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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파키스탄 紀行

淸山에 2014. 12. 17. 04:14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파키스탄 紀行

지배층은 이슬라마바드라는 신기루 같은 도시에서 민중과 유리된 삶을 살고

열심히 일하는 이는 소년, 여자, 당나귀 정도

趙甲濟  



학교 테러로 130명 이상 사망, 쿠데타의 연속, 전 총리는 암살되고 현직 대통령은 비행기 폭사, 탈레반의 준동 등등 이것이 파키스탄의 모습이다. 핵무기를 가진 가난하고 실패한 나라이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독립했었고, 1960년대 초 우리가 개발의 모델국으로 삼았던 파키스탄의 비참한, 그리고 위험한 오늘이다.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풍토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패사례가 파키스탄이다. 필자는 18년 전 파키스탄을 여행하고 대통령을 인터뷰했었다. 당시의 기행문을 소개한다.



 


바부르의 南進路를 따라


1996년 7월18일 기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두 번째로 찾아가 카리모프 대통령과 인터뷰를 마친 뒤, 20일에 인도 뉴델리 공항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形은 雪山, 돌산, 사막, 인더스江, 평야, 취락, 대도시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내려간 비행기의 南下 경로는 500년 전 바부르라는 20대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가나에서 小王國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부르는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몽골-투르크系의 합성이었다. 바부르의 소년기 교육은 그의 위대한 人格을 키워낸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시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몽골系)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몽골-투르크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둔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잊어 한 것은 그 지방이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512년 우즈벡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바부르는 北進을 단념하고 파키스탄, 인도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했다. 이 南征의 막장은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그는 몽골기병을 좌익과 우익의 맨 끝에 배치하여 전진하는 敵의 주력을 배후로 돌아서 포위, 등 뒤에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중앙에 배치한 총포부대는 일제사격으로 정면을 치케 했다. 포위 섬멸된 적은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친 수많은 희생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추억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파키스탄-인도는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000년간 이슬람化된 몽골-투르크族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인들은 무갈제국의 5代王이 먼저 죽은 아내를 추모하려고 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은 잘 알지만, 그것을 세운 王朝가 한국인과 인종적으로 연결되는 몽골-투르크族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기자의 파키스탄-인도 취재는 따라서 무갈제국에의 탐험이었다.


 

 



다니 박사의 역사 이야기


7월21일 기자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아하마드 하산 다니 박사(76)를 인터뷰했다. 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실크로드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고고학자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아주 곱게 늙은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大學者답게 재미있고 간략하게 파키스탄-인도와 유목민족의 관계사를 설명해 갔다. 다니 박사는 서기 5세기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훈族이 2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배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들(훈族)은 쿠샨王朝를 무너뜨리고 후나(HUNA)제국을 건설하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를 통치했습니다. 터키학자들은 이 훈族을 투르크族이라고 분류합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파괴자로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봉건영주제도를 우리나라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분리된 것은 18세기였으니까요.


훈族은 수많은 부족의 연맹체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뒤엔 각 부족에게 땅을 나눠주어 독자적인 통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봉건영주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1996년 현재까지도 파키스탄엔 봉건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大地主들이 각 지방에서 사실상 행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地主출신이고 군대도 地主들의 아들들이 장교가 되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5세기에 훈族이 정착시킨 제도입니다』


다니 박사는 계속했다.


『8세기에는 투르크族이 중앙아시아쪽에서 쳐들어와 2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습니다. 10세기에 비로소 이슬람 교도가 된 투르크族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쳐내려와 우리나라와 인도 사람들 중 일부를 이슬람화시켰습니다. 이때는 非이슬람 失住 투르크族과 이슬람 투르크族이 서로 싸웠습니다』


다니 박사는 아랍인들은 海路를 통해서, 투르크族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파키스탄-인도 대륙에 이슬람敎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아랍語와 상업,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슬람 성직자(수피)제도와 페르시아語를 갖고 왔습니다.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는 10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닮게 되었습니다. 10세기에서 18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페르시아語였으니까요. 몽골-투르크族이 건설한 무갈제국조차도 공식어로는 페르시아語를 사용했습니다』



