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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淸山에 2013. 8. 4. 18:42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동북공정으로 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삼키려 했던 중국이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은 정사(正史) ‘신청사’를 만들고 있다. 중국은 정사로 인정되지 않은 ‘청사고’에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조선을 여기에 포함시킨 전력이 있다.
중화민족을 앞세우고 ‘통일된 다민족국’을 만들기 위해 만주족 역사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중국의 역사 공작 전모를 공개한다.

 

  

[북경의 자금성. 만주족은 자금성 주변에 강력한 부대인 팔기를 포진시켜 한족 관료들을 감시·통제했다.]

 

‘신동아’는 2003년 9월호에 중국 ‘광명일보(光明日報)’에 실린 ‘고구려사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공개해, 중국이 준비해온 동북공정을 알림으로써 반(反)동북공정 열풍을 일으킨 바 있다. ‘신동아’는 중국이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 공작의 실체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청사공정(淸史工程)’이 그것이다. 청사공정은 청나라에 대한 공인된 역사서인 ‘신청사(新淸史)’를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신청사’를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 때문인지 올해나 내년으로 발간 시기를 미뤘다.

 

중국이 자기네 역사서를 만들겠다는 데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屬國)이었다’고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중국 정부가 공인한 정사(正史)에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표기한다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니 한중 관계가 경색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독도 영유권을 넘보는 일본에 이어 민족자존 문제를 놓고 중국과 날선 대립을 해야 한다.

 

중국에는 한 나라가 망하면 다음 나라가 앞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이 있다. 이를 ‘나라(代)가 바뀌면(易) 앞 나라의 역사(史)를 편찬한다(修)’고 하여, ‘역대수사(易代修史)’라고 한다.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중국은 25종의 정사를 만들어왔다(약칭 25사). 정사가 꼭 시대 순으로 편찬되진 않았다. 한참 후에 들어선 나라가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의 정사를 만들기도 했다. 한 나라에 대한 정사가 꼭 하나인 것도 아니다.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식으로 두 가지인 경우도 있다.

 

한족(漢族)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간주한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워 자신을 지배한 데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었다. 원을 무너뜨린 명(明)은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정사인 ‘원사’를 편찬했지만, 성의 없이 몇 달 만에 제작했다. 이 때문에 내용이 엉성하고 빠진 것이 너무 많아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반원(反元) 감정 때문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중화민국(북양정부) 시절에야 257권의 ‘신원사’를 편찬했다. 이를 1919년 중화민국 5대 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이 공인함으로써 청나라가 펴낸 ‘명사’보다 늦게 나온 ‘신원사’가 25번째 정사가 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공인’이다. 중국은 왕이나 황제 또는 그에 준하는 국가지도자가 승인한 것을 ‘공인’으로 본다. 전문 학자들이 검토해 승인하는 게 아니라 최고지도자의 인정으로 결정되니 정사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 있다. 중국이 청사공정으로 만들려고 하는 정사를 ‘신청사’로 한 것은 과거에 제작됐으나 공인받지 못한 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공인 여부는 정사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중국의 최고지도부는 9명(현재)의 상무위원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회다. 청사공정은 2002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朱鎔基), 리란칭(李嵐淸) 4명의 상무위원이 비준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에 따라 2003년 중국 런민(人民)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청사공정’으로 약칭되는 국가청사찬수공정(國家淸史纂修工程) 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을 통해 ‘신청사’가 완성되면 다시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의 비준(공인)을 받아 정사로 인정될 예정이다.

 

‘신청사’가 조선을 속국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명사(明史)’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청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명사’는 명이 무너진 후 중국을 장악한 청이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편찬한 명나라 정사다. 중국 정사는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다. ‘기’는 황제의 일대기와 정치활동을 적은 본기(本紀), ‘전’은 황제를 제외한 그 시대의 주요 인물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가리킨다. 열전 편에 외국에 대한 기록을 함께 넣었다. 조선에 대한 것은 ‘조선전’, 일본에 대한 것은 ‘일본전’으로 정리하는데, 이를 통칭 ‘외국전’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역사만 기록해놓았다. 삼국 이전의 우리나라 기록은 없다. 중국의 네 번째 정사로 꼽히는 ‘삼국지’ 위지의 동이전은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의 중국은 우리를 동이(東夷)로 칭했다. 동이전은 극히 중국 중심적으로 기술됐다. 이런 까닭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이전을 참고하면서도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


‘조선은 속국 또는 번국’

 

 

 

삼국지를 비롯한 고대 중국 정사에서 우리를 ‘동이’라고 한 것은 속국이라고 일컬은 것과 진배없는 멸시의 표현이다. 중국은 주변국을 동서남북에 있는 오랑캐라며 ‘사이(四夷)’로 부르고, 그에 대한 기록을 ‘사이전(四夷傳)’ 또는 ‘사이록(四夷錄)’으로 통칭해왔다. 사이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킨다. 동이전이 바로 사이전 중 하나였다.

