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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금관공동체 - 한반도 최초 출토 금동관은 백제 것?

淸山에 2014. 2. 13. 03:08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금관공동체 - 한반도 최초 출토 금동관은 백제 것?

 

 

백제-마한 시대 추정 금동모는 무려 일곱 점 출토

전강서금관과 나주 신촌리 금동관 세움장식 비교

 

 

신라와 가야의 금관을 살펴봤으니 이번에는 백제의 금관 금동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서두에서 밝혔듯이 백제 금관은 아직 완전품이 나온 것이 없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에 붙였던 금으로 만든 꾸미개(관식·冠飾)가 각 한 쌍씩 나왔다. 따라서 금동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과 왕비 모자에 붙이는 금제 꾸미개. 이 꾸미개의 모양과 아래에 있는 전강서금관의 세움장식 모양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문화재청)

 

 

전강서 금관

 

 

 

 

전강서금관의 일곱 개 세움장식을 각각 촬영한 사진. 이것과 무령왕릉 꾸미개는 비슷한가? 전강서금관의 세움장식이 신라나 가야의 금관 금동관에 있는 세움장식과는 비슷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356쪽 촬영)

 

 

무령왕릉의 꾸미개는 일렁이는 ‘불꽃 무늬’ 모양을 하고 있다. 풍성한 나무 모양 같기도 한다. 이것과 전강서금관의 세움장식을 비교해보자(위 사진 참조). 전강서금관은 신라나 가야의 금관 금동관과는 전혀 다른 세움장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 것이 분명한 무령왕릉에서 나온 꾸미개와는 비슷한 면이 있다. 왜 그럴까.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라고 하는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에서 기자가 몇 차례 주장한대로 강서가 있는 평남 지역은 초기 백제의 강역이었을 수 있기 때문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더 많은 유물을 발굴해 비교 연구를 해봐야 사실에 가까운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관-금동관 연구는 아직도 미개척 분야이다.

 
백제가 말기에 차지했던 충청과 호남 지역은 과거 마한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백제 영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는 마한의 것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와 마한은 전쟁을 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자연스럽게 백제가 마한영역으로 들어가 지배를 한 것 같다. 그러니 둘의 구분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한 지역에서 적잖은 금동관모가 출토되었다.
 

정식 발굴로는 가장 먼저 출토된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의 금동관

 

 

백제가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는 지역에서 나온 금동제 모자(금동관모, 금동모)는 현재까지 일곱 점이다. 금동관이라고 하지 않고 금동제 모자라고 하는 것은 절풍 형식의 관모가 일곱게 나왔기 때문이다. 나주 신촌리,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금동모 2점), 익산 입점리, 서산 부장리, 고흥 길두리 고분의 금동모가 그것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의 신촌리 9호분 을(乙에)관에서 출토된 금동관-금동모이다. 나주 신촌리는 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금동관과 금동모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은 국보 295호로 지정돼 광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917년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모. 금동관은 외관이고 상투를 잡아주었을 금동모는 내관(속관)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백제나 마한의 금동모는 여러 개 출토됐지만 금동관으로 출토된 것은 현재 이것뿐이다. 이 금동관의 세움장식과 무령왕릉 꾸미개, 전강서금관의 세움장식은 유사성이 있다.

 

 
나주 신촌리 고분은 백제-마한 지역에서 금동관이 나온 유일한 무덤이다. 따라서 신촌리 금동관의 세움장식으로 백제 무령왕릉의 관 꾸미개는 물론이고 전 강서금관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주 반남면 신촌리의 고분들은 공주나 부여에 있는 백제 왕릉보다 크다. 그리고 항아리에 시신을 받은 옹관묘라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백제가 남하하기 전에 이 지역에 있었던 토착 세력(마한으로 추정)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신촌리 고분에서 금동관과 금동모가 함께 출토됐는데, 이는 경주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금관과 함께 절풍 모양의 금제모가 출토된 것이 비슷하다. 금동모는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외관으로 금동관을 씌웠으니, 이 무덤에 묻힌 이는 남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금동관-금동모는 이 땅에서 정식발굴로는 처음 출토된 금동관-금동모였다.

