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대전의 특징]
제2차 세계대전은 2개의 축을 중심으로 행해졌는데, 유럽에서는 영·독전쟁과 독·소전쟁,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각각 독자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전쟁 초기에는 제국주의전쟁(영·독전쟁, 태평양전쟁), 조국방위전쟁(독·소전쟁),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전쟁(중·일전쟁) 등의 성격을 띠었으나,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개별적 대항 관계였던 전쟁이 점차 유기적인 연관을 갖게 되면서 연합국(영국·미국·프랑스·소련·중국) 대(對) 추축국(樞軸國;일본·독일·이탈리아)이라는 기본적인 양 진영의 대결국면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이 구도는 민주주의 옹호를 위한 반파시즘전쟁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기본적 성격이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전쟁의 시작]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세계 각국의 자본주의의경제가 독점단계에 들어서자,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 상품의 판로와 원료공급지 획득을 위한 치열한 식민지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선진제국주의 국가들과 뒤늦게 영토분할에 뛰어든 후발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대립은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었으며 국지전도 빈발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의 발칸지방을 둘러싼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결양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필연적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의 사라예보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프랑스에 대해 각각 선전포고를 했으며, 8월 4일에는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유럽 열강은 7월 28일부터 불과 1주일 만에 일시에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4년이나 계속되었고, 신무기의 등장, 국내경제의 총동원, 그리고 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붕괴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종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제국주의 전쟁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우연한 요소에 의한 우발적 성격을 지녔던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된 전쟁이다.
즉 일왕 히로히토〔裕仁〕 및 히틀러는 신중한 준비를 거듭한 끝에 의도적으로 전쟁의 도발을 감행하였다. 서유럽 중심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9월 3일 독일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선전포고로부터 확대·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대전의 시점을 연합국 대(對)추축국이라는 기본적 적대관계가 명확해진 시기로 본다면 그것은 41년 12월이 될 것이다.
이미 영국·프랑스와 교전하고 있던 독일은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을 깨고 41년 6월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영국·소련의 연합을 초래하였으며, 그 해 12월 8일 일본이 미국·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유럽에서의 영·독전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12월 9일 중국은 일본·독일·이탈리아에, 12월 11일 독일·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37년 7월부터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4월 중화소비에트정부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전쟁의 발단]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부터 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종료까지를 연속된 과정이라고 보아 17세기의 30년전쟁에 이은 제2의 30년전쟁이라고 보는 견해(노이만)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前史)로는 29년 10월부터 시작된 세계경제공황이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33년 히틀러정권의 성립 역시 이 공황의 사회적·정치적 영향을 무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동유럽·중유럽에서는 혁명운동이 소용돌이쳤고, 중국·인도·아랍세계 등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이 고양되고 있었다. 미국대통령 윌슨의 <14개조>는 이와 같은 민중운동의 소망과 기대를 대변하는 듯했으나, 이상적인 그의 민족자결주의는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의 제국주의적 현실주의에 이용당했다.
더욱이 미국의회는 베르사유조약을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윌슨주의는 와해되면서 미국은 오랜 외교정책인 고립주의로 전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이 등장하였고 패전국 독일은 약체가 되었으며 전승국이라고 하지만 영국·프랑스·이탈리아 3국도 전쟁피해와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피폐해졌다. 한편 미국과 일본이 대두함으로써 자본주의세계의 내부구조는 크게 변동하였다.
최강의 자본주의국가가 된 미국이 고립주의로 전환한 것은 세계정치와 세계경제에서 최대의 발언권을 유보하려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련은 전후처리 회의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간섭전쟁에서 배제되었고 폴란드·루마니아에게 영토를 빼앗겼으며, 공산주의세력을 막으려는 서유럽으로부터 격리당하였다.
이 격리는 핀란드로부터 발트 여러 나라와 폴란드를 거쳐 루마니아에 이르는 이른바 <방역선(防疫線)>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계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 소련을 배제하고 더구나 국제적 고립까지 강요하는 베르사유체제는,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제국주의 열강이 지배하는 반소적·반혁명적 국제질서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소련은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는 데 힘쓰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포위 및 반소비에트십자군의 위협을 늘 경계하였다.
베르사유체제는 패전국 독일을 억압하는 체제로서 성립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을 강요당하여 식민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삭감되었고, 엄격한 군비제한조치를 받았으며 막대한 배상금 때문에 허덕였다. 더욱이 전쟁책임은 독일에만 있다고 규정하여 독일인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이리하여 베르사유조약의 수정(修正)은 독일민족주의의 지상목표가 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조약은 3대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의 이익과 타협의 산물이었으므로 이에 강한 불만을 품은 전승국인 이탈리아·일본도 수정을 요구하였다.
베르사유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강경책을 추구한 프랑스는 23년 초 배상금 인도지연(引渡遲延)을 들어 독일경제의 심장부 루르지방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독일경제는 허물어져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어 독일은 <수동적인 저항>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고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배상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다.
배상문제는 미국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전채문제(戰債問題)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1924년 미국 주도하의 도스안(案)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미국자본으로 독일경제를 재건하고 독일이 지불하는 배상금으로 영국·프랑스는 미국에게 전쟁채무를 갚는다는 내용이었고, 이로써 독일경제가 부흥되자 유럽경제는 급속히 안정되어 갔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강경정책의 좌절은 프랑스가 추구하는 유럽에서의 정치적·경제적인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영국에 대한 종속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의 경제적 안정은 정치적 긴장을 완화시켰다. 25년 독일·프랑스 국경을 다각적으로 보장하는 로카르노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에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프랑스는 라인란트에서 예정보다 일찍 철수했다. <로카르느정신>은 크게 선전되었고, 28년에는 전쟁포기를 상징하는 부전조약도 성립되었다.
그렇지만 29년 10월 말 뉴욕주식시장의 대폭락을 계기로 세계경제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황금의 20년대>도 잠깐 동안의 번영에 지나지 않았다.
[나치당과 독일의 재무장]
1933년 1월 독일에서 성립한 히틀러정부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국제연맹의 무력한 대응을 보고, 그 해 10월 군비평등권이 인정되지 않은 것을 이유로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이는 히틀러가 재군비정책을 취하게 된 것을 뜻한다.