송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공격을 받아 북경을 포함한 16개 주(연운 16주)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항복을 ‘전연맹약(淵盟約)’이라고 하는데, 전연맹약 후 중국 정사에서는 주변국에 대한 기록을 외국전으로 격상했다. 이에 따라 ‘명사’는 조선전을 만들었으나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표현을 넣었다. ‘조선은 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번국(藩國)이다’라고 한 후 ‘조선을 속국으로 일컬으니 (명의) 경계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적은 것이다.

 

‘울타리 번(藩)’자를 쓰는 ‘번국’은 ‘번부(藩部)’와 같은 말로, 중국 외곽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은 변방에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등을 두고 있는데 이것이 ‘번부’나 ‘번국’이었다. 중국은 외곽의 이민족을 복속시켜 1차로는 중국을 지키게 하는 울타리로 삼고, 2차로는 중국 정치 영역에 붙잡아둠으로써 중국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구사했다.

 


[청나라 때의 변발. 만주족은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전 중국인에게 적용시켰다.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책과 함께, 2004)에서]

 

 

책봉과 明軍 파병

 

중국은 영토가 넓다보니 내지(內地)에도 이민족 거주지를 두게 됐다. 내지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은 ‘토사(土司)’라고 했다. 중국 정사는 토사와 번부는 외국전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본기나 열전 등을 기술할 때 번부와 토사에 대한 기록을 넣었는데, 이는 중국의 일부인 속국으로 본다는 뜻이다.

 

번부가 바로 과거의 사이(四夷)다. 전연맹약 덕분에 동이는 번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은 계속 번부로 규정돼, 지금은 중국의 일부가 돼버렸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역사 기록을 남김으로써 외국을 삼킨 것이다.

 

그런데 ‘명사’는 조선전을 따로 만들어놓고도 조선전에서 ‘조선을 번부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체재만 외국으로 분류했지만 내용은 중국의 일부로 본 것이다. 청나라가 이런 내용의 ‘명사’를 출간할 때 조선은 힘이 없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사’가 조선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事大)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인 듯하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황실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기에 외국에서 무역을 하자며 선물을 보낸 것도 ‘조공’으로 표기했다. 그러니 조공을 했다고 해서 외국이 중국을 사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도 이를 잘 아는지라 조공만으로는 속국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봉은 다르다. 책봉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고려는 요(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는 외교상 의례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한 조선의 책봉은 그 내용이 심각했다.

 

조선은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와 더불어 새 임금이 들어서면 무조건 중국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명이 책봉을 해줄 때까지 왕이란 칭호를 못 쓰고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구는 한술 더 떴다. 유구의 어느 왕은 명이 혼란에 빠져 책봉해줄 사신을 못 보내자 평생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 왕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기에 중국은 일본을 속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청에 두 번 항복한 조선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참으로 무능하고 한심한 임금이었다. 왜군에 쫓겨 의주까지 도주한 그는 중신들의 거센 만류에도 명에 ‘나의 망명을 받아달라’ ‘명나라 군대를 보내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명은 선조의 망명은 불허한 대신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계의 피가 흐르는 이여송이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행패가 심했지만 조선은 이들을 ‘천군(天軍)’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명군 참전 후 전쟁은 정전(停戰)을 하는 등 답보를 거듭하다 명-왜 간의 협상으로 왜군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외적을 자국의 힘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외국 군대가 와서 협상으로 물러나게 했으니, 조선은 명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명에 이어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은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정묘호란). 이 전쟁에서 이긴 청(당시는 후금)은 자신이 형, 조선이 동생이라는 형제지국(兄弟之國) 관계를 맺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조선은 명에 심각하게 의존한 기억 때문에 청을 무시했다.

 

그러자 1636년 다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를 붙잡았다(병자호란). 인조는 삼전도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만주식 예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림)를 하며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된다”고 약속했다. ‘군신지국(君臣之國)’을 조건으로 항복한 것이다. ‘명사’는 이러한 청이 만든 것이니 조선을 외국전에 넣긴 했어도 속국과 다를 바 없었다고 쓴 듯하다. 이러한 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청사고’이니 청사고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들어갔다.

