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체험한 6·25 남침 李龍萬 전 재무부 장관의 手記 이용만 前 장관
나는 치밀한 南侵 준비 현장에 동원되었었다.
나는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에 처음 들어오는 신입생들 상당수가 6·25전쟁은 「북침」으로 발발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啞然失色(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자녀들에게 역사를 잘못 가르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어쩌면 사선을 넘어 최근 北韓을 탈출해온 사람들이 북한에서 배우고 들은 내용과 그렇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탈북자들에게 나의 체험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당신들은 6.25 전쟁을 「국방군들이 쳐올라와서 영용무쌍한 조선인민군의 정의의 반격으로 남반부를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요?” 교육 때마다 물어보면 모두 「그렇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들이 어떻게 탈북자들과 인식이 같게 되었을까?
천지가 경탄할 일이므로 뒤늦게나마 나의 체험을 통해서나마 證言을 하고자 한다.
<동원된 사례 몇가지> 강원도 북한 중부전선의 남단에 위치한 平康 고급중학교 학생 때의 일이다.
- 수업은 전폐하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탱크와 군용차량이 화차에서 바로 내릴 수 있도록 평강역의 플랫폼을 높이 쌓아 철로 수준까지 올리도록 들 것으로 흙을 나르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 1948년 여름에는 「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남침용 도로신설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가구 1인씩 무조건 동원되는 것이므로 연로하신 아버님이 동원되어 일하게 되었고, 나는 방학 때 아버님과 교대해서 공사장에서 15일간씩 일했다. 탱크 두 대가 교차 할 수 있는 넓은 자갈을 깔은 도로였다. 지게, 삽 등 완전한 수작업이며, 헛간 같은데서 자면서 먹을 것은 각자 지참 했으며, 모든 노력동원은 당연히 무급이었다.
- 1948년부터 내내 평강군 현내면의 비행장(북한 최남단 비행장)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된 平康郡의 각 지역주민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매일 15~16명씩 일주일씩 교대로 숙식하며 비행장 신설공사에 투입되었다. 각자 밥을 해먹도록 되었지만 옥수수, 좁쌀 등 가져온 식량에 김치는 우리집 것을 먹었다.
- 1949年 9月 김화고급중학교로 전학 온 후의 일이다. 전쟁 임박해서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와 군 트럭이 매일 밤새도록 김화시내의 우리집 앞을 지나 남쪽으로 전진 배치하는 모습을 보았다. 낮에는 조용하다 어두워지면 탱크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또 한편, 中部전선을 가로지르는 철원~창도간의 전차 통학생의 등교도 약 1주일간은 일체 불가능했다. 무장한 군인과 군수물자 수송에 모든 화차가 동원되었으므로 학생이나 일반 통행은 금지되었고 학생은 학교 안와도 괜찮았다.
人民軍 장교로 끌려갈 뻔했다.
6·25 전쟁이 나고 3日후 「영용무쌍한 인민군은 남반부 서울을 해방시키고...」 운운하는 방송을 해대고 있을 무렵 고등학교 2학년 全校生은 군에 끌어가려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아버님은 나에게 「귀가 안들린다」「눈이 안보인다」 해라 하셨다. 어디선지 정보를 듣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안보인다」「안들린다」 해도 신체검사 결과는 합격이라 했다. 어머니는 눈물 흘리면서 팬티 속에 「돈 주머니」를 만들고 계셨고, 아버지와 큰아버님은 「승만이가 죽게 되었구나」 탄식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한에 친척 있는 사람은 不合格시킨다더라. 본명은 「승만」인데 매일같이 「이승만, 김 구 타도」 소리 등기 싫어서 임시로 용만이로 바꾼 것이다.
아버님은 「남한에 친척있다」 해라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종적인 개인면접 시간에 정치보위부 장교가 「남한에 친척 있느냐」 물었다. 나는 남한의 6寸형과 북한의 兄과 삼촌 이름을 많이 대며 남한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호적등본을 들고 있었으므로 이름의 행열이 맞는 것을 보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면담자가 사방을 둘러보고 무엇인가 판결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알길 없었고, 밤새 한 잠도 못자고 아침에 학교가 보니 나와 바로 내 앞에 면접받은 김정원 군만이 불합격이 되었다.
