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박정희의 비장한 일기장을 읽어라!

淸山에 2009. 8. 29. 05:10
 
 
 

 

 
 
 


박정희의 비장한 일기장을 읽어라! 

 
이 글은 토론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목은 여기서 고친 것이다.

이름:역사학도 (sionvoice@hanmail.net) (1, 남, 성직자)
2003-03-19 오후 3:10:00 65.118.138.1

 


한민족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만인의 희망

 

 

1975년 4월 월남 전선에는 수도 사이공에 어느 나라의 국기를 꽂느냐의 전투가 있었다. 한쪽은 군화조차 지급 받지 못하고 주먹밥과 소금을 급식으로 대신하는 가난한 나라의 군대였다.

다른 하나는 당시 동남아에서는 경제 중심 국가요 미국의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그 군세가 10배나 더 강한 나라의 군대였다. 분명 덩치로 보면 이 전쟁은 어른과 어린아이의 전쟁이었다. 당시 월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싸움은 한번도 제대로싸워보지 못한채 월남군이 후퇴만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사이공 시청에 공산당의 월맹기가 꽂힌 전쟁이었다.

그리고 사이공을 점령한 이북 공산당군이 친북 좌파부터 구금하여 처형하던

그 날, 어제까지 동네에서 평화롭게 소꼽장난하던 소녀들이 벌거벗은채 울며 도망쳐 나오는 그 패망의 슬픔을 전세계는 지켜 보았다. 그때가 1975년 4월 30일 정오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 날 일기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이제 월남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 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당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남이 도와준다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눈으로 보았다.

 

아! 어찌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한 나라의 수도의 시청에 빨갱이 깃발이 꽃히는 그 패망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일 수만 있단 말인가? 우리 민족도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당한지 일주일도 안되어 우리나라의 수도 시청에 인공기가 날리는 비극을 당해 보았다. 다행히도, 그때 한국 정부는 재빨리 부산으로 피난갔으며, 미군이 우리나라를 도와주기 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월남의 패망의 경우는 달랐다. 월맹군이 남침하면 공군과 해군을 보내 주겠다던 미국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월남은 그날부터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다른 점은 김 대통령의 과대 포장된 정책에는 알맹이가 없었던 데 비해, 박정희 대통령은 치밀히 전략을 세우고 발표한 정책을 예정대로 성사시키셨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전략가이기 전에 군사작전의 전략가였다. 그는 명축구 감독 히딩크 못지 않은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우방 월남이 적화통일 당하지 않는 방도를 내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월남군이 월맹군보다 열 배나 더 강하였으며, 월남 뒤에 미국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왜 세계 제4대 군사강대국인 월남의 군대가 하루 아침 사이에 증발해 버렸으며, 월남의 대통령은 독립궁에서
적의 포로로 잡힌채 항복을 선언해야 했던가?

 

외형상 백전 백승을 위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월남군에는 한가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군에 사기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노무현씨처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을 하는 지도자들은 있었어도 임전 태세를 말하는 지도자가 없었다. 적의 병력은 고작 십만명 정도였으므로 맞서 싸웠다면 만명 미만의 희생으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적 해결” 병에 걸린 그들은 수도 사이공에서 국기 대신 월맹기가 오를 때까지 후톼하다가 구백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자기네가 이용해 먹은 자들을 제일 먼저 처형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생리이기에 물론 반미주의자들, 민족 공조론을 외치든 친북 좌파 인사들이 제일 먼저 처형당했다. 이밖에도 보트 피플의 수가 106만명이었다. 평화적 해결을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협정을 위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댓가의 결과는 무려 천배가 넘는 인명 소실과 아울러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찌, 1975년의 월남의 비극이 결코 남의 나라일수만 있겠는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그날의 그의 일기장에 또 이렇게 쓰셨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목숨도 불위하겠다는 결심과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 해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 "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고진감래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이어가도록 해야 할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 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켤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그랬다. 당시 월남은 승전을 위한 모든 요건을 다 갖추었으면서도
충무공의 말씀하신 "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 의 각오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군사학적 분석 외에도 사회학적 관심사가 있다. 왜 거지 군대 월맹군에는 일당 백의 용기가 있었는데, 월남군은 지휘관이 진군 명령을 내려도 무기를 내버리고 도망가는 군대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월남인은 용맹스러운 민족이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1975년 4월 한달간의 전투 기간 동안 두 종교 지도자가 월남군을 무력화시키며 미군이 참전을 말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종교 지도자가 전시에 병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예를 우리는 종종 본다. 왜 기독교를 핍박하던 러시아의 스탈린이 2차대전 중에 성직자들의 도움을 호소하였는가? 그리고, 모세와 다윗처럼 국난의 때에 나라를 구한 위대한 신앙인들의 이야기가 동서 고금을 통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1975년 봄에 월남에는 그의 그릇된 민중신학으로 남남 분열을 일으킨 한국의 문익환 목사처럼 남남 분열을 일으킨 두 종교 지도자 짠후탄 신부와 틱낫한 스님이 있었다. 이 두 인물은 매우 독선적이면서도 자신들의 독선에 대한 굉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짠후탄 신부는 당시 월남의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민주화 운동 논리에 사로잡혀 있던 나머지 그의 눈에는 국경을 넘어 국군을 유린하는 월맹군이 자신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시민군으로 보였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민중 봉기를 공산군의 침략이라고 거짓말하는 여당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병사들이 짠후탄 신부의 말을 믿었던 월남군은 허수아비 군대였다.