 

조선을 두 번이나 항복시킨 청은 말기인 1885년, 26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總督)과 비슷한 뜻의 ‘감국(監國)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청사고’는 과거의 정사에는 없던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그 안에 조선을 집어 넣었다.

 

청나라는 1911년 쑨원(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쓰러졌다. 새로 들어선 중화민국은 극심한 혼란 탓에 쑨원이 아니라 당대의 실력자인 위안스카이를 총통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청사관(淸史館)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청사를 만들게 했다. 청사관 학자들은 대부분 청나라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청 실록과 공문서 등을 근거로 청사를 편찬했기에 청나라적 시각이 많이 반영됐다.

 

위안스카이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꿔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다 역풍을 맞아 실각하고 쉬스창(徐世昌) 같은 군벌(軍閥)의 대표가 총통에 올랐다. 그때의 중화민국은 일본 등 열강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다 내분까지 심한 내우외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인 못 받은 ‘청사고’

 

 

중국은 발해와 황해를 ‘북양(北洋)’이라 통칭한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북양에 면한 지역만 지배하고, 양자강 남쪽은 국민당 정권이 장악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중화민국 정부를 ‘북양정부’로 부른다. 북양정부 시절인 1928년 청사가 완성됐다.

그런데 청사는 공인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청나라적 시각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을 무너뜨린 세력을 역적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됐다. 명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를 배척했던 것처럼 중화민국을 세운 한족 엘리트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매우 싫어했다. 쑨원은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일으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를 내걸고 신해혁명을 성공시켰을 정도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반(反)봉건, 반(反)제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한족 엘리트는 청대(代)를 한족이 만주족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한 시기로 이해했다. 청나라는 한족을 철저히 차별하는 ‘기인(旗人)통치’로 중국을 지배했다. 쑨원을 필두로 한 한족 엘리트는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한족을 해방시키자며 혁명을 일으켰으니, 청나라는 이들을 역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청사는 이런 시각으로 작성되었다.

 

힘없는 북양정부라 해도 ‘멸만흥한’ 정신만큼은 공유하고 있었으니 이 청사를 공인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고는 나온 마당이라 ‘원고 고(稿)’ 자를 붙여 ‘청사고’로 이름 짓고 서고에 집어 넣었다. 이러한 ‘청사고’가 소량 인쇄돼 세상에 나온 적이 있는데, 여기에 조선에 대한 내용이 속국전에 포함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청사고’는 과거 정사에는 없었던 속국전을 만들어 조선, 유구, 베트남을 집어 넣었다.

 

‘청사고’를 만들 때 조선은 일본,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유구는 그 이전에 일본에 병합됐다. ‘청사고’ 편찬자들은 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었던 조선, 유구, 베트남을 빼앗긴 게 억울한 나머지, 속국전을 만들어 세 나라 기록을 정리한 듯하다. 우리에겐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청사고’가 공인받지 못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북양정부 총통이 ‘청사는 청나라 처지에서 쓴 역사이니 신해혁명 세력을 역적으로 볼 수도 있다’며 승인했다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는 항변도 못하고 앉아서 당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G2 반열에 올랐으니 세계는 ‘청사고’ 기록을 정설로 수용했을 것이다.

 

 


동북아재단의 추적

 

 

2003년 동북공정에 분노한 한국은 2004년 고구려역사재단을 만들고, 2006년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시켜 다룰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으로 확대 재편했다. 이 재단은 중국이 ‘신청사’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예의 주시해 왔다. 재단에 따르면 중국은 ‘신청사’에 속국전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사’에서처럼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쓰면 그만인지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은 속국전이 공인받지 못한 ‘청사고’에만 있는 체재(體裁)라, ‘신청사’엔 싣지 않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여러 요소가 변화했기에 ‘신청사’를 과거의 정사와는 다른 체재로 만들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기전체를 채택했지만 ‘신청사’는 창신체(創新體)를 취하기로 한 것. 이유는 중국의 문화와 철학이 혁명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한자를 정자 대신 간체자(簡體字)로 쓰게 된 것이다. 문장도 고대와 다른 백화문(白話文)으로 쓰게 됐다. 간체자로 백화문을 쓰는 현대 중국인들은 순수 한문으로 된 고대 자료를 술술 읽고 쓰지 못한다. ‘청사고’를 낼 때까지는 과거와 같은 한문 문장으로 역사서를 만들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학자가 드물다.

