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의 이해

베토벤 여인론 - 글 : 조수철

淸山에 2009. 9. 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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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여인론 - 글-조수철
                      직업 : 현 정신과의사, 현 대학교수

 

 

 

 


여섯 번째 여자 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

 

베토벤은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 베겔러의 회고에 의하면 베토벤은 일생동안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적(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이 한시도 없었다고 하였다.

 

청소년기의 기록을 보면 베토벤은 순수하고 도덕적인 면을 추구하였던 것 같다. 불륜의 관계에 대하여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여 그런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집에는 방문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베토벤이 두 남동생의 부인들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과 거부감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베토벤의 도덕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은밀한 방법으로는 도덕적인 타락에 빠져  40대에 와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창녀집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특히 쯔메스칼이라는 친구와 자주 어울렸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반된 태도가 베토벤의 내부에 동시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베토벤 자신의 기록을 살펴보자.

 

“영혼의 결합이 없는 감각적인 쾌락은 항상 동물적인 것이다. 단지 후회만이 따를 뿐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드 리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어느 날 베토벤을 방문하였는데,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베토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올려고 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냥 가지말고 피아노를 좀 쳐라’고 하여 나는 그들 앞에서 피아노를 쳤다. 한참 피아노를 치는데 베토벤은 ‘리스! 좀 더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라’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다소 울적하고 침울한 음악을 연주하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열정적인 곡을 연주하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나는 베토벤의 어떤 행동 때문에 그 여인의 기분이 상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는데, 나를 더욱 더 놀라게 한 것은 베토벤이 그 여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베토벤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길거리에서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면 흔히 돌아서서 안경 너머로 유심히 쳐다보곤 하였다. 그 때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면 싱긋이 웃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하녀들에 대하여는 이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벌레 같은 인간”
“형편없이 천한 여자” 


“돼지같은 하녀”
“야비한 인간”


“성질 고약한 늙은 요리사”
“가슴 크고 음탕한 여자”


베토벤의 첫사랑은 본 시절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던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베스트홀트 백작의 딸이었다. 베스트홀트 백작은 음악애호가로 자신은 파곳을 연주하였고, 아들은 플루우트, 딸 마리아는 피아노를 잘 쳤는데 백작의 부탁으로 마리아의 피아노 렛슨을 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은 사랑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마리나는 신분상의 차이를 이유로 들어 베토벤의 사랑을 거부하여 베토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본 시절의 베토벤이 사랑을 느꼈던 두 번째 여성은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던 엘레오노레로 생각된다.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한 후 브로이닝일가와 더욱 더 가깝게 지내면서 브로이닝 부인은 베토벤에 대하여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엘레오노레는 브로이닝부인의 딸로서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때 베토벤은 사랑에 빠진 듯하다. 본시절 베토벤이 엘레오노레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

 

엘레오노레양!

 

----- 손수 만든 목도리를 받고 깜짝 놀랬소. 그것은 또한 나에게 달콤한 슬픔을 불러 일으킨다오. 일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신의 관대함에 몸둘 바를 모르겠소. -------- 당신의 우정을 잃을까봐 내가 몹시 괴로워했고 지금도 괴로워한다는 것을 제발 믿어주시오. --- 당신의 친절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여기 변주곡과 바이올린을 위한 론도를 보냅니다. ---

 

안녕! 친구여! 당신이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여도 당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답니다. 예전처럼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존경한다는 것을 믿어주시오.---

1791년 본에서

 

      *
  
1792년도에 베토벤이 빈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엘레오노레는 베토벤에게 헤르더의 시에서 인용한 귀절을 남겨주었다.

 

“참된 우정은
저녁 노을의 그림자처럼 자라서
인생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

1793년11월2일짜로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엘레오노레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중한 친구 엘레오노레에게

내가 이 도시에 머문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서야 겨우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다오. ------ 내 본의와는 다른 그런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린다해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법.


