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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정보 판단 잘못이 세계사를 바꾼 경우

淸山에 2015. 5. 19. 08:25







지도자의 정보 판단 잘못이 세계사를 바꾼 경우

스탈린의 독일 침공 誤判, 이스라엘의 이집트 선제공격 오판,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 오판.

趙甲濟  


  
스탈린의 誤判


지도자나 지도부가 敵의 전쟁 의도를 잘못 판단하거나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대재앙을 부른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 스탈린은 세계에 퍼져 있는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스탈린이 이 보고를 불신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침공은 일찍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 “올해는 너무 늦었고, 침공설은 공작이다”고 확신하였다. 1939년8월 불구대천의 이념적 원수 사이이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그 직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을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戰端(전단)을 열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최고 지도자가 편견을 가지면 부하들도 상관의 판단에 맞춰주려고 정보를 왜곡한다. 6월16일, 즉 開戰(개전) 6일 전 영국에 있던 소련 정보요원은 포섭된 독일 공군 정보장교로부터 <모든 준비가 끝났다. 언제든지 침공이 가능하다>는 첩보를 입수, 본부에 보고하였다. 스탈린에 直報(직보)되었는데, 그는 보고서 옆에다가 이렇게 메모를 하여 부하에게 돌려주었다.


<이 독일공군 간첩은 창녀 같은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라. 이 자는 역정보를 주고 있다.>


도쿄에서 독일인 기자로 위장, 활동 중이던 소련 간첩 리처드 조르게는 일본주재 독일 대사와 친하고 대사 부인과는 戀人(연인) 관계였다. 그는 독일군의 침공이 임박하였다는 첩보를 입수,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 스탈린은 이것도 묵살하였다.


더 놀라운 정보는 소련 주재 독일 대사 슐렌버그로부터 나왔다. 그는 6월 초, 독일 주재 소련 대사 데카노조프와 식사를 하면서 히틀러가 전쟁을 결심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귀하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심하겠지만 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늘 반대하였던 비스마르크의 정신을 이어 받은 사람입니다.”


슐렌버그는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역정보 공작에 드디어 대사까지 나섰구먼”이라고 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도 스탈린에게 독일의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반공주의자 처칠을 더 싫어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처칠이 영국 정부를 움직여 反혁명 공작을 한 것을 잊지 않았다. 스탈린은 처칠이 히틀러와 자신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정보 수집엔 성공, 판단엔 실패


독일은 러시아 침공작전을 위하여 152개 사단, 전차 3350대, 대포 7200문, 전투기 2770기를 국경지대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에 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자 스탈린도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정보기관도 대규모 병력 집중은 숨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역정보를 흘렸다. 히틀러의 병력동원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스탈린에게 최후통첩을 하여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武力(무력) 과시라는 정보였다. 여기에 스탈린이 넘어갔다.


독일군의 침공 하루 전 해외 첩보망을 거느린 소련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는 스탈린에게 자꾸만 開戰(개전) 임박 정보를 올리는 간부 4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는 스탈린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저는 독일 주재 우리 대사를 소환, 처벌하기를 간청 드립니다. 그는 히틀러가 소련을 칠 것이란 보고를 계속 보내오고 있습니다. 최근엔 내일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히틀러가 1941년엔 절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도자의 현명한 판단을 뇌리에 박아 놓고 있습니다.>


6월22일 세계전쟁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 작전 ‘바바로사’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별장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주코프 장군에게 독일군의 침공에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사무실로 출근하였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히틀러도 이 사실을 모를 거야”라고 했다. 몰로토프에게 “독일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라”고 했다. 소련 측에 정보를 제공했던 술렌버그 대사는 ‘독일의 선전 포고를 전달하러 가겠다’고 했다. 이때까지도 소련군 수뇌부는 스탈린에게 무력 대응을 허락해달라고 간청 중이었다. 엄청난 사태 앞에서 ‘강철의 인간’이란 스탈린도 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탈진 상태에서 며칠간 별장에 칩거하였다. 부하들이 그를 찾아가자 스탈린은 불안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미코얀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를 체포하러 온 것으로 판단한 듯하였다고 한다. 몰로토프가 전쟁 지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자 비로소 표정이 풀렸다고 한다. 이 사례는 정보 수집엔 성공하였으나 분석과 판단에는 실패한 경우이다.





