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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의 1888년작 ‘물 위를 걷는 예수’. .베드로가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는 “오너라”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으며 예수에게 나아갔다(descending from the ship, Peter walks on the waters, to come to Jesus.)’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베드로는 ‘에고가 운전하는 배’에서 내렸다. 만약 베드로가 여전히 ‘에고의 운전대’를 틀어쥐고 있었다면 배에서 내릴 수 있었을까. 물 위에 발을 딛는 순간, 빠져 죽는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갈릴리 호수의 바람 속에서 나는 이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베드로는 먼저 ‘에고의 배’에서 내렸다. 나의 고집과 집착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나의 눈, 나의 관점’에서 내려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눈’에서 내려올 때 물 위를 걷게 된다. 왜 그럴까. 에고가 만든 잣대와 틀에 스스로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걸으며 우리는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마태복음에는 그 이유가 나와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강풍이 몰아쳤다. 복음서에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고 돼 있다. ‘휘이익!’하는 돌풍 소리에 베드로는 덜컥 겁이 났다. 죽을까봐 말이다. 그래서 얼른 ‘에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쑥 빠져들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예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장31절)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에고의 배’에서 내려온다. 그때 비로소 ‘에고의 운전대’를 놓게 된다. 그 다음에는 어찌 될까. 저절로 흐른다. 사람 속으로, 자연 속으로, 우주 속으로 저절로 흘러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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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낭만파 독일화가 필립 오토 룽게의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일까, 아니면 비유일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 지금도 ‘물 위를 걷는 예수의 이적’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도 궁금한 적이 있었다. 왜 하필 물 위를 걸었을까. 눈 먼 사람을 고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이적은 그래도 아주 낯설지 않다. 왠지 익숙한 일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장면은 다르다. 상당히 독특하고 낯설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의 ‘음부론(陰府論)’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요세푸스는 제사장 가문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 ‘음부론’에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천국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천국에는 잠도 없고, 슬픔도 없고, 타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곳이다. 천국은 시간으로 재는 낮과 밤도 없고, 필연적 법칙에 의해 천체 사이를 움직이면서 인생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계절의 진행과 변화를 일으키는 해도 없을 뿐 아니라, 계절의 시작을 알리면서 크기를 달리하는 달도 없을 것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달은 물론 작열하는 태양도 없으며, 회전하는 곰자리 별도 없으며 떠오르는 오리온자리 별도 없으며, 유리하는 수많은 별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은 여행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이며, 낙원의 뜰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보행자들이 그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든 바다의 무서운 파도 소리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비록 바다에 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의인들은 쉽게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의 풍경’이 여기에 자세히 묘사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의 설교를 향해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터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천국의 풍경’‘천국의 사람’은 이런 식이었다. 기사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