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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的 역사관 - 新羅죽이기에 답한다

淸山에 2009. 9. 3. 13:47
 

 

 
 

 

 

亡國的 역사관-新羅죽이기에 답한다
新羅의 再現이 대한민국이다.
趙甲濟   
 1. 군인을 존중하던 시절에 태어난 金庾信의 장엄한 생애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시대의 權臣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속으로, 또는 안개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正史 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覺, 武人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 부분의 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는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
 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元述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至誠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金庾信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하는 것이다.
 
 
 2. 이순신의 不運과 김유신의 幸運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의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그보다 먼저 죽었는데, 이순신은 그들의 자손까지 자기 자식처럼 아껴 길렀으며, 조카들을 모두 혼인시킨 후에야 자기 자식들의 혼례를 올렸다. 그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運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軍中에서 갑옷을 벗는 일이 결코 없었다>
 
  柳成龍이 쓴 懲毖錄(징비록)에 나오는 대목이다(서해문집. 김흥식 번역). 柳成龍은 李舜臣을 중용하고 그를 보호해준 후견인이었다. 위의 李舜臣에 대한 묘사는 공직자의 몸가짐이 어떠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듯하다. 柳成龍이 이순신을 不運한 군인이었다고 定義한 것이 인상적이다. '도덕주의자=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군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전쟁에까지도 도덕을 적용하여 간첩도 보내지 못하게 하고 敵을 유인도 하지 못하게 했던 자들이, 정권을 잡은 선비 출신 文臣들이었다. 군인을 알아주지 않는 文弱한 문신들은 그러나 권력투쟁에는 용감했다. 그들이 한 위대한 군인을 괴롭혔다.
 
  李舜臣과 정반대되는 곳에 있었던 이가 金庾信이다. 三國史記 列傳에는 김유신에 대해서 아주 긴 기사가 실려 있다. 마지막 대목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 없으며, 꾀를 행할 때 말을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치 않게 하였으니 유신이 그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삼국을 합쳐 한 나라를 만들고 공명으로써 끝마쳤다>
  군인을 알아준 신라는 김유신이 뜻을 마음껏 펼 수 있도록 뒷받침했고 김유신은 삼국통일로써 나라에 보답했다. 김유신의 장엄한 생애와 이순신의 비장한 생애는 군인을 알아준 신라와 군인을 멸시했던 조선조의 차이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조선조는 민족사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순신 같은 人材도 말살하는 조선의 위선적 도덕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자유통일을 주도할 제2의 김유신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金庾信(김유신)의 장엄한 생애와 李舜臣(이순신)의 비장한 생애
 
  가. 시대상황: 尙武정신이 넘쳐나던 통일신라 시대와 尙武정신이 억눌린 조선조 시대의 차이. 무사가 지배층이던 시절과 선비가 지배층이던 시절의 차이.
  나. 金庾信은 권력자, 즉 정치군인이었지만 李舜臣은 순수군인이었다.
  다. 金庾信은 삼국통일을 목표로 삼았고, 李舜臣은 조국의 수호가 목표였다.
  라. 김유신은 對唐결전주의자였고 이순신은 明軍을 상대로 事大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 김유신의 自主的 자세, 이순신의 충성스러운 자세가 대조적이다.
  바. 公私의 엄격한 구분 및 솔선수범이 공통점이다.
  사. 불교적 인생관과 유교적 인생관의 차이가 크다.
  아. 김유신은 신라의 적극적 뒷받침을 받았고 이순신은 조선조의 방해를 많이 받았다. 군사를 아는 왕(태종무열왕과 문무왕)과 군사를 모르는 왕(선조)의 차이이다.
  자. 김유신은 79세로 장수했고, 이순신은 50代에 죽었다. 死後 김유신은 興武大王으로 추존되고 이순신은 충무공이 되었다.
 차. 김유신은 민족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의 토대를 닦았고,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殉死(순사)했다.
 
  3. 玉浦에서: 이순신이 기뻐할 위대한 역전승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압도적 쇳덩어리
 
  尙美會(02-734-1245) 여행단 32명은 2006년 봄 거제도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玉浦大捷기념탑을 방문했다. '亂中日記를 들고 떠나는 민족의 聖地순례' 2박3일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전 퍼부었던 폭우가 걷히고 파아란 하늘과 청명한 공기 속에서 옥포만의 위용이 압도적으로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세계 제2위의 대우조선 공장이 내려다 보였다. 건조중인 수십만톤짜리 巨船들이 옥포만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900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도 보였다. 쇳덩어리의 집합체가 일대 장관이었다.
 
  옥포海戰은 李舜臣 장군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중 조선군의 첫 승리였다. 1592년 4월14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15만 명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월말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서울을 방어하도록 명령받은 金命元은 장수 된 몸이면서도 일본군이 다가오자 武器를 강에 버리고는 변장하여 달아나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왜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서울을 점령했고, 宣祖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2년 5월초의 상황이었다. 정규군인 官軍이 붕괴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때 玉浦 해전 승리는 그 어느 누구의 지시도 도움도 없이 李舜臣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규군의 첫 승리
 
  전남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사 李舜臣은 우수사 李億祺(이억기)와 함께 85척의 함선을 이끌고 5월8일 옥포만에 도착했다. 일본 해군은 50여척을 정박시켜놓고 있다가 우리 水軍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기세에 눌려 우리 배 6척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충무공은 직접 敵陣으로 들어가 26척을 불살랐다. 배를 잃은 일본군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도망했고, 살아남은 함선은 부산포로 물러났다.
  이 승리는 조선과 일본의 정규군끼리 대결하여 조선군이 올린 첫 승리였다. 이 첫 경험이 李舜臣 함대의 자신감으로 굳어졌을 뿐 아니라 패퇴를 거듭하던 宣祖 정권도 逆轉勝의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전을 기려 巨濟市가 옥포만을 내려다 보는 산꼭대기에 만든 옥포대첩기념공원은 한려수도를 둘러볼 수 있게 하고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생각에 잠기게도 했다. 특히, 그 勝戰의 현장에 해양강국 한국의 한 상징적 공장이 健在한 것을 내려다 보니 “이순신의 정신과 숨결이 저렇게 살아 있구나”하는 감회에 젖었다. 李舜臣의 이야기가 화석화된 역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實感이 드는 것이었다.
  李舜臣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지 못했으면 호남 곡창지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明軍이 구원하러 오기 전에 조선은 일본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무공이 孤軍奮鬪하여 지켜낸 바닷가에서 세계 제1이던 일본 조선공업을 누르고 한국의 조선업이 지금 세계 頂上에 올라 있다. 세계 7대 造船所가 다 한국에 있다니 이야말로 충무공이 기뻐할 민족적 逆轉勝이 아닌가.
 
 그린 앤 클린
 
  오후에 그 옥포조선소에 들렸다. 휴일인데도 李學文 홍보팀장(부장)이 나와서 尙美會 여행단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130만 평에 들어 서 있는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DSME)는 종업원이 1만2000명, 협력업체 종사원은 약 1만900명이다. 올해 매출액은 약 5조원, 영업실적은 100억 달러(수주물량)를 예상하고 현재 수주 殘量이 149억 달러어치나 된다. LNG 운반선 건조량에서는 대우조선이 세계1위이다. 건조 선박의 약 97%를 수출한다. 한 해에 이 조선소가 사용하는 철강무게만 해도 100만톤을 넘는다. 그 중 약70%는 포스코에서 사들이고 나머지는 수입한다. 포스코가 철강생산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생산자가 큰 소리 친다고 한다.
  대우조선이 만드는 32만톤 유조선의 경우 어른 500만 명분의 무게를 실을 수 있다. 이 조선소에서 짓는 배들중 가장 비싼 것은 浮游式원유생산저장하역선(FPSO: Floating Product Storage Off-loading)이다. 한 척이 10억 달러선이다. 아마도 9만톤짜리 원자력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및 이지스 순양함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는 약1500명의 설계요원들을 데리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이유는 이 기술력인 것이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의 조선업이 싼 임금으로 성장했고,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 등 조선업종에서 노사분규가 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李學文 팀장은 “대우조선 공장은 그린 앤 크린(Green and Clean)하다”는 표현을 했다. 둘러보니 공장이라기 보다는 ‘쇳덩어리를 조각하는 공원’이란 느낌이 들었다. 쇳물이 녹아내려 바다를 더럽히는 그런 조선소를 생각하면 이 또한 오해이다. 공장을 한 바퀴 둘러보아도 휴지 한 조각, 오물 한 점, 쇳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유조선 한 척을 만드는 데 약8만 조각의 철판이 필요하다. 이 조각을 이어붙여 가는 것이 造船이다. 그래서 건설업종과 生理가 비슷하고 현대건설처럼 건설업에서 성공한 기업이 진출하면 잘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동행한 여행단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한국의 피라미드가 아니겠습니까. 프랑스는 에펠탑을 갖고 있지만 이런 조선소는 없으니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감동적인 관광거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No change, no future"(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이런 모토가 쓰여진 공장을 구경하던 여행객이 “이 공장을 만든 金宇中씨야말로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분이 아닌가. 그분이 獄에서 나와야 할텐데”라고 말했다. 다른 분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李舜臣의 위대성은 조정이나 국가가 전혀 지원하지도 않는 가운데서 水軍을 精兵으로 훈련하여 프로 戰士 집단인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른바 白衣從軍 정신에 있다. 조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침략을 허용하고 말았다. 李舜臣을 기렸으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던 것이 조선조였다. 실천력이 약한 선비집단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충무공 정신 이은 나라
 
  李舜臣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은 李承晩이 建國과 建軍을 주도했고, 朴正熙가 근대화와 자주국방정책을 이끌었던 대한민국이었다. 두 위대한 대통령은 富國强兵을 목표로 삼아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을 건설했다. 종합 國力面에서 세계 10위권안에 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李舜臣의 자주국방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정신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자랑스러운 후손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李舜臣 정신은 말장난이나 글짓기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실력으로써 계승하는 것이다.
  대우조선 공장을 나서면서 옥포대첩비가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내 곁의 한 분이 말했다.
  “기업은 이렇게 잘 하는데 정치는 왜 그 모양입니까. 정치도 기업에 맡기면 안될까요?”
  옥포대첩비 아래 效忠祠에는 ‘尙有十二微臣不死’(상유십이미신불사)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충무공이, 元均의 패전으로 사라진 水軍을 재건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 조정에 보고한 문서의 한 구절이다. “아직 12척이 있고 제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12척밖에 남지 않았던 朝鮮水軍으로 기적의 鳴梁대첩을 만들어냈던 李舜臣이 還生하여 대우조선의 위용과 巨船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들, 정말 수고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4. 이순신의 亂中日記 읽기
 
  알려질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쓴 日記
 
  李舜臣의 일기를 亂中日記라고 부르게 된 것은 正祖가 李忠武公全書를 만들도록 한 뒤였다. 편찬자가 亂中日記라고 붙인 것이지 李舜臣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李舜臣은 그의 死後에 자신의 日記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日記는 전란속에서 가슴에 쌓아둘 수 없었던 울분, 걱정, 한탄을 기록한 것이지 나중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일이다.
 
