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800자로 본 중국 1부 - 13부

淸山에 2009. 9. 3. 13:34
  

 

 
 
 

800자로 본 중국 ① 오성홍기(五星紅旗)

[중앙일보] 입력 2007.09.06 04:36 / 수정 2007.11.13 11:36

빨간색은 혁명, 다섯 개 노란 별은 황색인종 상징

 

 
청나라 때 사용된 중국의 첫 국기로 용이 여의주를 좇는 모습을 그린 삼각황룡기(左)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인 오성홍기.
관련기사
관련링크
중국의 첫 국기는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과 연을 맺는다. 서구 열강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곤경에 처한 청(淸)에 군함을 팔 궁리부터 했다. 영국은 함정을 이용해 난을 제압할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1861년 계약을 체결하면 이듬해 9월 군함을 인도한다. 해군을 조련해 1863년 4월 작전에 투입하면 하루 안에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청을 유혹했다.

청은 이를 믿고 7척의 군함과 1척의 보급선을 샀다. 자연히 군함에 달 국기가 필요했다. 중국 최초의 국기인 삼각황룡기(三角黃龍旗)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황색 바탕에 남색 용을 그려 넣었다. 1862년의 일이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오성홍기는 1949년에 제작됐다. 중국 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가 공모한 결과 2992점의 후보작이 나왔다. 최종적으로 상하이 일용품 회사에 다니던 쩡롄쑹(曾聯松)의 도안이 낙점을 받았다. 바탕의 홍색은 열정, 즉 혁명을 상징한다. 다섯 개 별의 황색은 중국인이 황색 인종임을 뜻한다. 별 다섯 중 가장 큰 별은 공산당을, 나머지 네 개의 작은 별은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가, 민족자산가 등 네 계급을 나타낸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인민민주전정을 논함(論人民民主專政)'이란 글에서 인민으로 위의 네 계급을 언급한 데 착안했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의미가 담겼다. 작은 별 네 개의 한쪽 끝은 모두 큰 별의 중심을 향한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혁명 인민이 단결한다는 뜻이다. 별 다섯이 왼쪽 위에 자리한 것은 광활한 대지를 고루 비추게 하기 위함이다. 첫 오성홍기는 중국 건국일인 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 의해 천안문(天安門) 광장에 게양됐다.

중국연구소 유상철 기자
 
 

 

 

 
 

800자로 본 중국 ② 왜 위안화로 부르나

 

[중앙일보] 입력 2007.09.13 04:49 / 수정 2007.11.13 11:39

당나라 고조가 발행한 '개원통보'서 유래


'폴슨 효과'란 말이 있다.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 위안(元)화 가치가 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무역역조 시정을 위해 미국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귀하신 몸이 된 위안은 이제 달러.유로 등과 함께 세계를 삼분할 태세다.

중국 돈 인민폐(人民幣)의 단위인 위안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여러 가지 설 중 당(唐) 고조 이연(李淵)이 발행한 '개원통보(開元通寶)'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개원통보는 동그란 동전에 네모 구멍을 내고 글자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순서를 바꿔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읽어 '개통원보(開通元寶)'라고 했다. 이 때문에 명(明)대와 청(淸)대에 쓰인 금.은의 덩어리 화폐는 '원보(元寶)'라는 이름을 얻었다. '위안(元)'이란 글자가 화폐라는 개념을 얻게 된 계기다. 청 말엔 '은원'(銀元) 주조와 함께 '동원'(銅元)을 기계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위안이 화폐 단위로 공식 등장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8년 12월 1일 처음 인민폐를 발행하면서 그 단위로 '위안'을 계승했다.

인민폐 형태는 지금까지 다섯 차례 바뀌었다. 현재 유통되는 인민폐는 99년 고안된 것이다. 2005년엔 위폐 방지 기능을 강화했다. 위안 아래 보조 단위로는 1위안의 10분의 1인 '자오(角)', 100분의 1인 '펀(分)'이 있다. 중국인들은 일상생활에선 통상 위안은 '콰이(塊)'로, 자오는 '마오(毛)'로 바꿔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고액권인 100위안부터 1펀까지를 모두 더하면 188위안8자오8펀이 된다는 점이다. 돈을 번다는 뜻의 '파차이(發財)'의 '파'와 발음이 비슷해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8이 줄줄이 들어가 있다.