 



파키스탄人의 피의 62%는 투르크系


같은 문화권이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것도 파키스탄이 투르크族에 의해 이슬람화된 데 대해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다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人 피 속의 62%는 투르크人의 피로 본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에 대해서 다니 박사는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그들의 힘은 호스파워(Horsepower=馬力)에서 나왔지요. 말을 전쟁에 처음 쓴 사람들은 아리안系로서 4000년 前부터였습니다. 서기 前 2세기경에는 아리안系의 스키타이 유목민이 발걸이(金登 子)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장과 발걸이 등 馬具를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몽골族이었습니다. 이 馬具를 바탕으로 독특한 군사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몽골人들은 말을 번식시키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의 숫자가 많아야 전투력의 원천인 馬力이 증가할 것 아닙니까. 種馬를 아주 귀하게 여겨 족보까지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이 種馬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唐나라에까지 들어가서 힘세고 지구력이 강한 몽골 말이 확산되었습니다』


다니 박사는 징기스칸의 西征 이후 몽골族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많이 들어와 지금도 파키스탄의 라호르 근방, 캐시미르, 페샤와르 지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갈」(몽골族이란 뜻)이라고 부른다. 징기스칸의 몽골군대는 서기 1229년과 1241년 두 차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북부 푼잡지방까지 침공하여 1270년까지 주둔하였다. 인도대륙이 1000년간 이슬람化된 투르크族의 지배下에 있었다는 것은, 몽골-투르크族의 지배지가 넓이에서 뿐 아니라 피지배국의 인구수에 있어서도 항상 중국(인도와 인구가 비슷)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규모였음을 뜻한다.






신기루


7월22일 지프차를 타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하여 大宇건설이 닦고 있는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구간 6차선 고속도로(334㎞)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길은 20세기말에서 中世 봉건사회로의 회귀였다. 깨끗한 이슬라마바드만 보면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평화로운 田園국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슬라마바드에 모여 있는 이 나라의 파워 엘리트들도 그런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 사고(思考)하는 버릇이 있다. 이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을 버리는 자기 혁신이다. 이 자기 혁신이 어느 나라의 지배층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파키스탄의 정치·행정 엘리트들이 빈곤과 바닥에 있는 파키스탄의 현실과는 절연한 채 신기루 같은 이슬라마바드에서 과연 민중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을까?


大宇가 1992년 4월1일에 착공, 1997년 12월31일까지 완공하기로 돼있는 고속도로 공사는 9억8700만 달러짜리. 이 공사대금의 33.7%만 파키스탄 정부가 대고 66.3%는 大宇가 댄 뒤 상환을 받게 돼 있다. 외환이 부족한 파키스탄은 이런 BOT(Build·Operation·Turnover) 방식의 공사를 선호하고 있다. 2512대의 각종 차량과 중장비가 상시 동원되고 있는 이 공사현장에서는 약 6000명이 매일 일하고 있다. 95.6%가 파키스탄 노동자, 2.9%인 169명이 한국인, 필리핀人이 1.4%, 영국사람도 4명이 일하고 있다.


현장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金光洙 상무는 『하청공사分까지 포함하면 파키스탄 사람 10만 명(가족 포함)이 이 공사 덕분에 먹고산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파키스탄 건설 노동자들은 현장 부근에 천막을 쳐놓고 합숙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갔다가 오고 일요일도 없이 거의 쉬지 않고 일한다. 金상무는 『이들의 노동효율은 한국 노동자의 80%쯤 된다』고 했다. 임금은 한국건설노동자의 약 20분의 1이다. 대체로 성실한 편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을 뽑을 때 간부후보로 軍에서 제대한 하사관들을 찾아내 많이 채용했다고도 한다.