뒤에 들은 소식은 그 때 끌려간 학생들은 장교로 임관되어 거의 다 죽었다 한다. 김정원군은 그 후 인민군 탱크운전병으로 끌려갔다가 도주해 와서 나와 함께 월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령으로 예편해서 교통부 기획관리실장까지 했다.
나는 신체검사불합격 소식을 들은 즉시 200余里 떨어진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추가령의 목장으로 피신해 갔다. 그 목장에서 수의사로 형이 형수와 살고 있었다.
인민군 장교로부터 남한에 「고려대학교」 있는 것 처음 알았음
추가령 목장으로 열세살난 어린 동생이 아버님의 지시를 받고 김화에서 평강에 와서 하룻밤 자고 세포면 추가령까지 이틀간을 걸어서 나를 찾으러 왔다. 군사증(제2국민병등록증)을 받지 않으면 10년 징역에 벌금 물게 되어 있으니 즉시 받으러 오라는 아버님 말씀을 전하려고 어린 동생이 200여리를 걸어왔다. 귀가길에 신작로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는데 인민군 짚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다가 멈춰섰다. 「나를 잡으러 온 모양이다」고 가슴이 덜컥했는데 그 장교는 자기도 쉬었다 간다 했다. 그 장교는 서울을 해방시키고 오는 길인데 서울에서 고려대학생을 붙들고 「동무 독보회가 무엇인지 아오?」 물었더니 「대학생이 독보회도 모르더라」 나는 아마도 서울에 「고려대학」이 있는가 보다고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서울에 어떤 대학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알길도 없었다. 독보회는 점심시간 또는 휴식시간에 모두 모아놓고 「노동신문」이나 「김일성 연설문」 등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말하는데 남한에 그런제도가 없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도대는 공비토벌의 길에
9.28 서울수복에 이어 北韓에 국군이 들어었고 나도 공비토벌 한다고 金化의 北쪽인 金城 方面에 약 30名의 학도대원들이 갔다. 그날도 치안대(경찰서내에 설치)에서 자고 떠나기 직전 접에 들려서 어머님께 金城쪽으로 공비토벌가는데 같이 간다고 인사드렸다. 어머님은 집에 있는 콩고물의 찰떡을 급히 구워서 먹고 가라 하셨다. 아버님도 그렇지만 어머님은 16年의 斷産끝에 얻은 아들이라고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부엌에 서서 몇 개 먹고 떠났는데 그것이 어머님이 주시는 마지막 음식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날 金城에서 일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서 학도대 본부인 김화시내 경찰서로 귀대 도중이었다.
김화시내는 이미 인민군 패잔병 손에 점령되고
市內로 학도대가 3열종대로 행진해 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시내가 조용했고, 저녁때인데 집집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큰소리로 군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더욱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부를 때 난데없이 우리 숙소인 치안대 본부쪽에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나왔다.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면서 다같이 「학도대!」「학도대!」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앞서보낸 척후병 2명은 소식이 없고 기관총 소리가 더욱 요란했다.날은 어둑어둑해졌고, 「우리를 인민군으로 아는 모양이니 생창리 다리 너머 가서 자고 내일 시내로 들어가자」 하며 철수했다.
그 지점이 나의 집과는 불과 300m 이내로 지척이었는데 그것이 부모님 계신 곳을 먼 발치에서 바라본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각을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척후병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金 策 부수상이 이끄는 인민군 패잔병이 市內를 어제 완전 점령했고 시내에서는「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하는 인민군 노래를 부르며 트럭이 질주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인민군 패잔병이 이미 金化시내를 점령하고 있었고, 후문에 의하면 척후병으로 나간 김형기 군 등 2명은 체포되어 즉시 총살당했다고 한다.
우리 학도대 일행은 남한에서 올라온 방위군 소위의 지휘로 山 능선을 타고 남한으로 향했다.