중국연구소 신경진 연구원

 

 

 

 

  

 

 
 

800자로 본 중국 ③ 공산당원 신분 … 공산당 당원증은 취업 보증수표

[중앙일보] 입력 2007.09.19 04:28 / 수정 2007.11.13 11:39
 

 

중국 공산당에 새로 가입한 청년 당원들이 당기 앞에서 입당 선서를 하고 있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대학을 갓 졸업한 천(陳) 선생은 최근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극심한 대졸 취업난 속에서도 직장 두 곳으로부터 동시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다. 베이징 국유 기업을 갈지, 칭다오 독일계 기업을 선택할지 저울질이 한창이다. 천 선생의 취업 경쟁력은 어디서 나올까. 답은 '공산당 당원증'에 있다. 당원은 중국 정부기관뿐 아니라 외국계 기업에서도 채용 0순위로 꼽힌다. 공산당이 보증한 엘리트라는 이유에서다.

1921년 창당 당시 중국 공산당원은 57명. 2006년 말엔 7239만1000명으로 늘었다. 세계 최대 정당이다. 아무나 마구 끌어들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원이 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대학생의 예를 들자. 우선 학교 당지부에 입당원서를 낸다. 이때 기존 당원 두 명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당지부는 성적과 성실성.국가관.희생정신.리더십 등을 꼼꼼히 심사한다. 이 중 남을 위한 봉사가 가장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1년 이상 계속되는 심사에서 합격하면 예비 당원이 된다. 1년 정도의 예비 당원 기간엔 수시로 토론회에 참가해 소견을 밝히고, 입당 마음가짐을 적은 '사상회보(思想匯報)'를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우면 신청 약 2년 만에 정식 당원 자격을 얻는다. 직장인의 경우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중도 포기, 또는 탈락자가 많다. 천 선생과 함께 입당원서를 낸 20명의 학우 중 4명만이 입당했다. 최고 엘리트만이 당원의 영예를 안는 것이다. 과거엔 18세 이상의 중국 노동자나 농민, 군인, 지식인, 기타 혁명분자만 입당 신청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젠 '기타 혁명분자'가 '기타 사회계층의 선진분자'로 바뀌었다. 기업가도 당원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우덕 기자

 

 

 

 

 

 

 

 

 

 

 

 

 

 

 

  

 

 
 

800자로 본 중국 ④ 중국인들의 송편 '월병'

 

[중앙일보] 입력 2007.09.22 04:29 / 수정 2007.11.13 11:40

 

 

순금으로 만들어 뇌물 성격이 짙은 황금 월병.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원나라 전복을 위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때다. 그는 8월 15일을 결전의 날로 잡았다. 문제는 원나라 감시망을 피해 각 지역에 어떻게 군령을 전하느냐였다. 고심 끝에 '월병(月餠.둥근 모양의 작은 케이크)'에 착안했다. 월병 속에 '8월 15일 밤 봉기(八月十五日夜起義)'라고 적힌 쪽지를 넣어 선물이라며 돌렸다. 군령은 신속하게 전달됐고 봉기는 성공했다. 중국인이 중추절 때 월병을 선물로 돌리게 된 유래다.

우리가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면 중국인은 월병을 즐긴다. 월병은 오리알이나 과일.팥 등을 넣은 일종의 떡이다. 송편이 반달 모양인 데 비해 월병은 보름달 형태다. 중국인이 월병을 먹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로 알려졌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보름달처럼 둥근 월병을 만들어 달님에게 제사를 지낸다.

또 이날만큼은 둥글게 모여 앉아 월병을 나눠 먹으며 무병 장수를 빈다. 북송 시기 문헌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중추절 달을 깨물어 먹듯 작은 떡을 먹는다(小餠如嚼月)'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월병은 둥근 모양은 비슷하지만 지역에 따라, 또 맛과 재료에 따라 수백여 종으로 나뉜다.