6일 전쟁은 정보전의 승리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의 공군을 30분 만에 궤멸시킨 뒤 6일 만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무찔렀다. 6일 전쟁에서도 정보판단이 어긋날 뻔하였다. 이스라엘 군의 정보부대인 아만(AMAN)은 이집트의 군사력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약하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先入見(선입견)에 잡혀 있었다. 5월14일 이집트 군 일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출했을 때나 5월16일 나세르가 유엔의 평화유지군에 대하여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을 때도 아만은 침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武力(무력)시위라고 해석하였다.


5월20일 이집트 군은 샤롬 엘 세이크 항을 장악, 아카바 만을 통제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였다. 21일 이집트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다음 날 아만은 정보 분석 회의에서 이집트의 아카바 만 봉쇄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였으나 그날 밤 나세르는 아카바 만을 봉쇄, 이스라엘 선박의 통항을 금지시켰다. 23일 이스라엘 총참모본부 회의에서 아만 사령관 야리브 장군은 태도를 바꿨다.


“이것은 통항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만있으면 아랍 국가들은 우리의 의지를 얕보고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5월30일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카이로에 도착, 나세르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6월2일 야리브 장군은 내각 회의에서 전쟁을 하면 이스라엘 군이 이길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6월4일 내각회의는 전쟁을 선택하였다. 이집트가 특공대를 요르단으로 이동시켰다는 보고가 에슈콜 수상을 主戰論(주전론)으로 몰았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집트 공군의 대비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이집트 요격기들은 아침 5~7시 사이에 초계비행을 한 다음 기지로 돌아와 조종사들은 지상 요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간다. 전투기는 屋外(옥외)의 정비소로 옮겨진다. 이때가 되면 地對空(지대공) 미사일 요원들도 야간 근무로 피로해 있다. 6월4일,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모티 호드 장군은 라빈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였다.


<아침 7~8시 사이 이집트 공군은 작동을 멈춘다. 7시45분이 공격 타이밍이다.>


다음 날 이스라엘 공군은 7시45분에 이집트 공군기지를 공격, 419대의 전투기 중 304대를 지상에서 파괴하였다. 요르단 공군기 30대, 시리아 공군기 57대도 부쉈다. 6일 전쟁은 開戰(개전) 30분 만에 사실상 끝난 것이다.

 

이집트에 대한 과소평가


정보의 세계에선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스라엘 군사 정보 부대 아만은 6일 전쟁의 大勝(대승)으로 영웅이 되었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정보부대와 공군의 승리였다. 아만은 화려한 각광을 받는 가운데 중대한 偏見(편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참패한 아랍 국가들이 앞으론 절대로 질 것이 뻔한 전면전을 하지 않을 것이란 독트린(교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사 활동을 그런 관점에서 지켜보기 시작한 아만은 이스라엘 군과 정치권까지 오염시켰다. 워낙 아만에 대한 평가가 높았고, ‘전쟁이 임박하였다’는 정보보다는 ‘전쟁은 없다’는 정보가 달콤한 법이다.


1969년 11월 아만은 이집트가 예상보다 빨리 군사력을 再建(재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묵살하였다. 1970년 2월엔 더 충격적인 정보가 입수되었다. 소련이 이집트의 군사력 강화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무겁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 무렵 아만 내부에선 사령관 야리브가 분석관들을 호통 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6일 전쟁의 영웅인 야리브는 현장 보고서를 흔들면서 분석관들에게 “이건 당신들의 평가와 다르단 말이야”라고 소리치곤 하였다. 분석관들은 이집트를 과소평가하는 독트린의 포로가 되어 현장의 다른 첩보들을 왜곡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리브 장군이 轉役(전역)한 뒤 아만의 후임 사령관은 엘리 제이라 소장이었다. 그는 1973년 5월, 이집트 군이 수에즈 운하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등 수상한 동향을 보이자 <이집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을 했고, 정치권도 이를 존중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응, 예비군을 소집하였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아만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예비군 소집은 과잉 대응이고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의 開戰(개전) 하루 전날 미국 CIA도 닉슨 대통령에게 전쟁 가능성이 낮다는 보고를 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전쟁 8일 전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하였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첫째가는 임무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겠다.”


