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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았을까, 판자촌 아래 금관가야의 魂이 잠들어 있을줄[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淸山에 2017. 4. 27. 15:50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누가 알았을까, 판자촌 아래 금관가야의 魂이 잠들어 있을줄

김상운 기자 입력 2017-04-26 03:00수정 2017-04-26 09:20



<31> 부산 복천동 고분


부산 복천동 53호 고분(1989년 발굴)을 보존한 야외전시관에서 김두철 부산대 교수가 내부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무덤 바닥 한가운데 일렬로 놓인 덩이쇠(철정)들이 보인다. 부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빼곡히 밀집된 주택가 한복판 풀 떼를 입은 거대한 구릉이 나타났다. 거북이 등처럼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정상부에 있는 대형 무덤은 길이가 7, 8m에 이른다. 21일 답사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더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묻힌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1980년 10월∼1981년 2월 이곳을 발굴한 김두철 부산대 교수(59)는 “6·25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동네에 금관가야의 거대한 고분이 잠들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1600년 묵은 ‘처녀분’ 열리다


“철도레일 같은 게 바닥에 쭉 깔려 있다!”

1980년 11월 말 야심한 밤 복천동 22호 고분 발굴 현장. 무덤의 뚜껑돌(개석·蓋石)들 사이에 박힌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 뒤 손전등을 비춰 보던 김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행한 신경철 당시 부산대 조교(현 부산대 명예교수)와 조영제 부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현 경상대 교수)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멍 아래로 가야의 대표적 교역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철정·鐵鋌)가 마치 레일처럼 무덤 바닥에 줄지어 깔려 있었다.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와 그릇받침(기대·器臺) 등 각종 제의용 토기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김두철의 회고. “어둠 속에서 아릿하게 보이던 가야무덤은 그저 신비하단 말밖에는…. 잔영이 오래 남았는지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날 낮 발굴팀은 내부를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다. 무덤 뚜껑돌을 덮고 있는 진흙을 꽃삽으로 긁어낼 때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살짝 구멍이 난 것. 주변 인부들을 의식해 발견 사실을 비밀로 해두고 조사원들만 야간에 따로 모인 것이다.


 

복천동 22호분과 11호분은 1600년 동안 한 번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이른바 ‘처녀분’임이 분명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처녀분 발굴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다. 가야고분 특성상 무덤 깊이가 5m나 되는 데다 그 위에 주거지가 형성돼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발굴팀이 더 놀란 건 무덤 내부에 물이나 흙이 차지 않아 매장 당시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고학에서 무덤 부장품의 정확한 위치는 출토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두근두근 ‘덮개돌’ 들어낸 순간



1980년 복천동 고분 발굴현장에서 작업자들이 3t 무게의 무덤 덮개돌을 도르래로 들어올리고 있다.

부산대박물관 제공


본격적인 유물 출토에 앞서 발굴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덤을 덮고 있는 거대한 덮개돌 4개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들어내야 했다. 너비 1.4m, 길이 2.7m의 덮개돌 한 개는 무게가 3t에 달했지만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현장에 밝은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에게 SOS를 쳤다. 그의 소개로 경주에서 활동하는 석탑 드잡이공들을 불러들였다. 드잡이공은 인력용 도르래를 이용해 석탑을 해체, 조립하는 이들이다.



복천동 11호분 안에서 발견된 ‘금동관’.


드디어 1980년 12월 4일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 고고학계 원로들과 언론사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뚜껑돌을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뚜껑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래 있는 고대 가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의 회고. “하루 종일 뚜껑돌 4개를 서서히 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했던지….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발굴팀은 ‘민족의 죄인’이 되는 거였어요. 다행히 드잡이공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뚜껑돌이 제거된 11호분 안에는 치아가 남아 있는 인골과 더불어 가야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11호분 바로 옆 부곽(10호분)에서는 판갑(板甲·상반신을 보호하는 쇠 갑옷)과 말투구(마주·馬胄)가 출토됐다. 말투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 임나일본부설 역사왜곡 극복



복천동 11호 고분 옆 부곽(10호분)에서 출토된 ‘말투구(마주)’.


사람이 쓰는 판갑과 더불어 말투구가 함께 발견된 건 의미가 적지 않다. 왜가 4세기 가야를 점령했다는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깨지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전 일본 고분에선 갑옷만 발견될 뿐 말갖춤(마구·馬具)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보병만 있었고 기병은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4세기 말∼5세기 초 복천동 고분에서는 말투구와 마갑 등 각종 말갖춤이 출토됐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왜가 보병만으로 가야의 기병대를 제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영제는 “복천동 고분 발굴은 가야를 둘러싼 역사왜곡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부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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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Main/3/all/20170426/84071126/1#csidx452a5f3548556a7b3acbc469fb70f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