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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 노년에 이룩한 가장 위대한 창조

淸山에 2009. 9. 17. 17:19

 

 

베르디 - 노년에 이룩한 가장 위대한 창조



     쥬세페 베르디(1813-1901)

 쥬세페 베르디는 거의 90세까지 살았다. 19세기의 여명기에 태어나(1813년)에 20세기의 문턱을 넘어서자 죽었으니(1901년) 그는 한 세기를 송두리째 살고 간 셈이다.베르디는 단순히 오래 살았을 뿐만 아니라 예술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놀라운 노년의 창조를 이룩했다. 일찍이 존재한 가장 경이로운 노년의 창조라 할 오페라 <팔스타프>를 작곡했을 때 베르디는 80대의 노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쉬거나, 아니면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과거를 회상할 나이에 그는 생애 최대의 작품을 창조했던 것이다.

<팔스타프>의 창조는 이미 이룩한 베르디의 수많은 작품에다 단지 한 곡을 첨가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오페라 한 곡을 더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의 그의 모든 작품에다 새로운 빛을 던져 주는 필생의 대작을 창조했던 것이다. 만약에 그가 74세에 완성한 <오델로>로써 창작을 끝맺었다면, 확실히 우리는 그를 비극적 정열의 대가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팔스타프>를 창조함으로써 그는 이전의 모든 그의 작품을 다른 빛 속에서 보게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참으로 <팔스타프>는 이 작곡가의 '과거 전부를 거짓으로 단정하는 작품, 그의 힘을 무한히 상승시킨 하나의 오페라 부파, 즉 그 같은 종류의 음악의 숭고한 표본' 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오페라로써 베르디는 창작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창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네 개의 거룩한 소품 - 1898년 출판>으로, 교회 코러스를 위한 <아베마리아 - 무반주 4성부 합창곡>, 단테의 3련체 시에 의한, 여성의 목소리를 위한 <동정녀 마리아에의 기도>, 그리고 이중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성모 애가>와 <테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베마리아>는 1889년에 계획되었으나 <네 개의 소품>은 1895년과 96년, 83세의 노인이 되어 처음으로 쓰여졌다. 베르디 자신은 <아베마리아>를 유년시절의 작품으로 규정했지만, <동정녀 마리아에의 기도>와 나머지 두 개의 보다 큰 규모의 코랄 곡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숙한 숙달과 더할 나위 없는 창조력의 산물' 이라 평가된다. 이처럼 베르디에게선 만년의 작품에서도 영감의 쇠퇴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네 개의 소품은 베르디의 전 창작생활을 마무리짓는 일종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위대한 작곡가가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공물이라 할 만한 것이다.(베르디는 <테데움>의 스코어를 자기와 함께 묻어 주기를 바랬다.)

이 마지막 작품 속에서 베르디는 전혀 새로운, 완전히 변용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음악의 새로운 단순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과거와의 유대로, 그가 존경하는 거장들 - 팔레스트리나와 마르첼로 같은 - 과의 유대로 되돌아오고 있다. 진실로 <성모 애가>와 <테데움>은 이처럼 새로운 옛 예술, 즉 전통과 개인의 창조가 결합한 예술의 본보기라 할 만한 작품이다.

베르디가 최후로 작곡에 손을 댔을 땐 이미 87세였다. 국왕 움베르토 1세가 몬짜에서 1900년 7월에 살해당하자 망자를 위한 여왕의 기도문에 곡을 부치기 위해 그는 몇 가지 스케치를 만들었으나 음악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스케치는 거장의 마지막 음표가 되고 말았다. '나는 혼자뿐이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라고 비탄한 당시의 작곡가 자신의 기록이 남아 있다.(1900년 11월 13일자) 1900년 초엔 이렇게도 쓰고 있다.