 

 

 

그러나 현재의 월병은 중국 부정부패의 단면을 비춰 주기도 한다. 황금으로 만든 월병이 등장하는가 하면 월병 세트에 보석을 끼워 돌리기도 한다. 청탁이 목적이다. 과거 이민족 타도라는 애국적 대의를 위해 봉사했던 월병 선물이 이젠 중국 사회를 갉아먹는 뇌물로 전락한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돈만 보고 달려온 중국인의 씁쓸한 자화상이 배어난다.

한우덕 기자

 

 

 

 

 

 

 
 

800자로 본 중국 ⑤ 이웃국가 세계 최다

 

[중앙일보] 입력 2007.09.28 04:26 / 수정 2007.11.13 11:40

14개 국가와 국경선 길이 2만2000㎞
지금의 영토는 청나라 건륭제가 완성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에는 '십전기(十全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청(淸) 건륭제(1711~1799)가 신장.대만.미얀마.베트남.네팔 등 열 번의 대외원정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영토는 이때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중국은 육지로 14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에서 인접국이 가장 많은 나라다. 육지 국경선의 총 길이는 2만2000여㎞다. 2006년 말까지 12개 국가와 국경 조약 및 협정을 맺은 상태다. 90% 정도의 국경선이 확정됐다. 인도.부탄과는 아직 국경 조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신중국 성립 후 중국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평화공존 5원칙'에 따라 인접국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국경 문제를 한동안 거론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국경선 확정에 들어가 미얀마.네팔.몽골.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북한과 조약을 맺었다. 90년대부터는 러시아.라오스.베트남.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했다.

14개 국경선 중 몽골과의 국경선이 4710㎞로 가장 길다. 당초 중국과 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소련이 붕괴된 데 따른 결과다. 중국은 현재 러시아와는 동부 4300㎞, 서부 54㎞를 맞대고 있다. 둘째로 긴 국경선이다. 69년 무력충돌까지 빚었던 중.소 국경 분쟁은 91년 동부국경 협정을 맺으면서 해소됐고, 2004년에는 보충 협정까지 맺은 상태다. 가장 짧은 국경선은 아프가니스탄과 접하고 있는 92.45㎞다. 북한과는 64년 3월 국경선 1334㎞의

 국경 조약을 체결했다.

 

한국과 일본.필리핀.브루나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6개국은 중국과 바다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신경진 연구원

 

 

 

 

 

 

 
 

800자로 본 중국 ⑥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일보] 입력 2007.10.02 04:19 / 수정 2007.11.13 11:40

중국공산당보다 먼저 창설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 기반
전국 단원만 7215만 명

 

2000년대 초 중국에선 '대청시대(大淸時代)'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국을 이끄는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4명이 칭화(淸華)대학 출신임을 풍자한 것이다. 최근 중국의 유행어는 '퇀파이(團派)' 시대다. 퇀파이는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을 뜻한다. 공청단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권력 기반이다. 후는 1984년부터 1년간 공청단 중앙 제1서기를 맡았다. 2002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는 3년 동안 무려 150명의 공청단 출신을 차관보급 이상 요직에 배치했다.

15일 개막될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리커창(李克强) 랴오닝성 당서기 등 공청단 출신의 약진이 예상된다.

공청단은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1921년 7월 창설된 중국공산당보다도 빠르다. 한동안 공청단과 공산당의 관계가 모호했다. 그러나 1923년과 1925년의 공청단 대회를 통해 '공청단은 공산당의 지도에 복종한다' '공청단의 정치활동은 당의 감독과 지도를 받는다'로 정리됐다. 1925년엔 이름을 사회주의청년단에서 공산주의청년단으로 바꿨다.

82년엔 '공청단은 공산당의 예비 역량'으로 규정됐다. 공산당 영도 아래의 청년 군중조직으로, 실천 과정을 통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18세부터 입당 가능한 공산당원과 달리 14세부터 단원이 될 수 있다. 28세가 되면 간부직을 맡지 않는 한 단을 떠나야 한다.

