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의 이해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지휘자

淸山에 2009. 9. 17. 17:14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지휘자


① 선정 개요

윌간 "객석"은 창간 14주년을 맞이해 음악사상 "연주가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정리하는 연재 특집을 마련했다. 이 기사는 각각의 연주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20세기의 역사적인 연주가 10인을 선정, 그 면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21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바라본 20세기 양악 연주사의 집대성이 될 것이다. 그 첫번째인 '지휘자편'을 시작으로 이어서 '피아니스트편' '바이올리니스트편' '첼리스트편'이 연재될 예정이다.

이 기사에 소개될‘20세기 최고의 지휘자 10인’은 우리나라의 원로와 중견, 그리고 신예급의 음악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을 포함한 선정위원단의 투표로 선정되었다. 선정위원은 이순열, 송영택, 노승종, 선병철, 김범수, 황성호, 김춘미, 우광혁, 김방현, 임상순, 최갑주, 서동진, 김정순, 유윤종, 임화섭, 최은규, 이정환, 유형종, 이성일, 윤정열, 김길영, 김상현, 이석열, 박성준, 서석주, 박제성, 박성수, 류태형, 이일후, 문옥배(무순)등 모두 30명이었다..

복수 투표와 점수제 투표를 혼합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고득점 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가

1.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 아르투트 토스카니니
3.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4. 브루노 발터
5. 게오르크 솔티
6. 오토 클렘페러
7. 레너드 번스타인
8. 칼 뵘
9. 카를로스 클라이버
10. 세르주 첼리비다케

11. 에프게니 므라빈스키, 12.조지 셸, 13. 앙세르메, 14.클라우디오 아바도, 15.유진 오먼디, 16.줄리니, 17.피에르 불레즈, 18.세라핀, 19.라이너, 20.크나퍼츠부슈, 21.하이팅크, 22.가디너, 23.반트, 23.뮌슈, 25.바비롤리, 26.요훔, 27.멘겔베르크, 27.스토코프스키, 29.아르농쿠르, 30.마주어, 30.몽퇴의 순으로 나타났다. 아쉽게도 여기에 들지 못한 지휘자는 콘드라신, 쿠벨릭, 샤이, 시노폴리등이다.

참고적으로 1996년 일본의 '음악의 벗'이 발표한 20세기 지휘자의 순위는 1.푸르트벵글러 2.토스카니니 3.카라얀 4.번스타인 5.발터 6. 클렘페러 6.뮌슈 6.므라빈스키 9.크나퍼츠부슈 9.셸 11.솔티 12.슈리히트 12.뵘 14.바렌보임 15.아바도 16.클라이버 16.레바인의 순서였음을 밝혀둔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그의 양손과 머리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마치 간질환자의 발작과 같이. 지휘봉은 허공에서 떨어댄다. 누가 과연 저 앞에서 정확한 비팅이나 바톤 테크닉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조금도 표류하지 않는다. 오히려 놀랍게도 음악은 뜨겁게 작열하며 타오른다…"



②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지휘자

1.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의 지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위와 같을 것이다. 그는 리허설에서도 그저 ‘여기는 잘해야 돼. 반드시. 잘. 알겠지?’하는 식이었다 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까. 아니, 어떻게 그 수준을 뛰어넘어 흔히 말하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 솟아나온 것일까.

그의 지휘는 기본적으로 박자를 센다기보다는 멜로디의 선을 그려나가는 구성이었으나, 생명을 어루만지는 듯한 초월적인 유기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이완과 긴장을 반복해 살아 있는 유기체의 박동, 나아가 자연의 움직임과 같은 생생한 연주를 이끌어냈다. 중세 독일의 영감적 신비주의, 템포 변환의 신비, 작품의 영적인 본체를 찾아내는 힘 등, 그는 ‘영감과 마법’으로 지휘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카리스마의 극단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가 지휘대에 서면 단원들은 물론이고 청중들까지그의 존재에 빨려들었다.

그가 다듬어낸 음악은 ‘작곡가를 죽인’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것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맥을 이어 낭만의 진폭을 극대화시키고 주정주의와 직관을 투영한 그의 연주가 정신성에 충만해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였다. 히틀러가 나치즘과 전쟁과 학살로 ‘위대한 독일 정신’을 벼랑으로 몰고 갔다면 푸르트벵글러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추락하는 독일 정신에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고고학자인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 게르만 혈통을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작곡을 공부했지만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뮌헨 등지에서 연습지휘자로서 경험을 쌓았고, 1906년에 데뷔, 11년에 뤼베크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5년 만하임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인정받고 20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한 결과, 36세이던 1922년 니키쉬에게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를 물려받았다.