여기에 당신에게 헌정하는 곡을 보내오. 그저 이 작품이 당신에게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오, 그저 이것이 당신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완전히 보상받은 것이나 다름없소. ----
편지를 맺으면서, 부탁을 하나 하겠소. 당신이 만든 양털 조끼를 다시 가질 수 있다면 무척 기쁘겠어요. ----- 당신이 본에서 처음 준 것은 아직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유행에 뒤져버렸다오. ----

 

1793년11월2일 베토벤

 

 

베토벤은 엘레오노레에게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으며 피아노 3중주곡 제1번(Op 1-1)을 헌정하였다. 그러나 경위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이 사랑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엘레오노레는 베토벤의 친구였던 베겔러와 1802년도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의 이들 부부에 대한 우정이나 관심 그리고 사랑은 일생동안 지속되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희생적인 여인상으로 엘레오노레와 유사한 <레오노레>를 등장시켰다거나, 그 후 베겔러와의 편지에서도 이러한 베토벤의 심정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말년(1826년10월7일짜)에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 아내 로르헨(엘레오노레의 애칭이다)의 실루엣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네. 젊은 날에 나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이 여전히 나에게 가장 소중하다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투병하던 시기에 대필을 하면서 보낸 편지에도(1827년2월17일, 사망하기 약 1개월전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너무 기력이 없다네. 마음으로 자네와 로르헨을 포옹할 뿐이라네. 자네와 자네 가족 모두에게 우정과 사랑을 보내며.”       


    
1794년 베토벤은 본 시절의 친구였던 니콜라우스 심록(Niklaus Simrock)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의 네딸이 모두 장성하게 되면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나에게 주게나”라고 쓰고 있다. 베토벤이 본에 그대로 머물렀더라면 아마도 일찍 결혼을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795년경까지 베토벤은 본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여가수 막달레나 윌만(Magdalena Wilman)과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윌만이 이 당시 “베토벤은 너무 못생기고 또 반쯤은 미친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이 때부터 이미 베토벤의 괴퍅한 행동은 시작되었던 듯하다.  이 후 1800년에서 1821년 사이까지 베토벤은 지속적으로 1-2명의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특히 몇 명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것은 베토벤의 삶과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백작부인 쥴리에타 기챨디(Giulietta Guicciardi, 1784-1856)와의 관계이다. 쥴리에타는 브룬스빅 가족과 관계가 있으며 칼렌버그 백작과 결혼하여 나폴리로 가게 되었다. 1801년 경 베토벤은 쥴리에타와 알게 되었는데 그 해에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월광 소나타)을 헌정하였다.
1801년 11월16일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는 베토벤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변화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한 소녀에 의하여 야기되었다네. 나는 현재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갖고 있다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결혼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나와 신분이 다르다네. 현재로서는 결혼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네.”

베토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쥴리에타에게 구혼을 하였으며 쥴리에타도 이 구혼을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쥴리에타의 아버지가 신분도 다르고, 돈도 없고 또한 뚜렷한 직장도 없다는 이유로 그 결혼을 반대하였다. 결국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쥴리에타를 잊지 못하여 상아로 만들어진 쥴리에타의 상을 일생동안 자신의 책상 위에 두고 있었으며, 1823년의 대화록에는 쉰들러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보다 나를 훨씬 더 사랑하였다. 그러나 나보다는 그가 그녀의 연인이었다.”

48두 번째는 테레제 브룬스빅(1775-1861)과 언니 죠세핀 브룬스빅(1779-1821)과의 관계였다. 이들은 기챨디의 조카였다. 브룬스빅 가족은 항가리의 귀족으로 대지주였으며 베토벤은 이 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두 자매는 모두 피아노를 배웠는데 음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죠세핀은 아주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보다 30살이나 더 많은 죠세프 다임 백작과 결혼하였는데 1804년도에 남편을 잃게 되었다. 그 후 1804년-1806년 사이에 베토벤이 사랑에 빠졌던 듯하다. 죠세핀의 여동생이었던 샤롯은 베토벤의 방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토벤은 거의 매일 방문하며 수 시간씩 죠세핀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다소 위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도 베토벤이 성적으로 아주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추정은 죠세핀의 편지에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
 
1805년 죠세핀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은 만약 당신이 지나치게 나에 대하여 육감적으로 대하지만 않았더라면 내 일생에서 가장 깊은 추억을 남길만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 뜻하는 대로 한다면 나는 아마도 모든 신성한 맹세를 모두 져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가깝게 지내던 베토벤과 죠세핀과의 관계가 왜 냉각이 되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신분상의 차이로 인하여 죠세핀의 가족들이 베토벤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죠세핀이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베토벤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한 자신의 4명의 자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베토벤과의 관계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죠세핀에 대한 사랑은 1807년 여름 경에 식어버린 듯하다. 이 당시 한 편지에서 베토벤은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과 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1810년 죠세핀은 스카켈베르그남작과 재혼하였는데 테레제는 언니 죠세핀이 베토벤과 재혼하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

 

1846년 2월4일의 일기에서 테레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말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이 아름다운 금언은 베토벤에 의하여 음악화되었다.


베토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었던 그가 우리 가문의 친구였다는 것은 마치 꿈과 같은 일이다.
그 위대한 영혼!


