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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 맞서 나라 지킨 백선엽 장군

淸山에 2010. 1. 2. 07:51
 

 

 
 

 

 

북한군에 맞서 나라 지킨 백선엽 장군 [중앙일보]

 

“6·25는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는 계기였고
그로 인해 한국은 자유·민주 지켜내고 산업화 성공”
신년 기획 - 세계의 한복판으로 [2] 6·25전쟁 60년 -상처를 딛고 평화의 시대로

국군 1사단장과 1군단장,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며 6·25전쟁을 치렀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6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북한이 남침하면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야욕을 막아냈다. 여러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군인이 있다. 올해 90세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다.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에는 그의 이름이 반드시 오른다. 그는 현장에서 싸움을 지휘하면서 전쟁 국면을 바꾸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번 일궈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올해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때의 비극이 점차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2년이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전쟁. 국가가 맞이한 이 최대의 위기에서 현장을 누비며 싸움을 승리로 이끈 노병(老兵)이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키로 했다. 그에 앞서 그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들어 봤다. 지난달 22일 용산의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다.

글=채인택·유광종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6·25 전쟁과 대한민국 군대


-60년 전의 전쟁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너무 아픈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의 평가도 가능하다. 누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하는 계기였다. 한국은 미국의 우수한 문물을 제대로 받아 소화한 대표적인 나라다. 그로 인해 한국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결국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인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6·25전쟁은 분명 동족이 서로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거듭 태어나는 전기로도 작용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대한민국의 전몰 용사와 누계로 300만 명에 달하는 미군과 연합군 병사의 피와 땀이 그 속에는 숨어 있다.”

-전쟁으로 대한민국 군대는 어떻게 달라졌나.

“창군 뒤 10개 사단으로 시작한 한국의 군대는 전쟁을 겪으면서 20개 사단, 60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한때 70만의 대군이었다. 미국의 군사 시스템이 한국 군대에 그대로 이식됐다. 한국군이 우수했기에 무기와 물자, 군사력 운용 체제 등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의 우월성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다.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2년 12월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내가 직접 브리핑을 했다. 종전 뒤 미군 병력의 일부 철수가 필요하다면 이를 메울 한국의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뒤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때에는 평균 두 달에 1개 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의 지원은 어느 수준으로 이뤄졌나.

“155마일 휴전선에 모두 16개 사단의 한국군을 배치하는 큰 작업이었는데, 당시 한국의 재정 규모로는 이를 감당키 어려웠다. 미국이 모든 것을 댔다. 급식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기름·탄약·무기 등을 그대로 넘겨 줬다.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의 군사력만이 강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은 매년 3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했다. 인천의 유리 공장, 충주의 비료 공장 등이 미국의 자본과 기술로 지어졌고, 모자라는 비료는 미국이 일본에서 구입해 한국에 원조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결국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루는 토대로 작용했다.”

-미국은 다른 여러 국가들에도 지원을 했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토대로 일어선 유일한 국가다. 필리핀과 남베트남 등 여러 나라가 같은 경우이긴 했지만 우리와는 달랐다. 그들은 미국의 문물과 문화를 순조롭게 소화하지 못했다. 한국은 이를 제대로 소화함으로써 자력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랜 꿈이었던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의 꿈을 실현했다. 한국전쟁은 뼈아픈 동족상잔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대문을 활짝 열어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기틀을 만든 계기로 볼 수 있다.”

-전쟁 때의 한국군과 지금의 군을 비교한다면.

“한마디로 천양지차다. 창군 초기에는 일제가 남긴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48년에 미군이 소총 등 일부 무기를 한국군에 지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경찰 위주였다. 한국 경찰에는 M1 소총 등을 지급하면서도 군에는 주지 않았다. 당시 경찰이 주(主), 국방경비대(국방부 전신)는 보조였던 셈이다. 비행기와 탱크는 물론 대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미군정이 철수하면서 한국에 남은 미 군사고문단의 협력과 전쟁 때 수많은 미군 병력이 들어오면서 한국군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의 한국군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군(强軍)이다. ”

미군과 중공군 평가하자면

-6·25전쟁 중에 여러 유명 미 장군들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

“최상위 급의 전략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대범하면서도 천재적인 전략 구사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대한 부주의로 여러 가지를 잃기도 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이 북진통일을 앞에 둔 시점에서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했다. 맥아더 장군 본인이 주변 참모에 의해 귀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전에 대한 열정과 자유·민주라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등으로 무장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다른 지휘관들은 어땠나.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들이다. 월턴 워커(1889~1950, 주한 미8군사령관, 6·25전쟁 당시 직함) 장군과 매슈 리지웨이(1895~1993,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프랭크 밀번(1892~1962, 1군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 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1901~1987, 8군사령관) 등 미군의 최고 엘리트들이 전쟁을 이끌면서 한국군에 많은 것을 보여줬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전쟁을 이끄는 방식 등을 우리 군대가 보고 배웠다.”