1925년부터 27년까지 뉴욕 필에 초빙되었고 27년부터 30년까지 빈 필 겸 빈 국립오페라극장 상임, 게다가 바이로이트 음악제의 총감독까지 석권해 명실 상부한 음악계의 ‘황제’가 되었다. 33년부터의 나치스 통치 하에 힌데미트 및 유태계 음악가들의 도피를 돕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몰려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1947년 무죄판결로 복권되어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로 돌아왔다. 52년의 바이로이트 부활 연주회를 지휘했고, 같은 해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54년 죽음과 함께 ‘음악계의 제왕’의 권좌를 내놓게 된다.

그의 음반으로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우선 거론된다. 3번 ‘영웅’ (52년), 5번 ‘운명’(54년), 6번 ‘전원’(52년), 7번(50년) 등의 EMI 스튜디오 레코딩도 있으나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진정한 모습은 라이브 레코딩에서 찾을 수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의 3번(44년)과 5번 (47년), 그리고 EMI 레이블의 유명한 바이로이트 실황 9번 ‘합창’ (52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슈만의 교향곡 4번(DG, 51년), 브람스의 교향곡 1번(DG, 52년), 3번(EMI, 49년), 4번(EMI, 48년) 등도 그의 음악을 알려면 꼭 들어봐야 하는 음반들이다.

2.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20세기 지휘사에 가장 큰 두 인물,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던 두 거장이다. 푸르트벵글러의 직관과 영감에 찬 주정주의적 연주와는 달리 토스카니니는 신고전주의의 단정한 양식미를 중시했고, 악보를 해석의 근간으로 하는 철저한 객관주의를 숭앙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대단히 즉물적인 것이었지만 남유럽인의 기질처럼 다혈질적인 면과 생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두 거장은 역시 묘한 인연으로 엮여 있다. 로시 오페라 극단의 리우데자네이루 공연에 첼리스트로 동행했던 19세의 토스카니니는 우연히 지휘대에 서게 되어 ‘아이다’ 전곡을 암보로 지휘했다. 바로 그해 푸르트벵글러가 태어났다. 그리고 87세의 토스카니니가 지휘도중 의식장애를 일으켜 더 이상 지휘활동을 계속하지 못하게 된 바로 그해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했다. 토스카니니의 음악인생에 가장 유명한 일화 두 장면은 푸르트벵글러의 탄생·사망과 겹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지휘는 어땠을까.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는 오케스트라를 멈추고는 무시무시한 괴성을 질러댄다. 백발이 성성한 80대의 노인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포효 같은 호통에 100여 명이 넘는 단원들은 숨도 재대로 못 쉬고 쩔쩔매는 모습이다…’

리허설의 한 장면에서 보듯 토스카니니 역시 지휘대 위의 카리스마의 한 축이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지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음악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다듬어낸 음악은 항상 한 치의 착오도 없는 정확한 것을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활화산 같은 폭발을 담아낸 무시무시한 완벽주의자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토스카니니의 완벽주의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것은 놀랍도록 천재적인 그의 암보 능력이었다. 후대의 연구가들은 토스카니니가 대략 100여 편의 오페라와 250곡의 관현악곡을 파트별로 음표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가난한 난봉꾼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76년 파르마 왕립음악학교에 입학, 첼로를 전공했다. 1885년 졸업해 이듬해인 1886년에 위에서 소개한 대로 처음 지휘대에 섰다. 이후로 그는 승승장구해갔다. 1892년 스칼라에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1896년 토리노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의 초연을 지휘한 그는 1898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해 스칼라의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1908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15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오페라 개혁의 깃발’을 꽂아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독단적인 토스카니니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그는 1920년 다시 스칼라로 돌아왔다.

또다시 그의 예술에 대한 결벽증에 가까운 고집과 대중들의 요구가 충돌하기 시작했고, 도저히 견디다 못한 토스카니니는 29년 이탈리아를 떠나 26년부터 상임지휘자를 맡은 뉴욕 필에 전념했으나 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바이로이트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을 전전하던 그를 위해 하나의 악단이 만들어졌다. 1937년에 결성된 NBC 교향악단이 바로 그것. 이 악단은 토스카니니에 절대복종하는 악단으로서 위에서 소개한 토스카니니의 퇴진까지 17년간 이 괴팍한 지휘자의 음악혼을 남김없이 불태우도록 도왔다.

