집하던 무렵의

어려움을 사례를 곁들여 털어놓고 있다.

태백산맥이 한창 쓰여지고 있을 때 6월 항쟁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이태의 남부군을 필두로 한 빨치산 수기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조정래가 소설에서 보여준 빨치산의 실상과 의미는 당사자들의 수기와

진보 사학계의 연구를 앞서는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특히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태백산맥에 빠져든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이런 새로운 역사 해석을 산 때문이었다.

흔히 80년대 '의식화의 주범'으로 리영희나 송건호, 백낙청 같은 이들을 드는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야말로 이들의 그 어떤 책에 못지 않은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녔다.

 

검찰과 몇몇 우익 단체들이 이 소설의 이적성을 지적하며 국가보안법 적용 압박을

계속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정황이 고려가 되었을 터였다.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고 있는 법률적 협박이 있기 전부터 작가는 끔찍하고도 집요한

전화 협박에 시달려 오고 있었다.

작가 역시 태백산맥이 지닌 이런 이념적 폭발력을 예상했던 듯, 가족들에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유언까지 해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백산맥은 이념 서적이 아니라 사실주의 규율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이 역사를 새롭게 보고자 할 때에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둔 문학적 형상화로서 그러한 것이다.

 

작가는 인물과 구성, 문체 등을 통해 '억눌린 자들의 복권'이라는 소설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소설로서 태백산맥의 성공을 가능케 한 요인이라면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라도 방언의 적절한 사용이다.

 

/ 그 양귀신덜이 들이닥침스로 시상 판세가 워찌 돌아가등가?

코가 석 자나 늘어졌든 지주덜이 새 기운 얻어 되살아나고, 순사질 해묵은 죄

지가 먼첨 알고 뽕빠지게 도망질혔든 눔덜이 도로 그 자리 차고 앉고, 그 공평허게

일 잘허든 인민위원회럴 공산당 못자리판이라고 몰아때레 사람덜 잡아딜이고,

자네덜도 다 아는 이약 새 날아가는 소리로 일일이 되짚을 것도 없이,

지대로 잘 돼가는 밥솥얼 엎어뿐 것이 누구냐 그것이여. 보나마나 그 양코배기덜

아니었드라고? /

 

태백산맥의 성공은 작가로 하여금 또 다른 대하소설 아리랑한강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창작보고서에 따르면, 작가는 본래 태백산맥에서

해방에서 1980년 광주학살까지를 다루려 했었다.

 

그러나, 해방공간과 전쟁기의 얘기가 예상외로 길어지면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태백산맥의 전사(前史)로서 일제 강점기를 다룬 작품으로 아리랑을 쓰고,

전쟁 이후 현대까지를 한강이라는 또 다른 대하소설로 쓰게 된 것이다.

 

 

작가는 1989년 태백산맥을 완간한 다음, 1년여의 취재와 자료 수집을 거쳐

1990년 12월 아리랑의 집필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4년 반 뒤인 1995년 여름, 모두 12권으로 완간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과 저항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리고 있다.

 

태백산맥이 벌교를 중심으로 한 한정공간5년 미만 시간대

배경으로 삼고 있다면, 아리랑1890년대에서 해방까지의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전북 김제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 일본과 하와이까지

대단히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삼고 있다.

 

당연히, 소설의 형식과 밀도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태백산맥이 집중의 원리를 택했다면, 아리랑을 지배한 것은 확산의 원리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리랑의 속도감 있는 이야기 진행에 더 점수를 주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태백산맥의 밀도와 깊이가 아리랑을 앞선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한강을 통해 작가는 195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의 30여 년을 단행본 10권 분량에 담는다는 계획이다.

원래 계획했던 태백산맥의 뒷부분이 별도의 대하소설로 독립하는 셈인데,

시간 및 공간적 배경의 광활함에서는 태백산맥보다는 아리랑에 가까운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강이 그려나갈 시기는 앞서 아리랑태백산맥이 포괄했던 일제 강점기나 해방

및 전쟁기에 못지 않은 격동기라 할 수 있다.

 

4.19와 5.16에 이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등장, 그가 지휘한 수출 드라이브에 따른

경제 발전과 그 그늘에서 땀과 피를 흘린 노동자들의 고초,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 군부 정권의 독재와 그에 맞선 민주화 투쟁, 광주학살과 6월 항쟁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잇게 된다.

 

이문열의 변경이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를 다루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현대사가 이만한 규모의 대하소설로 형상화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200자 원고지로 1만5천장을 상회하는 규모의 대하소설을 한두 편도 아니고 세 편씩이나 쓴다는 것은 가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한 여행과 자료 수집을 위한 독서, 그리고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이런저런

대소사에 빼앗기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하루 평균 200자 원고지 10장씩을 써야

4~5년에 한 편씩을 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의 생활은 거의 토굴 속의 수도승과도 같다.

"먹고 쓰고 자고, 또 다시 먹고 쓰고 자고" 하는 지극히 단조로운 이 기간의 생활을 두고

그는 스스로 "글감옥에 갇혔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태백산맥아리랑을 읽고 감명 받은 수백만 독자는 작가의 이런 초인적인 노력과

헌신에 감사해야 마땅하리라.