'의사들은 내게 병이 없다고 말하지만 - 모든 것이 나를 얼마나 고달프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며 눈도 잘 보이지 않으니, 이젠 감정도 말라 버렸고 걷는 것마저 힘들게 되었다. 나야말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초목과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또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얼마 안되어 그는 타계했다.(1901년 1월 27일) 더 이상 그는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베르디의 음악을 가장 예리하게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아브라모 바세비는 일찍이 베르디의 작품을 네 시기(혹은 네 가지 수법)로 분류한 바 있다.(1859년) 즉 <레냐노의 전투>와 같은 [웅대한] 작품으로, 롯시니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이 그 첫째 시기요, 다음으로 <루이자 밀러>에 의해 막을 연 [개인적] 작풍이 잇따르는데, 여기선 인물들이 훨씬 더 섬세하고 개성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때 작곡가는 도니제티에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제3기는 <라 트라비아타>로 시작되는 이른바 [프랑스 영향]의 시기이며, 마지막으로 [독일 영향]의 제4기는 <시몬 보카네그라>에 의해 대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세비가 이 같은 의견을 발표했을 땐 아직 베르디의 진짜 중요한 오페라들은 출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바세비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베르디의 작품을 다시 분류한다면, <라 트라비아타>는 제2기에 포함되어 이른바 [개인적] 시기의 정점을 이루게 되며, 제3기는 <시실리 섬의 학살>에서 시작되어 대략 30년 동안이나 계속 되는 걸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작곡가는 장대한 오페라를 창조하고자 애를 썼는데, 여기서 고원한 마이어베어 풍의 주제가 베르디 특유의 이탈리아적 [열정]에 의해 소생된 셈이었다. 이 시기는 또한 베르디가 끊임없이 롯시니식의 은퇴의 조짐을 보여준 때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꽤나 부지런히 파리와 계속 접촉하며 끊임없이 소재를 찾아 다녔으나 그를 흥분시키는 소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의 승리를 갈망하는 그에게 이 같은 승리는 항상 그를 비켜갔지만, 1880년 파리에서 <아이다>가 그의 지휘로 공연되었을 때 마침내 그는 목적을 달성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진정한 걸작은 그 이후에 나타났다. <아이다>가 공연될 즈음 이미 <오텔로>의 씨앗은 작곡가의 속에 심어졌던 셈인데, <시몬 보카네그라 -1880-81년>와 <돈 카를로스 - 1882-3년>의 개정작업 때 베르디는 이 작품에 도전할 준비를 한 것이었다.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나 한치의 허술함을 찾아 볼 수 없는 완벽한 <오텔로>와 진실로 기적적 결구라 할 <팔스타프>가 제4기이며 최후의 시기를 웅대하게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일생에 한두 번은 영감이 고갈되는 위기를 겪던가, 혹은 작품세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획기적인 체험을 하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또한 비록 천재라 할지라도 평생에 한 번도 자기 회의 없이 요지부동의 자기 확신을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경우는 퍽 드물다. 베르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베르디의 생애에선 [자기 회의]와 [자기 확신]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 <나부코>의 공연(1842년)은 극단적인 자기 회의가 결정적인 자기 확신으로 뒤바뀐 전형적인 경우였다. -상