기자의 짧은 파키스탄 취재 인상은, 순박한 파키스탄 민중을 이 나라의 대다수 엘리트들이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경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파키스탄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정치인·관료들이 너무 애국심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기술자들을 연수 보내 주겠으니 계획을 짜달라고 해도 별 무반응입니다. 이 나라에는 아무래도 朴正熙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발전할 겁니다』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고속도로는 장차 중앙아시아와 카라치(파키스탄의 인도양쪽 항구)를 연결시켜 주는 더 긴 고속도로를 위한 첫 단계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와야 가능한 사업이다. 5시간에 걸쳐 이 공사현장을 달렸는데 이 도로는 푼잡 평야를 관통했다. 푼잡이란 인더스江의 지류인 다섯 강이 흐르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파키스탄과 인도에 걸쳐 있는 이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 꼽힌다. 인도 인구 9억5000만과 파키스탄 인구 1억3000만을 합쳐 약 11억의 인구가 이 평야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소년·여자·당나귀


이 평야지대를 달려보니 定型化된 풍경화가 반복되었다. 넓디넓은 논·밭 사이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윗통 벗고 한가롭게 쉬는 것은 남자들이고, 그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땡볕 농토에서 열심히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작은 당나귀가 집채만한 짐을 지고 요령부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뒤에서 나무 작대기를 휘둘며 쫄쫄 따라오는 것은 소년들이었다. 끙끙대는 당나귀의 표정은 한국의 가난한 할머니들 인상처럼 슬프기도 고맙기도 했다.


이곳 당나귀는 자기 집을 찾아가는 데 능력이 발달돼 있어 짐을 싣고 혼자서 하염없이 길을 걷는 당나귀들도 많이 보였다. 金光洙 상무는 『파키스탄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는 게 당나귀, 어린이, 여자들이다』라고 했다. 시골의 초등학교들을 몇 군데 지나쳤다. 학교 사무실만 있고 교실은 없었다. 교실은 큰 나무 밑 그늘이었다. 문맹률 약 70%의 현장이었다. 학교 취학률이 낮으니 어린이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고용된다.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 문제는 지금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자가 이곳에 있을 때도 EU(유럽공동체)에서 조사관을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노예와 봉건영주


어린이들은 손길이 섬세하기 때문에 카펫 제조공장에 특히 많이 고용된다고 한다.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이런 어린이를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英子신문들은 지방 토호(〓地主)를 「봉건영주」란 의미의 「Feudal lord」라고 표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나라, 원자폭탄을 제조한 나라, 그리고 金泳三 전 대통령이 「동지적 민주투사」로 칭송했던 부토 여사가 총리로 있던 나라, 5·16직후엔 한국이 본받고 싶어한 나라, 最高의 인류문명과 最大의 곡창지대를 가진 나라에서 아직도 中世的 용어가 예사로 쓰여지고 있다.


1945년 이후 파키스탄 현대사에서 파키스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깔고 진정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던 거의 유일한 지도자로서는 아유브 칸을 꼽는 파키스탄인들이 많았다. 그는 1958∼69년 사이 집권했다. 평민출신 장군 아유브 칸은 파키스탄의 정치가 대혼란에 빠지자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며 집권했던 사람이다. 그는 1965년 캐시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뒤 알리 부토를 비롯한 직업 정치인의 도전을 받았다. 反정부 시위로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1969년에 정권을 후배 장군 야하 칸에게 이양하고 하야했다. 그는 하야 직전의 술회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파키스탄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나라이다. 아마도 나는 우리나라를 너무 세게 근대화 쪽으로 밀어붙인 것 같다. 나는 정권을 이양하려고 민간정치인들과 접촉했으나 가장 큰 실망은 단 한 사람도 이기심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정치권이 선량한 지도자를 장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둘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진다. 그래도 우리가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나라를 10년간 통치해온 것은 한 바구니에 여러 마리의 개구리들을 넣고 들고 가는 기분과 같았다. 두 개의 파키스탄에는 희망이 없다. 東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守舊세력과 군대