  李舜臣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는 李舜臣의 그런 착각이 무척 다행이다. 솔직한 자기토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인간 李舜臣의 裸像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傳記작가들의 의해 신격화되고 박제품이 된 근엄하고 딱딱한 李舜臣과 달리 亂中日記속의 李舜臣은 피가 끓고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며 憂國과 분노가 뒤섞이고 비통함과 집념이 뒤엉키는 격동하고 생동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聖人도 아니고 聖雄도 아니다. 그의 傳記 10권을 읽는 것보다는 亂中日記 한 권을 읽는 것이 그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超人이 아닌 病弱했던 사람: 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正祖 시대 난중일기를 처음 활자판으로 간행할 때 누락시킨 부분이 많은데 주로 조정을 비판하고 元均에 대해서 험한 이야기를 한 경우이다. 이 누락부분이야말로 李舜臣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多少로 죄의 輕重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한 줄기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丁酉年5월21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丁酉年 5월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무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은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丁酉年 5월6일)
  1998년에 서울대학교 朴惠一 명예교수(원자력 공학)와 崔熙東 원자핵공학과 교수, 裵永德-金明燮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 같이 쓴 「李舜臣의 일기-親筆草本에서 國譯本에 이르기까지」에는 난중일기를 분석하여 李舜臣의 행동을 엿보게 한 대목이 있다. 李舜臣이 자신의 일기에서 몸이 불편하다든지 병에 걸린 것을 언급한 대목이 180여 회에 이른다.
  1597년 8월21일자 일기: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 人事不省에 빠져 거의 구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고통을 겪었다」
  8월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 기운이 없고 또 뒤도 보지 못하였다」
  8월23일: 「병세가 몹시 위급하여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고 또 실상 전쟁터도 아니므로 배에서 내려 포구밖에서 묵었다」
  이 기사를 본 내과전문의의 소견은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압박에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病狀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엔 술마신 기록이 140여회나 나온다. 그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술을 즐겨 했다. 나라가 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울분,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걱정,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元均에 대한 경멸과 미움, 倭敵에 대한 증오, 民草의 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李舜臣은 몸을 돌보지 않고 술로써 시름을 달랬던 것 같다. 토사곽란을 소주로 치료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위장병을 술로 다스리려고 한 사람
 
  신경성 위장병의 원인은 과도한 걱정과 울분이었을 것이다. 李舜臣 일기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나 나온다. 그는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사람이다. 꿈의 내용도 주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 걱정이다.
  <丙申 정월12일: 새벽 2시쯤, 꿈에 어떤 곳에 이르러 영의정(柳成龍)과 함께 이야기했다잠시 함께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이 막히어 그만두었다. 이윽고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다시 가시랴」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가슴이 막힐 만큼 나라 걱정을 하는 李舜臣은 元均에 대해서만은 아주 경멸스러운 용어를 쓰고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를 元凶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의 元均 인물평으로 해서 임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權慄)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을 가슴 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水軍에서 겨우 10척의 戰船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히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 후 종 順花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살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脫營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한 상황에서 軍紀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武將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한다. 무능한 王朝,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회.
 
  5. 연개소문과 김정일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인 연개소문을 美化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려 든다면...한 탈북자는 "연개소문이 김정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는 짓이 김정일과 꼭 닮아"
 
  며칠 전 북한정권의 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를 만났다. 70代인 그는 체구가 아주 컸다. 전형적인 북한의 지배층 체격이었다. 그는 요사이 고구려史를 읽으면서 북한을 생각한다고 했다.
  "특히 淵蓋蘇文(연개소문)이 김정일과 흡사하더군요. 고구려를 망친 것이 연개소문이듯이 북한을 망친 것도 김정일인데 망치는 방법이 비슷하고 末路도 비슷해질 것 같습니다"
  그는 이런 비교를 했다.
  "당시 고구려가 세계최강국인 隋 唐과 전쟁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지요. 연개소문은 전쟁을 피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민들의 고통이 어떠했습니까? 요사이 김정일이 미국을 敵으로 돌려놓고 군사력을 건설한다면서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연개소문은 왕과 귀족들을 도륙하고 집권했습니다. 민심을 잃은 것이지요. 그가 죽자 세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남생은 唐으로 달아나 唐軍을 안내하여 와서 조국을 치지 않았습니까? 김정일이 죽으면 그 아들들끼리 싸우고 정남이는 중국에 붙을지도 모르지요. 고구려가 외교를 통해서 隋 唐과 화해했다면 인민들이 고생하지 않았을터인데 전쟁의 길을 선택하면서 천리城을 쌓았지 않습니까? 북한이 미국, 한국과 대결자세를 취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니 인민들이 고생하듯이 말입니다"
  서강대학교 李鍾旭 교수가 쓴 '고구려의 역사'(김영사)를 읽어보니 이 탈북자와 같은 시각이 들어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의 집권은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결정적인 요인이다'고 지적했다.
 
  1. 연개소문의 포악함은 고구려 백성들의 마음이 왕국을 떠나도록 했다.
  2. 그는 집권과정에서 100여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이들은 王政을 담당하던 세력이었다.
  3. 그는 쿠데타에 반대한 지방세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羅唐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國力을 총동원할 수가 없었다. 唐과 싸우려면 국내의 단합을 도모해야 했는데 분열을 조장했다. 안시성에서 싸워 이긴 城主는 연개소문에 반대했던 이였다. 그는 연개소문의 도움 없이 唐軍을 무찔렀다.
  4.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
 
  李鍾旭 교수는 작년 10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 ─隋 양제와 唐 태종의 침략을 막아 내던 고구려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했을까요.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들어서면 그 주변국들은 으레 守勢的 입장에 들어갔습니다. 三國史記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잃고, 나라 안의 인심을 잃어 멸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고구려가 隋·唐에 대해 끝까지 대결정책을 쓴 것은 장쾌한 측면도 있지만, 「벼랑 끝 외교」로 결국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집권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어떻게 보십니까.
  『淵蓋蘇文은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 참석한 大人 100여 명을 몰살하고 왕궁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인 다음 그 몸을 몇 동강 내어 시궁창에 버렸습니다. 왕과 大人 100여 명을 한꺼번에 죽인 것은 고구려를 움직여 온 국가시스템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개소문은 국정을 장악해서는 안 될 무능력자입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후 安市城(안시성)의 城主를 제압하지 못했어요. 그런 리더십으론 다른 지방세력도 제어하지 못했을 거예요』
  ─唐 태종의 원정군을 물리친 사람이 안시성 城主와 城民들입니다. 연개소문의 통제 밖에 있던 지방군이 唐軍을 물리친 것이죠.
  『백제가 망한 이듬해 唐軍에 의해 평양성은 포위당했고 요동 영토는 거의 해마다 침입을 당했는데, 그것은 수도와 지방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런 펀치를 해마다 맞아선 長期戰에 견디기 어렵죠.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 지 2년 만에 고구려는 그의 아들 셋의 권력 다툼 속에서 패망했습니다』>
 
  SBS의 신라폄하, 연개소문 미화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인물비교로써 설명한 논문도 있다. 연개소문의 포악함과 金春秋의 관대함, 연개소문의 폐쇄정책과 김춘추의 목숨을 건 동맹외교, 연개소문 아들들의 분열과 金春秋 아들들(문무왕과 김인문 등)의 단합이 대조적이다.
  SBS가 이 연개소문을 미화하는 大河드라마를 작년 7월8일부터 내보냈다. SBS는 취지문에서 이미 선전적 의도를 드러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한을 축소 통일한 이후 고구려의 영웅들에 관한 역사는 왜곡되고 폄하되어 사라졌다. 특히 연개소문은 중국이 쓴 역사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그려졌으며 우리의 역사서도 그들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참으로 난폭하게 쓴 선전문이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고구려 추앙 분위기 속에서 대체로 과대평가되고 미화되었지 폄하된 적은 거의 없다. 신라가 통일 이후 고구려의 영웅들을 왜곡 폄하했다고 하는 주장은 三國史記를 읽어보지 않고 하는 막말 수준이다. 신라귀족의 후손인 金富軾이 쓴 三國史記는 고구려의 對唐, 對隋抗戰을 민족주체성의 입장에서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이 드라마의 위험성이 느껴진다. 즉, 연개소문을 통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려는 의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한 것이 아니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가 唐이 신라까지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자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손을 잡고 8년간의 對唐결전을 통해서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한 것이다. 신라가 唐의 힘을 빌려온 것은 전반부의 이야기이고 통일은 唐과 싸워서 이룩한 것인데도 이 SBS의 선전문은 민족사의 최대업적을 굳이 내려앉히려고 한다.
  SBS는 드라마 '연개소문'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KBS는 드라마 '1945년'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이 오늘 중국 山東省의 일부가 아니고 한국인이 漢族의 일부가 아니고 당당한 韓民族으로서 중국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對唐결전이 가져온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 건설이었다. SBS와 KBS가 합작하여 북한정권이 좋아하는 두 개,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통성 부정을 드라마틱하게 代行함 셈이다.
 
