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 그리움(바이올린)
♥ 그리움 ♥
작 사 : 고진숙
작 곡 : 조두남
기약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산 위에 흰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타네.
귀뜨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생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이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가네.
우리나라 가곡중에는 그리움을 읊은 것이 꽤 많이 있음을 느낍니다.
약 200여곡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빼앗긴 나라에서의 한맺힌 그리움과, 남북전쟁으로 인한 상처입은 그리움,
두고온 산천과 고향에대한 향수, 그리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고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던 사람들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이 한처럼 맺혀있어, 이러한 애상조의 연가가 탄생
될 수 밖에 없음을 우리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움을 표현한 수많은 가곡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애창되고 있는 가곡이
조두남 작곡의 <그리움>인데, 그는 1912년 평양의 개화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 출신의 신부 조지프 캐논스에게 서양 음악과 작곡을 배웠으며, 11세이던 1923년에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해 작곡가로 데뷔했을 만큼 자질을 보였습니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서울로 귀국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후에는 경남 마산에 정착하여 작곡 활동보다는 주로 피아노 교육에 매진했으며, 1962년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의 초대 지부장에 오르는 등 마산 지역의
예술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대표곡으로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있으며, 이 노래는 조두남이 만주에 머물 때 작곡한 곡으로 민족적 기상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널리 불렸으나, 원 제목은 <룡정의 노래〉이며 내용도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서정적이나 후기에는 민족적 정서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했으며, 1962년 경상남도 문화상, 1976년 눌원문화상을 받았습니다.
6.25때 경남 마산으로 피난와서 제2의 고향으로 삼아 30년이상 그곳에서 부인과 함께 살다가
1984년 11월 8일 72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으며, 바로 문화훈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생전시 그의 말에 의하면 가곡 <그리움>은 조두남 자신이 20대에 직접 작곡하여, 젊음이 약동하고 사랑의 감정이 용광로와 같은 때 그 누군가 이상형의 여인을 그리며, 노을진 저녁이나 외로움이 엄습해 오는 밤이면 조용히 불렀다고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625동란 3년 만에 휴전이 되자, 시인이면서 마산고교의 음악 교사였던
<고진숙>씨와 <조두남>씨에 의해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공감대가 서로 깊이 오버랩 되면서
개사된 가곡입니다.
<그리움>과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이 마산에서 처음 살던 집은 원래는 오동동 39번지 였는데 지금은 동성동 41번지로 행정구획이 개편 됨에 따라 동네 이름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오기와 고집이센 한 작곡가가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친구들이
줄을 이으며 사랑방 구실을 했던 그 집이, 그가 타계한 직후, 식당으로 변해 있어서, 문화의 무지를 실감하는 비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오동동은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바로 그 <오동동>입니다.
'오동추야 달이밝아 오동동이요' 젓가락 장단에 구성진 가락이 어울리는 대폿집 거리였지만, 1984년까지 그집엔 <피아노 집>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그 집은 피난살이에서 오갈데 없는 문인, 음악가등 예술인들이 모여들어 날마다 얘기꽃을 피우며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휴게실 이었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들의 연락처 였습니다. 그리고 <조두남>은 항상 그들을 환영했고, 부인 역시 남편의 뜻을 따랐기에 그는 ‘마산 예술인의 대부’ 란 칭호를 들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곡가 <조두남>은 평양의 개화사상에 젖은 갑부의 3대 독자로서 귀하게 자랐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부와, 미국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를 둔 가문에서 성장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도산, 안창호>선생의 독립을 돕던 중 투옥되면서 병을 얻어 <조두남>이 18살 되던 1930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조두남은 부친을 여읜후 삶의 의욕을 잃고, 21살되던 1933년, 멀고먼 만주로 유랑을
떠났습니다.
만주에 도착하여, 싸구려 여관에 머무르던 어느날 <선구자의 시인 : 윤해영>을 만나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되었을 때, <조두남>이 작곡가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독립군가
<룡정의 노래>의 시를 꺼내어 주며 작곡을 부탁 하였는데, 조두남은 이 <룡정의 노래>를 밤새워 완성 하였고, 노래의 제목을 <선구자>로 바꾸고 악보를 들고 그가 돌아 오기를 기다렸으나, 며칠 후 다시 오겠다던 그는 애처롭게도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한편 <그리움>의 작사자인 고진숙씨는, 생전에 조두남과 매우 친했던 마산 고교의
음악교사며, 시인 이었는데, 1958년 어느날, 평소 친했던 조두남은 우연히 서로가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로 실의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조두남은 그 자리에서 멜로디 악보만 그려 그에게
주면서, 자신이 지은 가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가사를 새로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답니다.
그때 시인 <고진숙>은 6.25때 헤어진 사람
중에서 얼굴이 대리석처럼 희고 고왔던 여대생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부산 피난시절, 바로 옆집에 혼자 월남하여 살던 미모의 여대생이었다고 하는데,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중노동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문학도여서, 휴전 이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취향이 같은 두 사람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남매처럼 가깝게 의지하며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릿다운 처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힘없이 부르는 ‘오빠’라는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 강력한 애정을 느꼈고, 유난히도 얼굴이 대리석처럼 하얀 그녀가 홀로 피난내려와서 가족을 기다리며, 살아 남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너무도 애처로와, 끊임없는 동정심과, 이성에
대한 호감, 그리고 문학을 즐기는 같은 정서로 하여금 두 삶의 인연은 사랑으로 발전 하고 있었고, 이제 두 사람은 평생해로를 위한 결혼 밖엔 남은 것이 없었을 즈음, 그 여대생은 안타깝게도 과로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희고 고왔던 서울처녀, 글을 읽고 문학을 논하던 아릿따운 그녀는 차디찬 땅속에 묻혔을
지라도,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만큼은 시인의 가슴속에 깊이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약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 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길 달려 가네'
가곡<그리움>의 가사는 피어보지도 못한 채, 바로 꽃봉오리로 숨져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것인데, 조두남은 그의 시를 보고 매우 만족하였다고 전합니다.
개사후 애창되기 시작한 <그리움>은 5.16혁명후 교과서에 실렸고, 성악가 김자경씨가
레코딩한후,
바리톤 김성길씨 등이 불러 유명한 가곡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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