1839년(26세) 베르디는 밀라노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으로 고향인 부세토를 떠났으나, 이듬해 라 스칼라에서 공연된 그의 오페라 <하루살이 왕국 - 사기꾼 스타니슬라오>이 참담한 실패에 부닥치자 깊은 절망에 빠져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따라서 이후 곧 작곡된 <나부코>는 베르디 자신이 '이 오페라에 의하여 예술가로서의 나의 진정한 생애가 시작되었다' 고 단언한 작품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거의 작곡가의 의사에 반해서 탄생된 것이었다. 당시 베르디가 절망의 구렁에서 어떻게 되돌아왔던가에 대한 이야기는 - 이후의 그의 전 창작활동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지침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작곡가 자신의 고백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패배하여 자신을 잃었고, 음악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겨울날 저녁 때였는데, 우연히 나는 자신의 극장으로 가고 있던 메렐리 씨와 마주치게 되었다.큰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광경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메렐리 씨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팔로 내 팔을 감싸며 라 스칼라로 함께 가자고 권했다. 걸어가면서 그는 새로 준비하고 있는 오페라에 대한 애로사항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극장에 도착하자 그는 원고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걸 봐요. 솔레라의 대본이 바로 이거요. 가지고 가서 읽어 봐 줬으면 좋겠소.'
'내가 그걸로 무얼 시작한단 말입니까? 아니, 아니 싫소! 나는 대본을 읽을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부탁이오. 당신에겐 해가 되진 않을 거요... 그냥 한번 읽어보고 내게 되돌려 줘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원고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 오는 도중에 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감과 깊은 슬픔, 그리고 가슴속에 스며드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이 달갑지 않은 대본을 책상 위에 냅다 던져 버리고선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큰 문자로 쓰여진 두꺼운 책이었다. 떨어졌을 때 책이 펼쳐졌다. 내 시선은 거기 머물렀다. 다음 같은 시구가 선연하게 눈에 띄었다.

- 솟아올라라 내 마음, 황금의 날개를 타고. -

놀랍게도 그것은 성서의 [시편]속의 [바빌론의 강변]에 대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였다. 나는 계속 읽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성서를 읽는 것은 내게 언제나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구절 한 구절 계속 읽어 나갔다. 결국 다시는 쓰지 않기로 한 나의 결심을 고수하기 위해 나는 억지로 원고를 덮어 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나부코는 내내 머릿속에서 한없이 맴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번엔 대본을 한 번 뿐만 아니라 두 번, 세 번 계속 읽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다음날 아침엔 솔레라의 작품 전부를 암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초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날로 극장을 방문하여 원고를 메렐리 씨에게 돌려주기로 작정했다.

'어때요. 좋지 않아요?' 메렐리 씨는 물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렇게 좋았으면 작곡을 하시오.'
'천만에요! 나는 하지 않겠어요'
'작곡하시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지 않소. 작곡을 해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원고를 내 주머니 속에 밀어 놓고,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더니 내 코 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대체 내가 어떡해야 했을까! 잠자코 <나부코>의 원고를 주머니에 넣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밖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한 절, 내일은 다른 한 절, 하루는 한 소절, 다음날은 한 악절... 이런 식으로 조금씩 진행되어 이 오페라는 단시일 내에 완성되었다.

베르디는 <아이다 -1871년 12월 24일 초연>의 대성공 이후 사실상 오페라 작고에선 손을 뗄 작정이었다. 1873년에 현악사중주 한 곡을 작곡하고, 이듬해 이탈리아의 국민적 시인 만쪼니를 추모하는 <레퀴엠>을 완성했을 때 그는 이것이 [최후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은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랜 침묵 뒤에 그는 정녕코 그의 최대 걸작이 된 두 편의 오페라 -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또다시 작곡하게 된다. 자연은 이 거장의 내면에 잠재된 힘을 그대로 묻어 둔 채, 사장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작곡가로 하여금 다시 오페라에 착수하도록 이끌기 위해선 교묘한 책략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같은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출판업자 쥬세페 리코르디와 작곡가이며 시인인 아리고 보이토였다. 베르디는 젊었을 때부터 셰익스피어를 좋아해서 일찍이 <리어왕>을 오페라로 만들 계획을 품었었고, 1847년엔 <맥베드>를 공연해서 그 자신의 작품 경향에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따라서 G.리코르디와 보이토는 베르디가 <오텔로>에 관심을 갖도록, 마음속에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무르익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보이토의 대본이 작곡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오텔로>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텔로>나 <팔스타프>나 모두 보이토의 우수한 대본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1883년 <오텔로>가 완성됐을 때 베르디는 리코르디에게 탈고의 기쁨을 열광적으로 전하고 있다.
'<오텔로>가 완성되었소! 정말로 완성되었소!!! 드디어!!! !!! !! (1886년 11월 1일자의 편지)'