 

그래서 ‘신청사’는 간체자-백화문으로 편찬하기로 결정했다. 기전체는 한문 문장에 적합하지, 간체자-백화문에는 맞지 않다. 현대의 중국 학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과 절로 나눠 글을 쓰는 장절체(章節體)에 익숙하다. 따라서 ‘신청사’는 기전체적 요소를 가미한 장절체로 쓰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창신체다.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도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황제의 일대기와 황제의 통치를 주내용으로 한 본기는 봉건적이라 보고 ‘신청사’에 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통기(通紀)’를 만들기로 했다. 통기는 황제의 일대기 중심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한다. 도판도 많이 삽입하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글로만 채워졌으나, ‘신청사’에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덧붙여 시각적으로 청대사를 보여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전을 없애고 이웃 나라(邦)와 교류(交)한 것을 적는 ‘방교지(邦交志)’를 만들기로 했다. 조선에 대한 기록은 방교지에 넣기로 했다.

 

청나라 사신 일행으로 북경을 다녀온 많은 조선 선비가 ‘연행록(燕行錄)’으로 통칭되는 기행문을 남겼다[과거에는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했기에 그 기행문을 연행록이라 했다]. 가장 유명한 연행록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중국은 조선 방교지의 객관성을 갖추기 위해 한국에서 간행된 연행록을 몽땅 가져가 분석했다. 이러한 연행록에는 조선실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공 사신으로 갔다’ ‘책봉을 받았다’는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 때문에 중국이 조선 방교지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염려하는 학자가 많다.

 

중국은 과거엔 번부였고 지금은 중국의 일부로 있는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중국 내지에 대한 기록인 ‘지리지(地理志)’에 담기로 했다. 여기에도 변화를 줬다. 과거엔 이들을 만이(蠻夷) 융적(戎狄) 견융(犬戎) 같은 경멸적 용어로 표기했으나, ‘신청사’에선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중국은 철저하게 자료에 근거해 방교지와 지리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으나 조선은 청에 두 번 항복했고 조공과 책봉을 했으니 조선 방교지에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할 수도 있다. ‘신청사’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과 베트남 등은 자존심이 상해 격분하고, 티베트와 위구르족은 “과거에는 청의 일부가 아니었는데 일부로 적었다”며 격렬한 독립투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해양굴기 잇는 역사굴기

 

 

최근 중국은 도련(島鍊)정책의 일환으로 남중국해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 동중국해의 조어도 영유권을 주장해, 인접국들과 큰 마찰을 빚었다. ‘해양굴기(海洋崛起)’가 중국의 1차 팽창이라면, ‘신청사’ 출간은 동북아를 뒤흔드는 중국의 2차 확장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중국이 정치적 배경을 갖고 ‘신청사’를 편찬한다는 사실이다. ‘신청사’는 중국의 국가기관이 아닌 런민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만들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대도 아니고 런민대가 주도하게 된 것은, 다이이(戴逸)라는 이 대학의 노(老)역사학자 때문이다. 다이이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가까운 학자로 수십 년간 ‘신청사’ 편찬을 주장해 관철해냈다.

 

1940년대에 베이징대 사학과를 다닌 다이이는 공산주의에 매료돼 학업을 중단하고 연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당군을 찾아갔다. 역사를 공부하는 젊은 엘리트가 연안에 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49년 공산당군이 중국을 장악하자 그는 일약 역사학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이전 역사를 만든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한다. 다이이는 성세수사를 들먹이며 여러 실력자에게 ‘신청사’ 편찬을 거론했다. 그러나 당시의 실력자들은 청나라를 ‘한족을 지배한 식민지배 세력이자 공산혁명으로 극복했어야 할 봉건세력’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족을 꼼짝 못하게 한 기인 통치

 

 

청을 세운 만주족은 한족을 가혹하게 통제했다. 만주족은 ‘팔기(八旗)’라고 하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다. 팔기는 8개의 기병부대를 가리키는데, 각각의 기는 7500여 명으로 편성됐으니 팔기는 6만여 명의 기마부대가 된다. 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를 ‘팔기만주(八旗滿洲)’라 했다.