35년 3월 재군비 사실을 은폐할 수 없게 된 나치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의 군비제한조항을 무시하고 재군비를 선언하였다.
그 해 5월 프랑스·소련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자, 영국은 이것이 서유럽과 독일의 대립을 깊게 하고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리라고 보고, 독일과 타협함으로써 독일을 일정한 제약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그 해 6월 영국·독일해군협정을 체결하고 영국·독일 해군력의 비율을 100 대 35로 정함으로써 베르사유조약을 수정, 독일의 재군비를 사실상 용인했는데 어느 나라도 이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1933년 10월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하자 무솔리니는 당혹했다. 그 해 6월에 가조인되었던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4개국협정이 독일의 연맹탈퇴로 인하여 소멸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4개국협정은 군축문제로 대립하고 있던 독일·프랑스 사이를 조정하는 것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식민지 획득에 관한 양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솔리니는 그 전부터 지중해제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는데, 35년 1월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과의 회담에서 에티오피아침략이 묵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그 해 4월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수뇌에 의한 스트레자회의에서도 영국·프랑스가 독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이탈리아에게는 타협적일 것이라고 판단, 우기(雨期)가 끝나는 10월에 에티오피아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이은 제2의 공공연한 무력침략으로서 국제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국>이라 규정하고 연맹규약 제16조에 의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했으나, 가장 중요한 석유는 금수품목(禁輸品目)에서 제외하였다. 이는 석유의 금수조치가 전쟁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영국과, 이탈리아와의 우호관계를 바라는 프랑스가 처음부터 제재조치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6년 5월 에티오피아의 왕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이탈리아군은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는 <신(新)로마제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국제연맹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영국·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대립은 심각해졌다.
히틀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용하여 36년 3월, 독일을 목표로 하는 프랑스·소련상호원조조약이 비준되려 한다는 구실로 갑자기 라인란트비무장지대로 진주,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독일주권의 완전한 회복과 정치적·전략적 지위가 개선되었음을 뜻하였다. 그런데 독일의 비무장화가 베르사유조약 및 로카르노조약에 규정되어 있고 이것이 프랑스의 안전보장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프랑스가 단호한 군사적 대항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 베르사유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안전보장체제를 포기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내전]
1936년 7월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정부에 반대하는 프랑코장군의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이탈리아는 즉시 프랑코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히틀러는 에스파냐에서 경제적·전략적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면서, 특히 영국의 동향에 대한 주목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스파냐 인민전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인민전선정부는 원조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내전이 독일·이탈리아 대(對) 영국·프랑스의 전쟁으로 확대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씻을 수 없었던 영국은, 프랑스정부에 압력을 넣어 함께 불간섭정책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 해 9월 독일·이탈리아를 포함하는 불간섭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독일·이탈리아는 반란군에 대한 원조를 강화한 반면, 국외로부터의 원조를 얻지 못한 에스파냐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소련은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정부군에 대한 무기원조를 공공연히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반파시즘운동도 인민전선을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내전은 영국·프랑스의 유화정책으로 고무된 독일·이탈리아와 이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의 소련, 즉 파시즘 대(對) 민주주의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본적 적대관계가 일찍이 여기서부터 나타난 것이다. 독일·이탈리아에게 유화적인 영국의 불간섭정책을 확인한 히틀러는 36년 여름 리벤트로프를 주영대사로 임명하여 영·독동맹 실현을 위해 힘쓰는 한편, 4년 이내에 전쟁준비를 갖추고 독일경제를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그 해 8월 경제개발4개년계획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침략, 특히 스페인내전에서의 프랑코에 대한 원조문제로 영국·프랑스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반면 독일과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6년 11월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독일·이탈리아 <추축>을 과시하였다. 이어 같은 달 독일·일본방공협정(防共協定)이 체결됨으로써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연합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뮌헨회담]
1937년 11월 초, 히틀러는 군부의 수뇌와 외무장관에게 중대한 정책을 선언하였다. 독일의 군사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될 43-45년까지 <생존권(生存圈)>을 획득하기 위하여, 우선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를 타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 세계대전을 우려하는 군부의 수뇌를 경질시키고 스스로 국방군을 통수함과 동시에 외무장관에 리벤트로프를 임명하였다.
이탈리아와의 추축 형성을 통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방(合邦)의 최대 장애도 제거된 셈이었다.
이리하여 38년 2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총리 슈슈니히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3월에 합방하였다. 그 뒤 주데텐지방의 독일인 자치운동을 선동하였고, 38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당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으로라도 병합시킨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전쟁의 위기 앞에서 9월 15일 영국총리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찾아가 주데텐독일인의 자결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프랑스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정부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9월 22일 다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찾아가자, 히틀러는 요구를 한층 강화하여 즉각적인 점령을 요구하면서, 9월 28일을 기한으로 독일군이 진격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무솔리니가 개입하여 9월 29·30일에 뮌헨에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4개국회담을 열어 히틀러의 요구대로 주데텐지방을 독일에게 준다는 뮌헨협정을 성립시켰다. 체임벌린은 약소국을 희생물로 삼아 침략자와 타협하여 이루어진 뮌헨의 평화를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자찬하였다.
[개전의 서막]
히틀러는 뮌헨협정에 만족하지 않고, 39년 3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대통령 하하를 협박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키고 15일 이 나라를 점령했으며, 16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21일에는 폴란드에게 단치히(현재의 그다니스크)를 할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 해체에는 합리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여론은 악화되었으며 그 때까지의 대(對)독일의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다.
3월 31일 체임벌린은 폴란드의 주권을 보장한다고 성명함으로써 히틀러를 견제하였다. 4월 3일 히틀러는 군에 명령하여, 9월 1일까지는 폴란드를 공격할 준비를 완료하라고 하였다. 영국이 징병제를 결정하자, 4월 28일 히틀러는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1934)과 영·독해군협정(1935)의 폐기를 선언했으며, 5월 22일에는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조약(강철조약)을 체결하였다.