왜 내 언니 죠세핀이 첫 남편이 사망한 한 후 베토벤을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았을까?
스타켈베르그보다는 베토벤과의 결혼이 훨씬 더 행복하였을 터인데“    

 

therese von brunsvik

1806년-1807년 사이에는 베토벤은 동생 테레제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테레제는 언니 죠세핀만큼 예쁘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베토벤과 조화를 잘 이룬 여인이었다. 테레제 역시 베토벤에게 사랑을 느꼈던 듯하다. 테레제와의 관계가 왜 서먹서먹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도 분명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테레제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자신의 망설임 또는 주저함이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


테레제는 자신의 초상화에

 

“드문 천재
위대한 예술가
선한 인간“

이라는 글귀를 새겨서 베토벤에게 전하였는데 베토벤은 일생동안 이 초상화를 비밀서류함에 보관하였다. 테레제는 일생동안 독신으로 지냈으며, 부다페스트에서 페스탈로찌의 정신을 이은 보육원을 최초로 세우는 등 봉사활동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네 번째는 안나 마리 에르되디 백작부인(1779-1837)과의 관계이다. 안나는 베토벤의 열렬한 애호가로서 피아니스트였다. 1796년 항가리 백작과 결혼 한 후에 크로이티아에 정착하였는데 1820년 이후에 오스트리아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1808-1809년 가을과 겨울동안 베토벤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방을 얻어 살았으며, 베토벤은 그녀를 ‘고백신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807-1817년 사이 약 10년간에 걸쳐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베토벤의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베토벤이 사귀었던 여인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여인으로 기술되었던 여인이다. 베토벤과 관련된 편지나 일기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자신의 아들의 살인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있던 여인이었다. 피아노 3중주곡 <유령(Op 70-1)>, 첼로 소나타 제1, 2번이 헌정되었다.

 

 

다섯 번째는 베티나 브렌타노(1785-1859)와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여류 시인으로 괴테와 베토벤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여 표현하며 때로는 거짓말을 일삼는 여인이었다. 항상 남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라며 남성을 성적으로 유인하여 애를 태우게 하는 습관이 있던 여인이었다. 베토벤이 사망한 후에 베토벤으로부터 3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공표하였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중 한편은 진짜이며 나머지 2통의 편지는 가짜였다. 베토벤이 일시적으로 매력을 느낀 적은 있으나 죠세핀에게 느꼈던 그런 깊이 있는 감정은 아니었던 듯하다.

 


여섯 번째는 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와의 관계이다. 안토니는 18세때에 프랑크프루트의 상인이었던 프란츠 브렌타노와 결혼하여 4자녀를 두게 되었다. 프란츠는 아주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나 안토니는 고향 비엔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으며 게다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슬픔은 더 깊어지게 되었다. 안토니는 자신의 시누였던 베티나 브렌타노의 소개로 베토벤과 알게 되었는데, 이 당시 안토니는 베토벤에게 청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베토벤은 크게 당황하고 또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듯하다. 왜냐하면 안토니는 이미 결혼을 하여 4자녀를 둔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베토벤은 안토니의 남편 프란츠와도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12년에 쓰여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에게”의 제목으로 쓰여진 3통의 편지의 주인공이 안토니 브렌타노라고 주장하는 전기작가도 있다. 이 편지들은 베토벤이 프라하에서 테플리츠로 여행하던 중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수주일 후에 베토벤은 안토니와 남편 프란츠 브렌타노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 때에 이 삼자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안토니와 프란츠는 부부였으며 베토벤은 친구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안토니의 마음이 어떠하였던지 간에 베토벤은 안토니와 프란츠의 가정을 파괴할 수는 없었던 듯하다. 전기작가 메이나르드 솔로몬은 이 세 명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의 성숙한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812년 후반기에 프란츠는 더 이상 프랑크프르트로의 귀환을 늦출 수가 없었으며 결국 가족들과 함께 비엔나를 떠나게 되었다. 이 후 베토벤이 안토니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을 하였다거나 또는 안토니가 베토벤을 만나기 위하여 비엔나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토니와 헤어진 후에도 안토니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베토벤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후 5년 뒤에 베토벤은 안토니의 딸 멕시밀리안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베토벤의 안토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고 있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신이시여! 나의 덕을 강화시켜주며, 내가 진정으로 떳떳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도록 해 주소서.“      

 

1816년도 작곡된 “멀리있는 애인에게”라는 연가곡을 작곡하게 된 것도 안토니와 관계가 있는 듯하고 1820년대 베토벤의 헌정을 받은 여인은 안토니와 딸 멕시밀리안 밖에 없다. 피아노 소나타 제30번(작품번호 109번)은 맥시밀리안 브렌타노에게 헌정되었으며, 피아노 소나타 제32번(작품번호 111)의 영문판과 디아벨리 왈츠를 주제로 하는 33개의 변주곡(작품번호 120)은 안토니에게 헌정되었다. 베토벤은 일생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이사를 다녔지만 안토니의 작은 초상화와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항상 가지고 다녔다.

