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 州島 팔레르모 근교에 12세기 시실리 王國(나폴리 남쪽도 통치)을 다스리던 노르만(바이킹 후손) 왕이 건설한 '몽레알레' 대성당과 수도원의 회랑이다. 노르만-아랍 혼합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회랑과 정원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킨다. 이 성당과 수도원을 지을 때 아랍 기술자들을 썼기에 건물 양식과 구조에 아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왕조는 아랍이 다스리던 시실리를 빼앗았지만 아랍, 유대인, 그리스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信敎의 자유도 허용, 중세 유럽의 가장 번성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몽레알레 성당 안엔 6000평방 미터의 壁面(벽면)에 성경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성당을 흔히 '돌에 새긴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중세에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성당의 벽화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
회랑의 기둥인데, 기둥에 붙여두었던 금박이 뜯겨 나간 흔적이 있다. 기둥 머리의 조각이 다 다르고 정교하다. 이런 회랑은 수도사들의 산책로로 이용되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특징 로마인, 마케도니아인, 게르만족, 아랍족, 몽골족, 투르크족, 마자르족, 불가르족, 바이킹족, 영국인, 포르투갈인, 스페인人, 네덜란드인, 프랑스인의 공통점은 여러 국가를 만들고, 여러 국가를 무너뜨리고, 여러 국가를 植民地化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尙武(상무)정신과 정복욕이 강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기술이 있었다. 세계사의 지배민족이라고 부를 만하다. 지배민족을 대별하면 몽골-투르크-흉노-아랍족과 같은 유목민족, 바이킹-영국인과 같은 해양세력, 그리고 그리스-로마 같은 잘 조직된 문명세력으로 나뉜다. 유목민족은 騎馬(기마)군단, 해양세력은 항해술이 우수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정복 전쟁엔 능하지만 통치엔 무능한 세력이 있는가 하면 정복에도, 통치에도 유능한 세력이 있다. 싸움도 잘 하고 다스리는 데도 유능한 민족은 장기간 계속되는 나라와 제도를 만들었다. 현재의 국가 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바이킹, 게르만족, 영국인들의 정복과 통치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이 점령하고 세운 나라들의 목록은 호화찬란하다. 1. 바이킹이 세운 나라 또는 王朝: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키에프 러시아. 2. 노르만이 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 영국, 아일랜드, 시실리 왕국, 핀란드. 3. 노르만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 미국의 루이지애나, 뉴올린즈, 캐나다 퀘벡 주 등. 넓은 의미의 게르만족에 드는 바이킹과 노르만족이 세우거나, 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들은 거의가 과거나 지금 一流국가들이다.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영국, 아이슬란드, 과거의 시실리 왕국. 키에프 러시아는 지금 러시아의 母胎(모태)이고, 노르만이 정복한 영국은 미국, 호주, 뉴질랜드를 개척하였다. 바이킹族은 가히 一流(일류)국가의 産母(산모)라고 부를 만하다. 9세기까지는 유럽의 가장 후진된 종족이었던 이들이 세계의 지배민족으로 변신한 과정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9세기부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하기 시작한 바이킹족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이들은 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온 바이킹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先進문물을 수용하면서도 戰士(전사)집단의 용맹성을 유지, 곧 영국,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 노르만족의 성격에 대하여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역사학자인 제오프리 말라테라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꾀가 많고, 정복과 통치를 위하여는 자신들의 전통을 버린다. 모든 것을 모방하고, 상반된 성격인 베풀기와 탐욕을 겸한다. 두목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하여 많이 베푼다. 노르만족은 아부에 능하고, 어릴 때부터 웅변가들이며, 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으면 통제가 잘 안 된다. 말과 무기, 사냥을 좋아하고, 추위나 배고픔을 잘 견딘다.> 노르만족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전통이나 관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다.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재주 있는 현지인들을 채용하고, 좋은 여자를 골라 결혼도 했다. 