 

만주족은 왕비가 몽골족에서 나오는 조건으로 몽골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중국을 통치해, ‘만몽(滿蒙)동맹’으로 불렸다. 청나라는 강력한 동맹인 몽골족으로 ‘팔기몽고(八旗蒙古)’를 만들었다. 중국을 정복한 다음에는 한족으로 ‘팔기한군(八旗漢軍)’도 구성했다.

청은 한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팔기만주를 주요 성(城)에 보내 주둔하게 했다. 반란을 막기(防) 위해 주요 성에 주둔(駐)한 팔기가 ‘주방팔기(駐防八旗)’다. 주방팔기는 각 성 안에 ‘만성(滿城)’이라는 작은 성을 짓고 그 안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며 한인들을 지배했다. 청나라 수도인 북경성에선 황궁인 자금성 주변에서 생활했다.

 

청나라는 원과 달리 한족 엘리트를 관료로 고용했다. 그러면서도 팔기를 동원해 철저히 감시했다. 팔기에 속한 사람을 기인(旗人)이라 했기에, 팔기를 통한 한족 지배를 ‘기인통치’라 한다. 청나라는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해 한족들도 변발을 하게 됐다. 기인통치와 변발 강요는 만주족의 핵심 지배술이었다.

 

기인들은 자금성 주변인 북쪽의 부유한 곳에 살았고, 한족 관료들은 남쪽의 빈한한 곳에서 거주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베이징에선 자금성 주변이 부촌이고, 그 남쪽은 서민 지역이다. 지금 중국 실력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도 기인들이 살던 곳이다. 기인통치 덕분에 10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은 100배가 넘는 1억 인구의 한족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청나라 중기 이후에는 중국 인구가 3억으로 증가했으니 300배가 넘는 한족을 통제한 것이다.

 

청나라 말기 청의 지배력과 경제력이 약해졌을 때를 빼면 한족들은 거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으켜도 전부 제압당했다. 청은 한족들이 어쩌지 못했던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몽골족까지 제압해 번국으로 삼았다. 그러던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처음으로 패하면서 몰락의 길에 빠져들었다. 그때 쑨원을 필두로 한 세력이 ‘멸만흥한’과 변발 거부로 혁명을 일으켜 쇠퇴한 청을 무너뜨렸다.

 

중국 건국기에는 만주족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다이이 교수의 주장은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시야가 달라지는 게 역사다. 청은 중국의 어떤 왕조보다 넓은 영토를 만들었다. 몽골족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지만, 일한국(一汗國) 등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중국을 통치한 원의 강역은 청보다 좁았다. 중국은 대만을 빼고는 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았다(조선, 베트남, 유구는 제외).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족은 만주족에 단단히 신세를 진 셈이 된다. 중국의 엘리트들이 이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康乾盛世’에 주목하다

 

 

둥비우(董必武)는 청년 시절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가담한 뒤 일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와 변호사가 됐다. 그러다 공산주의에 심취해 연안의 공산당군에 가담했다. 공산군이 대륙을 석권한 직후 그는 정무원 부총리 등을 맡았다. 둥비우는 공산군이 중국을 장악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성세(盛世)를 만든 것으로 보고, ‘청사고’를 대체할 ‘신청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같은 주장을 폈다.

 

다이이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런민대에 청사편찬위원회를 만들려 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불발됐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가 정리된 1978년부터 다시 학문을 할 수 있게 됐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사학자들이 성세수사를 강조하며 ‘신청사’ 편찬을 다시 주장한 것.

 

이러한 다이이를 밀어준 이가 당대의 실력자인 리란칭 상무위원이다. 그는 ‘신청사’ 편찬을 중국 공산당이 명실상부하게 중국을 장악했다는 증표로 이해했다. 그때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만주족이 한족과 이민족을 지배한 것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만주족이 100~300배에 달하는 한족을 지배한 것은, 1000만도 안 되는 당원을 가진 공산당이 10억이 넘는 중국을 지배해야 하는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청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를 만들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15년간이 극성기였다. 그 시기를 강희의 ‘강’과 건륭의 ‘건’을 따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중국은 당나라 태종 때 중국이 융성했다며, 당 태종의 연호를 따서 이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한다. 정관지치는 한족 중심으로 통치하며 변수가 적었을 때 이룬 것이지만, 강건성세는 많은 이민족과 넓은 영토를 관리하며 만든 것이라 훨씬 더 복잡한 통치술이 필요했다. 중국 지배층은 만주족이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을 다스리면서 번영된 강건성세를 이룬 것에 주목했다.