 

도굴이 아닌 정식 발굴로는 이 땅에서 처음으로 출토됐다는 것은 일제가 발굴했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경주 경찰에 의해 금관총 금관이 수습(1921년)되기 전인 1917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소속의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 네 명의 전문가이 무덤을 발굴해 이 금동관-금동모와 함께 고리자루큰칼 등을 수습했다. 나주 신촌리에서 금동관-금동모를 발굴해 ‘손맛’을 봤기에 일제는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의 금관에 흥분했고, 그 연장선에서 금령총과 서봉총을 발굴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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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나야먀 금동모. 이렇다 할 금동모 출토가 없던 시절 일제는 전남 나주 신촌리에서 나온 금동모와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나 지금 보면 그리 비슷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금동모는 공주 수촌리,익산 익점리, 천안 용원리, 고흥 길두리에서 나온 금동모에 더 가까운 것 같다(아래 사진 참조). 일본에서 출토 금동관-금동모는 신라나 가야의 금동관-금동모보다는 마한-백제 금동관-금동모에 가깝다. 이는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뜻인데 거꾸로 일본 학자들은 왜인들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활용했다.

 

 

전문가들은 이 금동관이 일본 큐슈 구마모토(熊本)현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과 비슷하다는데 주목했다. 이는 한반도에 있던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암시였다. 야쓰이는 단 한 장 짜리 보고서를 냈는데 핵심 내용은 “매장한 장법(葬法)으로 봐서는 왜인(倭人)들이 이곳에 와서 한 것 같다”였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러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로 문화가 들어왔다고 서술한 것.

 
이것이 임나일본부 설 등과 함께 우리와 일본이 치열하게 역사전쟁을 하게 되는 시작이었다. 일본은 고구려는 대륙이 아닌 반도에 있었다고 찍어누르려고 한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는 왜가 지배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한반도 세력은 형편없었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그러한 학설을 고착하려고 했다.

 
그것을 동북공정을 펼치는 중국이 수용한다. 중국은 하나의 역사를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사용하자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을 주장한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선조이지만 ‘중국인의 하나’인 조선족이 중국에 살고 있으니 중국사에도 포함된다는 것. 이렇게 정의한 중국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의 고구려는 한국사에 넣어도 좋으나 그 이전 대륙에 있었던 고구려는 중국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북으로는 고구려를 뺏기고 남으로는 마한과 백제 가야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백제-마한지역에서 출토된 금동모

 
다음은 백제-마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모들이다. 이 부분은 사진으로 보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한다. 관은 나오지 않고 모만 나온데다, 많이 부식돼 있이 치밀한 연구가 어려운 형편이다. 충남-전북-전남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천안 용원리 금동모 조각 (출처: 계림의 국토박물관 순례 http://blog.daum.net/kelim/15713409)

 

 

고흥 길두리 금동모
 

공주 수촌리 금동모

 

 

익산 익점리 금동모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백제와 마한은 어떤 관계였는가

 

한반도 남부를 언제부터 백제가 지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대패를 하고 개로왕까지 전사한 후 문주왕에 의해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를 했다. 이어 538년 성왕이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백제가 전라도 해안지역까지 지배했다면 그것은 사비 시절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전라도 해안 지역은 그 전에는 마한에 속한 여러 나라가 할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한반도 남서부에서 나온 금동관은 선뜻 백제 것으로 비정하기 어려워진다. 백제는 해상무역으로 융성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바다를 통해 이동했으니 다른 나라들보다 이동이 빈번하고 빨랐을 수 있다.

 
국가들은 평시에는 무역을 하고 비상시에는 전쟁을 한다. 무역을 하는 것은 이웃 국가와 사이가 좋다는 뜻이다. 백제는 해상무역을 많이 한 나라이니 마한 등 새로운 인접국과 섞이는 것이 부드러웠는지도 모른다. 무역으로 국부는빨리 키우지만 군사력은 약했기에 백제는 바다를 이용해 빨리 이동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도 그렇지만 백제는 더 더욱 신비한 나라이다. 요서 진평 두 군을 운영했다는 대륙 백제에서부터 일본에 분조(별도의 왕조)를 둔 것까지 백제가 만들어낸 역사의 폭은 대단히 넓다. 그러나 많은 것이 안개에 쌓여 있다. 백제의 왕릉으로 판정된 것들도 대부분 도굴됐다. 동북공정을 시작한 중국이 2003년 중국 집안시 무덤을 재조사했듯이, 우리도 백제 것으로 판정된 도굴된 무덤을 재조사해보면 어떨까. 그러한 재조사에서 백제의 금관-금동관 파편이 발견되지 않을까.
 

