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옛시조 모음

느림과 비움의 풍류

淸山에 2009. 9. 11. 15:13

 

 

느림과 비움의 풍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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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기우도(仙人騎牛圖) / 김홍도  

 

 

 

선인기우도(仙人騎牛圖)는 탕건을 쓴 한 선비가
소 등에 비껴 앉아 고적한 교외(郊外)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선비의 자세가 앞쪽으로 약간 쏠린 것을 보니
졸고 있지 않으면 낮술 한 잔에 취해있는 모양이다.
하늘 멀리에는 인기척에 놀란 물새들이 황급히 날아오르는데,
소등의 선비는 물새의 놀란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몰아의 경지에 깊이 빠져있는 표정이다.


옛 선비들이 소를 타는 것은 오직 느리고자 함에 있었다.
그들은 왜 느리고자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조선조 선비들은 물욕을 버리고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자
말 대신 소를 타는 것이라 했으며,
소를 타는 즐거움을 진정한 풍류를 아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화면 가운데는 그림으로 못다 표현한
시심(詩心)을 담은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落花流水閒啼鳴
一事無干陸地仙

 

떨어진 꽃잎은 물위에 흐르고
한가로운 새는 울며 지저귀는데
아무 일도 없는 육지의 신선이네


그림은 한 시대의 사회상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정신세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선비가 아닌 화원이 그린 그림이지만
[선인기우도]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류 생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權近)
기우(騎牛)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파하였다.


산수를 유람하는 데는 오직 마음속에 사사로움과 누(累) 없는 뒤에라야
가히 그 즐거워하는 바를 즐길 수 있다.
나의 벗이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가지고 소를 타고 산수 사이에서 놀았다.
그 유람하는 즐거움으로 벗은 능히
옛 사람이 알지 못한 묘한 바를 다 얻었을 것이다.
무릇 물체에 눈을 주시함이 빠르면 정(精)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미묘함을 다 얻는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니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생각하건대 밝은 달이 하늘에 있으매
산은 높고 물은 넓어 상하가 한 빛으로,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한계가 없는지라,
만 가지 일을 뜬구름과 같이 여기고
긴 휘파람 불며 소를 놓아 가는 대로 맡기고
생각나는 대로 술을 부어 마시면
흉중이 유연하여 스스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니,
이 어찌 사사로움과 누(累)에 구애된 자 능히 할 바이랴.


권근의 말을 빌리면 혼자서 즐기는 풍류 중에
소를 타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것이 없다.
소를 타는 풍류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 뱃놀이와 비슷하지만,
배를 타는 것은 위험하여, 소 등의 안전함과 같지 못하다.
배를 저어 가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며,
또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오르는 것은 더욱 수고로운 일이다.


때로 술도 없고 안주도 없을 때에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청하여 술 한 병 얻고자 할 때,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으면 외딴 주막에 들러
탁주와 산채 한줌을 허리에 차고 소요음영할 수 있으니,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무엇에 견줄 수 있겠는가.


선비들이 말을 두고 소를 탄 이유는 오직 더디고자 함이었다.
또한 빠른 말을 마다하고 굳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말이 있듯이
빠르면 사물의 실체를 보기 어렵다.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사물의 전체를 정(精)하게 보면
시비와 진위의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
소를 택한다는 것은 현실의 굴레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고자 함이다.
현실적인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탈속의 의미이며
이것은 곧 풍류도와 통한다.


실제로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생각에서 소타는 풍류를 즐겼다.
서거정(徐居正), 맹사성(孟思誠), 송질(宋), 조태만(趙泰萬)등이
소를 타며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맹사성
(孟思誠)이 단연코 으뜸이 아닐까 싶다.


맹사성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민정을 살피고,
벼슬살이로 받은 봉금에서 생활비만 남기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비가 샐 정도로 초라한 초가에서 살았지만
피리 불며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살았다.


더욱이 집에 있을 때면 늘 서너 곡 이상 피리를 불었기에
사람들은 동구에 들어서서 피리 가락이 들리면
맹사성이 집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50년 가까이 관직에 있으면서,
그것도 정승까지 지낸 사람의 유품이
고작 벼루와 자신이 만든 피리가 전부였다니,
그 어떤 일화보다 감동적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만약 자신의 자식이거나 남편이
맹사성 같은 청백리였다면
곽재구 시인처럼 칭송이 가능했을까?
20세기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맹사성을 가르치거나 칭송하는 일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까?

 

차라리 아래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처럼
조금은 더 여유롭게 유유자적한 모습이
선비의 진실된 모습이 아닐까한다.

 

 

[맹사성 / 곽재구]


장관이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 아침
기다렸던 TV 기자들은
버스를 탄 소감을 묻고
나는 맹사성을 가르친다
조선 세종조의 좌의정
즐겨 소를 타고 피리를 잘 불었으며
비 새는 초가살이를 기쁨으로 여겼다
좌의정이면 어느 정도 벼술일까
날아가는 새도 떨어지는 서슬이라는데
관복은 한 벌 평상복은 수십 번을
기워 입었다는데
20세기 코리아의 장관은
365일 허구헌 날 어느 하루
버스 출근이 TV 뉴스가 되고
잘사는 이웃나라 대장성 장관은
열세평 아파트에
전철 출근 예사라는데
옛 정승 맹사성은 가마 아닌
소를 타고 출근을 하고
청렴하여 더욱 아름다운 가락의
피리를 불고
맹사성을 가르치다가
나는 옛 역사가 들려주는
향내 깊은 피리소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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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 김홍도

 

 

紙窓土壁 終身布衣 嘯永其中    

흙벽에 아름다운 창을 내고 남은 삶을 자연인으로 노래와 시를 읊조리며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