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어느 사무라이의 하라키리(割腹), 그리고 일본 武士道에 대한 名文

淸山에 2014. 10. 18. 11:08


 




어느 사무라이의 하라키리(割腹), 그리고 일본 武士道에 대한 名文

무사도의 아버지는 禪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趙甲濟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가 안된다. 약 100만 명. 일본인들은 거의 전부가 神道(신도)를 믿는데 이를 종교로 볼 수 있을지는 쟁점이다. 샤머니즘과 불교가 혼합된 인상을 수는 神道는 수많은 神社(신사)를 통해서 일본인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었다.
   武士道(무사도)는 종교는 아니나 종교적 心性(심성)을 깔고 있다. 일본인이 물건을 만들거나 직장에 다닐 때 보여주는 집중력과 성실함, 여기서 나오는 완벽함의 추구엔 종교적 心性이 보인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것, 초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을 갈구하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求道(구도)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경제에 투입되면 名品(명품)을 만든다. 일본엔 求道者的 자세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수년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일본의 유명한 칼을 만드는 匠人(장인)이 소개되었다. 마사무네(正宗) 집안이 700년째 代를 이어 名劍(명검)을 만들고 있었다. 그 匠人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칼을 만들고 나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칼에 내 이름이 새겨지고 내 정성이 들어갑니다. 1000년 뒤에도 저는 이 칼을 통해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칼에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기능공이 철학자처럼 말했다. 匠人이기에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상품을 만들 때도 영혼을 쏟아붓듯이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그러니 불량률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다. 한 주제를 붙들고 거기에 魂(혼)을 쏟아붓는 정신,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본질이다. 이것이 그들의 살아 가는 방식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무식한 싸움꾼이 아니라 글을 아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뒤집어보면 '사는 것'이다. 항상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의 모든 분야에 파고들어 있다.
  
   미국의 건국정신, 서양의 기독교 정신(또는 신사도나 기사도), 조선조의 선비정신, 신라의 화랑도 정신 같은 것들이 살아 있어야 그런 사회는 타락하지 않는다.
  
   일본 北海道의 노보리베츠 온천마을 근방엔 에토 시대의 취락을 再現(재현)한 민속촌이 있다. 登別伊達時代村(노보리베츠 다데 지다이무라)이라고 한다. 그 안에 사무라이館이 있고 유키 료이치라는 사람이 썼다는 '武士道'(Spirit of Samurai)라는 글이 걸려 있다.
  
   <인간의 투쟁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거친 투쟁본능에 제어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武士道라고 한다. 이는 사회를 통제하고 또한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투쟁본능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어떤 神聖(신성)한 것의 존재를 일본인에게 깨우쳤다. 봉건제도는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해준 武士道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體現(체현)한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武士道를 일본인의 독특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출생의 비밀에 있다. 무사도의 아버지는 禪(선)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禪은 불교에 있어서 명상이며, 深思默考(심사묵고)에 의해 知의 영역을 넘어서서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이며, 유교는 祖先(조선)숭배신앙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따라서 상호모순된 개념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생긴 武士道를 體現한 인간, 즉 사무라이는 이 둘의 조합의 비율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사람의 人生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서두르지 말고 참는 것이 無事長久(무사장구)의 기본이다'라고 말한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이고, 강함을 추구하면서 결투에 생애를 걸고 상대를 죽여간 미야모토 무사시도 사무라이이다.
  
   이 두 사람간에는 공통된 삶의 방식이 없어 對局(대국)에 위치하는 듯하다.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艱難辛苦(간난신고)의 한가운데서 각각 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미드포드(Midford)란 사람이 쓴 「옛날 일본 이야기」(Tales of Old Japan)라는 책에는 그가 목격한 일본 무사의 할복(切腹)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인용한다. 