아유브 칸의 30년 前 절망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가 守舊세력으로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地主계급은 그 엄청난 농업소득에 대해 세금을 면제받아왔다. 농지세를 내도록 하려는 압력이 일어나 4개 주 가운데 두 군데에서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최대 곡창 지대인 푼잡州 정부는 거부하고 있어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地主계급이 정치뿐 아니라 아들들을 장교로 보내 군대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5·16쿠데타와 같은 개혁 지향적 군사 개입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은 네 번의 軍政을 겪었으나 한국처럼 경제개발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곳 정치인들은 민중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상태에서 단순히 정치인을 위한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1996년 7월20일자의 영자신문 돈(DAWN)紙에 실린 기사들은 파키스탄의 상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의사들, 그들의 소득에 물품세를 과세하기로 한 데 반발하여 스트라이크 결의.
·야당, 내일 총파업 호소.
·EC관리, 어린이 노동 문제 논의하기 위해 방문.
·봉건영주들(Feudal lords), 다두 지방의 수사에 압력.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났던 다니 박사는 『인도는 독립 직후 네루가 농지개혁으로 地主계급의 권력을 축소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었다. 문맹률을 70%대로 유지하는 것도 地主계급이 민중들을 다스리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다. 파키스탄의 초등학교 중 2만4750개가 건물이 없는 야외수업 학교이다. 문맹률은 특히 여성에서 심한데 약 80%나 된다. 파키스탄은 인구가 약 1억6000만 명으로서 세계 8위인데 인구증가율은 약 3%로서 세계 최고수준이다. 23년 내에 인구는 배로 늘 것이다.

 




라호르城


7월22일 오후 섭씨 40도의 불볕 더위 아래에서 라호르市內에 있는 무갈제국 유적을 둘러보았다. 전성기의 성(Fort)과 모스크는 그 규모와 예술성에 있어서 이 제국의 물리적 크기와 정신적 깊이를 짐작케 하는 대건축물이다. 성(城) 안에는 무갈제국 제3代 황제로서 인도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일하여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아크바르의 궁전들이 많이 있다. 아크바르는 15세기말에 수도를 인도의 아그라에서 지금은 파키스탄에 있는 라호르로 옮겼다가 14년간 뒤 아그라로 돌아갔다.


아크바르의 성은 시내를 내려다보는 대지 위에 건설되었다. 허물어지고 퇴색된 그대로 방치되고 있지만(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무상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성장(盛裝)했을 때는 동시대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못지 않았을 규모이다. 이 궁전의 돔 모양도 유목민족의 천막을 본뜬 것이다. 회랑에 난 돔의 내부천장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모방한 장식이었다. 무갈제국의 왕족들은 草原에 드러누워 청명한 밤하늘을 구경하던 시절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궁전 바로 옆에는 아크바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가 있다. 주황색 사암(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17세기말에 건설된 이 모스크는 인공 垈地(대지) 위에 세워진 170×170m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한복판에 난 운동장 같은 공간은 기도자들이 모이는 곳인데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건설 당시엔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무갈제국의 역사를 읽고 유적을 답사한 뒤 학자들과 만나 궁금증을 풀면서 기자는 이 제국의 예술적이고도 관대하며 때론 무자비한, 그리하여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황제들의 인간상에 빠지게 되었다. 창건자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병에 들어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바부르의 소원대로 되어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당시로서는 인구수나 면적에서 세계 제1의 제국이었다. 아크바르는 인도 역사 교과서에도 불교왕 아쇼카와 함께 2大 賢君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가와 건축가를 우대하여 무갈제국을 文化大國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자항길은 자신의 명령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부하 장군의 미망인 눌 자한과 연애에 빠져 딸을 가진 이 과부와 결혼했다. 눌 자한은 대단한 미모와 용기,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소유했다. 남편을 도와 그녀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빛낸 여자로 꼽힌다. 자항길 황제의 아들 샤자한은 아버지에게 반항,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한 적이 있었다. 눌 자한은 샤자한을 용서해 주도록 했다. 살벌한 유목민족제국사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타지마할의 비극


