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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淸山에 2017. 7. 9. 15:51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한 개인의 분노가 세계사를 바꾼 경우이다.

趙甲濟    
    


역사를 바꾼 용기-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3세기부터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부흥, 15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또는 해양진출)과 식민지 개척, 16-17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과 帝國주의의 확산, 18-19세기에 걸친 프랑스의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9세기의 국민국가 건설과 서구 민주주의의 정착,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전쟁과 실패한 공산혁명.
 
   이렇게 세계사의 흐름을 정리해놓고 보면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조직의 힘이 아니고 한 개인의 영웅적 결단에 의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그 뒤의 세상이 달라진 정도로 따질 때 예수의 십자가刑, 루터의 종교개혁,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이 먼저 떠오른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낸 행동은 조직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오직 그 한 사람의 분노와 정의감이 촉발시킨 변화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행동이자 용기였다.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은 名著 '영웅숭배론'에서 "용기를 특징으로 하는 튜턴 민족중에서, 그보다 더 용기 있는 인물이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썼다. 그는 또 "자연과 사실의 진정한 아들 루터, 그를 보내주신 데 대해 작금의 수백년, 그리고 앞으로 올 수백년은 하늘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칼라일은 특히 1521년 4월17일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神性로마제국의 국회에서 루터가 교황청 비판의 자세를 견지한 것을 근대 유럽사상 최대의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1517년 루터의 95개조 도전장에 의해 종교개혁에 불이 붙은 뒤 이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서구로 번져갔고 사회, 정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며 결국은 국가간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1517년에 시작하여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까지 西유럽은 가톨릭편과 프로테스탄트편으로 갈려 피비린내 나는 전쟁, 암살, 內戰,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인간의 신념을 기준으로 하여 편을 가르고 피를 흘렸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이념대결과 비슷하다.


   
   이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의 열병을 가장 슬기롭게 극복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갈등으로 해결한 나라는 프랑스였고 最惡의 代價를 치른 것이 독일과 스페인이었다. 이 때문에 國力 소모가 적었던 영국 프랑스가 17, 18세기에는 선두에 나서고 독일과 스페인은 後進하였다. 16-17세기 약100년간 독일이 종교분쟁에 휘말려 國力을 소진한 대가로 프랑스에게 밀린 것을 극복하는 데는 1870년 普佛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약230년이 걸렸다.
 
   이는 20세기 들어서 자본주의의 약점을 파고든 사회주의의 열병을 많이 겪은 러시아, 중국, 북한, 월남, 東歐가 주변 국가들에 비교하여 후진한 것과 비슷하다.
  
   마르틴 루터가 불길을 당긴 종교개혁에 의해서 인류의 사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중세 유럽을 정신적으로(때로는 정치적으로) 지배하던 교황청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졌다.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汎유럽적인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進前하였다.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개인주의, 人權, 자본주의의 윤리를 확산시키면서 산업혁명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치관으로 뿌리내렸다. 기성질서의 큰 기둥을 무너뜨린 종교개혁은 교회의 압제로부터의 인간해방이란 성격을 띠었다.
  
   이 시기 인간해방의 핵심은 종교의 자유, 그에 따른 언론의 자유 같은 것들이었다. 인류의 자유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종교개혁은 엄청난 인명손실이란 代價를 치렀다. 30년 전쟁으로 독일의 인구는 3분의 1이 줄었다고 한다. 인구비율로 따져서 독일의 피해는 2차세계대전 때보다도 더 참혹했다는 것이다.
 