토스카니니가 외우고 있던 작품들에 비하면 그가 남긴 오페라 녹음은 의외로 적다. 그의 까다로운 성격이 가뜩이나 복잡한 오페라 녹음에 번거로움을 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2년초 발매된 RCA의 방대한 토스카니니전집은 오페라를 제외하면 그의 연주예술의 대부분을 섭렵하고 있다. 이중에서 역시 그를 파악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들이다.

3.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카라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 그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전혀 엉뚱한 곳에 걸려 있는(예를 들어 ‘버드와이저’나 ‘코카콜라’의 포스터가 걸릴 자리에) 그의 포스터를 접하고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다. 20세기 클래식의 상업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자기 현시욕과 재물욕이 유난히 강했던 기회주의자가 음악에 집중할 새가 있었겠냐는 것이 그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자기 자신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치운 ‘자본주의 시대의 파우스트’로서의 짙은 의혹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20세기 후반, 음악의 몰개성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어쨌든 그는 최고의 악단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중에는 함부로 ‘싸구려’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명연들이 역시 즐비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번스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이끈 것이 카라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시대의 ‘절대적 카리스마’와는 조금 다른 ‘다재다능의 카리스마’로.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 역시 신동으로 각광받은 그는 빈 국립음악원에서 프란츠 샬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7년, 19세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그래서 카라얀은 1933년 나치 입당의 길을 선택했고, 34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35년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937년과 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으며 전쟁기를 맞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행적은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다.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종전과 동시에 그는 위기를 맞이했다. 47년 해금되었지만 어느 무대도 그를 웃는 낯으로 반기지 않았다. 미궁에 갇힌 그의 손에 면죄부를 쥐어준 것이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당시 구성된 레코딩 전문악단인 필하모니아를 카라얀에게 맡겼던 것이다. 49년부터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것도 그가 숨통을 틀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지휘무대에 복귀한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푸르트벵글러가 죽은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 되어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종신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다. 그리고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 포스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 베를린 필과의 불화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음악계의 황제’로서의 그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음반뿐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음악산업을 육성하며 연출에도 직접 나섰다. 자연자작의 음반과 영상은 아직도 레코드가게의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89년, 죽기 3개월 전에야 그는 ‘종신’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세련된 다듬기’와 ‘지겨운 레가토’로 특징지워진다. 그래서 고전 레퍼토리보다는 낭만 이후의 레퍼토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음반 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마지막 녹음이 된 브루크너 교향곡 7번(DG)도 명연 중에 하나. 그리고 말러 교향곡 9번(DG), 브람스 교향곡 1번(DG)도 대표적 명반이다. 더 이상 그의 명반을 꼽기는 힘들다. 그의 음반 타이틀 (영상물포함)은 모두 1천에 달하고 전세계적으로 약 1억 2천만장이나 팔렸다. 대중음악시장에서는 흔히 ‘많이 팔리면 뜬다’고 한다. 같은 논리라면 카라얀의 음반들 중 상당수가 ‘뜬 명반’인 것이다.

4. 브루노 발터(1876∼1962)

한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두 발의 총알이 든 총이 있고 당신 앞에는 ‘지휘자’와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있다. 당신이 누구든 두 사람을 골라 마음대로 쏠 수 있다면 누구와 누구를 쏘겠는가?”

단원은 서슴없이 답했다.

"지휘자! 지휘자에게 두 발 다 쏜다. 위와 같은 농담은 물론 카리스마의 극단을 치달은 20세기의 지휘자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단원들의 지휘자에 대한 존경심 없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브루노 발터. 이 지휘자야말로 앞서 말한 두 발의 총알을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감사와 겸손과 존경의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단원들의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그는 한편 일상의 인간들에게 평범하게 내재된 소중한 정감과 서정을 통해 고귀한 영혼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성선설적 음악혼’이 가장 소박하고 따스한 모습을 통해 가장 높은 경지를 드러내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느 곡을 들어보아도 그의 음악에는 모나고 각진 곳이 없다.