영국·독일전쟁의 위기가 급박했을 때 영국이 어떠한 정책을 목표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 목표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론·책임론과도 얽혀서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다.
그 당시 체임벌린의 가장 큰 정책목적은 대영제국의 유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하였다. 새로운 세계전쟁이 일어나면 인도와 아랍세계의 민족운동이 격화될 것이고 제국이 붕괴되는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국을 안으로부터 동요시키는 민족운동을 사전에 막아야만 했으며, 이들 민족운동을 선동하는 소련도 고립시켜야만 했다.
또한 나라 밖에서는 동아시아의 일본, 지중해의 이탈리아, 중부유럽의 독일 등이 베르사유체제·워싱턴체제의 수정을 요구하며 영국의 주변에서 공공연한 침략을 자행하면서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은 독일이었다.
영국은 그 때까지 독일의 수정 요구가 합리적이고 대영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독일의 요구를 인정하며 지지해왔다.
체임벌린은 베르사유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독일을 서유럽 열강, 즉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 의한 새로운 국제질서 안으로 편입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영국·프랑스 대 독일·소련의 대립관계는 세계전쟁으로 발전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피해야만 했으며,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해둘 필요성까지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체임벌린의 정책은 폴란드의 주권을 보장한다고 했던 3월 31일의 성명에서 독일에 대한 그의 입장이 바뀐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책목적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소련에 대한 교섭은 이런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여론에 밀려서 프랑스와 함께 소련과의 동맹교섭을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교섭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소련은 뮌헨회담 이후 영국의 유화정책에 대해 불신을 품고 있었으며, 39년 5-9월의 <노몬한사건>은 동서 양쪽으로부터의 양면전쟁의 위험을 드러냈다.
1939년 5월 소련 외무장관에 몰로토프가 취임했는데, 이는 리트비노프의 집단안전보장정책으로부터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었다.
8월 영국·프랑스와의 동맹교섭이 정체되자, 독일·폴란드전쟁이 독일·소련전쟁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독일에 접근, 8월 23일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소련은 제국주의전쟁의 권외(圈外)에 서서 국방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이 독일의 폴란드공격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사실은, 비밀부속의정서에 폴란드분할을 규정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조약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양국의 제휴였던 만큼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영국·프랑스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에 이르렀고, 일본에서도 히라누마내각〔平沼內閣〕이 무너짐으로써, 독일과 일본의 군사동맹교섭은 보류되었다.
한편 39년 미국의 세계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38년 11월의 이른바 <수정(水晶)의 밤>인 유대인학살(pogrom) 이후 미국과 독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루스벨트대통령은 고립주의를 의식하여 대독정책에 변화가 드러나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미국의 동향을 끊임없이 주목하고 있었던 히틀러는 39년 1월 말에 이 사건을 유대인의 소행이라고 하면서 국제유대인들의 음모를 비난하였다. 루스벨트는 미국 대(對) 일본·독일과의 세계적 대립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른바 <레인보> 작전계획을 입안하게 하였다(39년 6월 30일 제출). 일본 및 독일로부터의 양면전쟁의 위험에 직면한 루스벨트는 독일로부터의 위협이 더 클 것이라고 보았으나 군부는 일본을 주된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또한 루스밸트는 세계전략적 관점에서 소련을 일본·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지렛대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이 39년 7월 22일의 크레이기·아리타〔有田〕협정에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사실상 묵인하자, 그 달 26일 미국은 11년에 체결한 미국·일본통상항해조약을 파기했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다는 자세를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독일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을 견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독일·소련불가침조약에 의하여 소련의 중립을 확보하고 동쪽과 서쪽의 양면전쟁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히틀러는 주저하고 있었다.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한 것은 39년 8월 31일이었는데, 폴란드침공을 위한 군사적 준비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의 작전계획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9월 1일, 드디어 독일은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 달 3일, 영국·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영국·프랑스와의 전쟁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원인론의 핵심을 다루는 것인 만큼 이견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지속적인 준비·계획하에 대전을 일으켰다는 호퍼의 주장에 대하여 테일러는 기회주의자인 히틀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 정치가들의 계산착오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테일러논쟁).
히틀러는 제3제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의 총체적 위기 때문에 전쟁 이외의 다른 정책은 선택할 수 없었다(메이슨)는 주장과 설혹 그런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히틀러가 39년 9월 전쟁을 시작한 까닭은 설명될 수 없고 군비상의 우위를 잃을까 두려워한 그가 전쟁을 시작했다는 E.H. 카의 견해도 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유도 여론 때문임이 분명하나, 이 문제도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와 관련지어 논의되고 있다.
가령 히틀러의 수정요구가 단치히에 국한되는 합리적인 것이었다면 영국·독일의 타협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히틀러의 요구는 분명히 발칸반도에서의 <생존권> 획득에 있었다. 이는 영국이 도저히 용납할 없는 것이었으므로 영국·독일의 타협 여지는 없었다.
프랑스의 선전포고는 영국에 뒤따른 것이었다. 프랑스국민은 나치즘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한 데 대해 직접적이거나 중대한 국민적 이익의 침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전쟁에 대비한 경각심도 낮았다.
무솔리니는 39년 9월에 제2의 <뮌헨회담> 주재를 꿈꾸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강철조약에도 불구하고 군비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전(非交戰)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대전의 시작]
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은, 공군과 기갑부대의 긴밀한 상호협조에 바탕을 둔 전격작전의 성공으로 2주일도 안 되어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9월 17일 소련군은 러시아민족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 영내로 침입하여 부크강까지 병력을 전진시키고, 9월 28일 <독소경계 및 우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두 나라는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소련은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였다. 폴란드정부는 루마니아로 망명하였으나, 독일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당국에게 구금당하였다. 9월 30일에는 파리에서 시코르스키망명정부가 수립되어 영국·프랑스·미국의 승인을 얻었으며, 이윽고 폴란드는 10만 명이나 되는 망명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소련-핀란드전쟁]
소련은 다시 1939년 10월 초에 핀란드에 대하여 항코섬을 조차(租借)할 것, 레닌그라드 주변지역 및 카렐리아지협의 일부를 다른 지역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교섭이 결렬되자 11월 30일 핀란드에 침입하였다(겨울전쟁).