   서구가 이슬람권이나 동양유교문화권보다도 앞설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의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자유의 폭을 넓힌 西歐와 그런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슬람과 유교문화권의 차이는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로 나타났다. 인간이 도그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으면 그 자유만큼 물질적 성장과 생산과 창조가 이뤄지고 이것이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와 선진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修道士 겸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10월의 마지막 날에 독일 작센 공국의 비텐베르크城 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95개조'를 써붙였을 때 그 내용은 강경하였지만 방식은 온건했다. 이 대자보의 주제는 '형벌면제 권한의 선포에 대한 논쟁'이었다. 대자보에 루터가 쓴 초대장은 겸손하기도 했다.
   <다음 제안들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토론될 것입니다. 루터 신부가 토론을 진행합니다. 토론을 할 수 없는 분들은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이 95개조의 사본을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보내는 한편 이 글이 널리 읽히도록 하려는 뜻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인쇄한 다음 관련자들에게 돌렸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活版 인쇄술이 실용화되고 있었다. 종교혁명은 인쇄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 개인의 분노와 정의감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다가 광산업자가 된 사람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부모는 엄하게 아들을 교육했다. 루터는 "엄격하고 가혹한 가정을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선택한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루터는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苦行했다.
   스물네 살에 그는 修道士가 되었다. 작센 공국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神學 강사가 된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1517년 레오 10세는 聖베드로 사원을 완공할 경비를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도록 했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은 뒤 연옥에 빠져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교황은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맡겼다.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요한 테첼이란 사람을 판매인으로 지정했다. 

 


 
   독일의 중심부에 있던 强國인 작센의 選제후(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영주) 프리드리히는 이 면죄부를 작센에서 팔아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독일인의 돈이 이탈리아로 흘러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판매인 테첼은 작센 공국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接境지역 가까이 와서 면죄부를 팔았다. 작센 사람들이 국경선을 넘어가 면죄부를 사 오곤 했다.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 와서 루터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부터 로마 교황청의 부정 부패에 분노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지켜보면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루터는 교황이 인간의 罪를 용서하고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 하느님만 갖고 있는 권능을 사칭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善行(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기부하는 것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功德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그는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권위로서의 교황청을 일종의 사기집단으로 본 셈이다.
  
   그는 신부와 같은 司祭 직업도 필요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모두가 司祭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예수)과 인간 사이에는 司祭가 끼여선 안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로 성경 말씀을 내세웠다. 그는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95개조의 몇 조항을 소개한다.
 
   [5.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을 가지지 못한다.
  
   6.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是認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22.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27.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30.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32.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6.어떠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43.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5.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버리고(요 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 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면죄증을 사는 것은(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닌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68.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면죄증)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86.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90.일반 世人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출처: 말틴 루터, 지원용, 컨콜디아사, 1987.]
  

 


  
   이런 생각을 담은 루터의 95개조 문서가 인쇄되어 독일 全域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이단적 주장에 열렬한 찬성과 신랄한 反論이 쏟아졌다. 루터는 그 성격이 공격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는 편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수도사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종교재판에 걸어 화형시킬 것이 뻔했다.
   루터는 작센공국의 領主인 프리드리히 측에 편지를 보내 독일 제후들이 독일의 신민을 이탈리아로 넘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했다. 독일을 근거로 하는 神性로마제국의 황제 맥시밀리안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잘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루터는 독일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이탈리아 교황의 명령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때 독일사람들은 '독일어를 쓰는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윌 두란트는 '역사속의 영웅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의 헨리8세(영국교회를 만들어 카톨릭에 대항한 왕)가 가톨릭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교황의 압력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神學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독일의 민족정신이라는 풍요한 토양에 꽂았다. 개신교가 승리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민족주의가 깃발을 흔들었다.>
  
   루터의 반란이 성공하여 종교개혁으로 불리게 된 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독일 사람들의 지지, 그리고 독일영주들에 의한 루터 보호가 있었다.
   독일영주들의 보호조치로 해서 루터를 소환할 수 없게 된 교황은 체면을 구긴 셈이다. 타협안으로 교황은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탄 추기경 앞으로 불러 그의 주장을 취소시키라고 명령했다. 루터는 카예탄을 만나러 갔으나 이단사상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묵살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의 주장을 담은 문서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자 많은 대학생들, 상인들, 문학인들이 루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여론이 생긴 것이다. 루터는 인쇄술의 도움으로 드디어 민중의 마음을 잡은 것이다. 고무된 루터는 1520년에 '槪要(개요)'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교황을 정면 공격한다.
  