이는 백제 무령왕릉 하나만으로는 백제사를 추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던져본 제안이다. 그렇게 신비한 백제와 마한이 금관의 전신인 금동모와 금동관을 남겼다. 그렇다면 백제와 마한도 금관 금동관 공동체의 확실한 일원이 된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만의 문화 구조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백제의 강역을 추적하는 것은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천도한 평양이 어디인지 추적하는 것과 함께 우리 고대사를 새로 쓰게할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도전을 물리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기자의 눈에 전강서금관은 신라-가야의 금관 금동관과는 비슷한 점이 적어 보인다. 그러나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세움장식과 무령왕릉 금제 꾸미개, 그리고 전강서금관의 세움장식은 약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나주 신촌이 금동관 세움장식은 풀꽃 모양이라고 하여 ‘초화형(草花形)’으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불꽃무니와 초화형은 비슷하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취재를 하면서 기자는 일본에서는 몇 점의 금동관이 출토됐고, 그 모양은 어떤지 궁금해 알아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국내에는 연구된 것이 없는 것 같아 일본의 웹사이트를 뒤져받지만, 만족할만한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금관은 전강서금관을 포하하면 열 점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금동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금동관의 세움장식이 어떠한지 드리개와 달개장식이 어떠한지를 연구한 자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중국과 완연히 다르게 금관-금동관 공동체를 이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류로 일본이 존재한다. 문화의 뿌리가 다르다는 것은 다른 청동기 문화를 이뤘다는 뜻이다. 청동기 시절 우리가 제작한 비파형동검-세형동검은 중국식동검과 그 형태가 전혀 달랐다. 중국식동검은 검신과 검 자루가 한 몸이지만 우리는 분리돼 있다.

철기시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중국의 환수도와 비슷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제작했으니 변별력이 적어졌다. 그런데 중국이 만들지 않은 금동관-금관을 제작했다.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일궈온 것이다. 금관-금동관은 불교의 전래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만의 철학과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는 새깃털 같은 것을 상투 주변에 꽂고 있는 남성 그림이 많은데, 이 관을 한자로 ‘조우관(鳥羽冠)’으로 적는다. 그때는 말총이나 비단 또는 자작나무 껍질인 ‘백화수피’로 상투를 잡아주는 절풍형 모자를 만들어 쓰고 그 주위에 깃털 모양을 징식을 했다. 여기에서 금동관 금관이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깃털 장식이 금관 금동관의 세움장식이 되는 것이다.

 

융합 학문으로 고대사와 우리 철학 추적해야
 

 

당시에도 철학이 있었다. 우리의 고조선 시설 중국 황화 중류에는 주(周)나라가 있었는데 주나라에서 자연변화의 원리를 추적해 정리한 것이 그 유명한 주역(周易)이다. 청동기 시대 중국인들이 주역을 만들었듯이 우리도 우리만의 자연변화원리를 정리했을 수 있다. 한역(韓易)일수도 있고 조선역(朝鮮易)일수도 있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양 문화권 간의 교류로 우리 것은 끊어지고, 주역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 우리의 풍수를 중국의 풍수가 대체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가야를 포함한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 왜 우리 지도자들은 금관과 금동관을 썼을까. 인하대 정치학과의 남창희 교수는 모든 제도와 복식에는 시대 철학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그는 주역의 기본인 음양오행론은 중국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이었다고 본다. 오행의 상생(相生)관계 중에 금생수(金生水)가 있다. 금속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 금생수이다. 그는 ‘금생수 때문에 지도자들이 금속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반문을 했다.

 
사람의 머리에는 근육이 없다. 근육이 많이 움직여야 피가 몰려 그 부분이 뜨끈뜨근 해진다. 그런데 머리에는 근육이 없는데도 많은 생각과 공부를 하다보면 뜨끈뜨끈 해진다. 동양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나 근심 걱정을 많이 해서 머리가 뜨근뜨근해지는 것을 화기가 올라갔다고 한다. 머리에 화기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머리에는 수기가 많아야 맑고 편안해진다. 화기가 올라가면 번뇌가 많아진다.

 
그러한 머리에서 화기를 제거하고 수기를 늘이려면 금기운을 더해야 한다. 금생수의 원리에 따라 금기운이 수기운을 만드는 것이다. 남교수는 금생수 원리를 이용하기 위해 남보다 많이 고민해야 하는 지도자들이 금관이나 금동관을 쓰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난만한 발상이지만 정곡을 찌른 혜안일 수도 있다. 분명 우리 선조들은 이유가 있어 금관-금동관을 썼다. 그 이유를 찾아야 그 시절 우리의 정신세계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고대사를 추적하려면 고고학, 사학, 정치학, 공학, 철학, 의학, 복식, 음식, 주거(건축학), 해양학, 군사학 등 여러 학문을 융합해서 해야 한다. 전강서금관 출현을 계기로 그러한 연구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이 시도는 삼국시대 우리의 정신세계까지도 짐작케 하는 거대한 시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