샤자한은 愛妻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20년에 걸쳐 타지 마할을 만들었다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쿠데타를 당했다. 그는 딸과 함께 아그라 城에 갇혀 8년간 유폐생활을 하다가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7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타지마할 안에 있는 아내 무덤 곁에 묻혔다. 무갈의 궁정秘史는 오스만 투르크처럼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배반과 용서, 순정과 열정, 그리고 관용과 예술성이 느껴진다. 역사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 줄거리 같기도 하다. 등장 인물이 모두 독특한 개성에 따라 생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갈제국의 유적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동행한 大宇건설 직원이 휴대 전화를 받더니 『라호르 공항에서 폭탄이 터져 1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다쳤다』고 전해 주었다. 이틀 전에 기자가 도착했던 바로 그 공항이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인도가 사주한 테러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테러 범인을 제대로 잡은 적이 없어 설(說)로만 그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캐시미르 지역에 사는 이슬람 교도들의 자결권 문제를 놓고 독립 이후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캐시미르 지방에는 회교도가 더 많기 때문에 주민들의 자주적 결정에 의해 파키스탄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파키스탄쪽의 주장이다. UN 안보리의 결의도 주민의 자결권을 지지하고 있다. 인도는 이곳에 많은 군부대를 파견하여 이슬람 저항조직을 분쇄하려 한다. 인도의 스위스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캐시미르는 사실상 軍政下에 있다.


관광지로도 쓰이지 못한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캐시미르의 무장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파키스탄 신문 지면에는 거의 매일 캐시미르에서 일어난 충돌 기사가 실리고 있었으나 워낙 인구가 많아 사람값이 싼 탓인지 이곳 분쟁은 국제적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




 



◎ 파키스탄 사르달 팔루크 아하마드 칸 레가리 대통령


『인도가 핵개발을 포기하면 우리도 한다』


부족장 家門 출신 대통령


7월23일 오전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파키스탄 대통령 사르달 팔루크 아하마드 칸 레가리 대통령과 인터뷰를 가졌다. 1940년에 태어난 레가리 대통령은 발로크 부족장 家門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족장에게 농민들이 내던 세금을 없애는 등 개명한 지주였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지금도 일종의 부족 사회이다. 부족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경찰이 구경만 한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력서에 출신 부족명이 명기(明記)될 정도이다.


영국 옥스퍼드大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그는 지하울 하크 대통령의 軍政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벌여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9년 국회의원에 재선된 그는 베나질 부토 총리 밑에서 수리(水理) 및 발전 담당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93년 부토 여사가 재집권하자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국회에서 당선되었다.


파키스탄의 대통령은 二元 집정제의 대통령만큼 강력하여 정치를 조정하고 軍을 통수한다. 이슬라마바드의 대통령宮 접견실에서 기자를 맞은 레가리 대통령은 큰 키에 아주 유순한 인상이었다.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은 편안함과 신뢰감을 동시에 주었다. 그의 성실하고 솔직한 답변은 파키스탄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지도자像을 기자의 마음속에 새겨 주었다.


 

 



『같은 아시아人으로서 한국의 발전에 자부심 느낀다』


―어제 라호르 공항에서 있었던 폭발사고로 희생된 분들에 대하여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 사고를 당하여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테러가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관계로 테러를 방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테러로써 파키스탄의 사회적 안정을 해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만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정보수집 부문 등 몇 가지 면에서 對테러 작업에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체제를 정비하여 테러조직을 반드시 뿌리 뽑겠습니다. 우리 부토 총리가 貴國을 방문하고 있는 가운데 이렇게 파키스탄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기 와서 「동쪽 나라를 배우자」(Look Toward East Policy)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동쪽」중의 하나인 한국에 대한 대통령의 평가와 바람직한 파키스탄-한국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한국이 굉장한 공업국가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환(環)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그런 발전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면서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총리께서 貴國을 방문한 길에 한국의 성공비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워오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한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의 성공 비결은 人的 자원의 개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교육을 통해서 오늘날의 공업大國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문맹률을 낮추고 기술교육을 왕성하게 하고 정치를 안정시킨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한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였고 우리가 한국에 상품을 수출하는 입장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처지가 역전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역사와 환경이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 또한 많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도 日本같은 나라로부터 기술을 배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은 지금 선진국과 비견될 정도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한국의 성공 비결에서 또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체제를 살려 민간 부문의 역할을 활성화시킨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래의 두 나라 관계에 대하여 말씀드린다면 이번에 부토 총리의 訪韓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민간 회사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투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파키스탄은 큰 나라입니다. 인구만 해도 1억3000만이 넘고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동서양의 여러 文明이 만난 십자로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특히 관계가 좋습니다. 걸프 지역과도 가까울 뿐 아니라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맥박이 뛰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下에 있는 파키스탄은 한국 민간기업에 있어서 무역의 거점으로 적합한 곳입니다』