 

안토니 브렌타노가 떠난 후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복종! 운명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이 신에 대한 봉사로 이끌 수 있다. 너는 너 자신만을 위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 신이시여! 나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또한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A(안토니를 지칭함)와의 모든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가능한 한 T(안토니를 지칭함)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비록 결과가 나에게 유리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녀의 애정은 결코 망각되지 않을 것이다.”
   
브렌타노 가족이 떠난 후(1812년), 베토벤은 소위 ‘메마른 시기’(dry period, 작곡 활동이 뜸해지다는 의미에서 후세의 평론가들이 이런 이름을 붙여 놓았다)에 돌입하게 된다. 즉 1817년 피아노 소나타 제29번(작품번호 106번 )이 발표될 때까지 중요한 작품이 거의 작곡되지 않았다. 브렌타노 가족과의 이별은 마치 하이리겐슈타트의 유서와 유사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유서 사건 후에 제1기에서 제2기로 발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렌타노와의 이별 후에 제3기로 접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로는 테레제 말파티(1792-1851)와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비엔나 의학협회를 창립한 요한 말파티의 조카로서 요한 말파티는 베토벤 임종 당시 자리를 지켰던 사람 중이 하나이다. 테레제 말파티와 동생 안나 말파티는 그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매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베토벤은 18세된 테레제에게 매료되어 결혼까지 고려하였던 듯하다. 친구 베겔러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출생 신고서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으며 또 그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하던 양복점에서 옷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말파티의 가족은 베토벤의 이러한 태도에 극도로 화를 내었으며 말파티는 베토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여덟 번째로는 도로티아 폰 에르트만(1781-1849)과의 관계이다. 이 여인은 1798년 오스트리아 군인과 결혼하여 5년 후부터 베토벤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던 여인이다. 나중에 그녀는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가장 저명한 해설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15-1816년 사이에 피아노 소나타 제28번이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에르트만은 그녀의 생의 말기에 가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베토벤은 거의 매일 우리집을 찾았다. 때때로 그는 입맛이 전혀 없다고 불평하였다. 또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고 전혀 식사를 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신경이 아주 예민하였으며 기분이 수시로 변하고 때로는 친구들에 대하여 괜히 비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가 점점 더 멀어지는 이 가련한 음악가에 대하여 누가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며 모든 것을 용서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나는 베토벤과 순수한 우정을 유지하였다.”

 

도로티아와 베토벤과의 관계는 순수한 우정관계였던 듯하다.

전기작가였던 마렉은 1812년 베토벤이 쓴 “불멸의 연인에게”의 한 대상으로 이 여인을 주목하기도 하다. 베토벤이 사망하기 12일 전에 베토벤을 방문하였던 페르디난드 힐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함께 방문하였던 훔멜과 대화를 하면서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요. 당신을 돌보아 줄 부인이 있으니 말이요. 나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요. 당신 부인을 한번 만나게 해주시오’. 라는 청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깊이 후회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베토벤은 본시절의 청소년기부터 일생동안 항상 누군가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으나 결국 결혼으로까지 이어지는 성공적인 여성관계는 한 번도 맺은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음악적인 표현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이성과의 관계의 뿌리는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베토벤의 성장기에 베토벤과 그 부모들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일이 베토벤의 이성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미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으나, 어머니는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이 되고, 베토벤에 대하여 따뜻한 사랑과 정서적인 보살핌을 베풀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베토벤이 추구하였던 것은 정상적인 여성관계가 아니라 여성을 통하여 모성을 추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베토벤이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여성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인 듯하다.
         