  6. 전쟁과 天災가 가장 많았던 新羅가 통일한 이유
 
  공격과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이나 국가는 죽거나 항복하지 않으면 대체로 발전한다. 국가로선 新羅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으로선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고 감옥에도 갔다 왔던 李承晩, 朴正熙 같은 지도자이다. 욕을 많이 먹고 매를 많이 맞는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일 경우가 많다. 다만 고통을 견디어낼 때만 그 투자는 거대한 수확을 얻는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7. 너무나 당연한 新羅正統論
  -환상적, 희망적, 감상적 역사관의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韓國史는 의외로 단단하고 알차다. 과장하지 않아도, 견강부회하지 않아도 한국의 역사는 아름답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이다. 북한은 민족사의 異端이고 한반도의 反국가단체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역사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진실이다. 국민들은 이 정통론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근거하고 있다. 신라가 唐의 힘을 빌어 倭의 방해책동을 분쇄하고 백제, 고구려를 병합한 뒤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唐의 세력마저 내몰고 통일국가를 세운 것이 韓民族의 시작이다. 신라 이전은 민족이 아니라 종족이었다. 민족은 공통의 가치관, 풍습, 언어, 정치제도, 인종적 유사성을 가져야 한다. 장기간 그런 공통점을 공유해야 민족을 민족이게 하는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즉 민족은 오랜 세월의 정치적 숙성과정을 거쳐서 進化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에 의한 국민국가 건설은 한민족의 2大 쾌거이다. 삼국통일에 의한 민족통일국가의 설립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통일에 의한 두번째 민족통합을 指向할 수 있다.
  고구려 발해는 신라통일에서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主流에서 보면 上流와 支流에 해당한다. 북한정권은 이단이고. 고구려는 통일신라라는 저수지로 들어온 상류이고 발해는 말라버린 지류이다. 상류와 지류를 本流라고 오해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역사관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낮추어보기도 한다.
  서강대학교 이종욱 교수가 '신라정통론'을 주장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새삼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非과학적인 역사관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환상적, 희망적, 감상적 역사관의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韓國史는 의외로 단단하고 알차다. 과장하지 않아도, 견강부회하지 않아도 한국의 역사는 아름답다.
  특히 대한민국 建國과 신라의 삼국 통일은 장대한 드라마이다. 이 성공사례에서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만들어내야 한다. 고구려의 對唐, 對隋저항史도 대단하지만 결과론적으론 실패사례이다. 연개소문의 외교와 내정실패가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했다. 연개소문에서 실패의 연구를, 金春秋에서 성공의 사례연구를 해야지 연개소문이 唐과 싸워 일시적으로 이겼다는 사실만 부각하여 미화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배우는 길이다. 약한 나라가 당대의 최대 강국과 싸워 결국 망했다는 것은 외교의 실패를 의미한다.
  신라는 세계최대 帝國인 唐과 친하여 그 힘을 빌어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唐이 야욕을 드러내자 결전하여 추방했다. 이런 자주성이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對唐결전이 한민족을 만든 것이다. 왜 이 대목은 드라마와 소설과 연극의 소재가 되지 않는가?
  북한정권은 앵무새 같은 역사가들을 앞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방한다.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부분에 회칠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민족사의 이단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민족사의 2大 쾌거를 기리지 않고 저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익들이야말로 민족반역자들이다.
 
  8. 신라에 대한 부당한 모함의 예
 
  A. 신라는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을 쳤다?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족이 아니었다. 동족이란 무엇인가. 같은 언어, 같은 풍습, 같은 종교, 같은 정치제도,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오래 살아온 공동체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은 서로 싸우느라고 이런 공동체에 필요한 공감대를 형성할 겨를이 없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同族이 되는 것은 신라통일 이후 한반도를 보금자리로 삼아 함께 살면서부터이다.
  따라서 신라가 唐을 끌어들여 친 것은 동족이 아니라 외세였다. 즉, 외세를 불러들여 외세를 친 것이다. 신라에게는 당이나 백제, 고구려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에겐 왜나 신라가 똑 같은 외세였다. 백제는 항상 왜와 손잡고 신라를 쳤다. 백제 또한 외세를 빌어 외세를 친 것이니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
  7세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민족주의란 잣대를 신라통일에 들이대고 사대주의적 통일 운운하는 것은 세종대왕한테 왜 직선제 선거를 통해서 임금이 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신라는 당을 끌어들였지만 최후엔 당을 한반도에서 쫓아내었다. 신라통일을 욕하는 이들은 唐을 끌어들인 이야기만 하고 신라가 唐을 격퇴시킴으로써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한 위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B.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 통일이다?
 
  그 책임은 만주를 지키지 못하고 羅唐 연합군한테 망해버린 고구려한테 물어야 한다. 왜 신라가 고구려의 책임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설사 고구려 중심으로 통일되어 만주와 한반도가 우리 땅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을 한족과 북방기마민족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때 만주를 차지했었던 거란의 遼, 여진족의 金이 그 뒤 어떻게 되었나를 보면 안다. 강과 바다로 대륙과 격리되어 수비하기가 좋은 한반도를 한민족이 차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구려는 수와 당과 대결하여 민족통일국가에 보탬이 되는 인적, 지리적 자원을 지켜내었다. 신라는 왜와 대결하여 역시 한민족의 자원을 보존할 수 있었다.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자원을 660년까지 보존하고 있다가 신라통일에 의해 한민족의 한 구성요소로 넘겨주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모두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이다.
 
  C.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의 수치이다?
 
  민족통일국가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고 이를 저주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국뿐일 것이다. 미국인이 언제 독립을 저주하던가, 일본인이 언제 명치유신을 저주 경멸하던가, 독일인이 언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을 낮추어 보던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 가리발디-마치니-카불이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을 비난하던가. 민족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에 회칠을 하면서 조상을 욕하러 다니는 자들에게는 전통과 역사가 반드시 보복을 내린다.
 
  9. 신라와 대한민국의 공통점
 
  1. 통일신라는 세계의 一流국가였다. 대한민국은 非서구문명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一流국가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2. 신라와 대한민국은 文武를 겸한 尙武국가였다.
  3. 신라와 대한민국은 개방적 해양국가였다.
  4. 통일신라와 대한민국 시대에 한민족의 활동반경이 가장 넓었고 세계사의 主流에 참여했다.
  5. 신라와 대한민국은 동맹국 외교에 성공했다. 신라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唐과 동맹하여 통일에 성공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선진국 미국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6. 신라와 대한민국은 애국적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켰다. 호국불교와 화랑도의 결합, 反共애국기독교와 국군 장교단의 협력이 그것이다.
  7. 신라와 대한민국은 강대국과 동맹하면서도 자주정신을 유지했다.
  8. 신라와 대한민국은 유능한 지도자를 만났다. 통일신라는 외교의 金春秋, 군사의 金庾信, 내치의 文武王을 가졌고 대한민국은 외교의 李承晩, 군사의 朴正熙, 경제의 李秉喆을 가졌다.
  9. 신라와 대한민국에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국역사상 여왕들이 나온 나라는 신라뿐이고 여성대통령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는 東아시아에선 한국뿐이다.
  10. 대한민국이 신라보다 못한 점은 두 개이다. 첫째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이고 또 하나는 국내통합 부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11. 신라통일은 민족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국가의 출발이었으며 남북자유통일은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10. 一流국가 만들기의 新羅모델
 
  대한민국의 꿈은 자유통일을 이룩한 다음 一流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두번째 선진화 경험이다. 첫번째는 신라가 서기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다음 약200년간 一流국가로 번영했을 때였다. 7~9세기에 유럽은 암흑시대라고 하여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의하여 파괴된 뒤라서 교회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문화의 건설이 없었다. 아랍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 2대 문화권은 唐과 신라를 중심으로 한 동양, 그리고 아랍권이었다. 예술, 군사력, 정신력에서 신라는 당시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본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그 뒤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고대의 황금기인 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신라였다. 우리가 지금 두번째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첫번째 일류국가 新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一流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王權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해전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자주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사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위의 11개 조건은 대한민국이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정신, 실용정신, 해양정신, 文武통합, 애국종교, 행정력, 수도死守, 지도층의 솔선수범, 애국청년의 조직화, 정치안정, 동맹외교라는 키워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일류의 조건일 것이다.
 
 
  12. 新羅의 統一과 民族의 決定
  孫晉泰('韓國民族史槪論'에서 발췌)
 
  新羅는 唐과 聯盟에 依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征服하였다. 그러나 實質上으로 大同江·元山 以南의 半島를 統一한 것은 六七六年 頃이었으니, 新羅는 이 統一大業의 完成을 爲하여 約 十六年 間 唐軍과 鬪爭하는 苦難을 겪었던 것이다.
  唐은 百濟·高句麗王朝를 顚覆한 後 羅·唐 同盟 當初부터 가졌던 內凶心를 暴露하여, 그 占領地를 모조리 自己의 所有로 하였다. 그래서 百濟에는 態津 以下 五箇所에 都督府를 두어 이것을 統治하였는데 王文度를 初代의 態津都督으로 하고, 部將 劉仁願으로 하여금 唐兵 一萬으로써 사비성에 駐屯하게 하였으며 新羅에게 준 것은 王子 金仁泰로서 그 副將의 地位에 둔 것뿐이었다.
  어디까지나 新羅를 利用의 方便으로서만 弄絡하고자 하는 政策이었다. 이에 順從하는 것은 新羅의 統一理想의 蹂躪을 意味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唐은 그 傳統政策에 基하여, 民族的인 支配政策을 取하지 않고, 漢의 樂浪郡 同樣으로 다른 四 都督府와 府 州 縣의 都督·刺史·縣令에는 모두 百濟人을 任用하였다. 一方으로 高句麗에는 西域地方의 土耳其民族에 對한 安西都護府·北庭都護府와 同格으로 平壤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薛仁貴를 그 都護使에 任命하여 二萬兵으로 이에 駐屯하게 하였으나 餘他의 府 州 縣에는 亦是 高句麗人을 任用하여 그 都督 刺史·縣令 等에 任命하였다.
  이것은 民族的 支配에 依한 無用한 民族感情의 挑發을 回避하고, 將來 適當한 機會에 親唐的인 다른 臣服王朝를 再建하여 唐室의 安全과 商業的 利益을 꾀하려는 政策이었으니, 果然 未久에 六七七年 義慈王子 抉餘隆을 帶方王으로, 또 寶藏王을 朝鮮王으로 封하여 兩國의 再建을 計劃하였다. 이것이 비록 成功하지는 못하였으나 樂浪國에 對한 그것과 全然 同一한 思想과 方法이었음을 알 수 있다.
 