그러나 핀란드국민은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소련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에서의 고전과, 36-38년에 있었던 소련군수뇌에 대한 대숙청은, 훗날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미국의 군부가 소련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게 하였으며, 41년 6월의 독·소전쟁 때에는 소련군의 저항능력이 2-3개월 정도라고 판단하게 하였다. 1939년 12월 14일, 유명무실했던 국제연맹은 소련을 침략자라고 규정하여 제명하였다. 영국·프랑스는 핀란드를 돕기 위하여 병력을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소련과 핀란드도 전쟁을 조속히 끝낼 것을 희망하여, 40년 3월 12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소련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핀란드에 대한 원조계획의 실패 때문에 달라디에가 물러나고, 그 대신 레이노내각이 수립되었다.
[대전의 확대, 독일의 덴마크·노르웨이침공]
영국·프랑스의 핀란드원조계획은 한편으로는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의 여러 항구를 확보하고 스웨덴철광석을 장악함으로써 독일군수산업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였으나, 40년 4월 독일이 기선을 제압하여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국군·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이런 독일군의 승리는 노르웨이·육군장관 크비슬링의 공모(共謀)에 힘임은 바가 컸으며, 이후 <크비슬링>이란 반역자, 매국노를 뜻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실패를 책임지고 40년 5월 10일 체임벌린내각이 총사퇴한 뒤 독일에 대한 강경론자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프랑스 침공계획]
영국·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뜻밖의 일로 여긴 히틀러는 폴란드에 대한 전쟁을 끝낸 뒤인 39년 10월 6일 영국·프랑스에게 화평을 제의했으나 영국·프랑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영국·프랑스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격을 펼치지도 않고, 독일·프랑스국경을 따라서 만들어 놓은 요새인 마지노선에 의존하여 독일의 군사적 압력을 피함과 동시에 독일의 경제적 약화를 도모하는 계획에만 몰두하였다.
스칸디나비아작전도 그 일환이었으며, 그 밖에도 발칸작전계획 또는 독일의 석유공급원을 차단하기 위한 소련의 카프카스(코카서스)지방 폭격계획 등이 그것이었다. 이 계획들은 전쟁이 영국·프랑스 대 독일·소련의 대립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평제의를 거부당한 히틀러는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타도한다면 영국도 타협해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프랑스에 대한 작전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전선교착을 염려한 군부의 소극적 태도와 일기불순 때문에 여러 차례(40년 5월 10일까지 29회) 연기되었다. 더욱이 참모장교의 사고로 작전계획이 누설되기도 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벨기에중앙부를 돌파한다는 당초의 계획은 삼림지대인 아르덴지방을 기갑부대로 돌파한다는 만슈타인계획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의 항복]
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국가인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침공하였다.
연합군은 불시의 공격을 받아 5월 15일 네덜란드군이 항복하고, 네덜란드국왕과 정부는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5월 19일 독일군이 마지노선 북단을 간단하게 돌파하여 영국해협까지 도달함으로써 영국·프랑스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5월 28일 벨기에국왕은 군대와 함께 독일군에게 항복하였고, 북부에서 고립상태에 있었던 영국·프랑스군 33만 명은 6월 4일까지 ?케르크에서 영국본토로 철수하였다.
6월 5일 독일군은 파리를 향하여 총공세를 펼쳤으며,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런 정세를 본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했으나, 군사적으로 유효한 작전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프랑스총리 레이노는 루스벨트에게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간절히 요청했으나, 루스벨트는 고립주의적 여론이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간청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영국총리 처칠은 레이노내각에게 <영국·프랑스연합>을 제안하면서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식민지를 거점으로 하는 결사항전을 권고해 보았으나, 레이노내각은 이것을 거부했으며 6월 16일 총사퇴하였다. 그 뒤를 이어 페탱원수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그 이튿날인 17일 독일에 항복하였다.
휴전협정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동일하게 콩피에뉴 숲의 철도차량 속에서 6월 22일 조인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본토의 약 2/3는 독일군 점령지로 편입되었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인 <자유지대>는 식민지와 함께 비시로 옮긴 페탱정부에게 맡겨졌다. 7월 10일 제3공화국헌법이 폐지되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면서 파쇼적인 체제가 수립되었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망명한 드골장군은 런던에 <자유프랑스민족위원회>를 수립하고 국민에게 독일에 대한 항전을 호소하였다.
[영국의 저항]
프랑스의 항복을 받은 히틀러는 영국과의 타협에 의한 평화를 기대하였다.
"영국은 제국유지가 보장된다면 독일의 유럽대륙 지배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처칠의 항전의지는 확고하여 나치즘과는 타협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40년 7월 19일 히틀러의 평화호소를 일축하였다.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 없다면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 이외에는 디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히틀러는 영국본토상륙작전(바다사자작전)을 구상했는데, 이는 제공권 획득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작전이었다.
이리하여 히틀러는 7월 16일 <바다사자작전> 준비를 명령함과 동시에 8월 13일 괴링의 지휘로 영국공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제공권 장악에 있었으므로 영국 전투기 격추, 공군기지·군수공장 폭격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영국의 연안레이더망이 훌륭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공군도 성능이나 장비·훈련에서 뛰어났으므로 독일공군은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9월 7일 런던폭격을 시작하였으며, 11월 14일 코번트리공습 이후 도시에 대한 야간 무차별폭격으로 방침을 바꾸었는데, 이는 군사적 압력으로부터 경제적·심리적 압력 전술로 전환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바다사자작전>을 이듬해인 41년 봄까지 연기한다고 이미 10월 12일에 결정한 바 있었다.
[소련침공]
히틀러는 <바다사자작전> 준비를 명령하는 동시에 영국과의 타협의 길을 모색하면서 40년 7월 31일 육군 수뇌에게 이듬해 봄을 예정으로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는 결심을 보여 주었다.
