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숭례문의 모든 흔적을 한 곳에

淸山에 2013. 6. 1. 13:26

 

 

 

 

숭례문의 모든 흔적을 한 곳에

 

 

 

 

 

 

 

[Why] [알랑가 몰라]

숭례문 성곽 돌은 어디서 왔을까
 곽창렬 기자

 


입력 : 2013.06.01 03:11

  
5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崇禮門)은 예전과 달랐다. 성의 외벽은 흰빛을 띤 돌과 누런색 돌이 섞였다. 이 돌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복원된 숭례문의 외곽을 둘러싼 성곽돌은 모두 4000여개다. 이 가운데 흰빛을 띤 돌은 약 3650개인데, 모두 이번 복원을 위해 새로 제작됐다. 여기에는 모두 7억여원어치의 원석(原石)이 사용됐는데, 이를 가공해 성곽돌로 만들어내는 데 든 가공 비용도 약 9억40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두 비용을 합친 전체 비용이 16억4000여만원이고, 돌의 수가 3650개인 점을 고려하면, 성곽돌 한 개당 가격은 약 50만원인 셈이다.

 

화재 이전에 숭례문 외벽을 장식했던 성곽돌 194개도 사용됐다. 복원 이전 숭례문 외벽에는 모두 800여개 성곽돌이 있었으니, 4분의 1 정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600여개 돌도 여전히 숭례문에 있다고 한다. 숭례문 외벽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이는 갖가지 종류의 돌로 채워지는데, 600개 성곽돌은 모두 여기에 사용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오랜 기간 외부에 노출되다 보니 틈이 생기고 깨져서 외벽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숭례문

숭례문   

 
이 밖에 서울 남산 자유센터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던 성곽돌 380여개도 숭례문 외벽에 사용됐다. 이 돌은 원래 서울 성곽 외벽에 수십 년 동안 있었기 때문에 숭례문의 원래 외벽 색깔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흰색 돌을 누런빛을 띠게 가공해서 숭례문 전체를 예전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는 없었을까. 문화재청은 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문화재 보존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옛 돌과 새 돌을 배치하는 데는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복원 공사 현장에서 관계자들이 외관을 보면서 적절히 배치한 것"이라며 "새 돌도 10년 정도 외부에서 비바람을 맞으면 오랜 기간 있었던 외벽처럼 누런빛을 띠게 된다"고 말했다.

 

 

 

 

 

 

 

 

 

 

 

 

 

 

 

 

 

불타기 이전의 숭례문 모습

http://blog.daum.net/dwban22/1541?srchid=IIMsilDF000#A1519E71B4A166DFE1E21F1

에서 옮겨 옴

 

 숭례문

 

오전에 용산에 갈 일이 있어 용산에 들려서 일을 보고 남대문으로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요즘 삼각대가 자꾸 눈에 밟혀 삼각대 구경하러 남대문 시장에 갔다가 새로 단장한 숭례문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차가 다니던 길을 막아 작은 소공원을 만들고 숭례문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예전에 숭례문은 차들이 다니는 도로 한 복판에 있어 보기에도 좀 그랬는데, 아주 잘 된 일인 것 같습니다.

*숭례문은 현재 소실되어 복원 공사 중에 있습니다. 이 사진은 화를 당하기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국보 제1호 숭례문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국보 제1호 숭례문
 

숭례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습니다.
 

숭례문
 

 숭례문 현판(관악산의 화기를 막기위해 현판을 세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숭례문 홍예반자의 청룡
 

 숭례문 홍예반자의 황룡

 숭례문 벽에 무수히 많은 총알 자국(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 성곽과 숭례문이 만나는 곳(자연석과 다듬은 돌의 만남)
 

숭례문

 

 

 

 

 

 

 

 

숭례문의 흘러온 자취

 

 


한성도

한양의 성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중앙에 동그랗게 표시해 놓은 부분이 한양성이고

빨간 동그라미들이 한양의 문들인데 대문이 4개 소문이 4개 있습니다.

한양성의 가장 아래부분에 큰 산이 하나 걸쳐있는데 그 산이 남산이고

남산 때문에 남대문은 정 중앙에 위치하지 못하고 남산 왼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지도의 맨 아래부분 진하고 굵은 검정색으로 가로 질러 있는 것이 한강입니다. 한강에는 돗단배들도 다니는군요.


 









숭례문 바로 안쪽

기와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한양에는 인구밀도가 무척 높았다고 합니다.


 


남대문통

남대문통입니다. 숭례문 바로 안쪽에 성벽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대문통"이라는 명칭은 일제때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일본군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가는 일본군





전차 개통 당시





숭례문 우립


숭례문 우좌

 

"우립"과 "우좌"는 "소가 섰다", "소가 앉았다"라는 뜻의 한자입니다. 별 내용아닙니다. ^^;





숭례문 칠패(시장)





1897





1897원경





1900년대










1910





1950





한국 전쟁 직 후

전쟁으로 숭례문은 전체적으로 내려 앉아서 완전히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대공사를 하게 됩니다.