제이라 사령관은 사다트의 이 연설을 공갈 정도로 취급하였다. 1973년 10월에 들어서자 수에즈 전선의 이스라엘 군으로부터 이집트 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첩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제이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국가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달랐다. 모사드는 수상 직속 부서였다. 開戰(개전) 이틀 전 모사드는 카이로에 있는 간첩으로부터 이집트 군의 공격이 곧 시작된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었다. 모사드 책임자 자밀은 이 결정적 정보의 처리를 소홀히 하였다. 그는 아만의 제이라 사령관에겐 전화로 통지하고 골다 메이어 수상에겐 자신의 보좌관을 보내 설명하도록 했다. 보좌관은 전화로 수상 비서에게 이야기하였을 뿐인데 이 비서조차도 담당자가 아니었다. 자밀은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출국하였다. 카이로 간첩을 외국으로 불러내 직접 물어보러 간 것이다.

 

정보판단이 세계사를 바꾸다


10월6일 토요일에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이집트의 공격이 이날 중에 시작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공군기에 의한 선제공격 시간은 있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될 것이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메이어 수상과 댜얀 국방장관은 예비군 동원령만 내리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을 받은 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 군대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국처럼 縱深(종심)이 얕은 이스라엘은 기습을 허용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다얀 장관은 한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였다. 제리코 미사일과 팬텀 전폭기가 핵폭탄을 사용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메이어 수상의 친구는 수상으로부터 “다얀이 항복 조건을 논의하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상황에선 수상에게 자살용 독약이 필요하겠다고 판단, 의사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샤론 장군의 수에즈 운하 逆渡河(역도하) 작전의 성공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戰後(전후)의 대화 국면에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 반환된다. 제4차 중동전쟁은 제1차 석유위기를 불렀고 한국의 朴正熙(박정희) 정부는 이 위기를 중화학공업 건설과 중동건설 시장 진출로 돌파, 호기로 逆轉(역전)시켰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後果(후과)로 암살당한다. 이스라엘 정보부대 아만의 정보 오판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중공군 개입은 없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의 여세를 몰아 北進(북진)을 시작하자 중국의 周恩來(주은래) 수상은 중국 주재 인도대사를 통해서 워싱턴에 경고를 보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통보는 워싱턴에서 ‘가벼운 공갈’로 간주되었다. 한국군 3사단은 10월1일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했다. 미군을 主力(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은 10월9일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10월10일 트루먼은 맥아더 원수를 만나러 태평양의 웨이크 섬으로 날아가겠다고 발표했다. 11월의 중간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쇼의 측면이 강했다. 1950년 10월15일 오전 6시30분 대통령 전용기가 웨이크 섬 활주로에 착륙했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대통령 전용기가 먼저 내려 자신을 마중하도록 했다는 說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전날 밤에 도착해 있었고 비행장엔 30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트루먼과 獨對(독대)하여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고 안심시켰다. 단독 면담 뒤 두 사람은 배석자를 두고 두 시간 더 회담했다. 맥아더는 한국의 戰況(전황)을 장밋빛으로 그렸다.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참모인 찰스 윌로비 소장이 브리핑을 했다. 맥아더는 호언장담하였다.


“평양은 일주일 안으로 떨어질 것이다. 추수 감사절까지는 북한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날 것이다. 美8군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일본으로 복귀할 것이다. 내년엔 남북한 총선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미군은 전부 철수할 것이다. 군사적 점령으로 얻을 것은 없다.”


트루먼은 “이 전쟁을 制限戰(제한전)으로 축소시켜야 한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斷言(단언)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후 한두 달 사이에 개입했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개입을 겁낼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은 30만 군대를 만주에 모아놓고 있는데 10만에서 12만5000명이 압록강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5만~6만 명 정도가 개입할 수 있으나 그들은 공군도 없다. 우리는 한국 내에 공군기지를 갖고 있으므로 중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면 사상최대의 떼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100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공군력과 중공 육군이 결합되면 큰 문제이지만 그런 작전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정보장교의 자질이 의심스러웠던 윌로비 정보참모


트루먼은 비행기에 타기 전에 맥아더에게 훈장을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트루먼은 ‘미국의 소리’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서 맥아더를 격찬했다.


“그는 세계戰史(전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全세계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위대한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입니다.”