히틀러는 영국이 소련과 미국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을 점령한다면 영국은 최후의 보루를 잃게 되고, 독일은 유럽과 발칸지역 지배자가 될 것이며, 또한 소련을 무너뜨림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위 강화로 미국과의 대립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40년 8월 제공권을 둘러싸고 영국과의 전투가 시작되는 한편 육군은 소련과의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작전계획이 검토되고 180개사단의 장비를 생산하기 위해 30만이나 되는 노동자가 군수공장에 일시적으로 투입되었다.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한 40년 7월, 소련은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어 이 나라들을 합병하였으며, 루마니아에게도 최후통첩을 보내어 베사라비아지방과 북(北)부코비나지방을 할양하게 하였다.
이는 소련으로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임과 동시에 독일에 대한 예방조치였으나, 히틀러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루마니아가 소련에게 굴복하자 헝가리와 불가리아도 루마니아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하였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의 교섭은 타결되었으나 헝가리와의 교섭은 결렬되었다.
소련의 개입을 경계한 히틀러는 갑자기 40년 8월 말에 빈에서 무솔리니와 함께 루마니아와 헝가리 관계를 조정(調停)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을 제외한 처리방식으로 독일에 대한 소련의 불신감은 더 커졌다. 더욱이 히틀러는 10월 루마니아에 독일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고 11월 헝가리와 루마니아, 41년 3월 불가리아를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에 가맹시켰다. 소련·핀란드전쟁에 대하여 친소적 중립입장을 취했던 히틀러는 그 뒤 핀란드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보여 왔으나, 이러한 정책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핀란드에 무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페차모지역 니켈광산 장악을 예상하여 북노르웨이 주둔부대를 강화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히틀러는 소련을 포위하려는 자세를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의 3국동맹에 소련을 가맹시켜 <마드리드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대륙블록>을 형성하여 영국·미국에 대항한다는 방안은 현실적이지 못했으며, 40년 11월 12-13일 독·소회담에서 양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2월 18일 히틀러는 대소작전(바르바로사작전) 준비를 41년 5월 15일까지 완료하라고 명령하였다.
39년 5월의 군사동맹조약(강철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이탈리아는 군사협력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호불신이 깊어졌다.
무솔리니는 독자적으로 40년 10월 갑자기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겨우 2주일 만에 패하여 독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이틀 후 친서유럽적 경향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4월에 유고슬라비아로 침입하여 단숨에 전 영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5월에는 공수부대(空輸部隊)로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29일 발칸작전을 끝낸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공격개시 날짜를 6월 22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 독일부총통 헤스는 혼자서 비행기를 조종하여 영국 본토에 들어가 소련과의 전쟁을 위해 영국·독일의 휴전을 실현시키려고 하였으나 영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40년 11월의 독·소회담 실패 후 동부와 서부의 전략적 지위 강화에 힘썼다.
41년 1월 10일 제2차 독·소경제협정을 맺고 독일에 대해 계속 전략물자를 공급했으나, 41년 봄 독일의 발칸작전을 보고, 4월 13일 갑자기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장관과 소련·일본중립조약을 맺고 동아시아에서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5월 6일 스탈린은 스스로 총리가 되어 급박하게 변하는 사태에 대처하려고 하였으나, 그 해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독·소전쟁의 개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발트해로부터 카르파티아산맥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 영토로 침입하였다.
118개 보병사단, 15개 기계화사단, 19개 전차사단, 병력 300만, 전차 3600대, 항공기 2700대의 규모로서, 이는 독일육군의 75%, 공군의 60%에 해당하였다.
이와 함께 핀란드군·루마니아군·헝가리군·체코슬로바키아군·이탈리아군도 참가하였다. 북부군은 발트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고, 중부군은 스몰렌스크를 지나 모스크바로 진격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나아갔다.
히틀러와 군부는 소련의 사회주의체제가 내부로부터 급속히 붕괴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3-4개월 안에 소련군의 주력부대를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초반의 우세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7월 말 이후에는 전선(戰線)이 교착되기 시작하였다. 10월 초, 히틀러는 모스크바공략을 명령하였다. 소련정부는 쿠이비셰프로 후퇴해버렸고 모스크바는 계엄령하에 놓였다. 11월, 겨울장비가 없었던 독일군은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해 모스크바공략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12월 초에는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소련에 대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전제로 한 히틀러의 세계전략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11월 말, 군수장관 토트는 전시경제가 막다른 지경에 빠지자 전쟁을 정치적으로 끝내자고 히틀러에게 진언하였다.
한편 독일군에 의해 소련군이 거의 궤멸상태가 되었던 7월 3일, 스탈린은 라디오연설에서 이 전쟁은 파시스트억압자에 대한 조국방위의 <국민전쟁(大祖國戰爭)>이라고 말하고, 국민들에게 파르티잔전투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공업시설을 우랄산맥 동쪽으로 옮김과 동시에 붉은군대 재건을 도모하였다.
12월 초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반격은 소련이 영국·미국의 물자원조 없이 자체역량으로 패배위기를 극복했음을 뜻한다.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영국·미국은 즉각 소련을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소련의 항전능력을 2-3개월로 여겼으므로 그들은 전황의 변화만을 주시하였다. 7월 말 루스벨트의 측근인 홉킨스는 모스크바 방문으로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을 재평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11월 초에 소련에 대해 무기대여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12월에 미·일전쟁이 일어나고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영국·미국·소련의 <대동맹>이 형성되었다.
미국의 참전은 영국·미국·소련의 승리를 굳혔으나 독일과의 전쟁에서는 그 부담을 전면적으로 떠맡은 소련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목적을 실현했으며, 세계대전 후의 국제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의 열세]
미국이 참전하자 영·미회담에서 독일 타도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유럽중시정책이 재확인되었는데, 독일을 타도하기 위한 전략을 둘러싸고 영국·소련이 대립하였다. 소련은 독일군을 분산시켜 자체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서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42년 6월 미국이 그 해 중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에 합의하자, 7월 영·미군사회담에서 영국은 이를 연기시키고 북아프리카 상륙작전 실시를 결정하게 하였다. 처칠은 지중해로부터 중동·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한 채, 독일이 비교적 열세인 지역부터 공격하려고 하였다.