감탄부호를 8개나 붙인 73세의 노작곡가의 심경을 알 만하다. <오텔로>가 그의 마음속에 깃든 때로부터 실로 6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까. '작곡가는 <오텔로>에서 리하르트 바그너 쪽으로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실천했다.' 라는 평을 들었을 만큼 이 오페라는 종래의 그의 작품세계에 완전한 혁신을 가져왔다. G.모날디 같은 평자는 '베르디가 민족적 전승에 이바지하는 것은 <아이다>로 끝났다>' 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사실 베르디 자신은 소위 [바그네리즘]의 열풍에 점차 분개하고 있었지만, <오텔로>에서 보여주는 <로엔그린 - 바그너>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베르디의 귀는 그가 조우하는 온갖 대상에 활짝 열려 있었다. 롯시니와 도니제티, 메르카단테, 마이어베어, 베를리오즈 그리고 물론 바그너까지 - 이 모든 작곡가 속에 그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발견했다. <오텔로>는 그러므로 시초부터 그를 인도한 음악적 드라마에 대한 관념에 음악적 형태를 부여하는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험하며 수련을 거듭한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랄 수 있다. 그것은 오페라적 비극작자로서의 베르디에게 씌워진 최후의 왕관이었다. - 중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위대한 대가는 80에 이르러 <팔스타프>로써 다시 한번 경이로운 변모를 하게 된다. 1893년 2월, 라 스칼라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된 지 얼마 안되어 보이토는 까미유 벨래그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현대적이고 라틴적인 리릭 드라마(혹은 리릭 코메디)라고 당신은 말하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와 같은 리릭 코메디가 무대 위에서 창출하는 무한히 지적인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매력과 힘과 즐거움의 진정한 분출입니다. 셰익스피어이 불꽃 튀는 익살은 소리의 기적에 의해 선명한 터스카니식 원천으로, [지오반니 피오렌티노]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베르디는 <팔스타프>를 집중력을 가지고 맹렬한 속도로 작곡했지만, 이따금 악보를 밀어 놓고 힘을 얻기 위해 성서의 [수난기]를 읽곤 했다. 이 무렵에도 그는 매일 포도주를 마시고 엽궐련을 피우며 기분이 좋은 때는 트럼프 놀이도 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후 토스카니니는 <팔스타프>의 스코어 원고 속에서 다음 같은 말이 적힌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고 한다. '팔스타프의 마지막 악보, 모든 것이 끝났다! 할 수 있는 한 너의 길을 가라... 가라... 계속 너의 길을 가라... 아디오!'

베르디는 그의 세대에 속한 작곡가 중에서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내 이름에서는 이미 미이라 - 이전 시대의 냄새가 난다. 내 이름을 나 혼자 불러만 봐도 내 몸이 말라붙을 지경이다.' 라고 그는 스스로를 묘사하고 있다.(1898년 12월 15일자의 서신)

그의 친구들과 이전의 동료들은 차례로 그의 곁을 떠났다. 피아베(1876), 솔레라(1878)를 비롯해서 그의 프랑스인 출판업자 레옹 에스튀디에(1881), 쉴러의 역자 안드레아 마페이(1885)와 클라리나 페이(1886), 그의 제자 에마뉴엘 무지오까지 - 모두가 이미 타계했다. 그리고 1897년 11월엔 그의 두 번째 부인이며 필생의 반려자였던 쥬세피나마저 상 아가테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제 그는 정말로 완전히 혼자였다.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한밤중에라도 그는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여보, 들어 봐요!' 하면서 부인을 깨우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그에겐 그러한 공감의 순간을 함께 할 반려자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거의 한 세기의 세월을 축적해 온 이 위대한 노인은 흡사 그가 일생 동안 경도했던 셰익스피어의 작중인물인 양 인생에 대해 음울한 탄식을 쏟아 놓고 있다.