공청단원은 2005년 현재 7215만 명에 이른다. 공청단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왕자오궈(王兆國) 전인대 부위원장, 리루이환(李瑞環) 전 정협 주석이 있다. 후진타오 주석 세력 기반으로서의 퇀파이는 82~85년에 중앙 혹은 성급 행정 단위의 공청단 조직에서 간부직을 맡으며 후 주석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상철 기자

 

 

 

 

 

 

 
 *

800자로 본 중국 ⑦ 창장(長江)

[중앙일보] 입력 2007.11.13 05:12 / 수정 2007.11.13 11:40

길이 6300㎞ … 11개 성 관통
명나라 때 선교사가 잘못 소개
서방엔 양쯔강으로 알려져




"키안(Quian)이라 불리는 이 강은 세상에서 제일 크다. 1만5000척의 선박이 일시에 항해하는 것을 봤다. 16개 지방을 관통하며 주변엔 200개 이상의 도시가 있다."

13세기 후반에 중국을 17년 동안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창장(長江)을 이렇게 묘사했다.

강을 뜻하는 강(江)과 하(河)의 두 한자 중 강은 본래 창장의 고유명사다. 하는 황허(黃河)를 뜻한다. 창장 또는 '대강(大江)'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221~589년) 시대 이후다. 최근 창장과 혼동해 쓰는 양쯔(揚子)강은 실제로는 창장의 일부다.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바다에 이르는 하류의 이름이다. 명대(1368~1644) 마테오 리치 등 선교사들이 창장을 양쯔강으로 서방에 소개하면서 비롯한 잘못이다. 창장은 칭하이(靑海)성 탕구라 산맥에서 발원한다. 11개 성(省)급 행정구역을 관통해 중국의 동해로 흘러 나간다. 길이는 6300㎞. 세계에서 나일(6695㎞)강과 아마존(6400㎞)강 다음으로 길다. 창장의 본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까지가 상류에 해당하며 길이는 4529㎞다. 만리장성 이후 최대 공사였다는 싼샤(三峽)댐이 이곳에 있다. 중류는 장시(江西)성 주장(九江)까지로 길이가 938㎞다. 중국 경제의 중심인 창장 삼각주를 포함하는 하류는 835㎞에 달한다.

 
지류를 포함해 창장의 수계 면적은 총 180만㎢로 국토의 18.8%를 차지한다. 거대한 용이 대지를 가로지른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창장은 1500~2만t급의 선박이 하구로부터 쓰촨(四川)성 신스(新市)까지 2900여㎞ 구간을 운항할 수 있는 중국 경제의 대동맥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800자로 본 중국 ⑧ 베이징 카오야

 

[중앙일보] 입력 2007.12.06 05:55 / 수정 2007.12.07 07:39

명나라 주원장이 즐겨먹어
'황제가 먹는 오리구이' 명성
식당 '취안쥐더' 143년 역사

 

청나라 동치(同治)황제 때인 1864년. 상인 양전인(楊全仁)은 베이징 천안문(天安門) 맞은편 전문(前門) 부근에서 닭.오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황궁에서 대량의 오리 주문이 들어왔다. 사용처를 물었다. "황제가 즐겨 먹는 카오야(鴨:오리구이)를 만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황제가 먹는 음식을 일반인에게 팔면 돈이 될 것으로 판단, 오리구이 전문점 취안쥐더(全聚德)를 열었다. 가게는 143년이 지난 지금도 전문 그 자리에서 손님을 받고 있다.

'카오야(사진)'는 원래 남부 안후이(安徽) 지역 음식이었다.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건국 초기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황실에서 이를 즐겨 먹었고,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지의 궁중요리로 자리 잡았다.

베이징 카오야 맛의 비결은 오리의 껍질을 얼마나 맛있게 굽느냐에 있다. 오리를 통째로 구운 뒤 껍질만 분리, 이를 밀전병에 싸먹는다. 일반적으로 파.오이 등과 함께 싸서 먹고, 고유의 소스를 묻혀 먹으면 감칠맛을 더한다. 이 음식은 미국.중국 간 국교 정상화의 숨은 '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7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베이징을 은밀히 방문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협상하면서 점심메뉴로 베이징 카오야를 선택했다.