1942년 여름의 북아프리카전선은 매우 긴박하였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도우려고 출동한 롬멜장군의 기갑사단은 6월에 모로코의 토브루크를 점령한 뒤, 카이로에서 불과 100㎞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였다. 독일군의 이집트 침입은 아랍 민족운동을 격화시켜 영국의 중동 지배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1942년 10월, 영국군(B.몽고메리의 제8군)이 반격에 나섰으며, 이에 호응해서 11월에 아이젠하워 휘하의 미·영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이탈리아군은 동·서로부터 협공을 당하여 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이어서 영·미는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제2전선의 구축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유럽전선에서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우면서 전력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42년 여름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와 바쿠를 동시에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스탈린을 기념하는 러시아 제3의 공업도시를 빼앗음으로써 군수산업에 타격을 입혀 카프카스로부터 북쪽으로 보내는 석유수송을 차단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밀어붙이려 하였으며 이는 소련국민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9월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였지만 11월 소련군이 반격해 왔고, 격전 끝에 포위된 독일군은 43년 1월 말에 항복하였다. 이 패배는 소련국민뿐 아니라 세계의 반파시즘저항운동을 비롯한 연합국진영의 사기를 높인 반면 나치스독일의 군부에서는 히틀러의 전쟁지도력에 대한 불신이 번졌고, 이탈리아는 전선에서 이탈할 구실을 찾기 시작하였다.
독·소전쟁은 히틀러로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체제를 취했으나, 43년 여름의 총공격에 실패하고 난 뒤부터는 쫓겨가는 형세를 돌이킬 수가 없었다. 43년 7월 영·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7월 25일에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바돌리오를 총리로 한 새 정부를 세웠다.
바돌리오정부는 곧바로 영·미와 교섭을 시작하였으며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9월 8일에 그 발표가 있자 독일군은 이탈리아를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9월 9일에 영·미군은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로마로 향하였다. 국왕과 바돌리오정부는 남이탈리아로 도피하였으며, 10월 l3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한편, 독일군에게 구출된 무솔리니는 북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45년 5월까지 이어졌는데, 이러한 일종의 내란상태 속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46년 5월에 군주제가 폐지됨).
소련의 강한 요망에도 불구하고 영·미가 <제2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북아프리카작전을 펼쳐나가자, 영·미에 대한 스탈린의 불만은 깊어만 갔다. 1942년 12월 이래 소련은 히틀러에게 화평을 타진하였으나, 히틀러는 독·소 양국간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응하지 않았다. 43년 1월, 영·미 앙국이 카사블랑카회담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영·미가 이 회담에서 <무조건항복>방식을 선언함으로써 독일·이탈리아·일본과의 타협 가능성을 봉쇄해 버린 것은 소련과의 관계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1943년 4월,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스몰렌스크 근교 카딘의 숲에서 소련비밀경찰에게 살해된 약 4400명의 폴란드장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폴란드망명정부가 이 사건을 국제적십자가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자, 소련은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또한 1943년 9월의 이탈리아항복 교섭에서 소련이 제외되자 소련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한편 43년 8월의 퀘벡회담에서 미·영 앙국은 44년 5월에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 통고했다. 43년 10월, 다시 관계가 개선된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회의가 열려, 대전이 끝난 뒤의 유럽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유럽자문위원회>를 런던에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퀘벡회담에서는 처칠의 전략(지중해작전 강화)이 처음으로 미국과의 절충에서 관철되지 않았는데, 이후의 전략에서 영국은 미국에 종속되고 말았다.
미국은 대전 후 유럽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나라는 영국이 아니라 소련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다. 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대일처리방침으로서 <만주와 타이완을 중국에 되돌려 줄 것>과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선언하였다. 이어 11-12월에도 미국·영국·소련의 수뇌가 테헤란에서 회담하였다. 여기서는 소련군의 진격을 예상하여 동유럽·중유럽문제가 다루어져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커즌라인(제1차세계대전 후 1919년 12월에 정해진 국경선), 서쪽 국경은 오데르강으로 정해졌다. 이 때 스탈린은 대독전쟁이 끝난 뒤 대일전쟁에 참가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독일의 항복]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장군이 지휘하는 미·영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지방에 상륙하였다.
병력 15만 명, 전차 1500대, 함정 5300척, 항공기 1만 2000대가 투입되었다. 미·영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해졌으며, 8월에는 파리시민이 자력으로 파리를 해방시키고 드골을 맞이하였다.
패배를 눈앞에 둔 독일에서는 군부 중심의 보수파가 7월 20일 반히틀러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히틀러암살은 성사되지 못하고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미·영군에 호응해서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했는데, 4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소련 영토를 회복하고 동유럽·중유럽과 발칸의 여러 나라로 진격하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나치스독일과 결탁한 전통적 지배층이 몰락하고 저항운동을 담당한 민주세력이 등장하여 소련군과 힘을 합쳐 새 정권을 세웠다. 루마니아에서는 44년 3월에 소련군이 들어오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전선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9월에는 소련과 휴전협정을 맺고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미에 대해 선전포고까지 했으나 소련과의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4년 전쟁국면이 주축국측에 불리해지자 영·미와의 화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자 조국전선이 쿠데타로 정권을 수립, 10월에는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고 대독참전을 하였다. 헝가리는 소련 및 영·미와 교전상태에 있었으나, 43년 1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후 방향을 바꾸어 연합국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44년 3월에 헝가리를 점령하고 친독 정부를 세웠다. 44년 9월 루마니아가 전선에서 이탈하자 섭정(攝政) 호르티는 휴전을 결심하고 10월에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곧 쿠데타가 일어나 친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동부에서 진격해온 소련군의 협력을 얻은 헝가리 민족독립전선이 44년 12월에 정부를 세워 45년 1월에는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고 대독 참전을 하였다.
유고슬라비는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부대 외에도 런던망명정부의 지지를 받는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토니크>라는 저항조직이 있었다. 체토니크는 대(大)세르비아주의적 경향을 지녔고 독일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대기주의(待機注義)를 취했기 때문에 유효한 전투를 벌일 수 없었고 세력의 확장도 여의치 않았다. 이와는 달리 티토의 파르티잔부대는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국토를 해방시켰고, 43년 11월 임시정부를 세웠다.