  唐의 獨存思想은 同盟國인 新羅에 向해서도 一方的으로 强制適用되어, 新羅도 唐의 屬領視하여, 慶州에 鷄林都督府라는 것을 두고 新羅의 文武王을 그 都督에 任命하였다. 新羅는 一時 이에 忍從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이것은 決코 新羅의 堪耐(감내)하지 못할 바이었으니, 첫째 이것은 新羅의 自尊心을 害하는 侮辱이었으며, 둘째 이것은 新羅의 統一理念에 背馳(배치)되는 것이었고, 셋째 唐은 少數 兵力으로써 遠隔(원격)한 麗·濟 二國을 永久統治하기는 不可能한 일이므로 唐의 兵力의 衰弱과 함께 二國은 當然히 謀叛 獨立하여 다시 新羅의 敵이 될 것이었고, 넷째 이 二戰役에 있어 新羅는 多大한 犧牲을 내밀었음에 不拘하고 唐은 新羅에게 一片의 領土도 割讓(할양)하지 아니하였으므로서이었다.
  三國이 中國의 王室로부터 王·公 等의 爵位를 받는 것은 單純히 外交上의 方便에 不過한 것이요. 또 許多한 境遇에 그것은 中國王室의 强制 贈與이었고, 三國은 모두 內心으로는 民族自尊心에서 恒常 對等的 思想을 所有하였으므로 未開時代와 달라 그러한 外民族의 爵位(작위)에는 關心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에 關해서는 前에도 말한 바 있었지마는 新羅가 一時 親唐에 勞力하였을 時代에 있어서도 그들은 金春秋에게 唐 太宗과 同一한 太宗武烈王의 謚號(시호)를 加하여 唐의 問責을 받은 일이 있었고, 또 唐·羅 聯合軍이 百濟를 挾攻하였을 때, 金庾信이 黃山平野에서 百濟將 階伯軍에게 阻止되어 唐軍과 約束한 期日에 扶餘에 到達하지 못하였다는 理由로 唐將 蘇定方은 新羅將 金文永을 處斷하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金庾信은 怒髮(노발)이 衝天하고 腰間(요간)의 寶劍이 스스로 躍出하여 「唐軍과 一戰을 決한 다음에 百濟를 殲滅하리라」라 절규하여 蘇定方으로 하여금 唐慌 狼狽(낭패)하여 金文永을 釋放하게 하였다고 한다.
 
  新羅人의 意氣와 唐에 對한 心的 態度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態度는 何必 三國에 限한 것이 아니요, 若干 强弱의 差는 있을망정 高麗·李朝를 通해서도 大體로 同一하였다.
  新羅의 唐에 對한 不滿과 憤怒는 當然한 일이었다. 그러나 新羅는 淵蓋蘇文式 輕動을 警戒하고 隱忍自重하여 外柔內剛 唐에 對하여 外交的으로는 恭順을 表하면서, 或은 唐·契丹·靺鞨의 聯合軍과 八年 間에 大小 五十餘戰을 敢行한 後 實力으로써 半島 內의 唐兵을 漸次的으로 驅逐하여 六七六年頃(文武王 十六年) 겨우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半島를 完全히 占領 統一하고 그 以上의 北進을 斷念하였으니, 百濟 滅亡 後 實로 十六年의 歲月을 要하였다.
  이러한 唐과의 鬪爭은 新羅가 唐과 同盟하였을 當初부터 이미 覺悟하였던 바 있었을 것이다. 新羅의 이 壓迫에 놀란 唐은 安東都護府를 平壤으로부터 遼東에 移轉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또 一方으로는 麗·濟 兩國을 復興하여 新羅를 牽制하고자 하여 前述한 바와 같이 扶餘隆을 帶方王에, 寶藏王을 朝鮮王에 封하여, 百濟·高句麗 代身에 帶方國·朝鮮國의 新建을 꾀하였으나, 新羅와의 衝突이 不利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구태여 이것도 武力으로 强行하려고까지 하지 않고 斷念한 모양이다.
  그리고 未久에 高句麗의 故土에는 渤海王國이 일어나(六九九年) 新羅와 唐은 黃海를 隔하여 相隣하게 되었고, 그 뒤로도 北方에는 遼·金·元 等이 繼起하여 漢民族과 朝鮮民族은 約 七百年 間 平和를 持續하였으며 明·淸時代에 있어서도 두 民族 사이의 衝突은 없었다. 이리하여 朝鮮과 漢民族 間의 親善平和關係는 實로 一千二百七年에 亘(긍)하여 繼續되었다.
 
  高句麗에 依한 民族統一이 成就되지 못하고 新羅에 依하여 民族과 領土의 半分的 統一이 遂行된 것이 民族的으로 커다란 不幸事이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何如間, 新羅의 이 統一에 因하여 朝鮮의 民族은 이에 決定되었던 것이니, 비록 未久에 高句麗 故地에 渤海國이 高句麗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기는 하였으나, 二百三十餘年 間 新羅와의 사이에 注目할 만한 아무 交涉도 없이 極히 平穩 無事히 지내다가 九二六年 遼(東蒙古民族)에게 亡하였다.
  이리하여 時間의 經過에 따라 滿洲의 土地와 住民은 朝鮮民族 系列로부터 漸漸 離脫하게 되었다. 遼(九一六年-一一二四年)가 亡한 뒤 滿洲에서 金帝國(一一一四年-一二三四年)이 渤海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었을 때까지는 그래도 高句麗와의 사이에 兄弟之誼가 持續되었으나, 그 以後로 兩者間에는 血緣的 關係조차 全然 忘却되어, 後世의 滿洲民族(女眞民族)과 朝鮮民族은 別個의 民族으로 되고 만 것이다.
  오랜 동안의 政治的·經濟的·社會的 分離生活은 地理的 別異를 招來하고, 또 血緣的 別離와 文化 및 言語의 別離와 歷史의 別離 等을 재래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種族이라는 意識과 感情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要素가 除脫되어, 元來는 비록 同一血族에 屬하지마는 民衆의 感情과 意識은 서로 異民族視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지금 朝鮮民族의 母體는 當時의 新羅 領土로써 一但 決定되었으니, 그것은 大禮로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土地와 約 八百萬의 人口로 構成되었다. 이 民族은 高麗朝와 李朝 初期 世宗朝까지에 西北과 東北으로 漸漸 領土와 人民을 獲得하여 現在의 國境線을 이루게 되고, 또 若干의 蒙古民族과 女眞民族을 包攝 同化하여 그것을 朝鮮民族化하였다. 그리하여 李朝 末年까지 約 一千萬의 人口를 가졌던 것이다. 現 朝鮮民族의 完成은 一四三四年(世宗 十六年) 金宗瑞將軍의 咸鏡北道 回復으로부터이었다.
 
  12. 答薛仁貴書: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唐將 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强首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인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였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檄文(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羅唐은 공동의 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敵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鷄林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金庾信·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와 만주의 삼국을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만약 평화를 선택했다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答薛仁貴書」인 것이다.
 
 
  문무왕의 자존심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下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지배下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系 도래인들을 움직여 壬申의 亂 때 일본의 天武天皇 세력을 지원, 親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天武天皇 이후 약 30년간 日本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天武가 반포한 大寶律令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古代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城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을 어기고, 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薛仁貴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賊臣 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血肉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수모를 참고 견딘 이유는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唐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會盟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倭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 명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白村江(지금의 금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精騎兵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陣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北을 치자 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城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杜大夫가 말하기를, 『勅旨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麟德 원년(664)에 (唐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을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지금 公州市의 就利山)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唐은 망해 버린 백제를 唐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敗者와 勝者를 같이 취급하는 唐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이겨야 했던 전쟁
 
  <蕃漢의 모든 군사가 蛇水에 총집합하니 南建(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城中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唐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갖고 있던 비열성을 唐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唐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 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 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나. 한국사의 로마는 신라
 
 
  徐廷柱의 신라 정신
 
  불멸의 역사서인 史記의 저자 司馬遷은 이 책의 後記에서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고 썼다.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흐름을 쓰고 있는 것이나 신라통일의 前과 後에 관심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未堂 徐廷柱 시인도 6·25 사변 때 하도 참혹한 것을 많이 보고 당하고 한 뒤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가 신라 정신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뒤 신라 정신을 詩作의 한 주제로 삼았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신라 정신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로마 정신을 再발견하여 현실의 장벽을 뚫고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큰 난관에 봉착할 때 길어 쓸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감흥과 상상력의 깊은 샘물인 것이다.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賞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던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들 사이에 두어야지>
 
  (徐廷柱:「우리 데이트는-善德여왕의 말씀 2」)
 
 
  未堂은 이렇게 말했다(1995년 1월호 月刊朝鮮).
 
  『1951년부터 1953년까지가 내게 있어 신라 정신의 잉태기였지. 6·25 전쟁 중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國難이 닥쳤을 때 우리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 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난국을 무슨 슬기와 용기와 실천력으로 헤쳐 왔던가?」하는 것을 절실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신라 정신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
 
  未堂이 말하는 신라 정신의 요체는 멀리 보고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려는 영원성이다.
 
  『인생 행로를 제한받고 또 스스로도 제한하며 얼마만큼만 가고 말려는 한정된 단거리주의가 아니라 한정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고 또 가려는 저 無遠不至주의. 신라인들에게서 우린 그걸 배워야 해. 그러면 불안과 불신과 반감과 충돌 따위를 훨씬 줄일 수 있겠지』
 
  『신라 鄕歌에는 삶에 대한,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이 들어 있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소박한 감정부터 깊은 체념과 달관, 그리고 安民理世의 높은 이념까지를 노래한 향가도 그 바탕은 國仙 정신이야』
 
  國仙 정신은 무엇인가?
 
  『이 天地에 대한 주인의식이 신라인들에게 작용해 통일로 이끌어간 거지. 하늘과 땅을 맡아 생활하는 주인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 이 점이 조선시대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弱者의 팔자와 분수에 다소곳할 걸 가르쳐서 亡國의 길로 유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점이지. 각 개인의 값이나 민족의 가치는 에누리당하자면 한정이 없고, 에누리만 해나가다가는 민족의 장래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와 내 민족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하늘과 땅과 역사의 주인된 자로서 말이네』
 
  『민중을 억압하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민중에게 아첨하고 추파를 던진대도 곤란해. 진심으로 민중과 일치하고 화합하려는 정신, 그게 중요하지. 신라에는 여러 훌륭한 어른들이 많지만 본받을 만한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로선 金庾信 장군을 들겠어. 金庾信 장군을 배워라! 고난을 앞장서서 짊어진 모습을…』
 
  그의 「金庾信 將軍 1」이란 詩는 이렇다.
 