작품을 통하여도 베토벤의 이러한 태도는 아주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이다. 이 오페라는 여러 가지의 주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특히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는 “부인의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남편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헌신적인 부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베토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여성상이 레오노레라는 극중의 인물을 통하여 투사되고 또한 표현되고 있다. 피델리오는 레오노레가 자신의 남편을 구출하기 위하여 남장을 하면서 갖게 되는 이름이다. 즉 베토벤이 그리고 있었던 여성상은 자기희생과 헌신성을 발휘하는 “신성한 여성됨(divine feminity)"이었다. 따라서 베토벤이 현실에서 추구하였던 사랑도 기본적으로는 ”신성한 여성“의 추구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모성의 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이 현실 생활에서 여성들과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다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을 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의 세계로 빠져들어 자신의 환상이 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즉 여성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여성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살패를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그러한 자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자신의 육체적인 욕구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다. 말년에 가서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컬 홀쯔에게 자신은 자신의 육체적인 욕구에 자신의 고귀한 정신이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종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신분상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베토벤은 조상은 일반 평민으로 귀족이 아니었다. 베토벤 자신이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상당한 열등감이 있었다는 것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당시의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시대정신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으며 베토벤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귀족과 음악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르는 과정에서 뚜렷한 변화를 겪는다. 하이든이 완전한 종속적인 관계였으나 모차르트는 귀족들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음악적으로는 상당한 독립을 성취하였으나 대신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베토벤인 경우에는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완벽한 횡적인 관계가 수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친구 또는 후원인 자격으로서 귀족들과의 관계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대인관계에 대한 베토벤의 행동양식이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베토벤이 사랑을 고백하였던 많은 여성들이 모두 귀족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베토벤으로부터 음악을 배우기도 하고 또 서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거의 모두 베토벤을 떠나게 되었다. 그 가장 주된 이유는 신분상의 차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의 시대정신을 베토벤은 별 거부없이 수용하였으나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의 차이가 베토벤이 여성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실패를 거듭하였던 중요란 원인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는 여성에 대한 베토벤 자신의 무의식인 태도와 의식적인 태도간의 부조화가 실패의 원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지속적으로 여성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원하였던 것이 반하여 무의식적으로 여성과의 영원한 결합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베토벤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과 애정을 고백하였던 여성들 중 대부분이 이미 결혼을 한 상태에 있거나 과부의 몸으로 있으나 아이들이 많아 현실적으로 결합이 어려운 상태이거나 또는 나이차이가 너무 커서 애당초 결혼이 어려운 상태로서 현실적으로 결혼까지는 어려웠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일부 여성들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베토벤이 마음만 결정하면 결혼이 가능하였던 상황에서는 오히려 베토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베토벤의 무의식 속에는 여성자체를 거부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추정하게 해주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과정 자체가 베토벤에게는 한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을 의미하게 되고 베토벤은 일생동안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동기가 여성과의 관계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위야 어떠하던지 간에 여성과의 관계에서 경험하였던 “사랑, 관심, 그리움, 봉사의 마음, 희생의 마음, 환희”와 함께 동시에 이들 관계로부터 야기된 “괴로움, 외로움, 좌절”등은 베토벤의 창의력의 발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리톤
 
<아델라이데>라는 여성을 찬양하는 이 노래에서도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만나는 정겨운 인간애를 발견한다.

 

Adelaide 아델라이데

 

Einsam wandelt dein Freund im Fruhlingsgarten,
외로이 거닌다 당신의 친구가 봄의 정원에서,


Mild vom lieblichen Zauberlicht umflossen,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에 둘러싸여,


Das durch wankende Blutenzweige zittert,
빛은 흔들리는 꽃핀 나뭇가지를 관통하여 전율한다,


Adelaide!
아델라이데!

 

In der spiegelnden Flut, im Schnee der Alpen,
거울처럼 빛나는 큰물결 안에서, 알프스의 눈속에서,


In des sinkenden Tages Goldgewolken,
침몰하는 낮의 황금빛 구름들 안에서,


Im Gefilde der Sterne strahlt dein Bildnis,
별들의 광야 안에서 반짝입니다 당신의 이미지가,


Adelaide!
아델라이데!

 

Abendluftchen im zarten Laube flustern,
저녁바람이 상냥한 나무그늘 속에서 속삭인다,


Silberglockchen des Mais im Grase sauseln,
오월의 은방울들이 잔디에서 바스락거린다,


Wellen rauschen und Nachtigallen floten:
파도가 포효하고 밤꾀꼬리는 노래한다:


Adelaide!
아델라이데!

 

Einst, o Wunder! entbluht, auf meinem Grabe,
언젠가, 오 기적이여! 꽃필것이다, 나의 무덤에,


Eine Blume der Asche meines Herzens;
꽃한송이가 내 심장이 타고난 재에서;


Deutlich schimmert auf jedem Purpurblattchen
선명하게 번쩍일 것이다 모든 보라색 잎들 위에서


Adelaide!
아델라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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