인민군에 포위되어 풍비박산(風飛雹散) 마을이름도 기억 안나지만 한곳에서는 한밤중에 비상소집해서 나가보니 山 속의 民家에 人民軍이 들어있으니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공격하기로 하고 山 속에서 포위하고 있었는데 새벽 동틀무렵 잠복중인 학도대 쪽으로 예광탄이 2~3발 날아오더니 집중 사격을 받았다. 거꾸로 우리가 포위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소대는 풍비박산이 되었고, 도주하는 바람에 박격포의 포신과 포탄 갖은 사람이 각기 다른 方向으로 떨어져서 박격포는 땅에 묻고 남쪽으로 산능선을 따라 걸었다.
때로는 점심을 얻어먹으러 들어간 집에 조금전에 산속에 있는 인민군이 300명분을 주문해 놓았다 하여 서둘러 그 마을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피난민수용소 생활 45일간 이틀 후에 도착한 곳이 경기도 포천여자중학교 교사였다. 김화에서 피난온 피난민수용소가 되어 있었으며 한 교실에 200余名이 먹고 자고 하였다. 45日間의 피난민수용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하루 주먹밥 3개인데, 주먹밥 크기는 주먹의 반쯤 큰 것을 소금물로 쥐었으므로 찝찔했다. 물도 구해먹기 힘들었으므로 화장실 갈 일도 별로 없었다. 때로는 15日間 용변을 보지 못했다. 먹은 게 없으므로..
그런 가운데 학도대는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학교 운동장에서 제식 훈련을 하였다. 내가 대장이 되어 「차렷!」「앞으로 갓」「번호붙여 갓」「뒤로돌아이 갓,도라이 갓, 도라이 갓」 세 번만 하면 대원들이 비실비실 쓰러졌다. 먹은 것 없고 기운이 없어서 비실비실 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강변까지 뛰어가서 갯물에 세수하고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40余日이 지난 후 아침에 훈련한 학생과 방안에서 쉬고 있었던 학생과 비교해 보면 혈색이 완전히 달랐다. 한쪽은 얼굴은 말랐으나 혈색이 좋았고, 한쪽은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中共軍 참전 소식으로 서울로
그 때 中共軍의 대거 참전소식으로 우리들은 「잠시 서울에 가야하며, 서울에 잠시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피난민 총 인솔 책임자인 신기초 대장의 설명을 듣고, 모두가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걸어오는 도중 미군들의 도로 확장과 포장공사 하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게 느꼈다. 이북에서의 도로공사는 수백명이 지게와 삽, 괭이, 들것으로 하는데 미군 서너명이 트럭으로 자갈을 쭉 뿌리고 불도자, 땅을 다지는 롤러차로 덜덜덜 하면 다 끝내는게 아닌가? 서울에서 내가 배치된 곳은 청양리사범학교 자리였다. 교문을 들어설 때 보니 「주번사관」「주번사령」같은 완장을 두른 군인들이 눈에 띠었다.
第二國民兵과 함께 피난길 약 1주일이 지나서 때마침 내가 불침번을 서고 있을 때 「남쪽으로 먼저 갈 사람 3명만 차출하라」는 명을 받아 나와 앞뒤 불침번 3명이 다음날 아침 선발되어 간 곳이 창경원 옆의 「비원」 숲속이었다. 서울 각지에서 모여든 弟二國民兵 수천명이 모인 것 같았다. 학생들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이 미제군복도 입고 건장했으며, 배낭들을 지고 있었다. 방위군 장교가 나와서 「이중에 구령 붙일 수 있는자 나오라」 하여 나갔더니 이 대열을 움직여보라 하여 학도대 훈련시킨 경험으로 「차렷!」「우향 웃」「앞으로 갓」「뒤로돌아 갓」 몇 번 했더니 18部隊 3大隊 9中隊 1소대장을 하라했다. 그것이 1950年 12月 17日부터 서울에서 떠나는데 우리가 出發하는 날이 18日 이므로 18부대라 했다.
명에 따라 모든 대원들의 제2국민병 등록증을 회수하고 보니까 이북에서 온 나나, 서울사람이나 신분증 없기는 똑같았다.
비원을 떠나 제2국민병의 피난대열에 참여했으며 경기도 양주에서 첫밤을 지냈다. 겨울 날씨에 북한강변의 찬바람은 매서웠다.