 

마지막으로,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에 대한 이야기. 벌교는 전남 보성군에 속한

일개 읍이다. 물론, 일찍이 일제시대부터 간척지가 개발되고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온

바닷물을 이용해 조운이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아담한 소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통해 이 마을은 일약 굴지의 관광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이 책에서 맛본 감흥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이 궁벽진 마을을

다투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 살았던 벌교읍의 모습을 소설 속에 원형 그대로 되살려 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무당 소화의 집과 김범우의 집, 염상구가 활약하던 철교와 염상진의 야산대가

한동안 해방구를 이루었던 율어 등 소설 무대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어떤가. 전라선 열차를 타고 벌교역에 내리면 역 광장 건너편으로

벋어나간 길가에는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의 단란주점이 있다.

 

어느 해 작가와 동행해 들어간 그 집에서 작가 왈, "이런 건 작가한테 저작권을 지불해야 하는 거 아냐?"

 

 

기억을 두레박질하는 사람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김인정 (소설가, 전라도닷컴 2005년 6월)

 

벌교읍 봉림리, 야트막한 산언덕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집 하나가 있다.

담장이 높고 유난히 길어 한눈에도 행세깨나 했던 양반이 살았을법한 집,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김범우의 집이다.

 

몇 번쯤 무너져 내렸는지 높다란 담장은 시멘트로 메운 흔적들이 군데군데.

그래도 옛 집의 위용은 여전하다.

금방이라도 생각 많은 얼굴의 김범우가 고개를 숙이며 담장 아래로 걸어올 것 같다.

 

김범우의 집으로 불리는 이 집의 주인은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아니다.

사십여 년 전 이사온 임씨네 노부부이다.

 

/ 그 뭐냐, 태백산! 태백산인가 그 책을 보고는, 대학생들도 오고, 일본 사람도 오고,

 미국사람도 오고, 껌은 사람 빼놓고는 다 오요. 차말로. 아니, 여그 뭣을 보러 오까?

암만 생각해도 볼 것이 한나 없는디 /

 

한나 볼 것도 없는 집을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저 신기할 뿐이라는

김이순(81)할머니. 하지만 볼 것 없는 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까닭을 김할머니도

알고는 있다. 소설책에 이 집에 나왔고, 그 이야기를 쫓아서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는 것을.

 

 

/ 조정래 그 양반이 지대로 썼어라우 /

 

김범우의 집을 빠져나와 홍교다리를 건넌다.

홍교 옆 슈퍼 앞에 아저씨들이 너댓분. 멀리서 보니 영낙 중년 아저씨들인데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칠순을 훌쩍 넘긴 노인들이다.

한손에 낫을 들고 한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커피를 든 칠순의 아저씨들이 들려주는

벌교의 옛 기억들은 대부분 여순사건 무렵의 이야기들이다. 

 

/ 14연대 반란 때는 쩌그 소화다리에서 사람께나 죽어나갔소. 그 다리가 난간이 없거든. 긍께 졸졸이 세와놓고 들들들 총질을 해불믄 다리 밑으로 시체가 흑허니 떨어져. 아이고 차말로... /

 

열두 살 무렵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치가 떨리는 듯 눈을 감는 예순 다섯의 아저씨 한 분.
/ 가난한 사람들은 해방 전이나 똑같애. 아니 더 죽겄어.

긍께 속으로 어째야 살꼬, 궁리들이 많앴겄제. 주민들도 14연대를 속으로 응원헌 사람이

많앴어. 지주들 보기 싫응께. 근디 반란군 잡는다고 주민들을 더 잡았어.

그때나 시방이나 시상은 똑같애라우. 잘산 것들은 요리조리 잘 살고 없는 사람만,

못산 사람만 당허제 .. /

 

쉰 목소리로 가난한 이들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칠순의 상고머리 아저씨.
/ 우리 형은 괜히 지레 겁묵고 산으로 내빼갖고 아, 경찰들이 형 어디다 감찼냐고

울 엄니랑 나랑 동생이랑 삼년을 쫓아댕김서 뚜들어팼어라우.

아조 떡이 되게 사람을 패고 죽인디 못살것습디다. /  


아직도 열이 받치는 듯 얼굴이 붉어지는 일흔 넷의 키 작은 아저씨.
그렇다면 그런 기억들을 소설 태백산맥이 잘 담고 있느냐는 질문에 소설을 직접 읽었다는 한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 조정래 그 양반이 지대로 썼어라우. 그 이야기 쓸라고 옛날 사람들 다 쫓아댕김서

만나고 그랬어.

그런 이야기 무서와서 누가 말도 못 헐 때제. /  

 

 

벌교를 넘어 전 국민의 기억의 재생장치 만들어

 

벌교에 와서 사람들의 기억과 마주하고 나니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벌교의 기억을 퍼올리는 두레박질이었지 싶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작가 조정래가 벌교 땅에서 산 것은 고작 두 해,

그것도 열 두세 살의 어린 소년 시절이었다.

