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과 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나폴리 王國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경탄하면서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된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人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부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기독교 권으로 탈환하였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후예들인 노르만 인들의 시실리 공략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한 왕국을 처음 만든 이들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노르만 전사들이었다. 노르만인들은 9세기 말부터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후예들이었다. 바이킹족은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살던 미개한 게르만族으로 약 300년간 유럽의 全域(전역)을 습격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 정복왕조를 세웠다. 몽골-투르크족이 기마군단을 앞세워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 중앙아시아, 中東에서 여러 나라를 만들고 부수고 하였던 것과 비견된다. 바이킹족은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하였고 몽골-투르크족은 기마군단을 앞세운 점이 다르다. 기동성이 이들 정복민족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들은 싸움도 잘 했지만 소수가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통치, 행정술이 뛰어났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 영국(잉글랜드, 아일란드 등)을 정복하고 王이 된다. 노르만 세력은 그 후 수백 년간 英佛(영불)에 걸친 영토를 갖게 되는데, 100년 전쟁을 통하여 정리된다. 노르만의 영국정복 이전에도 영국은 덴마크의 카누트 대왕에 의하여 통일된 적이 있다. 11세기 초 카누트 大王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에 걸친 바이킹 대제국을 세웠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노르만의 영국정복은 그 후 영국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권에서 멀어진 北海 국가에서 탈피, 유럽 文明의 일원이 되고, 佛語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어가 만들어지고 좋은 제도가 뿌리를 내려 富國强兵(부국강병)의 길을 걷는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가 100% 바이킹 국가라면 핀란드는 30%, 영국은 50% 바이킹 국가라고 부를 만하다.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족은 이곳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 실력을 기른 다음 2차 원정에 나선다. 영국 정복은 설명한 대로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오트빌 家門(가문)의 노르만 戰士(전사)집단이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를 점령한다. 이들을 이끈 루제로 1세가 교황으로부터 시실리王 및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公으로 公認(공인)된 것은 1130년이었다. 루제로(영어로는 로저) 2세(서기1095~1154)는 정복과 행정을 결합시켜 시실리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바이킹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르만 지배세력도 여러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실력 위주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들이 공존하고 아랍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까지 시실리 왕국에선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르만의 루제로 1세가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家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200년간은 노르만 王朝(그 피를 이어받은 독일의 스와비아 왕조 시절도 포함)의 시실리 지배 기간이다.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 왕국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나중엔 노르만의 영국이 중심국가로 떠오르지만 12세기 당시엔 아직 변방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미개하였던 바이킹족이 소수로서 다수를 다스리면서 가장 찬란한 기독교 文明을 건설한 것은 세계사의 한 기적이다. 10세기까지만 해도 바이킹족은 원시종교를 믿고 부족장이 죽으면 殉葬(순장)을 했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에는 다섯 명의 名君(명군)이 있었다. 루제로 1, 2세, 굴레모 1, 2세, 그리고 페데리코 황제. '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에서 노르만인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한 이후 취한 점령 정책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노르만 정복왕) 루제로는 패배자가 된 아랍 유력자들과 그 가족을 죽이지도 않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남이탈리아 내륙지방에 땅을 주고 농장주로서 살게 했다. 아랍인 병사들을 노르만-시실리 군에 편입하였다. 아랍의 학자도, 상인도, 기술자도 농장경영자도 남았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며 共生(공생)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노르만 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에게 피해를 본 남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의 북쪽 끝에서 온 노르만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이 시기의 팔레르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팔레르모만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사라진 여러 민족과 종교와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시실리엔 많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레모 2세가 만든 것인데,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몽레알레 대성당은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세워진 것인데, 굴레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레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왕권이 격돌하는 중세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는 굴레모 왕을 견제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관리하는 팔레르모 대성당도 대단한 건물인데,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 안에 또 다시 대성당을 지은 데는, 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 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레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代가 끊어지고, 政略(정략) 혼인 관계에 의하여 1190년 독일 스와비아 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시실리 왕이 된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레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코스탄자(할아버지 루체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코스탄자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코스탄자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이다.
하인리히 6세는 독일에 체류중 시실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왔다가 1197년에 병으로 급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11~12세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首長(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루제로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프로 戰士집단인 노르만 기사단의 뒷받침으로 황제의 독일군과 대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1075년 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세속권력, 즉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교황에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北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 교황을 추방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로마에서 물러났다. 로마를 점령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물러나자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 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선출시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기도한 이가 페데리코 2세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와 교황은 정면충돌 코스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