저우 총리는 "매우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황제 음식"이라며 먹는 방법을 설명했다. 음식을 먹으며 둘 사이 감정이 통했고, 덕택에 회담이 쉽게 풀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베이징 카오야를 상품화한 취안쥐더는 70여 개 지점을 운영하는 식당그룹으로 성장했다. 하루 평균 약 1만4000마리의 오리를 식탁에 올린다. 최근 중국 선전 증시에 상장, 거래 첫날 주가가 271%나 올랐다.

한우덕 기자

 

 

 

 

 

 

 
 

800자로 본 중국 ⑨ 마오쩌둥 체조

 

[중앙일보] 입력 2007.12.10 05:01 / 수정 2007.12.10 07:40

 

 

"매일 아침 20분 동안 '마오쩌둥(毛澤東) 체조'를 336번 하면 이팔청춘이 부럽지 않아요."

여든둘의 나이에 팔굽혀펴기 50회를 거뜬히 소화하는 이대용 전 베트남 주재 공사가 밝히는 건강 비결이다. 그가 '마오쩌둥 체조'를 익힌 것은 베트남에서 공사로 일하던 1975년. 당시 베트남이 공산화하면서 체포돼 사이공의 치화 형무소에서 5년 동안 옥고를 치를 때다. 78㎏이던 몸무게가 46㎏으로 줄 정도로 혹독했던 수감 생활을 공산당 간수에게서 배운 이 체조로 버텼다.

체조의 핵심은 단전호흡 및 하복부와 항문의 수축 운동.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선 상태에서 팔을 앞으로 뻗은 뒤 눈 높이까지 천천히 들어올리며 숨을 깊이 들이 마신다(사진). 이어 양팔을 천천히 내리다가 30도에 이르렀을 때 속도를 내 뒤로 확 젖힌다. 바로 이때 배꼽 부근 단전에 힘을 주면서 동시에 항문을 꽉 오므리고 또 숨을 내뱉는 것이 키포인트다. 1분에 15~20회 정도가 적당. 한 번만 해 보면 누구나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단순함이 이 체조의 강점이다.

이는 마오가 대장정을 막 마치고 옌안에 머물 때 만들었다고 전한다. 본래는 단순 동작 외에도 다리.머리.몸통 등을 쓰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 고대 중국 양생법에서 전하는 체조 '팔단금(八段錦)', 후한(後漢) 명의 화타가 곰.호랑이.원숭이.사슴.학의 동작을 모방해 만든 '오금희(五禽戱)'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

이후 마오쩌둥 체조는 중국의 '방송(廣播)체조'로 계승돼 13억 중국인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체조 덕일까? 새 중국 성립 당시 35세에 불과했던 중국인 평균 연령은 올해 72.88세로 두 배가 넘는다.

 

 

 

 

 

 

 

 

 

 

 

글=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사진=김상선 기자



▶관련 동영상 보기

 

 

  

 

 
 

800자로 본 중국 ⑩ 천안문 국기 게양식

 

[중앙일보] 입력 2008.01.10 04:54 / 수정 2008.01.10 08:49

166m 248걸음으로 이동
해 뜨는 시각에 맞춰 시작
2분7초 동안 천천히 게양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해의 첫 여명이 밝아오는 1일 오전 7시30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1만3000여 시민이 국기 게양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중국인민무장경찰 위수사령부 소속 국기보위대원 36명은 천안문 앞에서 출발해 금수교(金水橋)를 건너 광장으로 진군한다. 62명의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창조국

이 장엄하게 울리며 그 뒤를 따른다.

 신장 1m80㎝~1m90㎝ 훤칠한 키의 사병들이 천안문 앞에서 게양대(사진)까지 166m를 정확히 248 걸음으로 내딛는다. 32명은 동서로 나눠 서고, 기수 한 명과 게양수 세 명이 게양대에 오른다. 일출 시간인 7시36분, 게양수는 힘껏 팔을 휘둘러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공중으로 날린다. 의용군 행진곡이 연주되는 2분7초간 오성홍기는 서서히 천안문 상공으로 치솟는다. 중국 시민들은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조국의 상징을 보며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1949년부터 76년까지 천안문 광장의 국기는 베이징 전력공급국의 노동자 두 명이 게양했다. 관중은 없었다. 76년부터 인민해방군이 인수했고 매일 게양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국가 연주는 없었고 게양 시간도 불규칙했다. 82년부터는 무장경찰이 게양식을 맡았다. ‘조국과 일월(日月)은 함께 빛난다’는 관념에 따라 일출에 맞춰 국기를 올렸다.