  <말과 사람이 함께 얼어 쿵쿵 나자빠지는
 
  혹독한 추위 속의 어느 겨울날
 
  고구려 평양으로 가는 험한 산길에서
 
  新羅 최고의 군사령관 金庾信은
 
  한 사람의 輜重兵 步卒이 되어
 
  맨 앞에서 군량미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팔뚝을 걷어 어깨까지 드러내고
 
  땀 흘리며 끌고 가고 있었다.
 
  그래서 팔심이 더 세기로야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서 죽인
 
  金閼川을 신라 최고로 쳤지만
 
  그런 김알천의 그런 힘까지도
 
  金庾信 장군의 힘에다가 비기면
 
  젖비린내 나는 거라고
 
  신라 사람들은 간주했었다>
 
 
  徐廷柱 선생은 신라의 화랑들이 가졌던 未來佛 미륵신앙을 자신의 詩 「신라 사람들의 未來通」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사람들은 백년이나 천년 만년 억만년 뒤의 미래에 살 것들 중에 그중 좋은 것들을 그 미래에서 앞당겨 끄집어내 가지고 눈앞에 보고 즐기고 지내는 묘한 습관을 가졌었습니다. 미륵불이라면 그건 과거나 현재의 부처님이 아니라, 먼 미래에 나타나기로 예언만 되어 있는 부처님이신 건데, 신라 사람들은 이분까지도 그 머나먼 미래에서 앞당겨 끌어내서, 눈앞에 두고 살았습지요>
 
 
  대한민국은 新羅의 再生
 
  신라의 힘은 흉노족의 군사·정신문화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기마문화와 샤머니즘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토속적인 요소와 중국에서 들어온 漢字-불교-유교문화가 균형을 이루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 신라는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생동성을 이어갔으나 중국적인 것이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정신도 國力도 시들어 갔다. 초기 신라왕은 유목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샤먼(巫王)을 겸했으며, 금관은 정치권력의 상징이자 샤머니즘의 具現이기도 했다. 화랑도와 신라 지배층의 주체성은 샤머니즘이란 토양에 뿌리 박았으므로 이것이 불교·유교에 의해 약화될 때 위기를 만났다.
 
  초원의 활기도 바다의 개방성도 사라지면서 한민족은 정신과 육체가 다 같이 야위어 갔다.
 
  1945년 한반도 분단으로 남한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그 뒤 조선조적인 내륙문화와 결별하고 해양문화권으로 흡수된 이후 새로운 운명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한민족이 조선왕조적인 질곡에서 해방되니 잊혀졌던 흉노적인 생명력이 튀어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흉노적인, 유목적인, 기마민족적인 활달함을 한민족의 피 속에서 再발견하였다. 이 나라의 모습은 점점 신라를 닮아 가기 시작했다. 신라인 이후 가장 넓은 활동공간을 확보한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이었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해양세력화하였다. 신라인 이후 처음으로 自主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은 自主국방이 가능한 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런 쾌속질주를 가능하게 했던 세력은 羅唐동맹을 이끌어 냈던 金春秋와 비견되는 韓美동맹의 건축가 李承晩이었고, 金庾信 및 화랑도와 닮은 朴正熙 및 국군 장교단이었다.
 
  한국인은 李承晩·朴正熙의 영도下에, 그리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넓은 활동공간을 얻었다. 이 공간을 활용할 정치적 자유도 얻었다. 그래서 빠른 기동이 생겼다. 공간과 자유와 기동은 한국인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흉노의 피를 끓게 했다. 민족 에너지의 대폭발은, 지도자들이 민족의 원형질과 유전자를 건드려 흥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제2의 文武王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통일대왕인 문무왕의 文은 중국적 지성일 것이고, 武는 흉노적 군사력일 것이다. 오늘에 맞게 해석한다면 文은 지식인·언론인·법조인이고, 武는 군인·기업인·과학자들일 것이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요소를 균형 있게 통합하여 자유통일을 쟁취한 뒤 조국 선진화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정치인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李承晩·朴正熙로 대표되는 실용적인 정치지도자의 시대를 1993년에 마감하고 그 뒤 11년간 조선조적인 문민정치 시대를 다시 경험하고 있다. 명분과 위선과 내분에 치우쳐 안보와 경제와 과학을 소홀하게 다루다가 외적의 침략을 부른 역사적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근대화 혁명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양성한 실용·과학·합리의 정신으로써 문민 정권의 守舊性을 돌파할 것인지, 주저앉을 것인지 조국은 기로에 서 있다.
 
  이런 때 우리가 민족사로부터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을 끌어내려 한다면, 근세의 유럽인들이 로마를 연구했듯이 신라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 신라 정신의 핵심이 바로 흉노적인 것이고 이는 한국인의 원점이자 自主의 기준점인 것이다.
 
  삼국통일 前後의 신라가 정신·물질·군사·외교 면에서 일류국가였고 민족의 제1 황금기였다면,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제2의 황금기이다. 경제규모 10위권, 군사력 6위권, 삶의 質 30위권의 대한민국이다. 이 두 번의 황금기를 주도한 영웅들(金春秋·金庾信·金法敏·李承晩·朴正熙·李秉喆 등)의 시대정신은 자존심·실용주의·열린 自主로 표현된다. 그 바탕을 흐르는 것은 자신의 야만성까지도 정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내 버리는 흉노적 기질과 이를 통제하는 合理주의의 절묘한 균형과 통합, 즉 文武의 合一인 것이다. 그 文武王은 『나는 흉노왕의 후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고, 金庾信은 승리의 비결이 『우리의 정직으로 敵의 굽은 곳을 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당한 正直으로 위선과 거짓을 부술 때 민족사의 제2황금기는 자유통일을 넘어 조국 선진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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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일본이 신라에서 배울 때
 
  '일본의 역사'(岩波新書. 이노우에 기요시 著)를 읽다가 재미 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지휘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됩니다. 그가 뒤에 天智천황입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의 改新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 公民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연호를 정하는 것을 建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호를 사용하는 백성들이 황제나 왕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大化 改新의 주도세력은 親百濟 정책을 썼습니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복구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냅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서기 663년의 일입니다. 일본 패잔병은 백제 유민들을 다수 싣고서 돌아왔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나카노오오에는 국내 문제에 전념하기로 하고 수도를 大津으로 옮긴 뒤 천황(天智)에 올랐습니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습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弘文천황이 등극합니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고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습니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오오아마측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황으로 추대했습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입니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릅니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2 - 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습니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 역사학계의 거두인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天武천황의 통치 시기에 신라는 唐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670-676년 사이 신라는 唐을 상대로 일대 결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唐이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신라와 당은 국교가 끊어진 상태로 냉냉했습니다. 天武천황 정권은 신라의 눈치를 보면서 한때 唐과의 通交를 중단했다가 신라-당의 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난 지 27년이 흘러서야 재개했습니다.
  신라통일이 일본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고대 국가가 그 체제를 정비하는 데 먼저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신라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한자 등 여러 문물이 전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국가 만들기의 노하우가 통째로 건너갔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백촌강의 해전에서 신라군에 의하여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뒤 한동안 신라에 눌려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워간 셈입니다.
  이 史實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동아시아(당, 신라, 일본)의 공동 번영을 보장했다는 것을 잘 증명합니다. 한반도가 안정되면 주변국가들도 평화를 구가할 수 있고, 한반도가 지금처럼, 또는 삼국시대처럼 분렬되면 주변 국가들도 전쟁에 휘말려 들거나(삼국시대에 한반도엔 중국군대와 일본군대가 들어와 싸웠다. 임진왜란, 러일전쟁, 6.25전쟁의 경우도 그렇다) 불안정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김유신, 김춘추(태종무열왕), 문무왕 등 통일 3걸이 주도한 신라통일은 동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을 선물한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업적임이 이렇듯 분명한데도 엉터리 학자들과 못배운 자들의 위선과 환상, 그리고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좌익들의 선동에 의하여 폄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으려면 한국의 실력이 일본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때여야 할 것입니다. 7세기말의 통일신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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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자료: 통일기 신라와 일본의 대외정책(정효운)
 
  *아래 글은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가 펴낸 신라문화 제25집에 실렸던 논문(일본율령국가와 통일신라의 형성에 관한 일고찰)에서 일부를 뽑은 것이다. 필자는 부산동의대학교 鄭孝雲 교수이다.
 
  <백제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신라의 對일본 외교는 적대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는 655년부터 668년까지 왜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동맹 노선에 가담하여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 있어 군사적 지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白江전투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대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倭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극적으로 참가한 663년 白江전투에서의 패배란 상황은 倭를 정치·군사적 양면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하였다. 군사제도 면에서 방위태세의 확충과 정치제도 면에서 國制의 개혁이 그것이다. 패전 후 일본의 정치적 과제는 국내 민심의 수습과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통해 압박해오는 唐의 외교적 압력의 극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상되는 신라와 唐의 무력적 외교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방위시설의 증설을 강화하였다.
 
  <三年 是歲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置防與烽 又於筑紫大堤貯水 名日水城 四年 秋八月遺達率答春初築城於長門國 遺達率憶禮福留 遺達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六年 十一月 是月築倭國高安城 讚吉國山田郡屋嶋城 對馬國金田城 (이상 「日本 書紀」 天智天皇條)
  3년 이해 대마도 일기도 축자국 등에 방안과 봉화를 두었다. 또 축자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하였다. 이름하여 水城이라 한다.
  4년 추 8월에 달솔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도록 하였고 달솔 억례 복류와 달솔 사비복부를 축자국에 보내어 대야 및 연성의 두 성을 쌓게 하였다.
  6년 11월 이 달에 왜국의 고안성과 찬길국 산전국에 옥도성과 대마도의 금전성을 쌓도록 하였다.>
 
  664년에서 667년에 걸쳐 對馬에서부터 畿內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요지에 많은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방어 전략과 연계하여 667년 3월에는 수도를 내지인 近江大津宮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국적 방어 태세의 정비는 唐과 고구려의 전쟁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시기 倭의 對外정책은 더 이상 한반도 정세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불간섭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는 666년(天智 5) 10월과 668년(天智 7) 7월의 2회에 걸쳐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 파병을 요청하고 있지만 응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68년(天智 7) 7월의 고구려 사신 파견에 뒤이어 9월에는 신라로부터 사신이 倭에 파견되고 있다.
 