   <우리들(7인의 외국 대표자)은 일본 檢使役(검사역)의 안내를 받아 儀式이 집행되는 절의 본당에 들어갔다. 그것은 정말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본당은 지붕이 높고 검은 기둥으로 떠받쳐지고 있었다. 천장에는 불교사원 특유의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燈籠(등롱: 불을 켠 초나 호롱을 담아 내어다 걸 수 있도록 한 기구)과 장식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높은 佛壇(불단) 앞에는, 아름답고 흰 다다미가 깔린 마루가 놓여져 있었는데 땅바닥으로부터 3~4인치 높았고, 여기에 붉은 융단이 덮여져 있었다. 불안과 긴장감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키 겐자부로가 삼베로 만든 예복을 입고서 당당하게 본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이는 32세, 기품 있는 대장부였다. 한 사람의 가이샤쿠(介錯人)와 세 명의 공무원이 같이 들어왔다.
 
   가이샤쿠는 영어의 사형집행인(Executioner)과는 같은 의미가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가이샤쿠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의 역할로서 많은 경우 사형을 선고당한 사람의 일족이거나 친구로서 兩者(양자) 관계는 사형수와 집행인이라기보다는 주연과 조역의 관계이다.
  
   이 경우, 가이샤쿠는 다키 겐자부로의 門第(문제)이며 검도의 達人(달인)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뽑혀나온 것이었다. 다키 게자부로는 가이샤쿠를 왼쪽으로 데리고 조용히 일본의 검사역이 앉은 데로 나아가 인사를 한 다음 외국인 검사역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더욱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곧 다키는 할복할 자리에 올라 조용히 威儀(위의)를 갖추고 본당의 佛壇 앞에 두 번 경례하고나서 佛壇을 등 뒤로 하여 융단 위에 단정하게 앉고 가이샤쿠는 그의 왼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곧 세 공무원 중 한 사람이 흰 종이로 싼 短刀(단도:약 25cm)를 사형수에게 내밀었다. 그는 공손히 그 칼을 받아 머리 위로 올리더니 자기 앞에 놓았다.
 
   다키는 거듭 공손하게 절을 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감정이 들어 있었으나 얼굴이나 태도에서는 잘 감지되지 않았다. 


   '저는 혼자서 무분별하게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고베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발포명령을 내렸는데 그가 도망가려는 것을 보고 재차 발포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죄를 지고서 할복합니다. 검사역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번 또 인사를 한 그는 웃옷을 허리띠까지 벗어 상반신을 드러낸 뒤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윗옷의 소매를 무릎 밑에 괴었다. 신분이 높은 일본 무사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죽어야 명예롭다는 관습이 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앞에 놓인 단도를 움켜쥐었다. 그는 생각을 집중시켜서 그 칼을 바라보았는데 애정어린 눈초리였다. 그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추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단도를 왼쪽 배에 깊이 찔러 넣고 손잡이를 천천히 오른쪽 복부로 당기더니 그 칼을 약간 위로 꺾었다. 


   이 끔직하고도 고통스러운 동작을 계속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단도를 뺐을 때, 그리하여 앞으로 몸을 뻗으면서 목을 내밀더니 비로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때까지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할복장면을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던 가이샤쿠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을 향해서 칼을 치켜드는가 하는데 어느 새 섬광이 번득이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꽝! 그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그의 머리였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움직임이 없는 고기덩어리로부터 쿨렁쿨렁 솟구치는 소름끼치는 피소리가 침묵을 깨고 있었다. 가이샤쿠는 깊게 절하더니 미리 준비한 흰 종이로 자신의 피묻은 칼을 닦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피 묻은 단도는 집행의 증거물로서 엄숙하게 바깥으로 실려 나갔다.
 
   그 후 일본측 공무원 두 사람이 외국인들 앞에 오더니 사형집행이 끝났으니 확인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儀式은 이것으로 끝나고 우리는 그 절을 나왔다.>
 
   이 글은 명치유신 직후 고베에 주재했던 외국인이 쓴 것으로서 할복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세밀히 묘사한 것이다. 이 글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국제
연맹 사무차장을 지낸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통 인사)가 영어로 쓴 '武士道'란 책에 실려 있다. 