민가에서 저녁으로 주먹밥을 먹고 양주 방위군 사령부를 갔다. 장작불 난로를 피고 있던 방위군 장교가 「너 몇 살이냐?」「열일곱입니다」「내동생과 같구나」「배고프지」「네」「네방에 몇 명이냐?」「19명인데요」「19개 가져가!」 우리 먹은 밥의 3배만큼 큰 주먹밥을 얻어다 숙소식구들에게 나눠주니 모두가 즐거워했다.
양평을 떠나 여주, 장호원, 문경세재, 상주를 거쳐 대구밑의 경산까지 매일 100里 내지 120里씩 13日間을 걸었다. 매일 걸으니 발이 퉁퉁 부었고, 잠잘 때 발을 높이 고이고 자면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수안보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을 때는 폭설이 펑펑 쏟아졌다. 山 중턱에서 미군들이 도로확장 공사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았다. 암반을 뚫는 소리 불도자의 덜커덩 소리가 요란했으며, 山에서 내리막에서는 눈쌓인 언덕을 즐거운 기분으로 미끄럼 타며 내려왔다.
걷는 길에 동태국과 곶감 주신 아저씨들
걷는 도중 도로양변에 많은 장사꾼이 있었고 때로는 땅콩을 큰 가마니에 한가득씩 파는 곳을 지날 때 「맛좀봅시다」하며 집어가는 사람을 보고 나도 「맛좀봅시다」하며 몇 번 주머니에 집어 넣었더니 주머니가 두둑하였었다. 문경새재의 숙소에서 두사람이 따로나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동태를 사다 밥해 먹으면서 나를 끼워준 것이다. 그때 고마운 마음 표할길 없었다. 그 때 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주머니 살 팔아다 밥좀 해주세요」하는 소리 듣고 쌀을 사와야지 팔아오라는게 무슨 뜻인가 하였다. 또 한번은 상주를 지날 때 연세가 드신 한분이 「곶감」을 한접 사서 나를 한꼬치(10개) 주며 「이것 먹으면 배가 든든하니 먹어둬라」 하셨다.
소대장이라 하며 젋은 학생이 밥구하러 뛰어다니고, 심부름 잘 해주고 하는 것이 보기가 기특해서 생각해 주신 것 같이 고마웠다.
담요와 따뜻한 콩나물국 준 육군훈련소
경산까지는 잘 왔는데 이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만 18세부터 35세 미만은 신체검사 받고 그 외에는 마산까지 걸어가야 된다 하였다. 나는 신체검사도 안받고 신체검사 끝나고 서 잇는 줄 맨 앞에 섰다. 나는 김화에서 포천, 포천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산까지 왔는데 여기서 또 마산까지 걸어갈 생각이 아득하였기 때문이다. 키도 크고 해서 신체검사 마치고 서있는 사람들 맨 앞에 섰다. 「이 줄은 뭐야?」 군인이 물었다.
나는 「갑종합격입니다」하였더니 그래 「앞으로 갓」 해서 겨울 추운 밤중에 경산에서 대구까지 걸어와서 대구 육군 훈련소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날이 1950년 12월 30일이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담요도 지급받았다. 군번도 받았다. 0180826이었다. 그간 입고 있던 옷은 10월부터 입던 고등학교 교복에 어머님이 양털실로 떠주신 上下 양털 셔츠였다. 아무리 양털 셔츠라도 근 3개월 세탁도 안하고, 이, 벼룩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해 미군들이 밀가루 같은 DDT 약을 콤프렛샤로 머리와 옷 속에 팍팍 뿌려 댔으므로 푸대처럼 뻣뻣했었다.
군에서 주는 솜누비옷은 따뜻했고, 콩나물국에 안남미밥은 뜻뜻하였고 살 것만 같았다. 피난민 수용소의 한방에 200여명씩 자는 숙소나 주먹밥에 비하면 낙원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밤에 도망병이 생기지 않도록 날카롭게 신경쓰는 것 같았다. 화장실 갈 때는 누비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엷은 옷만으로는 12月 추위에 도망 못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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