어떻게 소년의 눈에 그많은 것들이 보였던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 기억을

역사로 되살려내고, 벌교를 넘어 전 국민의 기억의 재생장치, 역사의 플레이어

만들어낸 것일까.   

 

/ 벌교는 솔직히 따로 취재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집이며 골목들, 방죽이며 다리, 벌교천, 다 머릿속에 있었지.

김범우네 집으로 나오는 그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정도 많았나, 내 또래가 하나 살고 있었어. 언젠가 그 집에 갔는데 누룽지에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서 주더라고.

가슴이 쿵 내려앉을만큼 충격을 받았어.

 

눌려먹을 밥이 어딨으며 설탕이 어딨어?

그 시절에. 근데 그 집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그 간식을 집어먹더라고.

그 집 간식 하나가 어린 내 가슴에 큰 돌처럼 내려앉았지.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남을 부리는 사람, 남의 밑에서 죽도록 일하는 사람,

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다르게 살게 만들까 고민스러웠지. /

 

조숙했을까. 벌교 북 국민학교 4학년 무렵의 두 해, 이후로는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동국대에 들어갔으니 전라도 땅,

특히 벌교와의 인연은 소년시절의 그 두 해가 전부인 셈이다.

 

그런데도 작가의 머릿속에는 벌교가 거울처럼 환하게 보였다고 했다.

그것도 그 기억의 파편마다에 뚜렷한 음영까지 새겨두고 있었다. 왜 가난한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배가 고프며, 왜 슬픈가.

 

/ 말도 마찬가지예요. 기억을 떠올리면 절로 나오는 거죠. 취재해서 썼다면 그렇게 써지질 않겠지. 전라도 말에 너무 고마울 때 쓰는 아즘차니 아즘차니 아즘차니라는

말이 있어요.

울 어머니가 아흔 두 살이신데 가끔씩 띄엄띄엄 태백산맥을 읽으셨던 모양이라,

그러더니 아가, 니가 어찌 그 말까지 다 안다냐 와! 허시는 거에요.

그런 말들을 공부해서 나오겠습니까? 그냥 내 저 기억의 깊은 곳에서 저절로

품어져나와요. /

 

 

기억 안하려고 하는 역사 취재 힘들어

 

탁월한 기억력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작업은 다른 기억들을 모으는 작업이었다.

역사학자보다 더 많은 자료를 구하고, 일일이 경험자들을 찾아다녔다.


/ 그때가 5공 정권, 전두환 정권 때인데 빨치산 경력이 있는 분들이 자신의 과거를 쉽게

털어놓으려고 하겠어요? 기억이 안난다, 모르것다.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말을 안해요.

그렇게 기억 안하려고 하는 역사를 취재하는 것이 참 힘들었죠. /


그렇다면 일일이 기억을 더듬어 사람의 이야기로 되살리는 이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80년 5.18때 진압이 된 며칠 뒤에 광주에 왔었지요.

거리가 온통 죽은 거리 같앴어요. 사람들 표정이 다 똑같아 보이더군요.

도청앞 Y건물에 갔는데 총알이 온 벽에 박혀 있는 거에요. 그 총알을 삼백 오십 개까지

세다가 포기를 해버렸지요. 계단으로는 피가 쫙 흘려내려있더라구요.

아니 저 끔찍한 걸 왜 안 닦을까 했는데 하이타이로 닦아도 안진다는 겁니다.

 

/ 아, 그때 깨달았어요. 선죽교의 전설은 전설이 아니라 실화였다는 사실을,

피는 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내가 봤던 여순사건도 이렇게 처참하진 않았어요.

광주처럼 그렇게 잔인하고 참혹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작가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기록해야 하는가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 통렬함이 태백산맥을 쓰게 했지요. /

 

그 후 25년 동안, 작가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쓰고 아리랑을 쓰고 한강을 썼다.

하루 열여섯 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을 자처하며 기억의 복원작업에 매달렸다.

그 와중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 고발을 당했고, 반공단체의 테러 협박에 시달렸다. 두 차례나 유서를 써 두었을만큼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태백산맥 대한 국가보안법 무혐의 처리 11년만에 통보받아

 

/ 그 사람들한테도 고통스런 기억이 있었겠지요.

가족을 잃었거나 피해를 받았거나, 하지만 한쪽의 역사만을 이야기해서는 우리가

겪어온 비극이 풀립니까?

언제까지 빨갱이는 악마고 도깨비라고 가르치면서 항일운동을 왜곡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세력에 침묵하고 동조해야합니까? /

 

기억의 정면에 서서,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버텨온 세월동안

작가의 머리는 숱이 적어지고 흰눈이 앉았다.

그렇게 세월을 견디고야 작가는 검찰로부터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국가보안법 무혐의

처리를 통보받았다.

고소고발 11년만의 일이었다. 고발자 반공단체들은 검찰의 무혐의처리에 곧바로

항소를 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자택에서 작가는 무혐의 통지서와 유서 등 상처의 기억들을 챙기고

있었다.

벌교에 세워질 태백산맥 문학관에 자료로 두겠다고 했다.

지나온 기억들이 만만치 않았는데, 작가의 기억에 어떤 일들이 또 각인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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