연합국은 그 해 11월에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임시정부 지지를 결정했으나 처칠이 임시정부에 망명정부 대표 슈바시치를 참가시킬 것을 요구했고 소련도 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44년 6월에 티토―슈바시치협정이 체결되었다.
알바니아는 1939년 4월 이후부터 이탈리아의 점령하에 있었다. 유고슬라비아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41년 11월에 알바니아공산당이 창설되어, 활발한 파르티잔투쟁을 펼쳤다.
42년 9월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파르티잔부대가 <민족해방운동>으로 결집하여 이탈리아군과 싸우다가, 이탈리아가 항복한 뒤로는 독일군과 싸워 해방구역을 넓혀 나갔다. 44년 10월 알바니아공산당의 호자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 스스로의 힘으로 국토를 해방시켰고 튼튼한 권력기반을 확립했기 때문에 대전 후 소련에 대해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핀란드는 44년 2월부터 소련과 휴전교섭을 시작했으나 독일의 압력으로 중단되자 9월에는 독일과 국교를 단절하고 소련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상과 같은 각국의 상황을 지켜 본 처칠은 44년 10월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나,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에서는 소련의 우월권을 그리스에서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등한 입장을 유지할 것을 제안하여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냈다. 처칠은 이렇게 함으로써 런던에 있는 그리스·유고슬라비아·폴란드망명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독일군 철수와 동시에 공산당계의 국민해방운동(EAM)이 봉기하였고, 이를 영국군이 탄압하였으나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처칠과 스탈린의 이른바 발칸분할협정에 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다.
44년 6월에 소련군이 커즌라인을 넘자 7월 말에 소련은 폴란드에 루블린정부를 세웠다. 소련과 단절상태에 있던 폴란드의 런던망명정부는 초조해진 나머지 8월에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했으나, 2개월도 못 가서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그 당시 영·미 양국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즉시 지원이 가능했던 소련군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45년 1월,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들어갔다. 폴란드의 통일된 정부와 국경에 관해서는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해결되었다. 얄타회담에서의 중요한 검토사항의 하나는 독일처리문제였는데, 프랑스에게도 점령지대를 할당해 주고 독일처리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인정하였다. 이미 1944년 12월부터 스탈린은 영·미를 견제하기 위해 드골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드골도 대독정책에서 영·미를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소련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얄타회담에서는 소련의 대일참전도 결정되었는데, 대일참전 조건인 대일처리에 관한 비밀협정은 뒤에 많은 문제를 남겼다.
히틀러는 44년 12월 서부전선의 아르덴에서 일대반격을 시도했으나 4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45년 2월 오데르강, 4월에는 나이세강까지 진출하였다. 영·미군은 3월에 라인강을 건넜고, 4월 25일에는 엘베강의 토르가우에서 소련군과 만났으며, 바로 그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입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29일에 <정치적 유언>을 한 뒤 30일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되니츠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급적 영·미점령지구로 옮기고 5월 7일 항복, 9일에 베를린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이로써 나치스독일의 제3제국은 소멸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전선의 독일군은 4월 29일 항복하였다.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근교의 코모호(湖)에서 파르티잔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의 피해]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참가한 대규모의 전쟁이었다.
동원병력 약 1억 1000만 명, 전사자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약 2500만 명, 전쟁부상자 약 3500만 명으로 집계된다.
이 중 소련의 희생이 가장 컸는데, 전사자 약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면 약 2000만 명으로서 전체인구의 1/10 이상이었다.
중국도 사망자가 약 20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폴란드가 사망자 약 600만 명으로, 전쟁 전 인구에 대한 비율로는 약 17%로서 가장 높았는데, 그 중 전사자는 불과 2%로 압도적 다수는 민간인 희생자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한다면 교전국수 2배, 동원병력 2배, 전사자수 5배, 민간인 희생자수 50배, 전쟁 부상자 2배, 직접전비는 6배이다.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손해는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막대한 것이었다. 폴란드의 경우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특징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무리한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징용제도·징병제도·근로보국대제도·근로동원제도·여자정신대제도·학도지원병제도 등을 만들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인력을 강제 수탈하였다. 43년 한국의 대학생 4500명을 지원이라는 미명 아래 징병하였으며 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을 제정, 공포하여 12세부터 20세까지의 한국인 처녀 수십만 명을 강제징집하여 군수공장에서 사역시키거나 중국과 남양 등지의 전선에 군대위안부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1945년 8월까지 146만 명의 한국인 청장년을 징용하여 광산·토목공사·군수공장에서 무보수 노예노동을 시켰는데, 군사기밀의 유지를 이유로 공사가 끝난 뒤 노무자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도 수없이 자행하였다. 또한 일본의 간토군〔關東軍〕 특수부대에서는 이른바 마루타를 대상으로 세균 등에 대한 잔혹한 인체실험을 하기도 하였으며, 규슈〔九州〕대학에서 생체를 해부한 사건도 있었다.
유럽에서는 나치스독일의 인종말살정책 때문에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독일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 중의 70%이다. 물론 러시아인도 학살되었다. 또한 독일인 식민을 위하여 슬라브계 주민을 국외로 추방해 버리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고 노동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동인력을 징발하는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생겼다.
파르티잔을 포함한 저항운동의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투하(사망자약 34만 명), 드레스덴대공습(45년 2월 13일, 사망자 약 23만 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전투원·비전투원을 구분하지 않은 대량살육전쟁이었다.
유럽 국가들의 인적피해(군인)
국가명 |
사망자 |
부상자 |
실종자 |
독일 |
210만 여명 |
400만 여명 |
290여 만명 |
미국 |
31만 여명 |
47만 여명 |
15만 여명 |
영연방국가 |
35만 여명 |
47만 여명 |
9만 여명 |
소련 |
1360만 여명 |
? |
? |
이탈리아 |
39만 여명 |
? |
21만 여명 |
[대전의 영향]
전쟁은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기술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역시 기술혁신이 두드러지고 경제와 사회의 구조도 변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소화기(小火器)에 의한 보병전투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항공기와 전차가 전쟁의 판도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대형 전함에 의한 대함거포시대(大艦巨砲時代)는 지나갔고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함대가 해전을 주도했으며, 낙하산부대가 등장하였고, 급강하폭격기와 결합한 기갑부대의 전격전(電擊戰)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장거리 폭격기에 의한 전략폭격도 시작되었다.