 90년 실시된 ‘국기법’을 기초로 91년 5월 1일 노동절부터 현재와 같은 게양식이 완성됐다.

 
 천안문 광장에 게양되는 국기는 열흘을 넘기지 않고 교환한다. 건국 이래 4000여 장의 국기가 사용된 셈이다. 49년 개국대전에 사용된 국기는 국가 1급 문물로 중국혁명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800자로 본 중국 ⑪ 자동차 번호판 읽기

 

[중앙일보] 입력 2008.01.17 05:35 / 수정 2008.01.17 07:53

첫째 자리 한자는 등록지
둘째 자리 영어는 차 용도

 



어느 나라든 자동차 번호에는 고유의 정보가 담겨 있다. 중국의 경우 더 복잡하고 세분화돼 있다. ‘자동차 번호만 정확하게 알아도 차에 누가 탔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베이징 왕(王) 선생의 자동차 번호 ‘京KM6715(사진)’을 예로 보자. 첫째 자리 한자 ‘징(京)’은 등록지가 베이징임을 뜻한다. 상하이라면 ‘후(沪)’, 광둥성이면 ‘웨(粤)’가 붙는다. 징, 후, 웨 등은 그 지역을 가리키는 약칭이다.

<표 참조>
두 번째 문자는 반드시 영어로 표시된다. 베이징의 경우 두 번째 알파벳이 B이면 택시, G이면 근교지역 자동차, O이면 경찰을 뜻한다. 나머지는 개인 승용차다.

 소속이 어디냐에 따라서도 번호판은 달라진다. 대사관 자동차는 번호판 맨 앞에 대사관을 뜻하는 ‘사(使)’자가 붙고, 영사관은 ‘영(領)’이 표시된다. 그 다음 세 자리는 국가번호를 뜻한다. 한국대사관은 196번, 북한대사관은 133번, 미국대사관은 224번 등이다. ‘使 196 001’ 자동차에는 주중 한국 대사가 타고 있다.

 
 ‘WJ’로 시작되는 번호판은 무장경찰 소속이다. ‘우징(WuJing, 武警)’에서 ‘WJ’를 취한 것이다. 일반 경찰은 지방마다 다르지만 번호 끝에 붉은색 ‘경(警)’자가 붙는다. 군대 차량은 흰색 번호판에 붉은색 글자로 표시하며, 군구에 따라 갑(甲), 을(乙), 병(丙) 등으로 나뉜다.

 상하이·선전 등 일부 도시는 경매를 통해 번호판을 사야 한다. 상하이의 경우 4만~5만 위안(약 500만~625만원)에 경매가가 형성된다. 번호가 좋다면 가격이 치솟는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 ‘8’이 많은 번호판의 자동차에는 부자가 타고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한우덕 기자



◆중국 성(省)·직할시 약칭

베이징 京, 톈진 津, 상하이 沪, 충칭 渝, 산둥 魯, 랴오닝 遼, 허베이 冀, 저장 浙, 지린 吉, 광둥 粤, 쓰촨 川, 헤이룽장 黑, 윈난 云, 후난 湘, 안후이 晥, 신장 新, 장시 赣, 후베이 鄂, 광시 桂, 간쑤 甘, 산시(山西) 晋, 네이멍구 蒙, 산시(陝西) 陝, 푸젠 闽, 구이저우 貴, 칭하이 靑, 시짱 藏, 닝샤 寧, 하이난 琼

 

 

 

 

  

 

 
 

800자로 본 중국 ⑫ 동서 5200㎞ … 시차 왜 없나

 

[중앙일보] 입력 2008.01.24 04:57 / 수정 2008.01.24 07:42

5개 시간대 1949년 하나로
정치적 이유 ‘분열 빌미 준다’
경제적 이유 ‘서쪽 인구 적어’

 
 중국의 서쪽 끝 우루무치시 공무원의 출근시간은 오전 10시다. 일반 회사의 경우 11시 출근도 적지 않다. 베이징으로부터 2400여㎞ 떨어진 이곳에 정상적인 시차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이징 출근시간(오전 8시30분)을 적용할 경우 이들은 밤하늘에 뜬 별을 보고 집을 나서야 한다.

