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러시아 제압위해 영일동맹 추진
그러나 조선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됐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해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일본은 1901년 12월 7일 하야마(葉山)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美) 유학파 였던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여러 국가 원로들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고무라는 만주가 러시아에 점령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만주를 빼앗기면 조선도 스스로를 러시아의 손에서 지킬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를 제압하기 위해 영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원로회의는 영일동맹을 승낙했다.(1902년 1월 영일동맹 체결)
한편, 러시아는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對)만주 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시아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노기(乃木希典)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2월 8일 뤼순(旅順)항을 공격해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攻守同盟)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조선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간에 대격전이 벌어졌다.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일본이 뤼순 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다.
러시아군은 5월27일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제독이 이끄는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과 함께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