   일본의 무사들은 자신의 과오를 책임질 때 이런 할복으로 대신했다. 죽을 때까지도 위엄과 예절을 지키려고 했던 일본 무사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무사도의 핵심은 ' 어떻게 죽는가'란 주제에 대한 탐구였다고 한다.
 
   죽음의 美學(미학)이란 시각으로 할복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한 사회의 지도층이 어떤 자세로써 공무를 수행해야 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면도 있다. 지금의 일본인들 중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이런 할복을 감행한 사람들의 정신적 후예란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명예, 철저함,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할복의 전통을 가진 지도층, 그런 윤리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오늘의 일본을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계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약하게 보이지만 말이다.





 


일본, 할복자살과 무사도

 

할복(割腹)이란 말 그대로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하며 일본말로는 갓뿌쿠(割腹) 또는 토후쿠(屠腹)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하라키리(harakiri)로 부르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올라있는 일본 특유의 습속이다. 무사도《武士道, Bushido, 1900년》라는 책을 영어로 써서 일약 일본인의 용감성을 전 세계에 알린 니토베이나조의 말을 빌리면, ‘고대로부터 복부에는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들어있다고 믿었으며 용감한 무사가 배를 갈라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무사도의 완성’이라고 한다.

일본역사상 처음 할복을 자행한 사람은 헤이안시대의 무사인 미나모토노 다메토모(1170년)로 이후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1185~1333)에 정착되어 근세까지 무사들 사이에 행해져 오던 자살방법으로

 

주군(主君)을 따라 죽는 오이바라(追腹),

직무상 책임이나 의리 때문에 죽는 츠메바라(詰腹),

적군에 체포되었을 때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죽는 할복 등

할복의 동기도 여러가지다.

배를 가르는 방법은 일자형으로 가르는 일자자르기(一文字腹)、

명치끝에서 배꼽 밑까지 십자형으로 자르는 십자자르기 (十文字腹)가 있는데

십자 자르기가 용감한 것으로 여겨졌다.
<font color="#1c4827"> </font>

그러나 이것은 무사도가 살아 있던 서슬 퍼렇던 시대의 이야기이고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8)에 오면 할복자살도 형식화되어 할복 뒤에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것을 가엾이 여겨 곁에서 죽음을 도와주는 사람이 등장했으니 가이샤쿠(介錯,かいしゃく)가 그들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에도시대 중기에는 할복용 칼이 아니라 부채를 놔두고 부채를 손에 대려는 순간 가이샤쿠가 목을 베주는 방법이 주로 쓰였는데 이를 부채가르기(扇子腹)라고 한다. 이쯤 되면 할복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용감무쌍한 무사가 죽음을 벌벌 떨어 가이샤쿠가 죽음을 거든다면 할복도 무사도도 한물간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할복은 보통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지만 중세 이후에는 처형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네가 네 죄를 인정하여 너 스스로 죽음으로 보이라.’는 것으로 우리네의 사약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할복자살을 시키는 것은 참수(斬首)보다는 명예로운 것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풍신수길은 조카 히데츠구(豊臣秀次)와 자신의 다도선생인 센리큐(千利休)를 죽게 할 때 이 방법을 썼으며 지체가 높거나 상급무사한테만 특별히 허용하는 처형방법이다. 특히 1663년까지 모시던 주군이 죽으면 따라 죽는 일이 유행하여 정부는 이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전후(戰後)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리에게는 소설<금각사>로 잘 알려진 미시마유키오의 할복자살은 사무라이들의 전유물이던 할복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진 한 예이다.가마쿠라부터 명치유신까지 무사시대 ‘70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사무라이 시대가 끝났지만 ‘군주에게는 충성을, 부모에게는 효도를,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하고, 적에게는 연민을 느끼며, 사리사욕을 금하고, 사물에는 공정성을 기하고, 부귀보다도 명예를 중시하라.’라는 <무사도> 정신과 <할복문화>의 잔영은 남아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출처;blog.naver.com/nsunday/150087420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