이는 군사시설과 군수공장, 나아가서는 도시까지 파괴함으로써, 전쟁수행의지를 꺾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항공기의 항속거리·속도·탑재능력 등이 급속히 개선되었다. 제트기도 개발되었으나, 전쟁중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폭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폭탄의 대형화, 파괴력의 강화도 촉진되었다. 한편 공습에 대한 방위를 위하여 레이더도 발명되었다. 이리하여 무인비행기·유도탄·로켓탄·바주카포(로켓식 대전차포) 등 갖가지 신무기가 개발되었으며 대항조치도 고안되었는데, 이러한 개발경쟁의 극치는 원자폭탄이었다.
전쟁의 기계화에 따라 부족한 연료나 원료 대체품의 연구와 생산도 추진되었다. 독일에서는 석탄을 액화한 인공연료가 43년에 약 570만t이나 생산되어 전체 연료 공급량의 절반에 이르렀고, 42년의 인공고무 생산은 1938년의 총공급량을 넘을 정도였다.
그 밖에 의료면에서는 화학요법이 발달하여 술폰아미드제·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기술혁신이 군수산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수요증대와 노동력부족 때문에 대량생산방식이 도입되었고, 원료부족을 보완하고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기술혁신이 각종 산업에서 추진되었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기술혁신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의 승패는 보다 뛰어난 폭격기를 보다 빨리, 보다 많이 생산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개발은 처음에 영국에서 착수하였으나, 미국이 그것을 이어받아 20억 달러를 투입해서 완성시켰는데, 여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신기술개발은 미국과 같은 경제대국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미 기술력에서 영국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으며, 게다가 패전국 독일의 로켓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에서 최대·최강의 군사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크게 바뀌었다.
대전 전의 국제적 고립과 독·소전쟁 등으로 인하여 일찍이 붕괴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소련은, 연합국의 대독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의 신뢰와 위신을 높이게 되었으며, 대전 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초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대독전쟁의 반격 과정에서 동유럽과 중부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나치 독일과 결탁했던 전통적 지배층이 일소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 인민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반소 <방역선>은 와해되었으며,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었다. 서유럽 쪽에서는 이를 소련의 팽창으로 보고 반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체제의 일각을 허물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체제를 더욱 약화시키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을 이겨낸 중국은 세계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 대립은 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동남아시아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네덜란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식민지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의 야욕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민족해방운동이 비약적으로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도로부터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어 독립국이 잇따라 생겨났다.
동유럽·중부유럽에서의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는 무너졌으며, 유럽대륙에 대한 전통적인 세력균형책의 전제는 상실되었다.
더욱이 대전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는 역전되어 미국에 대한 종속만 깊어졌다.
1945년 7월 총선거 결과 처칠 대신에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민은 국내를 개혁함으로써 격동하는 세계정치적 상황에 대응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1940년 6월 전쟁에 패배한 후부터 나치스독일의 종속국적 지위로 전락했으나, 민중의 저항운동으로 그 명예를 회복하였다. 드골은 이러한 저항운동을 통일하고 새로운 제4공화정의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미·영·소 다음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하고 미국·소련 사이에서 독자적인 대독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세계에서는 유독 미국만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가로서 피폐된 자본주의세계를 지도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미 45년 1월, 소련의 약 600억 달러의 신용공여(信用供與) 요청을 거부하고, 5월에는 소련에 대해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 인도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8월에 대일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소련을 겨냥한 위협이기도 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냉전>이 시작되었다.
[냉전의 시작]
냉전이란 말은 국제연합원자력위원회의 미국 대표인 버루크가 처음 사용하였으며, 평론가 리프먼이 논문 제목으로 사용한 이래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냉전의 주요 원인은 서방의 반공정책(反共政策)에 있었다. 자본주의체제를 취하는 서방의 여러 국가는 자본주의의 적(敵)인 사회주의와 대립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힘으로라도 소련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사회주의 세력이 강해지자, 사회주의에 대한 무력공격이 쉽지 않게 되었으며 열전(熱戰) 외의 모든 분야에서 격렬한 대립이 전개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서방측은 냉전이 필요하였다. 대전 중에 생산력을 증대시킨 미국은 대량의 상품과 자본을 소화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수생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납세자를 납득시키기 위해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을 과대하게 선전하였으며, 의도적으로 국제긴장을 격화시켰다.
냉전은 l946년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을 서곡으로 하여 47년의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방측은 <봉쇄정책>과 <반격정책> 등에 의거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앙조약기구(CENTO), 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SEATO), 미·일안보조약, 그리고 그 밖의 반공군사망을 조직했으며, 동방측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중·소우호상호원조조약 등으로 대항하였다. 또한 경제·문화적 교류도 단절되어 동·서 2개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46년 베를린 위기, 50-53년 한국전쟁, 56년 수에즈전쟁 등을 거쳐 62년 쿠바위기에 이르러 냉전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의 막다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쿠바위기는 미·소 양국지도자와 세계인들에게 열핵전쟁(熱核戰爭)의 공포를 실감시켰다.
이 때, 미국 지도자는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을 갖춘 소련을 상대로 냉전을 계속할 때의 위험을 깨달아 소련과의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63년에 부분적으로 핵실험금지조약을 성립시켰으며, 워싱턴-모스크바의 직통전화 설치는 이러한 정책의 한 표현이었다. 미국은 그 후 중국을 상대로 냉전정책을 계속해 왔지만 중국이 강대해지고 세계에서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이 정책도 실패하였으며, 72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미·중의 상호양해가 성립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실패가 냉전정책의 결정적인 파탄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냉전에 대신할 수 있는 대외정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91년의 소련공산체제 붕괴와 더불어 냉전이라는 용어는 점차 쓰이지 않고 있다.
출처 :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