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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64돌,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한국인들

淸山에 2014. 9. 14. 18:03


 





인천상륙작전 64돌,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한국인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北進통일을 하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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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변호인 朴正熙 전기(全13권) 趙甲濟의 現代史이야기(全14권)
 
   내일은 64년 전인 1950년 9월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날이다. 미군과 한국군을 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맥아더는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背後(배후)를 차단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은 9월28일, 38선을 돌파하여 北進(북진)을 시작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神話(신화)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6.25 전쟁 하면 우선 맥아더를 연상한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北進통일을 하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그들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후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을 가졌고, 트루먼 대통령이 사방에서 오는 한국포기 압력을 견뎌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미군 장성들 중 가장 과대평가된 인물이 맥아더인데, 한국인들은 과대평가된 그를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맥아더는 한국을 구한 면도 있지만 한국을 絶體絶命(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간 책임도 있다. 맥아더의 ‘성공 뒤 실수’를 분석해보면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오만은 반드시 代價(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이 첫째이다.
  
  
   1. 맥아더는 정보판단에서 실패했다. 그는 유엔군이 北進해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誤判(오판)했다. 중공군이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만주로 이동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원이 중공군과 섞여서 같이 걷기도 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15일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여도 사상최대의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는 찰스 윌로비였다. 이 사람은 맥아더가 이미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 즉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
  
   2. 맥아더는 정직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北進하는 국군을 쳤다. 수개 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와 산 속에 布陣(포진)하고 있었는데도 맥아더 사령부는 그 10분의 1 정도로 추정했다. 맥아더는 명백한 사실이 등장했는데도 자신의 誤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北進을 중단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야 했음에도 그는 한 달 뒤인 11월 하순 또다시 무모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3.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11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유엔군을 총력으로 기습했다. 맥아더는 뒤늦게 현실을 인정한다. 맥아더의 엉터리 정보판단과 부정직한 태도로 해서 수많은 유엔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의 기습을 당한 유엔군은 싸우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서울까지 총퇴각 명령을 내린다.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 번 기습에 놀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한다.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돌변한다.
  
   4. 변명만 했다. 유엔군이 평양~원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南進을 저지했더라면 38선까지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접촉을 피하게 하곤 총퇴각을 명령하여, 서울을 싸우지도 않고 내어준 뒤 수원 이남까지 물러났다.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였다. 맥아더는 이 사이 변명만 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誤判했던 점에 대해선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고, 유엔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만주 폭격을 트루먼 정부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을 향하여 증원군을 보내주지 못하겠으면 한국에서 철수시켜달라고 협박했다. 대만 군대를 중국본토에 상륙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당시 대만 군대는 軍律(군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엉터리들이었다. 이들이 중국본토에 상륙하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맥아더는 중국을 공격하자는 제안도 했다. 한국전선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중공군에 땅을 넘겨주고 있으면서 중국과 정면대결하자고 한 것이다.
  
   5. 맥아더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작전 지휘를 분할했다. 서부전선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동부전선은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맡았다. 맥아더는 알몬드를 편애했다. 통합작전이 불가능해졌다. 韓美연합사가 해체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국군과 미군의 통합작전이 어렵게 될 것이다.
  
   6. 맥아더의 속셈은 중국을 수복하여 '아시아의 시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기회로 삼아 전선을 중국 本土로 확대시키려 했다. 트루먼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런 擴戰(확전)을 뒷받침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맥아더는 극동만 보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자유세계 전체를 지켜야 했다. 그때 소련은 原爆(원폭)실험에 성공한 상태였다. 미국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을 상대로 全面戰(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힘도 국가적 의지도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친다면 소련이 중국 편에서 개입할 것이고, 핵무기를 쓰는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았다.
   트루먼이 擴戰을 결심했더라면 핵을 쓰는 3차 대전이 일어났든지 월남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美中 전쟁이 중국 본토에서 계속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미국이 이기지 못했을 것이며, 미군철수 과정에서 한반도는 포기되었을 것이다. 트루먼이 승자도 敗者(패자)도 없는 제한전을 통하여 한국에서 확보한 것은 남한과 평화였다. 한국과 미국은 휴전 뒤 韓美동맹을 구축, 이 평화의 시기를 善用(선용)하여 북한군의 재남침을 저지하고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불렀다.
  
   7.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한 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는 반격작전을 펴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 올렸다.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반격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전선으로 날아와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반격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하여 부하의 功(공)을 가로채려 했다.
  
   8. 맥아더는 文民우위의 전통을 무시했다. 그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대통령의 발언중지 명령도 무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抗命(항명)한 그를 해임한 것은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늦었다는 평을 받았다.
  
   9. 웅변 뒤의 몰락: 맥아더는 귀국하여 영웅 대우를 받고 미 의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이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공세였다. 그 직후 열린 美 의회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민주당 의원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는 거짓말하는 장군, 무책임한 장군, 세계정세를 아주 좁게 보는 장군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피력했던 핵심적인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란 것이 폭로되었다. 맥아더는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청문회 이후 여론의 지지는 사라졌다. 1952년 선거에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맥아더의 副官(부관)이었다. 그는 맥아더보다 훨씬 원만하고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10. 맥아더의 정보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毛澤東은 당초 한반도로 出兵하는 중공군 사령관에 林彪(임표)를 임명하려 했다. 林彪는 稱病(칭병)하곤 이 제의를 거절했다. 모택동은 彭德懷(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수개월 간 사령관이 林彪라고 오판했다. 자신이 상대하는 敵將(적장)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운 것이다. 요사이 韓國戰史를 쓰는 미국인들 중엔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 직후에 죽었더라면 영원한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랬더라면 한국은 통일되었거나 휴전선이 평양~원산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11. 맥아더의 실패는 거의가 명예를 추구하는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측근들을 ‘예스맨’으로 채웠다. 그들은 맥아더가 싫어하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황제나 다름없는 맥아더를 둘러싸고 안락한 도쿄에 앉아서 한반도 지도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嚴冬雪寒(엄동설한)의 한국전선은 맥아더와 그 측근들에겐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하루도 한국에서 잔 적이 없다. 맥아더는 언론 타기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쇼맨십은 그의 무덤이 되었다.
  
   12. 워싱턴의 미 국방부, 合參(합참)도 맥아더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 미국 군부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들은 거의가 맥아더의 훨씬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기가 치솟은 맥아더를 견제하려 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을 펴도 이를 방치했다.
  
   13.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맥아더의 그늘에 가려서 두 사람이 과소평가 받는다. 트루먼과 리지웨이이다.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중공군 개입 후에도 한국 포기 압력을 거부했던 트루먼이야말로 정말로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트루먼의 제대로 된 동상, 거리이름, 공원이름도 없다. 많은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이순신, 트루먼은 원균이다. 맥아더를 한국전선으로 보낸 이는 파병을 먼저 결단한 트루먼이었다는 사실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