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쟁은 정보전의 승리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의 공군을 30분 만에 궤멸시킨 뒤 6일 만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무찔렀다. 6일 전쟁에서도 정보판단이 어긋날 뻔하였다. 이스라엘 군의 정보부대인 아만(AMAN)은 이집트의 군사력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약하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先入見(선입견)에 잡혀 있었다. 5월14일 이집트 군 일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출했을 때나 5월16일 나세르가 유엔의 평화유지군에 대하여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을 때도 아만은 침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武力(무력)시위라고 해석하였다.
5월20일 이집트 군은 샤롬 엘 세이크 항을 장악, 아카바 만을 통제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였다. 21일 이집트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다음 날 아만은 정보 분석 회의에서 이집트의 아카바 만 봉쇄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였으나 그날 밤 나세르는 아카바 만을 봉쇄, 이스라엘 선박의 통항을 금지시켰다. 23일 이스라엘 총참모본부 회의에서 아만 사령관 야리브 장군은 태도를 바꿨다.
“이것은 통항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만있으면 아랍 국가들은 우리의 의지를 얕보고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5월30일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카이로에 도착, 나세르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6월2일 야리브 장군은 내각 회의에서 전쟁을 하면 이스라엘 군이 이길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6월4일 내각회의는 전쟁을 선택하였다. 이집트가 특공대를 요르단으로 이동시켰다는 보고가 에슈콜 수상을 主戰論(주전론)으로 몰았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집트 공군의 대비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이집트 요격기들은 아침 5~7시 사이에 초계비행을 한 다음 기지로 돌아와 조종사들은 지상 요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간다. 전투기는 屋外(옥외)의 정비소로 옮겨진다. 이때가 되면 地對空(지대공) 미사일 요원들도 야간 근무로 피로해 있다. 6월4일,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모티 호드 장군은 라빈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였다.
<아침 7~8시 사이 이집트 공군은 작동을 멈춘다. 7시45분이 공격 타이밍이다.>
다음 날 이스라엘 공군은 7시45분에 이집트 공군기지를 공격, 419대의 전투기 중 304대를 지상에서 파괴하였다. 요르단 공군기 30대, 시리아 공군기 57대도 부쉈다. 6일 전쟁은 開戰(개전) 30분 만에 사실상 끝난 것이다. 이집트에 대한 과소평가
정보의 세계에선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스라엘 군사 정보 부대 아만은 6일 전쟁의 大勝(대승)으로 영웅이 되었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정보부대와 공군의 승리였다. 아만은 화려한 각광을 받는 가운데 중대한 偏見(편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참패한 아랍 국가들이 앞으론 절대로 질 것이 뻔한 전면전을 하지 않을 것이란 독트린(교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사 활동을 그런 관점에서 지켜보기 시작한 아만은 이스라엘 군과 정치권까지 오염시켰다. 워낙 아만에 대한 평가가 높았고, ‘전쟁이 임박하였다’는 정보보다는 ‘전쟁은 없다’는 정보가 달콤한 법이다.
1969년 11월 아만은 이집트가 예상보다 빨리 군사력을 再建(재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묵살하였다. 1970년 2월엔 더 충격적인 정보가 입수되었다. 소련이 이집트의 군사력 강화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무겁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 무렵 아만 내부에선 사령관 야리브가 분석관들을 호통 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6일 전쟁의 영웅인 야리브는 현장 보고서를 흔들면서 분석관들에게 “이건 당신들의 평가와 다르단 말이야”라고 소리치곤 하였다. 분석관들은 이집트를 과소평가하는 독트린의 포로가 되어 현장의 다른 첩보들을 왜곡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리브 장군이 轉役(전역)한 뒤 아만의 후임 사령관은 엘리 제이라 소장이었다. 그는 1973년 5월, 이집트 군이 수에즈 운하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등 수상한 동향을 보이자 <이집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을 했고, 정치권도 이를 존중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응, 예비군을 소집하였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아만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예비군 소집은 과잉 대응이고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의 開戰(개전) 하루 전날 미국 CIA도 닉슨 대통령에게 전쟁 가능성이 낮다는 보고를 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전쟁 8일 전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하였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첫째가는 임무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겠다.”
제이라 사령관은 사다트의 이 연설을 공갈 정도로 취급하였다. 1973년 10월에 들어서자 수에즈 전선의 이스라엘 군으로부터 이집트 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첩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제이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국가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달랐다. 모사드는 수상 직속 부서였다. 開戰(개전) 이틀 전 모사드는 카이로에 있는 간첩으로부터 이집트 군의 공격이 곧 시작된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었다. 모사드 책임자 자밀은 이 결정적 정보의 처리를 소홀히 하였다. 그는 아만의 제이라 사령관에겐 전화로 통지하고 골다 메이어 수상에겐 자신의 보좌관을 보내 설명하도록 했다. 보좌관은 전화로 수상 비서에게 이야기하였을 뿐인데 이 비서조차도 담당자가 아니었다. 자밀은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출국하였다. 카이로 간첩을 외국으로 불러내 직접 물어보러 간 것이다. 정보판단이 세계사를 바꾸다
10월6일 토요일에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이집트의 공격이 이날 중에 시작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공군기에 의한 선제공격 시간은 있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될 것이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메이어 수상과 댜얀 국방장관은 예비군 동원령만 내리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을 받은 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 군대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국처럼 縱深(종심)이 얕은 이스라엘은 기습을 허용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다얀 장관은 한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였다. 제리코 미사일과 팬텀 전폭기가 핵폭탄을 사용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메이어 수상의 친구는 수상으로부터 “다얀이 항복 조건을 논의하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상황에선 수상에게 자살용 독약이 필요하겠다고 판단, 의사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샤론 장군의 수에즈 운하 逆渡河(역도하) 작전의 성공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戰後(전후)의 대화 국면에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 반환된다. 제4차 중동전쟁은 제1차 석유위기를 불렀고 한국의 朴正熙(박정희) 정부는 이 위기를 중화학공업 건설과 중동건설 시장 진출로 돌파, 호기로 逆轉(역전)시켰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後果(후과)로 암살당한다. 이스라엘 정보부대 아만의 정보 오판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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