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 장세훈·시계 칼럼니스트 파텍 필립 칼라트라바 - 대를 이어 물려주고 싶은 진정한 명품시계를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세상의 수많은 브랜드를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머릿속에서 구획하고, 소위 등급을 매기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거의 이견 없이 톱클래스로 간주되는 몇몇 브랜드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시계의 제왕’, ‘하이엔드 위의 하이엔드’로 불리는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이다. 드레스워치 정석, 명사들 럭셔리 상징 1940년 초에 제작된 초창기 칼라트라바 Ref.96_ 사진 출처 앤티쿼룸(Antiquorum) 폴란드에서 스위스로 망명한 귀족 출신의 군 장교 앙투안 노베르 드 파텍(Antonie Norbert de Patek)과 프랑스 태생의 시계장인 장 아드리앙 필립(Jean-Adrien Philippe)에 의해 스위스 제네바에 뿌리를 내린 파텍 필립은 이들 창립자의 각 성을 따서 만들었다. 내년이면 무려 창립 175주년을 맞이하는 파텍 필립은 하이엔드(High-end·최고급) 시계를 언급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명가다. 이는 단지 이들의 시계가 보통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몸값을 자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년 세계적인 경매 행사에서 당대 최고가를 경신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시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파텍 필립의 특별한 가치는 우선 시계 자체의 놀라운 품질에 있고, 그 다음은 철저히 관리된 희소성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시계 역사상 뚜렷한 족적을 남긴 파텍 필립의 수많은 대표 컬렉션 중에서도 오늘 소개하는 칼라트라바(Calatrava)의 위치는 매우 특별하다. 시와 분, 초 정도만 표시되는 단순한 기능에 군더더기를 배제한 극도로 심플한 디자인, 크기 역시 수십년간 크게 변하지 않은 보수적인 사이즈를 지닌 칼라트라바는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세월을 초월한 듯 클래식한 면면 때문에 드레스 워치의 정석으로 통한다. 칼라트라바는 또한 오랜 세월 세계 명사들 사이에서 과시하지 않는 럭셔리의 상징이었다. 겉으로는 수수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기계식 무브먼트의 훌륭한 작동 안정성과 구석구석 고급스럽고 정교하게 다듬어 완성한 미적인 성취는 파텍 필립이 왜 진정한 명품인지를 방증하는 지표가 되었다. 칼라트라바는 1932년 파텍 필립의 기존 다이얼 공급자였던 찰스와 장 스턴(Charles & Jean Stern) 형제가 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탄생한 시계였다. 1920~30년대 세계 경제 대공황의 징후를 실감했던 찰스와 장 스턴 형제는 그 전까지 파텍 필립의 장기로 통했던 고가의 컴플리케이션(다기능 복잡) 시계들보다는 기능적으로 심플하면서 상대적으로 금액대가 낮은 시계들을 통해 브랜드의 중흥을 도모하고자 했고, 이러한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최초의 칼라트라바라고 할 수 있는 Ref. 96은 20세기 초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계들에서 보이던 어정쩡한 형태 같은 게 완전히 사라져 현대적인 손목시계의 한 표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다. 케이스에서 길쭉하게 뻗어나온 날렵한 형태의 러그(lug)와 우아한 케이스 형태, 그리고 정제된 다이얼은 단숨에 수많은 모방을 낳았고, 드레스 워치 디자인의 한 모범답안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프랑스어로 아플리케(Applique) 타입이라고도 불리는 양각으로 세팅한 두툼한 막대 형태의 바 인덱스와 칼처럼 쭉 뻗은 도피네(Dauphine) 핸즈, 6시 방향의 스몰(서브) 세컨드 다이얼을 보여주는 초창기 Ref.96은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일명 ‘칼라트라바’ 스타일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특유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이후 등장한 양각의 아라빅(숫자) 인덱스와 6시 방향 스몰 세컨드 다이얼의 Ref.570은 회중시계 및 마린 크로노미터의 전통을 계승하는 디자인을 자랑하며, 로마자 인덱스에 센터 초침 형태의 다이얼인 Ref.570 SC 같은 모델도 40년대 초반에 나온 시계 치고는 상당히 모던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이들 시계에서 보여주는 특징적인 양식들은 현재의 칼라트라바 컬렉션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크게 기계식 수동(핸드 와인딩) 모델과 자동(오토매틱) 모델로 나뉘어 선보이고 있다. 파텍 필립 시계의 가치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니뭐니 해도 무브먼트이다. 현행 수동식 칼라트라바에 주로 탑재되는 215PS 칼리버만 보더라도 1974년에 개발돼 무려 40여년 가까이 파텍 필립 애호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파텍 필립은 이미 1950년대 말에 당시 어느 브랜드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자이로맥스라는 프리스프렁 방식(레귤레이터를 없애고 작은 스크루의 관성으로 완급을 조정)의 독창적인 부품을 개발한 선례를 자랑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실리콘 계열의 신소재 실린바로 제작한 이스케이프 휠과 앵커(펄소맥스), 스피로맥스 헤어스프링 등 현대적인 첨단 반도체 기술과 워치메이킹 전통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부품·소재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 파텍 필립은 이렇듯 창립 이래 무수한 발명품들을 만들어온 브랜드이다. 시계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은 비단 세월에 의해, 혹은 일부 부유한 컬렉터 및 애호가들의 충성도에 의해서만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렇듯 보이지 않는 치열한 개발의 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이엔드 시계의 가치는 무브먼트의 장식성 내지 미적인 가공상태에서도 판가름이 난다. 파텍 필립의 특별함은 모든 무브먼트의 부품들을 일일이 수공으로 다듬고 조정하고 세팅한다는 데 있다. 스위스 고급 시계를 판단하는 한 중요한 지표로 제네바 실(Geneva Seal)이 있는데, 파텍 필립은 지난 2009년부터 이런 제네바 인증 대신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자체적인 ‘파텍 필립 실’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스위스 및 독일의 내로라하는 고급 시계 제조사들은 저마다의 엄격한 자체 품질 유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파텍 필립처럼 드러내놓고 제네바 실의 권위에 도전한 브랜드는 없었다. 그만큼 파텍 필립의 드높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애호가들 전폭 지지 받아온 무브먼트 파텍 필립은 1930년대 초 스턴(Stern)가에 인수된 이래 현재까지 4대째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형 그룹 소속이 아닌 독립 브랜드로서 오랜 세월을 유지해온 브랜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헤리티지를 훼손 없이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중 칼라트라바는 단연 파텍 필립을 상징하는 얼굴이자 지금의 파텍 필립을 만드는 데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해온 컬렉션이라 할 수 있다. 파텍 필립의 광고 카피 문구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파텍 필립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 두고 있을 뿐이다”라고. 이는 파텍 필립이 지향하는 바를 어쩌면 가장 적절하게 응축해 보여주는 한 예시라고도 할 만하다. 파텍 필립의 시계는 현행품 못지않게 오래된 빈티지 시계들도 세계 경매시장을 호령한다. 수백개의 작고 섬세한 부품들로 이루어진 기계식 시계는 그 각 소재의 품질이나 설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해야만 오랜 내구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텍 필립의 시계들은 최상의 소재와 장인정신이 만들어낸 작은 소우주와 같다. 이런 시계여야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들 세대에 이르러서도 그 가치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파텍 필립에 경의를 표하는 가장 큰 이유다. 파텍 필립 칼라트라바_ Ref.519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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