  <秋九月壬午朔癸巳 新羅遺沙級金東嚴等進調 丁未 中臣內臣使沙門法弁·秦筆 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 付東嚴等 庾戌 使佈勢臣耳麻呂 賜新羅王輸御調船 一隻 付東嚴等 … 十一月辛巳朔 賜新羅王絹五十疋 綿五百斤 韋一百枚 付金東嚴等 賜東嚴等物 各有差 乙酉 遺小山下道守臣麻呂 吉士小?於新羅 是日 金東嚴等罷歸
 
  (「日本書紀」 天智天皇 七年條)
 
  추 9월 임오 초하루 계사에 신라가 사록 급손 김동암 등을 보내어 진조하게 하였다. 정미에 중신 내신이 사문법변과 진필을 사신으로 하여 신라의 상신 대각간 유신에게 배 한 척을 주어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경술에 포세신이마려를 보내어 신라왕에게 조를 나르는 배 한척을 하사하여 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였다. … 11월 신사 초하루에 신라왕에게 비단 오백필과 면 오백근, 가죽 일백매를 하사하고 김동암 등에게 전하게 하고 동암 등에게도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이가 있었다. 을유에 소산하 도수신마려와 길사 소유를 신라에 보내었다. 이 날에 김동암 등이 파하고 돌아갔다>
 
  이들 신라 사신 파견의 의미는 656년(齊明 2) 이후 13년만이라는 점보다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唐軍에 의해 함락되었던 시점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사신의 파견은 앞으로 예상되는 唐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외교적 목적을 가진 파견으로 생각된다. 이에 倭의 天智조정은 다량의 답례품을 사여하는 등 후한 대접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倭의 행위는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던 신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외교책에서 나왔다고 보아진다.
  이 점은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의 지원 요청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의 신라와 倭가, 당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해 공통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倭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립적 불간섭 외교정책은 신라가 唐과 전쟁을 수행하였던 시기에도 일관되게 추진되었다고 보아지며, 이는 白江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추진한 소극적 양면외교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왜의 對唐외교는 주로 熊津都督府 鎭將과의 교섭이었기 때문에 당조정과 직접적으로 외교를 추진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격변기란 점도 작용하였지만 唐과 적대적이었던 고구려·백제의 군사노선을 선택하였던 것이 唐과의 직접 교섭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와중에 669년(天智 8)에 제 5차 遺唐使(견당사)가 파견되었다.
 
  이 사신의 파견에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보아 고구려 멸망과 관련된 축하사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 역시 倭의 중립적 외교의 표현으로 보아진다. 이후 701년(大寶 1)에 6차 遣唐使가 파견될 때까지 33년간 唐과의 국가적 교섭은 보이지 않는다. 天智朝의 唐과의 외교단절 정책과, 신라와의 외교 재개란 대외정책의 방향은 天武·持統朝에도 계승되고 있다.
 
  이 시기 왜의 對外정책을 제약한 요인은 白江전투의 패배에 따른 패배감과 唐의 위협이라는 국가적 위기감이었다. 후자는 신라와 공통하는 대외인식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일본의 외교를 唐보다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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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신라통일의 세계사적 의미
  (최성재)
 
  [정치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선택]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환타지 소설 읽듯이 읽으면 안 된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 한의 여후, 당의 태종과 측천무후, 명의 영락제, 청의 옹정제 등 초창기에 치열한 권력 투쟁을 통해서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이후에 이들이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들을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한 것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사회 윤리 또는 국가 윤리 대신 오로지 개인 윤리의 잣대만을 들이대어 형제를 죽였다, 조카를 죽였다, 자식을 죽였다, 공신을 죽였다, 라는 그 한 가지 사실만 두고, 그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거들떠보지 않는 춘추필법을, 최소한 국가를 책임진 사람들은 계속 견지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천하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그 국가는 저 막강하던 진이나 수처럼 밤하늘의 불꽃인 양 허망하게 스러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 와중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었을 것이다. 흔히들 독재자로만 아는 위에 든 위인들은 하나같이 백성에겐 풍요와 자유를 안겨주되 정적에겐 가난과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수백 년 평화의 양탄자를 깔았다. 욕을 몽땅 덮어쓰는 대신 국가와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후엔 하나같이 풍요로운 경제와 다채로운 문화와 활기찬 사회의 새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은 없고 희생 없는 영광은 없는 법이다.
 
  [영토를 넓히는 일은 국가의 흥망을 거는 대도박]
 
  특이한 나라가 신라이다. 삼국통일 후에 100여년 간 치열한 권력투쟁이 없었다. 아주 안정되었다. 지금까지 이걸 연구한 걸 못 보았는데,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세상에는 절대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신라는 남다른 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신라가 발해 정복에 나섰다면, 거의 100% 신라는 망했다. 그럴 힘이 전혀 없는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00여년에 걸쳐 전쟁을 한 나라가 무슨 힘이 더 있었을까.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그 당시로서는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는 100여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대격전장이었다. 국가 총력전의 각축장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신라가 발해와 전쟁을 벌였다면, 당이 최소한 어부지리로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했을 것이고 일본도 영남과 호남의 일부라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민족의 국가는 소멸되고 그들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높았던 고려는 정종 때에 광군(光軍)을 설치하여 군대를 무려 30만이나 유지했다. 그 결과 고려보다 수십 배 큰 송도 못 이긴 요와 금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가 망했지만, 금방 요가 들어서고 금이 들어서서 만주를 차지한다는 것은 '새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들의 침략에 나라가 안 망하면 다행이었다. 윤관이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물리치고 한때 9성을 쌓았지만, 그것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기도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조선의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경선을 넓힌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본 삼국 통일]
 
  우리는 삼국통일을 우습게 여기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건 엄청난 쾌거이다. 후삼국의 짧은 기간 외에는 무려 1300년 동안 우리 한민족은 동족상잔이 없는 평화로운 통일국가 체제를 유지했다.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적 같은 일이다. 중원과 북방의 초강대국들이나 고려말 이후 전쟁의 귀신이 된 왜에게 굴하지 않고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자주통일국가를 유지한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계에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비교하되, 중국이 통일국가로서 위엄을 떨칠 때와 비교하는 데만 익숙해져서, 신라의 통일을 초라하게 보고 특히 그 면적이 작다고 주눅이 들지만, 중국이란 나라도 통일과 분열을 얼마나 되풀이했으며 이민족의 지배는 또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중국은 BC221년에 통일했지만, 그 후로 나라가 산산조각 난 적이 부지기수이다. 전 중국인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것만 해도 400년이 넘는다. 또한 오늘날의 저 오만방자한 중국이 5개 내지 10개 국가로 분열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 빈틈을 노려서 우리가 만주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신라의 삼국통일은 세계로 눈을 넓히면 더욱 빛난다. 우리나라와 면적이 거의 비슷한 영국이 통일한 것은 1707년, 우리보다 약 1000년이 늦었다. 북해도를 빼면(이것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에 병합) 역시 우리와 비슷한 크기의 일본이 통일한 것은 1603년, 우리보다 약 900년 늦었다. 독일이 통일한 것은 1871년. 우리보다 1200년이 늦다. 유럽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졌던 로마제국이 망한 후 라틴족은 기껏 이태리 반도 하나를 통일하는 데도 무려 1400년이 걸렸다. 왜 이태리는 조상들이 그렇게 큰 나라를 가졌었는데, 그 모양 그 꼴로 분열되어 살았던가. 후손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몽골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했지만, 지금은 땅만 좀 클 뿐 너무도 초라하다. 후손이 못났기 때문이다.
 
  로마나 몽골과는 달리 그 조상이 우리 조상보다 훨씬 못났던 일본이나 영국 또는 독일은 우리보다 900년에서 1200년 통일이 늦었지만, 그 후손이 우리보다 훨씬 잘났기 때문에 못난 조상을 원망하지 않고, 아니 그런 조상을 엄청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불철주야 노력해서 옛 전통에 새 전통을 차곡차곡 쌓아서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전쟁 도발과 식민지 경영의 과오는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오늘날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평화로운 통일 국가를 구가하다가 이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채 강대국에 운명을 맡기고 있는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특히 한반도 크기의 영국은 통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달성한 덕분에 100여년간 전 세계의 태양으로 군림했다. 그 상징이 그리니치 천문대이다. 그 곳을 중심으로 동경과 서경, 곧 동쪽과 서쪽이 나뉘어진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란 말이다.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세계의 중심이란 말이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인도나 러시아가 아니라, 일개 섬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면적은 우리와 거의 같지만 그 조상이 못나서 영국은 우리보다 1000년이나 늦게 통일했지만, 그 후손이 잘나서 못난 조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달팽이처럼 국내로 움츠려드는 게 아니라 독수리처럼 세계로 눈을 돌리고,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과거로 뒷걸음질치지 않는 게 아니라 청년처럼 가슴을 활짝 펴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감으로써 만주나 중원 따위가 아니라 5대양 6대주의 패자가 된 것이다.
 