-미군의 특징을 꼽는다면.

“보급과 무기 체계가 세계 최고의 군대다. 그러나 낮에는 싸움을 잘하지만, 야간에는 전투력이 떨어진다. 기동력, 공군 지원 등이 탁월하지만 야간 전투에 약해서 야밤에 쳐들어오는 중공군을 힘에 겨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더라도 세계 최강의 군대인 것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중공군은 어땠는가.

“매복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전투를 잘하는 편이다. 야간에 공격해 올 때 피리와 꽹과리 등을 부는데,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는 방법이다. 교란전술이다. 우회와 포위 작전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보급이 약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전력이 크게 약해지는 면모를 보였다.”

6·25 전쟁이 남긴 교훈은

-한국전쟁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과 유엔 여러 국가들의 참전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외국인으로서 한반도의 전쟁에 뛰어든 미군과 유엔군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

-이제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당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 참전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50년 말부터는 북한군과 싸운 것이 아니고 사실상 중공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적이 아니다. 친구로 잘 사귀어야 할 때다. 중국은 ‘대륙세력’이다. 미국은 그에 비해 ‘해양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 부상하는 중국이라는 대륙의 세력과 잘 사귀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말하자면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철저하게 다지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 중국과 함께 발전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 과제지만 미국과 튼튼한 안보 동맹을 다지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즘의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6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주 언급해야 한다. 전쟁이 남긴 여러 가지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6·25전쟁은 한민족이 치른 비극적인 대전이었다. 동시에 미군과 연합군, 그리고 중공군이 참여해 벌어진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해 늘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전쟁을 겪으면서 산업국가로 올라섰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지키고 키웠다. 우수한 국민이 있어서 다 그렇게 된 것이다. 전방에 120만 병력을 배치하고 늘 위협을 해오는 북한이 아직 존재한다. 백성들을 굶기면서 말이다. 그 점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초가 국가안보다.”

6·25 전쟁의 산증인 ‘첫 한국군 4성 장군’ 백선엽은 누구

1950년 10월 19일 평양 수복 직후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오른쪽)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백선엽 1사단장.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바로 그날 아침 국군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은 서울 신당동 집을 나섰다. “전쟁이 터졌다”는 사단 참모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열흘 전부터 경기도 시흥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때여서 집에서 출퇴근을 하던 상황이었다. 그는 육군본부에 가서 “사단 복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다음 바로 전쟁터를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51년 4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렸다가 겨우 회복된 뒤 2군단장으로 승진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하기 위해 부산의 임시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다. 그는 그때서야 모친과 아내, 그리고 세 살 된 딸과 재회했다. 개전 이후 첫 만남이었다. 부산의 지하 방 한 칸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가족이다. 개전 초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을 때 가족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물론 가장의 도움은 없었다. 서울을 지나 평양으로 북진할 때도 가족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서 원망도 많이 받았겠다”는 질문에 백 장군은 “다 그런 거지”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는 그런 군인이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대승(大勝)의 장군’이다. 기념비적인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쟁 초에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이 경남과 경북 일부만을 남겨두고 있던 낙동강 전선. 그의 1사단은 대구 북방의 다부동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인민군 총공세의 예봉을 꺾고 북진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토대를 이룩한 승리였다. 김일성 치하의 북한 수도인 평양에 처음 입성한 군대도 그의 1사단이다.

제1사단장, 제1군단장, 휴전회담 초대 한국대표, 제2군단 재창설 등 주어진 임무를 그는 훌륭히 이행했다. 당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8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는 청년 장군 백선엽을 주목한다. 이에 따라 그는 한국군 역사상 첫 4성 장군에 오른다. 그의 나이 33세 때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대 내부의 좌익 군인들을 제거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맡았고, 이 과정에서 붙잡힌 박정희(당시 소령) 전 대통령의 사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54년 한국과 미국의 상호 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숨은 주인공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 영웅들을 6·25전쟁 중 만났다. 이들로부터 미국의 군사지식을 배우고 익혔다.

이런 경험은 그가 두 차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군의 실력을 키우고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 그는 외교관으로 10여 년 해외를 누볐고 70년대 초반에는 교통부 장관 자격으로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을 깔 토태를 만들기도 했다. 대한민국 중공업하면 ‘포철 박태준’이지만 화학공업 발전의 토대가 백선엽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971~80년 9년 동안 충주·호남 비료 사장과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역임하며 이땅의 화학공업 기반을 닦았다.  

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