발터의 본명은 브루노 발터 슐레징거다. 베를린에서 유태인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1889년 13세 때 베를린 필과 협연까지한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한스 폰 뷜로의 연주를 듣고서 한눈에 반해 버린 탓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맞이했다. 1895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에 부지휘자로 가면서 말러를 만난 것이다. 그는 말러의 충고로 슐레징거라는 유태계 성을 버렸고, 말러를 따라 빈 필의 부지휘자로 간다. 웬만하면 홀로서기를 주장해도 좋을 시점까지 그는 말러를 섬겼다. 그의 죽음 뒤에도 발터는 평생토록 말러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1913년에 뮌헨 오페라극장, 25년에 베를린 시립오페라극장을 맡았던 그는 1929년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이 된다. 독일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 된 그에게 곧 시련이 닥친다. 1933년 나치가 들어서며 유태인인 그의 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1936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옮겼으나 나치의 마수는 오스트리아마저 삼켜버렸고, 그는 결국 유럽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미국땅에 닻을 내린 그는 이미 63세의 거장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뉴욕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56년, 고령으로 은퇴했으나 CBS가 당시 개발된 스테레오 녹음에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콜롬비아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삼고초려 끝에 복귀한 80대의 발터가 남긴 녹음들이 오늘날 그의 명반이 되어 남아 있다. 모차르트 후기 6대 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전집(소니, 59∼60년)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캐슬린 페리어와 공연한 말러 ‘대지의 노래’(데카, 52년)는 기념비적인 명반.

5. 게오르그 솔티(1912∼1997)

1997년 가을, 솔티의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을 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텅빈 듯한 허전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솔티는 전세대의 거장들과 같이 ‘파괴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자는 아니었지만, 비록 잠시였으나 20세기의 마지막 거장 지휘자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가 차갑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솔티의 스타일은 많은 악단에 전염되었다. 20세기 후반의 영-미계 오케스트라들의 음향은 솔티 특유의 음향을 향해 수렴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솔티가 추구했던 오케스트라 기능성의 극대화가 레코딩의 중요성이 커진 시대의 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미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리스트 음악원에서 바르토크·코다이 등에게 피아노 지휘·작곡을 배운 그는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로 본격 음악인상을 시작했다.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도 일한 그는 38년 부다페스트에서 ‘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한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42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계 지휘자들이 대거 축출된 기회를 맞아 지휘자로도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다. 34세이던 1946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52년 푸랑크푸르트 시립오페라극장, 61년 런던 코벤트가든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데카와 계약해 50년간 관계를 유지했던 솔티.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세계 최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빈 필을 기용, 1958년에 착수해 65년에 완성한 이 전집은 솔티가 카라얀에 버금가는 레코딩의 황제로 비약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코벤트가든의 비약적인 수준 향상에 공헌한 점이 인정되어 영국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1969년엔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이 되어 20년 넘게 이끌며 최정상의 악단으로 발돋움시켰다.

마지막까지 지휘대를 지켰던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잇달은 죽음으로 자극을 받은 듯, 솔티는 91년 은퇴를 선언했고, 시카고 심포니 측은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했다. 20세기 ‘마지막 황제’로 남은 그는 92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이끌며 거장 지휘자 부재시대의 공복감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마지막까지 레코딩과 지휘대를 오가다 세상을 떠났다.

솔티의 음반으로는 위에서 말한 ‘니벨룽의 반지’ 전곡(데카)과 말러 교향곡 8번(데카) 등이 유명하다. 관현악곡으로 베토벤(70년대와 80년대, 두 번 녹음했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데카)을 꼽는 사람들도 있으나 개성이 철철 넘치는 다른 지휘자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무난한 편이다. 오히려 오페라 쪽이 강한데,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제외한 오페라에 강하다. 타계 직전까지 매달렸던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데카)는 후대에 명반으로 꼽힐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6. 오토 클렘페러(1885∼1973)

극단적으로 무뚝뚝하면서도 고집스런 지휘자 클렘페러. 그의 인생도 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1885년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20대에 그 재능이 말러의 눈에 들어 입신의 길에 접어들었다. 프라하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 추천된 그는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쫓겨났다. 1910년에는 역시 말러의 추천으로 함부르크 오페라와 계약했으나 유부녀였던 엘리자베트 슈만과 염문을 일으켜 쫓겨났다. 바르멘·스트라스부르·쾰른·비스바덴 등지에서도 오랫동안 버티지 못했다.

1927년 베를린 크롤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발탁되어 이듬해 예술감독이 된 클렘페러는 당시에 전위였던 힌데미트·야나체크·스트라빈스키·바일·쇤베르크 등을 무대에 올렸고 연출도 현대적인 것을 종용했다. 오페라극장은 3년 만에 망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그를 다시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으로 불러들였다. 기쁨도 잠깐. 나치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한 그는 1935년, 독일을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이주한 그는 LA 필의 상임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도 지휘하며 새로운 지휘인생을 시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1939년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수술 뒤 반신마비가 된 그는 한동안 폐인이었다. 딸 로테가 공장에 나가서 번 돈으로 연명하던 그는 1947년 유럽으로 돌아가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극적으로 재기했다.

