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동선곡의 고향, 망향, 그리워... 세곡에 얽힌 사연! 오늘은 '망향'입니다.>
<채동선곡/박화목시/테너 신인철>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 일레라
가곡 “고향” 그리고 작곡가 채동선( 1901- 1953)
작곡가, 채동선 선생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아버지 채중현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은 현재 벌교
남국민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절에 채동선은 학업에 열중하면서, 뜻이 맞는 친우들과 함께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고취시켜 나갔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절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슈만이 파가니니의 독주회를 듣고 법학도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결심하듯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채동선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급기야,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1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장안에 바이올린 소지자가 4,5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정진은 유보된 상태였다. 한편, 경기고보 시절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채동선은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
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
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24년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일본 교향악계의 개척자인 일본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일본 각지에 연주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채동선은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훗날 지금의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채동선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
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 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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