   <로마는 자주빛 옷을 입은 바빌론이요,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회당이다. 우리가 도둑을 교수대로, 강도를 칼로, 이단을 불로 처형하면서 어떻게 이들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로마라는 소돔의 온갖 하수구를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1517년에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써붙여 종교개혁에 불을 지른 독일 작센공국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1520년 교황청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반격을 시작한다. 그는 '기독교 재산에 대해서 독일 민족이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독일어로 써 돌렸다. 이 글에서도 그는 독일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한다. 당시는 '독일민족'이란 개념은 없었고 독일의 제후 국가들만이 존재했다.
 
   <어떻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우리 재산이 교황들에 의해서 그런 강도질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도둑을 목매달고 강도의 목을 벤다면서 어떻게 로마의 탐욕은 그대로 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 그 개인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교황청의 反성경적인 요소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사정 없이 공격했다.
 
   <당신은 하인들중의 하인이다. 당신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대를 높이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대를 낮추는 사람을 믿으시라.>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이 교황의 勅書 사본을 불태우게 했다.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격이었다. 교황은 세속 권력의 대표자인 神聖로마제국 황제의 칼5세의 도움을 청했다. 칼5세는 1521년 1월27일 독일 보름스에서 帝國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토의하기로 하고 루터를 소환했다. 황제는 교황청의 고발에 대하여 증언하라는 초청장을 루터에게 보냈다. 칼5세는 루터에게 통행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도 했다.
  
   루터에게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루터는 "지붕 위의 기왓장만큼 악마가 많다고 해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다"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과 生과 死를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교황과 황제라는 유럽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상대로 도전장을 냈던 한 수도사는 성경에 대한 확신과 교황청에 대한 분노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4월17일 루터는 수도사 복장을 하고 의회에 나아가 議長인 황제 앞에 섰다.
   1521년4월17일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神性로마제국 의회에서 황제 칼5세는 루터에게 그가 쓴 책이 이단적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황제는 하루의 말미를 주었다.
 
   다음 날 루터는 황제 앞에서 독일어로 말했다. 두 시간 계속한 연설에서 그는 공손하고 현명하고 솔직했다. 그는 수긍할 부분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굽히지 않아야 할 부분에선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토머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에서).
  
   "나의 저작은 더러는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더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서 나온 것은 인간적인 약점, 즉 경솔한 분노, 맹목성, 또 취소할 수 있다면 다행으로 여길 많은 것들이 개재되어 있다. 그러나 건전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은 취소할 수 없다. 어떻게 취소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증거로, 또는 솔직하고 공정한 論證으로 나의 말을 반박하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취소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루터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칼5세 황제는 독일 제후들 가운데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수도사 한 명이 1000년의 기독교와 맞선다면 분명히 그가 틀렸을 것이다. 나는 루터와 더 상대하지 않겠다. 그는 안전통행증을 가지고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설교를 하거나 어떤 소동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루터의 고향인 작센의 選제후 프리드리히와 팔츠의 選제후 루드비히는 황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황제의 군대에게 납치되지 않도록 그를 산위의 성에 숨겨주었다.
  
   칼라일은 루터가 칼 5세 앞에서 한 행동을 이렇게 평했다.
 
   <루터는 신이 만드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을 다했다. 그는 허위가 "나를 믿느냐"고 물었을 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代價를 치르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교황제나 봉건제보다 더 고귀한 정신적 물질적 제도가 이뤄질 것이다. 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이나 허위가 아니라 오직 사실 위에서만 설 수 있다.>
 
   칼라일은 교황과 황제를 상대로 한 루터의 도전은 근본적으로 허위에 대한 진실의 도전이었고 루터가 진실의 편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칼라일은 역사를 움직인 루터의 용기를 분석했다.
  
   그 용기는 관용에서 나왔다고 칼라일은 말했다. 루터는 근본적인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은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칼라일은 루터가 쓴 24권의 책이 문학적으로는 잘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강건한 정직성, 소박성, 단순성은 없다는 것이다. 칼라일은 루터의 용기를 '가슴의 위대성'이라고 표현했다.
 