 


소란스런 정치


―저는 파키스탄에 온 지 3일밖에 되지 않아 아주 피상적인 관찰이 될지 모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파키스탄의 정치는 정책대결보다는 권력게임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층은 국가적 목표의식·애국심·개혁의지를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국민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가나 국민을 개혁하기 전에 지배엘리트層이 스스로를 먼저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께서는 어떤 생각이십니까.


『파키스탄에 며칠밖에 안 계셨다고 하셨지만 지금 지적하신 내용은 아주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소란스러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문제에 관해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컨센서스를 이루었다는 것도 간과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컨대 安保정책, 캐시미르 지역 분쟁에 관한 정책, 그리고 核무기에 관하여는 여야가 구별 없이 합의한 국가적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정책에 관해서도 자유 개방 정책을 중단 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與野가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稅率을 낮추는 대신에 납세계층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정치세력은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한적 대결이 정치판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역 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돌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두 번에 걸쳐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고 계엄령으로 민주질서를 억압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만, 이런 군사통치가 오늘날의 극한적 대립을 만든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건국 자체가 위대한 지도자 진나의 영도하에서 이뤄진 민중운동의 결과이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은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통치세력 기간內에 군인들이 후견하고 후원한 非민주적 정치세력이 생겼습니다.


민주세력과 이런 세력 사이에는 정치 문화가 다른 만큼이나 敵對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특히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아 고생한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겠습니다. 저는 여러 정당의 정치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자주 가집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국가의 중요과제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人的자원의 개발을 위해서 여자들에 대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든지, 의료문제·빈민층 대책에 정치가 앞장서야 한다든지 하는 데 있어서는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된 이후 2년 반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 정치의 열기를 냉각시켜볼까 고심(苦心)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집권당 소속이었고 민주화 투쟁에 섰던 사람입니다만 대통령이 되자마자 당적을 버리고 초당적인 입장에서 國政을 관리하겠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헌법에는 대통령이 당적을 포기하라는 규정이 없고 과거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도 우리 야당은 본인을 여당 대하듯 공격해 왔습니다.

 
작년부터 그들도 태도가 좀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를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는 것 같고 내일에는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하는군요. 그들도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공격하는 야당인사들에게도 대화의 문호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와서 정부와 야당의원들이 캐시미르 문제에 관한 소위원회에서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캐시미르와 核개발 문제