'인생은 고통이다. 젊었을 때는 생활의 미숙함, 감동, 가지가지의 방심과 방탕 속에서 마술에 걸려 꿈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약간 좋은 것과 약간 나쁜 것을 알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해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며 그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며 괴롭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병들고 지치며 실망하면서... 까지 계속 살아나가야만 한다.'(1898년의 편지에서)

베르디가 자신의 최후의 위대한 작품이라 생각한 것은 밀라노에다 그의 경비로 건축한 늙은 음악가들을 위한 [안식의 집(Casa di Riposo)]이었다. 이것은 보이토의 동생인 건축가 까밀로의 설계로 지어졌는데, 베르디는 쥬세피나와 더불어 자신이 사후 이곳에 묻히기를 바랬다.

만년의 그는 서서히 쇠약해지는 노구를 이끌고 상 아가테로부터 밀라노의 호텔, 제노아의 궁전 그리고 몬테카티나의 요양소 등을 왕래하며 인생에 대한 쓰디쓴 독백을 되풀이했다. 그의 주변엔 과거만이 남아 있었고 과거의 추억만이 환영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팔스타프>속에서 눈부시게 분출했던 저 노년의 빛나는 위트와 익살은 어디 가버렸을까?

아마도 그는 <팔스타프>에서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익살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광대로 태어난 것을' 이라고 노래하는 대신 '인생이란 한갓 걸어가는 음산한 그림자일 뿐' 이라고 탄식한 맥베드의 심경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노작곡가는 잠이 오지 않았으므로 대개 한밤중에야 자리에 들었다. 주위가 고요할 때면 거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쇠잔한 음성이 들리곤 했다. 이따금 그는 에라르 제작의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돈 카를로>의 음울한 장면의 도입부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군주는 잠에서 깨어나 타다 남은 촛대를 본다. 밖에는 이미 먼동이 트고 있었다.

이 세상 하직하는 최후의 길에
호사스레 날 치레해 주면
비로소 나는 잠들리라
모든 것이 끝나면
비로소 나는 잠들리라...

베르디는 20세기의 첫 크리스마스를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 그의 방에서 리코르디 부처와 보이토 그리고 소프라노 테레자 슈톨쯔와 함께 보냈다. 이듬해 1월 21일 같은 곳에서 베르디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엿새 뒤 사망했다.죽기 사흘 전 베르디는 카톨릭의 종부성사를 받았으며, 레옹까발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신세대 작곡가들이 유체 곁에서 밤샘을 했다. 고인의 얼굴은 평온했으며 조각가 L.제키가 데드마스크를 떴다.

'나의 매장은 아주 검소하게 해주기를 바라며, 새벽이나 또는 성모 예배의 종이 울릴 때가 바람직하다. 두 명의 신부, 두 개의 촛대, 그리고 한 개의 십자가로써 충분할 것이다. 상 아가테 마을의 빈민에게는 내가 죽은 후 6천 리라를 나누어주기 바란다' 는 고인의 소망에 따라 장례식은(1월 30일) 요란한 의식 없이 간소하게 치러져 그의 육체는 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 뒤(1901년 2월 28일) 쥬세페 베르디의 유해는 고인의 희망에 따라 [안식의 집]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때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이 국민적인 음악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9백 명의 가수들이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오페라 <나부코>의 합창을 노래했다.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북 이탈리아 점령에 항의하는 이탈리아의 애국심을 위한 [구심점]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오페라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또한 지난날 절망의 늪 속에 빠져 있던 작곡가에게 홀연 광명의 길을 가리켜 준 작품이기도 했다. [날아라 내 마음, 황금의 날개를 타고!]

베르디의 죽음에 부쳐 보이토가 한 말은 이 거장에게 바쳐진 가장 적절한 찬사인 듯하다.
'그는 자신과 더불어 엄청난 빛과 온기를 가져가 버렸다. 우리는 모두 이 올림푸스 신과 같은 노년의 빛을 쬐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이와 같은 증오심을 이전에 나는 정녕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속에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이 90대 거장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출처-http://www.suns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