노르만 지도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았으며 교회의 書記(서기)를 채용하여 자신을 돕도록 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는 소녀 시절에 본 노르만 왕자 보헤몽(안티옥 공국의 건설자)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로마 땅에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키가 큰 비잔틴 사람보다도 한 단위가 더 컸다. 허리는 가늘고 어깨는 넓었으며 깊은 가슴과 강력한 팔을 가졌다. 너무 야위지도, 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균형 있는 몸이었다. 그의 몸은 희고, 얼굴은 붉은 점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황색이었으나 다른 야만인처럼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까지만 오도록 잘랐다. 수염은 면도칼로 잘라 분필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은 높은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 용기와 열정이 몸과 마음에 녹아 있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이었다. 그는 위트가 있고 재주가 많아 곤란한 상황에서 늘 벗어나곤 하였다. 대화를 할 때 그는 정보가 많아 보였고, 그의 답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체격과 그런 성격은 황제 이외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고매함과 행운, 그리고 다른 타고난 성격에서도 그러하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체격과 용기, 명예욕, 그리고 실용적 정신과 적응력이다. 고고학자들의 遺骨(유골) 조사에 따르면 바이킹 남자의 평균 키는 약174, 여자는 158cm였다고 한다. 중세 유럽인들 중 가장 큰 키였다. 역사에서 바이킹과 노르만은 여러 얼굴을 갖고 활동한다. 해적, 장사꾼, 傭兵(용병), 정복자, 통치자, 영주, 농부, 이민자, 탐험가, 식민지 개척자. 다양한 역을 해낼 만큼 타고 난 능력과 적응력이 강하였다는 뜻이다. 바이킹이 남긴 碑文(비문)과 詩(시)를 종합하면 바이킹을 원정과 정복의 길로 몰아간 가장 큰 심리적 동기는 명예와 탐욕(일확천금의 꿈)이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인들에 대한 옛날 기록을 읽어보면 이들이 영웅적인 人間像과 人生觀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성격은 과대망상으로 흐르기 쉬운데, 바이킹-노르만족은 다른 편으론 實利를 매우 중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인간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商工業을 진흥하고, 개방-관용-實用의 통치를 하였다. 시실리 정복자 노르만인들의 유연한 정신이 담긴 건축물이 몽레알레 성당이다. 노르만, 아랍, 비잔틴 양식이 질서 있게, 주체적으로 혼합된 위대한 건축물이다. 일본인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사라진 여러 민족과 종교와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시실리엔 많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레모 2세가 만든 것인데,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되었다. 노르만 건축을 대표하는 세계적 건축물이다. 몽레알레 대성당은 1174~1182년 사이 단기간에 세워진 것인데, 굴레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레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신성로마제국의 世俗王權이 격돌하던 中世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는 시실리의 굴레모 2세를 견제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관리하는 팔레르모 대성당도 대단한 건물인데,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 안에 또 다시 몽레알레 대성당을 지은 데는, 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 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聖書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중세 유럽 성당 가운데 가장 큰 모자이크이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레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모자이크 중에는 영국의 켄터베리 주교 聖 토마스 베켓의 모습이 보인다. 굴레모 2세는 영국의 노르만 왕 헨리 2세의 딸 조안나와 결혼하였다. 베켓은 조안나의 가정교사였다. 영국 가톨릭의 수장이던 베켓은 헨리 2세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가 1173년에 聖人(성인)으로 追敍(추서)되었다. 아버지의 非行(비행)에 불만이 많던 조안나의 권유에 의하여 베켓의 모습이 성당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의 11~12세기 정복지인 영국, 시실리, 나폴리를 여행하면 한때의 야만족이 文明건설자로 변신, 수많은 성당과 성채를 남긴 데 감탄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 1066년 노르만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40년 동안 약1000개의 城이 세워졌다. 그 전 600년간 없었던 건축 붐이 일어난 것이다. 노르만이 유럽에 유행시킨 건축양식이 로마네스크이다. 노르만이 점령한 나폴리와 시실리에서도 건축붐이 일었다. 나폴리의 海城인 '달걀 성'처럼 노르만이 지은 성과 성당은 규모가 컸다. 노르만의 야성은 중세의 침체기에 잠들어 있던 유럽을 깨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