웨이크 섬 회담 4일 후인 10월19일 중국의 彭德懷(팽덕회)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渡河(도하)를 명령했다. 그 자신은 저녁에 참모 1명, 경호원 2명, 무전기 한 대를 실은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었다. 약 30만 명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 호언장담은 誤判(오판)이 되어버렸다. 중공군이 10월 말 한국군을 공격한 뒤에도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병력을 실제의 약 10분의 1(3만 명)로 축소,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11월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한다. 이날 윌로비가 평가한 중공군의 규모는 최저 4만, 최고 7만 1000명이었다. 실제로는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산속에서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그 함정 속으로 유엔군을 밀어 넣었다가 반격을 당하고 후퇴한다. 1·4 후퇴, 흥남철수, 이산가족의 비극이 맥아더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戰史家(전사가)들은 일본점령사령관으로 부임, 천황 위에서 군림하면서 ‘미국의 시저’로 불리던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자만심이 너무 강해져 정확한 정보판단을 하지 못하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이 이런 맥아더의 충복이 되어 객관적 정보 분석 대신 상관이 바라는 방향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왜곡,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인 윌로비 장군은 異見(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미국 CIA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방해, 워싱턴에선 한국전과 관련, 윌로비-맥아더 라인의 정보 이외엔 다른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맥아더는 이런 윌로비를 ‘나의 군 복무기간 50년 동안에 만난 최고의 정보장교’라고 추어주었다. 건전한 비판을 배제하는 이런 인간관계는 냉철한 정보판단에 치명적이다. 윌로비는 10년간 맥아더의 정보참모로 근무하면서 맹종하는 습관을 익혔다. 감정적 기복이 심하여 냉철해야 할 정보장교로선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부하들이 자신의 판단과 다른 정보를 올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유엔군은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일단 후퇴한 한 달 뒤 다시 공세를 펴는데 이게 재앙을 불렀다. 윌로비가 양심이 있는 정보참모였다면 중공군의 규모를 맥아더에게 정확하게 보고, 무모한 공세를 막고, 평양~원산 선에서 방어선을 치도록 했어야 했다. 그는 맥아더가 약속한 크리스마스 공세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규모를 축소,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혹자는 중국 본토 수복을 꿈꾸고 있던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을 유도, 중국 공격을 노렸다는 해석도 한다. 윌로비의 책상 위엔 중공군의 만주 집결에 관한 현장 정보가 쌓이고 있었고, 30만 명이 집결하였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하였지만 개입 여부에 대한 판단을, 맥아더의 희망에 맞추어주는 방향으로 내려버린 것이다. 군사정보를 정치적으로 왜곡한 셈이다.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정보판단을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중공군 개입 여부나 북한의 核戰力(핵전력)에 대한 정보 판단은 수백만 명의 生과 死, 그리고 국가의 存亡(존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캠브리지 5인방의 간첩질


수백만의 생명을 代價(대가)로 치른 스탈린, 이스라엘 정보기관, 맥아더의 誤判(오판)은 敵의 의도에 대한 지도자의 분석과 판단이 선입견이나 오만, 그리고 정치적 계산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공군의 개입 여부에 대한 맥아더의 오판은 소련이 간첩망을 통하여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략에 관하여 최고급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결과를 빚었다. 1930년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면서 좌경화되어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다섯 명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은 외무부와 정보기관에 들어갈 것을 권고한다.


이 가운데 두 명은 한국전이 한창이던 시기, 특히 중공군이 개입하던 기간에 한국전에 관한 최고 기밀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돈 매클레인은 영국 외무부의 미국과장, 킴 필비는 미국 주재 영국정보기관(SIS, MI 6라고도 불림)의 연락관으로서 미국 CIA에 대한 접촉창구였다. 이 두 사람은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原爆(원폭) 사용을 금지시킨 사실, 미국의 원폭 보유량이 부족하다는 사실, 애틀리 영국 수상이 트루먼과 담판한 내용 등을 알아내 소련 정보기관에 관련 비밀서류를 복사, 통째로 넘겼다.


캠브리지 5인방은 좋은 집안 출신인데, 공산주의자가 된 후엔 돈 한 푼 받지 않고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간첩질을 하였다. 영국 정부의 엘리트 사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인맥이 두터웠다. 이 사건은 1980년대 한국의 대학을 다니면서 좌경 의식화된 다음 정치, 언론, 법조계에 진출, 북한정권을 위하여 복무하는 ‘자발적 간첩’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