 

한편, 상생 평화 논리의 독선에 빠져있던 틱낫한 스님은 그의 조국 월남이 미국의 참전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미국을 말렸다. 미국은 월맹에 평화협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월남이 평화적 해결을 주도하는 것을 고집하던 틱낫한 스님은 미국을 말렸다. 월남 패망사는 우리에게 월남에도 우리나라에도 적의 민족공조론에 속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민족공조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은 뒤에 이데올로기 대결의 독소를 감추고 있다.

 

월남과 월맹은 한민족이었으며, 통일은 그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대결을 망각한 두 종교 지도자 짠후탄 신부와 틱낫한 스님이 민주화 운동 논리와 상생 평화 논리로 민중을 잘못 인도하였을 때 사실상 그들은 나라를 적의 수장에게 갖다 바치는 무모한 일을 하였다. 그 결과 짠후탄 신부는 자기가 도와준 월맹군에 붙잡혀 처형되고, 월남에서 도망쳐 나온 틱낫한 스님은 월남 패망 28년이 지난 오늘 또 다시 그의 거짓 평화론의 독소를 들고 우리나라를 찾았다.

 

지난해 6월 한일월드컵 기간 중 무적함대 스페인과의 격돌에서 홍명보 선수의 승부차기 볼이 전광 석화처럼 상대편 골에 꽂혀 4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감격의 스파크가 있었으며, 서로 얼싸안은 오천만 겨레의 희열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여기에 온 국민이 공감하는 애국심이 있었다. 그로부터 꼭 6개월이 지나 그 광장에서 두 여중생을 위한 촛불추모식이 있었다. 많은 청소년들은 다시 한번 애국심의 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질타가 쏟아지면서 그들은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다. 비록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해도 그 촛불 추모식의 숨은 정체는 이데올로기의 대결이었다.

 

촛불 시위를 주최한 자들에게는 처음부터 두 여중생을 추모할 뜻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적화 통일이었어며,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두 여중생을 이용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3·1운동 84돌인 3월 1일(2003년) 정오에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수십 만명의 애국 시민들의 다시금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이번 집회의 특징은 참전 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어우러진 집회였다는 것이다. 6.25동란 때 서울 시청에 인공기가 꽂히는 것을 보았던, 그리고 1975년 4월 30일 정오에 월남의 수도 사이공에 월맹기가 꽂히는 것을 바라보았던 세대요, 다시는 인공기가 서울 시청에서 휘날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념으로 모인 시민들이었다.

 

민족 공조? 좋은 말이다! 참전 세대는 고향과 친척과 논답이 북한에 있는 세대이다. 그 누구보다도 민족 공조를 원하는 세대가 참전 세대이다. 그러나 신세대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여기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이다. 적화통일은 결코 민족공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 분쟁은 어느 한편에서 군사적인 힘의 우위로 그 승부를 겨루려고 할 때에는 전쟁을 야기한다. 그리고 적이 쳐들어 오면 막아 싸워야 한다. 결코 월남의 두 종교 지도자 짠후탄 신부와 틱낫한 스님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앉아서 당하기만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 민족 공조일 수도 상생 평화일 수도 없다. 군사적인 공격에는 군사적인 대항이 필요하다는 것이 국가 안보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무환의 바탕 위에서 우리가 또 하나 물어야 할 물음이 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의 본질은 우리 민족 내의 이데올로기의 대결이다. 이것은
우리 국가가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느 체체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대립의 본질적 문제는 철학적, 종교적 질문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모든 정치학적으로 복잡학 수식어를 생략하고 이데올로기의 분쟁의 골자를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함축하여 표현하면 "만인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이다.

