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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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 두루마리의 일부분(나가사끼현 지정 문화재)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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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에도(동경)까지 이르는 조선통신사의 여정--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의 그림
임진왜란 후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장장 200여년동안 12차례에 걸쳐 계속됐던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최고의 관료로 구성된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이하 학자, 문화인을 비롯해 화려한 악대, 소동, 무인, 통역관 등 500여명에 달하는 외교, 문화 , 무역 대사절단이었다.
일본의 학자나 문화인들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를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사절단이 묵는 객사를 찾아와 시와 글을 받아가고 학문과 외교에 대한 질문을 하고 듣기를 청했다.
사절단의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준비와 협조에 백만냥(5580억원)정도의 경비를 대마번은 지출하였다고 한다. 이는 조일무역에 대한 대마번(번주인 소씨일가)의 이윤이 더 엄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통신사를 초청하여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이어지는 장장 6~7개월의 행렬을 끝까지 돌봐주는 실무를 맡은 것은 대마도주 일가의 가업이었다. 대마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막부정권 아래에서 조선과의 외교권과 무역권을 독점한 독립적인 특수한 번이었다.
2.이즈하라시내에 있는 조선 통신사의 흔적들.
이즈하라는 1489년 대마도 번주(성주, 영주) 종정국이 부중을 옮겨서 생긴 번주 휘하의 무사도시, 즉 사무라이들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대륙의 문화, 무역, 외교의 창구로써 번창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 왕래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대마시(2004년 3월 1일 시로 승격)의 시청 소재지다. 부산에서 배로 2시간 40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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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항 입구에 설치된 안내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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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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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 재방의 뚝과 난간에 그려진 조선통신사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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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앞마당에 있는 <조선통신사 막부접우지>비
이즈하라시내의 여러 곳에 이런 비석이 있는데 모두 1811년(순조11년)년으로 되어있다. 이는 마지막 통신사가 일본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막부에서 접반사가 대마도에 와서 행사를 치렀기 때문에 통신사와 막부의 관리가 묵은 주택 등을 표시한 것이다.
통신사는 일본 막부정권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대에서 예를 다함.)정책 때문에 본토에 들어가지 않았다.
3. 이즈하라에 있는 한국의 문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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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민옥적--이즈하라시내의 하천이 바다와 접하는 방파제 내만에 있다.
조선의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대피하게 되면 조류의 흐름으로 인해 대마도에 이르는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사진의 왼편 잔디밭에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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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가 ‘부옥 조’(釜屋 操)의 세 글자로 된 이름이다.
부산(釜山)할 때의 ‘부(釜)'자다. 결국 부산댁이 성이고 이름은 조가 된다. 부옥씨는 본토에는 없는 성씨이고 대마도에만 있다. 일본은 성이 두자이고 99%가 성과 이름을 합쳐 넉자 이상이다. 한국식의 3자로 된 문패가 대마도는 약 50%정도에 이른다. 아마 이들의 조상은 한국인 일 것이다.
*총각, 지게 등 본토에는 없고 대마도에서만 사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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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우체국
“이 우체국은 부산 영도우체국과 자매결연을 맺은 우체국입니다”라는 한국어 표지판이 건물 외벽에 큼지막하게 붙어있고 낮 12시만 되면 ‘고향의 봄’ 노래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곳곳에 한국어로 된 간판이나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일본의 대마도만이라도 한국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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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년전 3년제 조선어학교
조선과의 성신교류를 강조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가 설립하였고 그의 저서 ‘교린수지’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 학습교재이다. 명치시대까지 사용했다.
대마도의 소학교는 5~6학년이 되면 한국어를 배우고 '대마도 고등학교'는 국제교류코스라는 한국어과가 설치되어 있고 한국어 원어민 선생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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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역사가 살아있는 개성인삼 중개상사--시내 중심부 대마호텔 옆에 있다. 지금은 약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