 중국은 면적 960만㎢로 세계에서 넷째로 넓은 국가다. 동서 거리는 약 5200㎞. 정상적이라면 다섯 시간의 시차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베이징을 기준으로 한 ‘협정세계시간(UTC)+8시’를 단일 표준시간대로 고수한다. 반면 알래스카를 제외한 본토의 동서 길이가 4500여㎞인 미국은 4개의 다른 시간대를 두고 있다.

 왜 중국은 시차를 두지 않을까?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서부의 인구나 GDP 모두 적어 별도의 시차를 둘 필요가 없다는 경제적 이유에서다. 또 하나는 시차를 인정하면 분열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에서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1912년 중화민국 성립 후 당시 중앙기상국은 5개의 시간대를 두었다. 쿤룬(崑崙·GMT+5:30), 신짱(新藏·GMT+6), 룽수(鈺蜀·GMT+7), 중원표준(GMT+8), 창바이(長白·GMT+8:30)시간대(지도)가 그것이다. 39년 내정부는 이를 비준했다. 그러나 49년부터 공산당과 대만으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는 모두 베이징 시간을 기준으로 전국의 시간을 통일했다.

 
 2005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에서 시차를 두자는 건의가 나왔다. 베이징 시간을 동부시간, 산시(陝西)를 기준으로 한 중부시간, 신장·티베트의 서부시간 등으로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이 안은 베이징 시간과 서부시간 두 개로 나누는 안으로 수정됐으나 표결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800자로 본 중국 ⑬ 춘절에 세배하나

 

[중앙일보] 입력 2008.01.31 05:08 / 수정 2008.01.31 08:29

집안 어른에겐 무릎 꿇고 절하고
동네 어른에겐 두 손 모으고 인사

 

중국 전설에 ‘녠(年)’이라는 괴수가 있었다. 녠은 하루에 한 가지씩 온갖 것을 잡아먹는 왕성한 식성을 지녔다. 밤에만 활동하다 해 뜰 무렵 산속으로 돌아가는 녠은 365일 중 하루를 골라 산 사람을 잡아먹었다. 이에 사람들은 녠이 오는 날에는 집집마다 한 데 모여 저녁을 먹고 밤을 꼬박 새우며 녠이 돌아가기(過年)만을 기다렸다. 우리의 까치설인 섣달 그믐 중국인들이 밤을 지새우는 ‘서우쑤이(守歲)’ 풍습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튿날인 설을 중국인들은 춘절(春節)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도 춘절에 세배를 할까? 온 가족이 모인 춘절 아침 중국의 손아랫사람들은 집안 어른들께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이를 바이녠(拜年)이라고 한다. 어른들은 준비한 ‘야쑤이첸(壓歲錢·세뱃돈)’을 준다. 이는 쑤이(歲)와 발음이 같은 ‘나쁜 재앙(祟)’을 막는(壓) 돈이란 뜻이다. 한편 동네 어른들에겐 보통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는 퇀바이(團拜·사진)를 한다.

우리가 설에 떡국을 먹듯이 중국인은 춘절에 녠가오(年糕·설떡)와 자오쯔(餃子·만두)를 먹는다. 자오쯔는 은 덩어리 화폐인 ‘위안바오(元寶)’와 모양이 같다. 송(宋)대에는 지폐를 자오쯔(交子)라고도 불렀다. 재운을 바라는 의미다.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새해를 축하하고 악귀를 쫓기 위해서다. 붉은 종이에 노란 글씨로 써 대문 양쪽 기둥에 붙이는 춘롄(春聯) 역시 악귀를 쫓는 데서 유래했다. 복을 바라며 복(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것도 춘절의 한 풍속이다.

 
중국의 춘절 축제는 섣달 23일 부엌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24일 집안 대청소(掃塵)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찹쌀 알갱이떡(위안샤오·元宵)을 먹고 홍등을 거는 대보름(元宵節·원소절)까지 이어진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