 

유럽과 근동에 로마의 국도가 건설된 A.D. 1세기의 세계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세기였다. 동으로는 인도 저편의 신라와도 교역하였을 정도로 동서 교역의 활발하였던 로마의 번영과 찬란한 문화의 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경이였다. 그럼에도 종교계, 사상계는 혼란스러웠으며, 사람들은 영적 갈급함을 느끼었다. 만민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이 세상은 누가 통치하는가? 씨이저인가? 씨이저가 사람들의 마음도 통치하는가? 누가 이 세상의 구주인가? 이것이 A.D.
1세기 당대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다.

 

"이 나라는 누가 통치하는가?"--그리고 이것이 40년간의 민주화 운동 후에 허탈해진 심정으로 오늘 우리가 묻는 질문이다. 남한에서는 16대 대선 이후 시민들의 대화에서 대통령이란 호칭이 사라져 간다. 어제 (2003년 3월 17일) 노무현은 “한총련을 언제까지 반국가 집단으로 간주해 수배할 것인지 참 답답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국민들은 그에게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인지 답답해 한다. 국정 초보 운전자가 삼권 분립의 원칙마저 무시하면서 초법적으로 국정을 마구 뜯어고치는 것을 민주주의의 진보라고 생각할 이는 별로 없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노무현씨는 민주화 운동 배신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 나라에 지도자의 문제가 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떠한가? 만일 북한 동포들이 여전히 그들의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믿고 있다면 그들은 속으며 살고 있다.
실로, 북한의 지도자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기에 김정일이 지배하지 않는 나라를 찾아 지금도 탈북자의 행렬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씨이저가 그들의 진정한 왕일 수 없음을 알았던 A.D. 1세기의 사람들은 "만민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이것이 20세기 사람들이 줄곧 물어온 질문이다. 우리 민족의 뼈아픈 분단 현실도 그 뿌리는 이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3월 1일 광복후 감격의 첫 3.1절 행사 직후 좌익 폭력배들이 애국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소동이 있었다. 무엇이 이데올로기 분쟁의 씨았이었던가? 20세기 초에 러시아인들이 인간의 행복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에 달려있다는 유물사관을 받아들였다.

 

그 불똥을 우리나라까지 튀긴 후 정작 공산주의 종주국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를 포기하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이며, 근자에 남한에서도 친북 좌파들이 제2의 남로당 활동을 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경제 이론은 경제의 효용성을 계속 떨어뜨린다는 데서 그 한계가 드러난다. 이 경우 공산주의 경제의 문제점은 인간의 행복이 물질에 달려있다는 거짓 신념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공산주의는 생산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기에 분배의 효용성마저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한편,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하기 쉽다. 월남의 짠후탄 신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였으되, 부익부 빈익부 현상을 부패로 여겼다는 점에서 좌익이었다. 사실, 자유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부익부 빈익부 현상을 잠시나마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선진국형 경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에
국민적 합의로 잠시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잠시 인내하는 민족은 선진국이 되고, 서둘러 분배 평등의 목소리부터 크게 내는 민족은 후진국형의 사회주의 국가로 도태된다.

"만인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데에 기독교의 복음의 경이가 있다.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용비어천가는 없다.


그는 서민이셨다. 그는 부익부 빈익부에 분노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세가지 경제관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다. "네 있는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막 10;21). 행복은 공산주의자들처럼 남의 것을 빼았음에 의해서도 아니요,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익부 편에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우리나라 국가 재정의 90%를 지원하던 시절의 미국의 GNP가 고작 몇천불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경제의 효용성은 공산주의처럼 강압적인 분배의 평등이 아니라, 자발적인 환원에서 극대화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 5:13). 개혁이나 투쟁으로 부패를 방지하려는 사람들은 부패를 막기 위하여 소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1975년 봄에 월남 사회에 부패가 있었다.

 

그리고 짠후탄 신부는 나름대로 정의감을 가지고 부패 방지 운동을 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는 짠후탄 신부나 문익환 목사처럼 분배의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성직자들이 좋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비복음적이요, 오히려 경제의 효용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남남 분열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전복당하는 위험을 자초하기 쉽다. 월맹군의 침략을 민중 봉기라고 말한 짠후탄 신부 때문에 월남은 패망하였으며, 비성서적이고 그릇된 민중신학을 퍼뜨린 문익환 목사의 통일운동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쳤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는다. "만민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민족의 미래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북한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도 이것은 우리 민족이 함께 물어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