   <리히터는 루터의 언어를 평하여 그것은 半전투라고 했다. 그는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런 투쟁이 용기의 진정한 표현이라고 믿었다. 용기를 특징으로 하는 투턴민족 중에서도 그보다 용기 있는 인물, 그보다 더 용감한 인물이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호랑이는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흉포하고 잔인할 뿐이다. 그들은 더 강한 敵을 만나면 도망친다. 루터의 위대하고 소박한 가슴속에 있는 저 부드러운 사랑의 숨결, 어린아이나 어머니의 사랑처럼 부드러운 저 숨결보다 더 감동적인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표현은 꾸밈 없고 거칠지만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같이 맑다.>
  
   루터는 작센 제후의 보호속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는 수많은 논설과 책을 썼다. 이들 저작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 덕분에 독일 사회에서 널리 읽혔다. 교황청에 대한 루터의 글쓰기는 하나의 언론활동이었다. 루터의 글은 독일의 민중을 움직였다. 여론이 그의 편이 되었다. 루터가 보름스로 들어갈 때는 그의 마차 주변으로 20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神性로마제국의 황제조차도 그 인기에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교황도 황제도 이 이단자를 처단할 수 없었던 것은 인쇄술에 의한 言論활동으로 民心이 루터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感知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용기는 民心을 격동시켜 反교황의 여론을 형성했고 이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뒤 서구 민주주의 발전의 기반을 만들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상당부분은 루터가 교황 및 황제와 맞선 덕분에 공짜로 얻은 것이다. 진실뿐 아니라 용기는 인간을 자유케 한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청의 존재 이유를 부인하고, 聖職者도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난 前 수녀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낳았다. 그는 결혼의 환희를 예찬하였다.
 
   "아내는 남편이 즐겁게 집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하고, 남편은 자신이 집을 떠날 때 아내가 아쉬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결혼보다 더 사랑스럽고, 친근하며, 매력적인 관계, 結社(결사), 친구는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農民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교황청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종교개혁가들, 젊은 신부들, 광신도들이 루터의 용기에 고무되어 농민들과 함께 곳곳에서 제후와 교회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교회를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경악했다. 그가 원한 것은 이런 사회 정치혁명이 아니었다. 그는 農民반란을 규탄하는 글을 돌렸다. 그는 심지어 農民반란을 진압하는 목적이라면 가톨릭 세력과 손잡아도 좋다고 주장했다. 독일인답게 그는 무질서와 폭력을 증오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급진 종교개혁가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욕을 먹기도 했다. 루터는 끝까지 성경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는 '글의 인물'이었다. 목회자들과 아버지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대소요리문답'을 1529년에 낸 데 이어 이듬해엔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신앙을 조리있게 천명한 일종의 선언문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썼고 신구약 합본성경을 1534년에 번역, 출판했다. 인쇄술의 도움으로 이들 책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독일어의 낱말과 文法을 집대성한 책으로 현대 독일어의 母體가 되었다.
 
 
   루터의 傳記소설을 쓴 래그 그랜트는 '루터의 대포는 인쇄기였다'고 했다. 그가 한 말과 독일어 성경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성경이, 無知와 미신으로 그들을 얽어매던 사슬을 끊어버렸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교황청과 世俗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라틴語로 쓰여진 성경을 독점하여 민중을 靈的 노예로 삼았던 사제들과 귀족들은 루터가 터뜨린 거대한 민중의 知的 에너지를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루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루터 지지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너희 음흉한 바보들아. 뉘렌베르크과 아우구스부르크, 보름스와 스위스, 그리고 작센에는 파리와 쾰른의 모든 대학들과 이 세상 어떤 교황주의자들보다도 성경을 더 잘 아는 부인들과 하녀들이 있고 작센의 選제후 같은 귀족들이 있다."
  
   루터는 용기와 聖書의 힘과 글의 힘과 인쇄술로 세상을 바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