 

1999~2003년 중국 CCTV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를 연속으로 제작해 방영했다. 이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게 아니라, 위대한 중국을 만든 시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 무렵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전 중국인을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만든 조어가 ‘중화민족’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합치는 역사 공작을 시작했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고, 중국 영토 안에 조선족의 선조가 만든 고구려가 있었으니,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을 본격화했다. 만주족도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니 만주족 선조가 만든 금(金)과 청도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는 것 또한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였다. 중국은 번국인 위구르족 역사를 통합하기 위해 서북(西北)공정, 티베트족 역사를 흡수하기 위해 서남(西南)공정을 펼쳤다.

 

 


한족 대신 중화민족 내세워

 

 

청사공정은 중화민족을 내세워 만주족이 만든 청나라를 토대로 강력한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역사 공작의 종합편이다. 여기에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해 덧붙임으로써 ‘중국은 태평성대이니 중국 인민과 소수민족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보내게 되었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역사학자와 리란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는 이러한 생각으로 청사공정과 동북공정 등을 추진한 것이다.

 

중국이 ‘신청사’와 동북공정 등을 통해 중화민족을 앞세우게 된 것은 중국을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다.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은 중국의 국시(國是)다. 중국 헌법 전문(前文)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의 여러 민족과 인민이 공동으로 창건한 통일된 다민족국가이다. (…) 민족단결을 유지하는 투쟁 중에는 대민족(大民族)주의, 특히 대한족(大漢族)주의에 반대해야 하고,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항주의 악왕묘에 있는 무릎꿇은 진회 부부상. 벽에 ‘가래침을 뱉지 말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청사공정과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추진되는 국가사업이다. 이는 중국 역사학계가 중국 정치에 철저히 종속돼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청사공정을 위해 6억 위안(약 1000억 원)을 쏟아붓고 있다. 필자는 입찰을 통해 선발하기에 선발된 필자들은 중국 정부의 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은 반드시 모순을 초래한다. 좋은 예가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다. 악비는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최선을 다해 싸운 송의 명장이다. 그러자 진회(秦檜)로 대표되는 굴종파가 구실을 만들어 그를 체포해 처형하고 조건부 항복을 했다. 중국인들은 ‘송사’ 열전에 악비를 충신으로 묘사했다. 항주에 진회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악비에게 비는 조형물을 갖춘 악비사당(악왕묘)을 만들고, 진회 부부상(像)을 향해 욕을 하고 가래침을 뱉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중화민족과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하면서 중국은, 금나라와 타협한 진회를 영웅, 악비를 분열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사에 있는 판단을 바꿔버린 것이다.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악비 사례에서처럼 해석은 필요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현대 국가들은 국가가 공인하는 정사를 만들지 않는다. 공인된 정사 편찬은 독재국가, 봉건국가의 산물로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은 ‘마이웨이’를 고집한다. 따라서 ‘신청사’가 나오는 날 중국은 안팎에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청사’를 만든 목적인 ‘통일된 다민족 국가 건설’이 오히려 위협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 때문에 중국 내에서도 ‘신청사’를 내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중 역사전쟁은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시작된 25史

 

 

 

중국의 정사는 대개 국가나 왕실이 편찬했다. 그러나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와 ‘신오대사’ ‘남사’ ‘북사’ 등은 개인 저술이다. ‘사기’는 전한(前漢) 무제 때의 사마천(司馬遷)이 사고(史庫)와 집 안에 모아놓은 여러 사료를 토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사는 국가에서 내는 관찬사(官撰史)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정사는 여러 왕조를 기록한 통사(通史)와 한 왕조나 나라의 일을 기록한 단대사(斷代史)로 나뉘기도 한다. ‘사기’는 황제로 대표되는 3황5제 시대를 시작으로 하-상-주-춘추전국-진-한(전한)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역사를 서술했기에 통사(通史)로 분류된다. 진수의 ‘삼국지’와 5대10국의 역사를 기록한 ‘신·구 오대사(五代史)’ 등도 통사다. 반면 한서 당서 송사 명사 신청사 등은 단대사가 된다.


사찬(私撰)임에도 최초의 정사가 된 ‘사기’를 만든 사마천은 전한의 무제로부터 남성을 거세당하는 치욕적인 궁형을 당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통제해 객관적으로 ‘사기’를 편찬했다. 사마천은 원한을 버리고 이미 나와 있는 자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추려 정리하는 식으로 ‘사기’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중국은 정사는, 만드는(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述)해야 한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강조했다. 신청사는 술이부작의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