―대통령의 부친과 조부께서는 발로크 부족의 長으로서 여러 가지 근대화된 정책과 발상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개명(開明)된 지도자의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나와브 자말 칸 레가리)께서는 소작농들이 부족장에게 바치는 세금을 폐지하신 것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大地主들에게 농업소득세를 부과하려는 조치가 大地主들 출신의 정치세력이 반대하는 바람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前근대적인 기득권 세력과 농업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농업세는 중앙정부의 관할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관할입니다. 연방정부는 총리와 함께 지방정부에 대하여 농업세를 부과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두 개 주, 즉 신드州와 北東지역州에서는 농업세를 부과하고 있으나 농지가 가장 많은 푼잡州에서는 실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농업주(農業主)들은 그 동안 농산물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팔게 유도하는 정책을 따르다가 보니까 결국 우리나라 각계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농업세를 도입하면 그런 보조기능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납세 계층을 넓히고, 담세율을 지금의 13%(GDP기준)에서 20%로 높여서 사회간접시설과 人力개발에 대한 투자 재원으로 확보하려는 정책에는 찬성하는 바입니다. 세금구조도 고쳐서 세금과 소득이 비례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파키스탄 정부는 여러 번 核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었으나 실제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삼가고 있다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인도도 핵무장을 한 상태입니다. 두 인접 국가는 캐시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두 核무장국끼리의 이런 긴장상태는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核전쟁으로 발전할 소지를 제공합니다. 파키스탄 정부의 입장을 설명해 주십시오.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캐시미르 분쟁은 영토분쟁이 아닙니다. 캐시미르 지역에 관한 UN 안보리 결의는 지역住民들의 자율적 결정에 의하여 이 지역이 소속될 나라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인도가 그 결의안을 위반, 무력으로 강점한 데서 일어난 분쟁입니다. 이 지역의 분쟁이 지난 50년간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를 악화시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캐시미르는 150×80㎞의 면적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산악지대도 많습니다. 그런 지역에 인도는 60여 만 명의 잘 훈련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져서 이처럼 병력이 집중된 곳은 세계 역사상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발포하고 연행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인도 주둔군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캐시미르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5만 명 이상의 캐시미르 사람들이 인도 주둔군에 의하여 살해되었습니다. 청장년들은 집에서 연행된 다음날 시체로 발견됩니다. 유고 학살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이 1989년 이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에 의한 해결에 반대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작년에 인도를 방문하여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등 지도층을 만나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왜?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구를 합치면 약 10억을 넘는다. 캐시미르 분쟁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세계 인구의 약 20%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막대한 국방비를 쓰고 있다. 캐시미르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된다면 우리는 국방비를 줄여서 발전소, 건설, 의료비 등에 더 투자를 할 수가 있게 되며 공동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이곳의 긴장이 에스컬레이터 될 소지는 많습니다. 지난 2년간 인도는 核운반 능력을 갖춘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가 사정거리에 들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을 통해서 인도에 제의했습니다. 즉, 미사일을 전면 폐기하는 방법을 놓고 토론해 보자고 한 것이지요. 인도는 중거리 유도탄도 개발중인데 동쪽으로는 한국까지, 서쪽으로는 中東, 남쪽으로는 서남아시아의 맨 아래쪽까지 사정권 안에 든다고 합니다. 파키스탄은 평화적인 核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核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보상의 위협을 받는다면 우리는 즉시 核무기에 의존하는 방위능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인도가 核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면 우리도 조건 없이 하겠다고. 우리는 主權국가로서의 생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귀하도 잘 아시겠지만 1971년에 인도는 東파키스탄으로 쳐들어 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시켜 방글라데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큰 덩치에 의하여 협박을 당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롭게 번영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권국가의 권리로서 평화적인 核개발을 계속 추구해가면서 인도에 대하여는 이 지역의 평화를 항구화하기 위한 대화를 중단 없이 시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에 북한의 核무기 개발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북한이 파키스탄의 核연구 센터에 많은 기술자를 보내 연수를 시켰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파키스탄은 북한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가끔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사긴 하지만 귀하가 말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남한과 북한이 자율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가 연결되어야』


―파키스탄은 中央아시아의 관문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 급속도로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과 관련하여 파키스탄은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계획입니까.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 아주 역동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곳입니다. 중앙아시아는 기름, 천연가스,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이지만 이 지역은 인도양으로 연결되어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파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식으로 수송로가 뚫려야 합니다. 가운데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이 해소된다면 인도양과 중앙아시아의 그런 연결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연결되는 가스파이프라인과 시베리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석유 수송 파이프라인도 구상되고 있습니다.


터키, 이란,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5개국),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문화권으로서 3억의 인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지역 국가는 ECO(Economic Cooperation Organization)를 조직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 아니라 걸프 지역과도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앞으로 이 지역의 공동발전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WEF(World Economic Forum)가 내년에 파키스탄에서 중앙아시아 및 南아시아 합동 회의를 갖기로 한 것도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80∼90년대에 환태평양 지역이 발전하듯이 2000년대에는 중앙아시아가 거대한 잠재력을 활용하여 번영의 길에 접어들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