1951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인연을 맺은 클렘페러는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후원으로 비상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앉아서 지휘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던 그는 ‘돈 조반니’ 지휘중에 기적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가 지휘대를 떠난 54년에 필하모니아의 상임이 된 클렘페러는 당대 최고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58년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잠들어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63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서 음악을 다듬어냈다.

그가 73년 타계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연주와 녹음을 병행한 것은 오늘날의 음악팬들에겐 커다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말년에 이르러 모든 곡에서 지극히 느려진 템포가 ‘악취미’라는 평도 있지만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그 가공할 흡인력에 할말을 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힘든 벼랑을 기어 오르는 등반가같이’ 만들어낸 음악은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환희를 준다. 클렘페러의 연주가 그렇다. 첫 화음이 열리는 순간부터 마지막 화음이 스러질 때까지 전체의 구도는 하나로 잡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정신의 환희가 느껴지는 것이다. 바흐의 미사 B단조(EMI), 브루크너·말러의 교향곡 등 그의 음반 중에는 절대적인 완성도를 가진 것이 수두룩하다.

7.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나는 지휘도 하고 싶고, 피아노도 치고 싶다. 교향곡도 쓰고 싶고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위한 음악도 쓰고 싶다. 책도 쓰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미국에서 다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너드 번스타인. 본질적으로 지휘자이지만 작곡가·피아니스트·교육가·저술가·평화운동가·좌경주의자·동성연 애자·유태주의자이기도 한 사람.

하버드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후 커티스 음대에서 라이너를 사사하고 1943년 25세의 나이로 뉴욕 필의 부지휘자가 된 이후 번스타인의 ‘화려한 인생’은 쉴새없이 전개된다. 발터의 급환으로우연히 선 지휘대에서의 대성공을 기반으로 그로부터 15년 만인 1958년, 뉴욕 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후 그는 TV를 적극 이용하며 상업성과 교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당시의 ‘청소년 음악회’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좀더 가깝게 접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솔티가 유럽에서 날아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이 되던 바로 그해, 번스타인은 뉴욕 필에 사의를 밝혔다. 그도 분명히 다른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럽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 10년 만인 1979년, 마침내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섰다. 자신의 의도대로 음악적인 면에서도 거장성을 충분히 인정받은 번스타인은 자기보다 10년 연상인 카라얀의 죽음을 보았고, 독일 통일 기념 음악회를 지휘한 후 영면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거의 다 쏟아놓고 간 셈이다.

그처럼 유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리고 알기쉽고 재미있게 바톤 테크닉을 구사한 지휘자는 드물다. 지휘봉 하나만으로도 그는 오케스트라가 그에게 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휘중에 엉덩이를 흔들고, 지휘대에서 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의 음악도 그렇다. 불필요한 과장이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가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들은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다. 특히 80년대의 말러 사이클(DG)은 완성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 칼 뵘(1894∼1981)

사실 카라얀 생전에 그와 자주 비견되던 인물은 번스타인이 아니라 뵘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이었고, 베를린 필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빈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카라얀 독재시대’에 유일하게 카라얀을 대적할 지휘자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81년 타계할 때까지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서양음악 중심 레퍼토리에서 빈 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한 그의 후기 낭만주의적인 해석이 크게 호응을 얻었던 탓도 있다.

1894년 그라츠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그라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법학박사를 받았으나 음악과의 끈질긴 인연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21년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 오페라극장에 지휘자가 되어 정식으로 지휘인생을 시작한 그는 1927년 다름슈타트의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당시 현대음악의 첨병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의 인연으로 그는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의 해석에도 일가견을 인정받았다.

1931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을 상연하며 작곡가와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는 후대에 뵘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최고 해석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34년에 베버·바그너·R.슈트라우스 등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극장으로 옮겨 9년간 힘을 축적한 그는 1943년 드디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주활동 금지 처분을 받아 물러나게 된다. 1956년 재건된 빈 국립 오페라극장 무대에 다시 섰으나, 일단의 음모에 휘말려 다시 밀려난 그는 67년에야 빈 필의 명예지휘자로 추대되며 끈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는다.