  우린 어떤가. 똘똘 뭉쳐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어려운데, 한 나라 안의 국민들이 가슴에 저마다 증오와 원망을 품고 입에 가득 욕설과 저주를 내뱉으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대를 이은 독재자가 해괴한 구실로 대를 이어 국민이야 굶어 죽든 말든 오로지 군대만 양성함에도, 그의 선의를 철석같이 믿고 그가 달라는 대로 나라의 세금을 뚝 떼어 식량과 달러와 비료를 아낌없이 고일(상납할) 뿐, 2300만 동족의 생존과 인권은 그 독재자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자들이, 70% 이상의 세금납부자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분배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권력과 조직과 방송을 이용하여 도리어 이들을 시대착오적인 수구보수자라며 민족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자라며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집요하게 뒷조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상식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 어찌 국론이 핵이 분열되듯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렇게 국론이 갈가리 찢어진 나라가 어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가 있을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북한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암울한 일제시대에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기개를 길러주기 위해서 한 단재의 말을 세계 11위의 경제강국이 된 오늘날까지 앵무새처럼 외우고, 특히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300만 죽이고 조상과 일제와 소련과 중국이 물려주고 적선한 것을 뜯어 먹기만 하고 전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어 300만을 굶겨 죽이고, 전 국민의 평균 신장을 저 가혹했던 일제 시대 때보다 평균 5cm나 낮추어놓고도, 일대일로는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우세했던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신라의 통일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열등감과 죄의식을 해소하려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말려 들어가, 삼국통일과 김유신 이야기만 나오면, '뚜껑이 열리는' 사람들은 제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도 이젠 그럴 소리를 하면 차분하게 설득해서 싹수가 노랗지 않게 해야 되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마징가 제트' 같은 의식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욕하기 전에]
 
  개인이라면 중소기업 하나라도 알짜배기로 키우고 나서 삼성을 욕하고, 한국의 위정자라면 남북통일은커녕 일본에서 두 번 다시 망언이 못 나오도록 독도를 명실상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고 나서, 북한은 적화통일의 망상은 제발 버리고 백두산과 간도 하나라도 제대로 차지하고 나서, 삼국통일을 욕하기 바란다. 학자라면 동북공정을 들고 나오는 중국의 입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김부식을 욕하기 바란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당당히 본기(本紀)라고 하여 중국과 똑같이 당당히 황제국의 역사로 기술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발 한번이라도 읽고 나서 삼국통일과 김유신을 욕하기 바란다.
 
  단재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거의 읽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읽었으면 본기가 뜻하는 것이 뭔지 김유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랐을 리가 없다. 거기엔 죽은 지 400년이 넘었지만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의 사대부만 아니라 나무하는 아이와 물긷는 아낙네도 칭송해 마지않던 김유신에 대한 기록이 문무왕을 빼고는 삼국의 역대 모든 왕에 대한 기록보다 많고, 통일 이전의 역사는 신라에 대한 기록보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훨씬 많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맞서 삼국의 역사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바로 이 「삼국사기」이다. 괴이하게 서로 철천지원수라는 식민사관 학자들과 민족사관 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대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한 김부식이 편찬한 이 「삼국사기」이다. 중국은 사마천의 「사기」와 진수의 「삼국지」가 있고, 일본은 「일본서기」가 있고,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있다. 이 4권은 각기 자국의 고대사를 가장 자세히 기록한 정사(正史)이다. 우리가 고구려를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삼국사기」이다. 무령왕릉의 지석을 통해 입증되었듯이 「삼국사기」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에 비해 훨씬 정확하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업신여기면, 중국과 일본은 쾌재를 부르면서 저네들의 사서에 비추어 우리 고대사를 제멋대로 왜곡하여 한국의 과거만이 아니라 한국의 현재도 멸시하고 한국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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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라이샤워의 신라극찬
 
  E.O.라이샤워는 됴쿄에서 출생한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일본학과 동양학을 연구했고 이 대학의 옌칭(燕京)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일본 승려 圓仁의 여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번역했고, 그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엔닌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한 章을 떼어내어 「중국의 신라인」을 다루고 있다. 아마도 기자가 이 여행기를 읽고 감탄한 것과 같은 감동을 그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와 唐이 손잡고 동아시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唐, 新羅, 일본이 공존공영하던 고대사의 전성기에 신라인들이 한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圓仁이 우리에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중국 동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은 대부분 신라 출신자들의 손에 의하여 장악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들은 평온한 지중해 연안에서 상인들이 그 주변영역에 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연출할 수 있었다. 중국의 수도 長安에 머무는 외국 사람들 중에서 신라인들이 가장 많았고, 다른 외국인들보다도 철저하게 중국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서해는 신라인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생각된다.
  신라인 무역상 사회는 山東반도 南岸 일대와 淮河(회하)하류 일대를 따라 집중되었다. (해상무역의 전략적 거점인) 楚州에는 거대한 신라 租界가 있고 신라인 총독이 신라방의 행정을 관장할 정도였다. 839년 봄 일본사절단의 신라인 통역 김정남이 초주에서 귀국하는 사
  절단을 위하여 아홉 척의 배를 구하고 이를 운항할 60명의 신라인 선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중국연안의 신라인 사회는 상당할 정도로 치외법권의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圓仁이 중국 연안에서 만났던 많은 무역선들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신라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동아사이 해상무역에서 신라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도전은 미약했다.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관료주의적 비효율과 혼란과 비극적인 항해의 기록은, 신라인들이 여유 있게 산동연안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가 드디어 圓仁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던 뛰어난 기동력에 비하면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어쨌든 圓仁의 시대에는 아직 신라인들이 세계의 이 부분에서 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이샤워는 張保皐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張保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三國史記의 잛은 기록을 보충하는 圓仁의 여행기와 라이샤워의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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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記]속 신라
 
  張保皐 연구의 결정적 자료
 
  일본 天台宗의 大成者인 圓仁(엔닌)은 서기 838년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唐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기 위한 고난에 찬 순례를 했다. 이 여행기록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唐뿐 아니라 일본과 신라를 오가면서 국제무역을 하던 해상왕 張保皐 등 신라인의 해외 활동이 잘 적혀져 있다. 장보고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자료이다. 이 여행기는 日記式이다. 중국 천지를 걸어서 다니면서 체험한 민중의 삶은 생생하다. 圓仁은 주관적인 감상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적어놓고 있다. 일본인의 기록정신이 이런 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司馬遷의 史記를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여행기가 절제와 자제를 미덕으로 삼는 전형적인 동양식 기록문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圓仁의 이 여행기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법사의 大唐西域記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기자는 최근 '중심'에서 출판하고 金文經씨가 譯注를 붙인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거의 절반이 唐, 일본인이 아니라 신라인이다. 圓仁이 9년 동안 唐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는 데, 그리고 귀국하는 데 在唐신라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신라인의 唐內 집단거주지나 연락망, 특히 張保皐가 산동반도에 세운 기지인 赤山법화원의 큰 도움을 받았다.
  신라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의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譯注者 金文經씨는 이렇게 썼다.
 
  主人賊心算人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이 신라인들이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동서해상교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하고 그 주인노릇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신라인들은 마치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지중해나 중동의 해안에서 수행하였던 것과 같은 역할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前者에 비해서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앞장서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교역은 종전의 唐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교역체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갔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무역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인공들이 바로 신라 무역상인들이다>
  이 여행기에서 圓仁은 '주인은 도적의 마음으로 사람을 재어보았다(主人賊心算人)'라고 쓰는 등 자신이 접했던 인물들의 평을 자주 했다. 그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험담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묘사한 신라인들의 언동은 감동적이다. 신라인들은 이 일본 高僧에 의해서, 唐에서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일을 정확하고 친절하고 의리있게 하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일류 세계인으로서의 신라인
 
  그가 唐의 관리들과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 在唐 신라인과 하는 일은 척척 돌아간다. 신라인들은 唐內에 거점과 인맥을 잘 만들어두었고 정보에 밝으면서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나온다. 장보고의 唐內 네트워크가 강했고 신라무역상들이 우수한 항해술을 근거로 하여 당,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서해, 남해의 해상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하여 我田引水式 과장의 필요 없이 사실대로 확인된다.
  圓仁 일행이 9년간의 순례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과정, 그 동안 수집했던 典籍들을 신라인에게 맡겨두었다가 불교탄압의 와중에서도 고스란히 돌려받는 이야기, 장보고의 부하 張대사가 圓仁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하여 배를 짓는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하여 항해중 신라영해로 표류하여 들어갈까봐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신라인들은 敵國의 승려를 동족 대하듯이 한다.
  <張대사는 지난 해 겨울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금년 2월에 이르러 일을 마쳤다. 오로지 우리를 실어 떠나보내어 귀국시키고자 함에서였다>
  그러나 누군가 張대사를 모함하는 신고를 唐의 관청에 하는 바람에 張대사가 만든 배를 탈 수 없었다. 圓仁은 중국의 남부 항구 明州로 가서 거기에 와 있는 일본 배를 타고 귀국하기로 한다.
  <접대중인 張대사는 20리를 배웅해와서 비로소 헤어졌다>
  圓仁은 또 신라 배를 이용한다.
  <신라사람 진충의 배가 숯을 싣고 초주로 가려는 참에 만났는데 배 운임을 의논하여 그 삯을 비단 5필로 정하였다>
  <초주에 도착하니 신라坊의 총관인 劉愼言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로소 명주에 있던 일본인은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劉대사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출발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기를 청하였다>
 
  신라 배 타고 귀국길
 
  <신라사람 金珍 등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5월11일 소주의 송가구로부터 출발하여 일본국으로 갑니다. 21일을 지나 내주 관내의 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일본국의 스님들이 지금 등주의 적산촌에 머물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배에태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일 노산을 떠날 즈음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스님 등은 이미 남주로 가서 일본국으로 가는 본국선을 찾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노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배를 타고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노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 편지를 써서 김진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이곳의 소식을 알리고 특별히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 뒤 다시 노산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고자 여행 식량을 준비하였다. 초주의 신라인 劉총관이 모든 일을 맡아주었다. 전 총관인 薛詮과 등주 張대사의 동생인 張從彦, 그리고 어머니 등 모두가 배웅하였다>
  <김진 등의 배를 찾을 수 있었다. 배에 올라 떠났다. 등주 관내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張詠(張대사)이 배로 올라와 만났다>
  <張대사가 보낸 송별의 물건을 받았다. 적산포로부터 바다를 건넜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산들이 있는 섬을 보았다. 높거나 낮거나 하여 이어져 있었다. 뱃사공 등에 물었더니 "신라국의 서부, 웅주(공주)의 서쪽 땅'이라고 했다. 본래 백제의 땅이다. 하루종일 동남을 향해 나갔다. 산과 섬이 연이어서 끊이지 않았다. 밤10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이도(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구초도(전남의 거차군도 중 한 섬)에 도착했다. 섬지기 한 사람과 매를 키우는 사람 2명이 배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 칙사가 500명을 이끌고 경주에 와 있습니다. 4월중에 일본 대마도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신라국의 동남쪽에 이르러 큰 바다로 나아갔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갔다>
  <날이 밝을 무렵 동쪽으로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정오경에 전방에 일본국의 산들을 보았다. 오후 8시 무렵이 되어 히젠국 마쓰우라군 북부 시카시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험난한 귀국과정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가 圓仁일행이 당에서 수집한 많은 서적을 싣고 한반도의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무사히 도착하는 장면에 이르러 기자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마치 기자가 1200년 전으로 돌아가 劉愼言, 張대사 등 신라인이 되어 圓仁일행을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삼초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 신라인의 정보망, 基地網, 우수한 항해술, 정확한 업무자세는 왜 통일신라가 민족사 최초의 일류국가였는가를 웅변해준다. 일류국가는 일류국민으로 구성된다. 9세기 신라인들이 보여준 품격이야말로 신라의 國格이었을 것이다.
  圓仁 또한 일본의 천태종을 발전시킨 國師가 되었고, 그의 여행기에 신라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 뒤 사람들이 신라와 張保皐의 對外 활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제1 가는 자료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야말로 국경을 넘어선 報恩이 아니겠는가.
  圓仁의 여행기를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圓仁의 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前 주일미국대사 라이샤워도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群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신라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羅唐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제국 唐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韓美동맹 덕분이었음을 모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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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 隱忍自重의 나라 新羅
 
  隱忍自重(은인자중): 마음속으로 참으며 몸가짐을 신중히 함(금성출판사 국어사전).
 