칼 뵘은 카라얀과는 달리 레코딩에 욕심이 없었다. 게다가 같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나누어 쓰던 카라얀의 견제로 더욱 폭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카라얀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분에서는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알반 베르크의 ‘룰루’와 ‘보체크’(D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그림자 없는 여인’ ‘엘렉트라’를 비롯한 오페라 전집(DG) 등이 그것이다.

9.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 )

살아 있는 지휘자 중 아바도를 제치고 유일하게 선정된 클라이버. 과연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 오페라극장에 무작정 뛰어들어 단계적인 도제과정을 거쳐 마이스터에 이른 최후 세대의 지휘자로서 역시 과거 거장들의 카리스마와 비슷한 면을 소유하고 있고, 레코딩을 철저하게 절제해 집중력이 탁월한 음반들만 소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또한 신선한 리듬감각과 음악의 흐름과 밀착된 표현력, 그리고 그것을 빚어내는 출중한 지휘 스타일에서 그의 매력을 찾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이름은 카를이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1935년 나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임하고 가족들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적 취득과 함께 카를로스로 개명했다. 20세 되던 해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그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취리히의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2년 후 견습지휘자가 되어 음악으로 돌아왔고 다시 2년 후 지휘자로 데뷔, 아버지 에리히가 사망한 56년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일취월장했다. 1964년 취리히 오페라극장, 66년 뷔르템베르크 오페라극장, 68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등, 차차 유럽음악 중심부를 향해 수렴해 들어갔다. 70년대 들어서 그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음악제, 코벤트가든 오페라극장 등에서 지휘대에 설 때마다 찬사를 한몸에 받으며 완전히 아버지의 이름이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었다.

80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82년에 빈 국립오페라 극장과 한시적인 계약을 맺기도 한 그는 89년과 92년에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해 앞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리고 89년 카라얀 타계 당시 베를린 필 입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정작 클라이버 자신은 전혀 대중적인 인기나 레코딩엔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점이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했을 만큼 레코딩을 싫어하는 클라이버. 하지만 그의 음반은 성공작이 대부분이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4번 (오르페오), 빈 필과 함께한 5번(DG), 7번(DG), 브람스 교향곡 4번(DG) 등이 그가 지금까지 남긴 교향곡 음반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오페라로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한 베버의 ‘자유의 사수’ (DG)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영상물(DG) 등이 있다.

10.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

첼리비다케의 죽음과 함께 단원들이 ‘쏴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지휘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유독 첼리비다케에게만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첼리비다케는 ‘구시대적 지휘자’로서의 면을 다 부여잡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채 안되어 뮌헨 필은 그의 뜻을 어기고 녹음들을 팔아치웠다. 물론 그 녹음들이 첼리비다케에 대한 세기적인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1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철학과 수학, 그리고 작곡과 지휘를 병행해 공부할 정도의 천재였다. 1936년 베를린에 이주해 전쟁중에도 이곳에서 계속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독일문화와 베를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 필의 바톤을 이어받는다. 그는 베를린 필 재건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베를린 필은 카라얀을 새 지휘자로 지명했다. 첼리비다케는 깊은 배신감으로 독일을 떠나 ‘방랑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61년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에 자리를 잡았고, 75년에 슈트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맡으며 독일로 돌아온다. 1979년 뮌헨 필의 음악감독이 된 그는 베를린에서 못다한 음악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레코딩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집불통이던 첼리비다케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1992년 베를린 필과 화해의 연주회를 했던 것은 그가 유달리 베를린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여권에는 죽기 직전까지 거주지가 베를린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카라얀, 그리고 베를린 필 사이에서 영욕과 카리스마를 불태웠던 첼리비다케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는 저물었다. 단원들에게 소리지르고, 고집불통에다가 자신의 의도대로만 음악을 끌어나가며 전횡과 독재를 일삼았던 극단적인 카리스마. 독단적이고 전제적이긴 했으나 역시 믿고 존경할 만했던 예술가. 이는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들이 어느 정도 공유했던 모습이었다. 이제는 오케스트라가 민주화되면서 지휘자보다 악단 중심으로 운영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속보로 날아온 아바도가 베를린 필을 떠난다는 소식. 이는 단순히 아바도-베를린 필의 문제가 아니라 지휘자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열렬하게 음악을 쏟아냈던 20세기 지휘사가 그 도도한 흐름의 한 장을 접는다는 얘기로 들린다.

- 자료: 월간 <객석> 98년 4월호 특집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