  은인자중이란 말이 우리 귀에 익게 된 것은 1961년5월16일 아침 KBS 방송을 통해서 울려퍼진 혁명공약 때문이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읽은 혁명공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장악하고(후략)>
 
  隱忍自重이란 말은 칼을 가슴에 품고(忍)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력을 기르고, 신중한 처신으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단어를 보면 연상되는 인물과 나라가 있다. 쿠데타를 준비해가던 朴正熙의 모습, 그리고 삼국통일을 준비해가던 신라의 모습이 그것이다.
 
  삼국중에서 가장 약체였고 침략을 많이 당한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사기의 통계를 분석한 역사학자 孫晉泰에 따르면(한국민족사개론. 을유문화사) 신라는 왜로부터 27회, 백제로부터 40회, 고구려로부터 17회, 말갈로부터 7회, 낙랑으로부터 4회, 가야로부터 3회 총98회의 침공을 받았다.
 
  신라가 먼저 공격한 경우는 20회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신라였다. 특히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세력으로부터 국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했다. 고구려가 한족과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한민족의 미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 시기에 신라는 倭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 오늘의 한민족과 민족활동 공간으로서의 한반도는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신라가 98회의 침공을 받은 데 비해 20회의 선제공격밖에 가하지 않은 것은, 이길 전투만 골라서 함으로써 불필요한 국력소모를 줄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은인자중하면서 국력을 키운 다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약체로 출발한 신라의 역전승이고 허세를 배격한 실력주의의 성공이었다. 가장 약했던 신라가 은인자중하면서 실력을 기르더니, 가장 적은 회수의 전투로써 가야, 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제압해간 과정은 감동의 드라마이다. 이 감동을 수치로 몰아가는 세력은 김정일 정권과 사대주의자, 위선자, 자학주의자, 무식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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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唐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신라가 얻은 것
 
  서기 611년 백제 武王은 사신을 隨나라로 보내 煬帝를 만나 隨가 고구려를 칠 때 협조하고싶다고 자청했다. 煬帝는 기뻐하면서 부하를 무왕에게 보내 협의하도록 했다. 그 이듬해 수 양제는 遼河를 건너 고구려를 치게 되었다. 무왕은 국경의 경비를 엄하게 하고 말로써는 隨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양다리를 걸치고 기동하지 않았다. 隨는 이 전쟁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했다.
 
  수가 망하고 唐이 일어났다. 隨의 지배층이 가졌던 백제에 대한 불신감은 그대로 唐의 지배층에 인계되었다. 7세기 백제와 신라는 피를 피로 씻는 공방전을 벌인다. 백제와 신라는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패권국가 唐과 동맹하려는 경쟁을 벌인다.
 
  백제 무왕 28년(서기 627년)에 왕은 조카 福信을 入唐시켜 唐의 도움을 청했다. 당 태종은 이 자리에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한다. 이즈음부터 唐은 신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기 643년 唐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에 맞추어 신라는 5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의 水口城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는 사이 백제가 서쪽으로 쳐들어와서 일곱 개 城을 빼앗겼다. 唐도 고구려에게 패퇴했다.
  신라는 唐과의 우호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했던 것이다. 唐의 지도부는 신라의 이 義理를 고맙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서기 648년 선덕여왕의 명령을 받은 金春秋는 入唐하여 당태종과 함께 羅唐동맹을 맺는다. 신라가 당과 힘을 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에는 평양 이남 땅을 신라가 갖기로 약조한 것이다. 이 동맹관계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 지도부가 손해를 감수하고 唐과의 약속을 지킨 代價이기도 했다. 국제관계에서도 의리와 신용은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미 동맹 관계도 羅唐 동맹과 비슷하다. 羅唐 동맹이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듯이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에서도 한미 동맹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신라처럼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이 어려울 때 배신한다든지 미국을 敵처럼 대하지나 않는지 되돌아볼 때이다. 만약 미국으로부터 우리가 배신자처럼 찍힌다면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용을 잃었던 백제처럼 결정적인 시기에서 결정적인 외면을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보는 우리의 작은 손해는 통일기에 큰 득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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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름답게 망한 나라 新羅
 
  신라의 마지막 왕 敬順王은 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인 뒤 세워서 왕이 된 사람이다. 경순왕 9년(서기 935년) 왕은 나라를 고려 王建에게 바치려고 회의에 붙였다. 마의태자는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 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에 경순왕이 말했다.
  "이와 같이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로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만 간과 뇌를 땅에 바르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간과 뇌를 땅에 바른다'는 말은 原文에 '肝腦塗地'라고 적혀 있다.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려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절실하게 그린 것이다. 경순왕의 말에서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흥미롭다. 나라를 지킬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나라가 폭싹 망해버릴 정도로 약하지도 못하니 왕족들이 구차한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면서 백성들만 고생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경순왕은 후계자인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시하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해 11월에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송도(개성)의 태조에게 귀순한다. 마차, 牛車, 말이 30여리에 잇달아 도로가 막히고 구경꾼이 담장과 같았다. 경순왕은 왕건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경주를 食邑으로 받았고 경순왕 백부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 보냈다. 여기서 난 사람은 고려 현종의 아버지가 된다.
 
  신라의 귀족들도 고려에서 중용되었다. 경순왕이 싸워서 망하지 않고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과 귀족들이 망국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덕을 본 셈이다. 삼국사기의 著者 金富軾은 이렇게 평했다.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한 일이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만약 죽음으로써 힘껏 싸워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만 궁급함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멸망되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만 끼쳤을 것이다. 현종은 신라의 外孫으로 寶位에 올랐고 그 후 대통을 이은 자가 모두 그 자손이었다.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망하면 왕족과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동서고금의 사례에서 보는 바이다. 신라처럼 싸우지 않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왕이 스스로 결단하여 귀순함으로써 그 스스로는 물론이고 귀족과 백성들을 살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고구려는 지배층의 自中之亂, 백제는 지배층의 부패가 심각했다. 두 나라가 싸워서 망한 것은 일견 장렬하게 보이지만 그 후유증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싸워서 망하든지 끝장을 확인할 때까지 가서 망하면 망하는 쪽에서 남는 것은 없다. 따라서 접수하는 쪽에서는 물건과 노예를 줍듯이 하니 예우해줄 이유가 없다. 신라 경순왕은 군사적, 경제적 餘力이 있을 때 귀순하니 왕건으로서도 대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지배층이 고려의 지배층으로 전입함으로써 신라사람들은 고려시대에도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邊太燮 교수는 '韓國史通論'에서 고려 성종 때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을 때의 지배세력은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頭品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고 썼다. 성종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主役이었던 유학자 崔承老는 신라 6두품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28개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제시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했다.
 
  북한 金正日은 이런 경순왕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북한체제가 망하고 김정일 집단이 단죄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여력이 있을 때 손을 들 것인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때 항복할 것인가의 선택만 남았다. 김정일이 대오각성하여 대한민국에 귀순한다면 적어도 그와 친족, 그리고 측근들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는 그의 운명이 의자왕이나 차우세스쿠보다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헤어질 때, 죽을 때, 해산할 때, 망할 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삼국통일로써 한민족이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공동체의 무대를 한반도에 설정했던 신라는 망하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라정신 속에 있는 실용정신, 자존심, 그리고 관용과 지혜 덕분일 것이다. 에밀레鐘에 새겨진 銘文에 나오는 '圓空神體'란 말이 새삼 생각난다. "둥글고 속이 빈 것이 하느님의 본성"이라는 의미이다. 원만하고 겸허하면서도 강력한 존재가 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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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통일의 원동력은 정치안정
 
  삼국사기 列傳에 등장하는 신라인 56명중 20여명이 殉國한 사람이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다해야 하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孝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忠孝를 함께 하는 인간의 도리이다"
 
  신라 56왕중 암살 등의 이유로 왕위를 찬탈당한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하다. 이는 신라의 王權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本紀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新羅本紀에는 정치관련 기사가 전체의 48.3%나 된다. 백제는 29.8%, 고구려는 36.4%이다. 이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정치행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는 의미이다.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 申瀅植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신라는 정치기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어 왕권의 강화나 제도의 정비 등 정치적 발전에 큰 진전을 본 나라였으며, 전쟁에서 가장 적은 출혈을 보았으므로 비교적 정치적 안정과 문화의 개발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배층이 정치를 잘해서 내부단합과 이에 기초한 생산력과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唐의 장수 蘇定方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귀국하여 당 고종에게 보고한다. 고종은 왜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蘇定方은 이렇게 설명한다(삼국사기에서 인용).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겨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내부단합을 이루는 것이다. 상하관계에 질서와 의리와 인정을 심어 외부의 충격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대가 달라도 변함이 없는 정치의 본질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과 반목을 부채질 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1300년 전 신라를 배워야 할 것이다.
 
  *통계: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新羅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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