보수 공사가 끝난 모습




 

 

 

 

 

 

 

 

숭례문, 5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작성자: 어니스트뉴스  2013.04.29 10:59:58  
 

 
[어니스트뉴스=손시훈기자]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5년 3개월에 걸친 숭례문 복구 사업을 완료하고 이를 기념하는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5월 4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숭례문과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기념식 행사는 ▲ 어린이 합창과 액운을 씻어내는 ‘천도(薦度)’ 등 식전행사(13:50~14:00) ▲ 개식타고(開式打鼓), 경과보고, 전통공연 고천(告天), 현판 제막식, 개문(開門), 희망보감 전달 등의 준공식(14:00~14:40) ▲ 희망우체통에 담긴 국민엽서로 제작한 희망보감(希望寶鑑)을 이봉(移奉)하는 길 닦음 행렬(14:40~15:40) ▲ 세종로에서 벌이는 자유연희마당(14:00~16:00) ▲ 광화문 광장에서 벌이는 ‘판굿, 비나리, 아리랑’의 주제공연(15:30~16:40)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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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문화재청]

 

기념식에 앞서 4월 22일부터 숭례문과 문화유산을 가꾸고 지켜 나가고자 하는 국민의 다짐과 문화융성에 대한 희망을 담는 ‘문화융성 희망우체통’ 행사를 진행 중이고, 또 숭례문 복구를 선대왕께 고하는 ‘고유제’를 5월 1일 종묘에서 개최한다.

문화재청은 이날 기념식을 ‘숭례문, 문화의 새 문이 열리다’를 슬로건으로, 숭례문 화재로 입은 국민의 상실감을 치유하고 온 국민과 함께 경축하는 국민 화합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치를 계획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2008년 2월 방화로 훼손된 숭례문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등 최고의 장인이 참여하여 복구하였다. 전통기법과 재료로 복구하기 위해 다양한 고증과 연구조사를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를 복구과정에 반영하였다. 기와는 직접 손으로 만들어 전통기왓가마에서 구웠고, 단청안료도 기존에 썼던 인공안료 대신 천연안료를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때 피해를 보아 임시로 복구했던 현판도 조선시대 탁본을 구해 원래 필체의 모습을 되찾았다. 또 일제에 의해 철거된 좌우 성곽도 복원하였다.

또 숭례문의 복구는 온 국민의 성원과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기증받은 소나무로 복구에 필요한 목재를 확보할 수 있었고, 국내·외에서 7억 원이 넘는 국민성금이 모금되어 공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복구 기간에는 2만 8천여 명의 국민이 전통방식으로 복구되는 숭례문의 모습을 직접 현장에서 관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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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염원 속에 다시 돌아온 숭례문은 기념식 이후부터 국민에게 공개되며,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또 5월 18일부터는 문루 상부(1층)는 매주 토요일(오전 11시, 오후 1시, 3시)과 일요일(오후 1시, 2시, 3시)에 특별 관람이 가능하며,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20명씩 접수를 받는다. 5월에는 관람시간을 오후 7시까지 1시간 연장 개방된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를 국민과 함께 경축하기 위하여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열리는 5월 4일 하루 동안 4대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를 무료 개방한다.

 

 

 

 

 

 

 

 

 

 

숭례문 복원식 기념.♠  
 


당신은 기여히 가셨더이까
산천도 울고 초목도 떨던 그날
서기 이천팔년 이월 십일 오후 여덟시사십분
하늘은 울울했고 바람은 소소했더이다.

육백년 세월의 유구한 숨결을 안고 이나라 수도 한 복판에

독야청청(獨夜靑靑) 지켜섰던
당신 님 숭례(崇禮)여 무엇을 지키려 자신을 불태웠더이까?
어디하나 온전한데 없는 이 나라에 무슨 가르침 주려 그리 했더이까?


그래도 내 조국이니 어찌 버릴손가

애국애족하라는 무언훈도(無言訓導)였더이까?
제 배 채우는데 급급하여 백성을 외면하는

위정자들에게 내리는 살신경언(殺身警言) 이 였더이까?

오호라 통재(痛哉)라~
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며 이름없는 민초(民草)와 운명을 같이했던

당신 님 숭례여 그대 이땅에 세워질때

조선의 한양은 무악(武岳)과 인왕(仁王)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백악현무(白岳玄武),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을 지리(地理)로 삼은후에
4문1루(四門一樓)을 세우고 시경(詩經)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오행(五行)에 배정하여 이름을 정하니
 

인(仁)은 동방이니 동대문(東大門)에 배속시켜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의(義)는 서방이니 서대문(西大門)에 배속시켜 돈의문(敦義門)이 되고
예(禮)는 남방이니 남대문(南大門)에 배속시켜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지(智)는 북방이니 북대문(北大門)에 배속시켜 소지문(炤智門)이 되고
중앙은 신(信)이니  종로 한가운데 루(樓)를 세워

보신각(普信閣)으로 명한고로
이때가 태조7년으로 년대가 1398년이니 헤아려보면

그대 님의 보령(寶齡) 610세가 되더이다
 

그 긴긴 세월동안 만고풍상 모진 시련에도

그대 숭례의 우뚝함은 흔들리지 않았더이다
경복궁이 임란(壬亂)으로 송두리채 잿더미가 된후 273년을

호공(虎公)이 출몰하는 공궐(空闕)로
변했을 적에도, 병자호란 삭풍이 강화까지 몰아칠 적에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6.25의 화마속에서도

이웃 광화문은 무참히 파괴되었으나

홀로 원형이 훼손되지않았으니
그대 숭례야 말로 민족의 흥망성쇠를 몸으로

기억하는 혼(魂)이요 얼굴이었더이다.

 

http://cafe.daum.net/kyo1055/IsHS/262?docid=4199345270&q=%BC%FE%B7%CA%B9%AE%20%BA%B9%BF%F8%BD%C4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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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된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이 5년 3개월 만에 국민 품으로 돌아온다. 숭례문 복구 사업을 마친 문화재청은 2013년 5월 4 일 복구 기념식을 열고 5일부터 일반에게 무료 개방된다.

 

 

 

 

 

 

1398년부터 2013년 숭례문의 역사

 

 

 

火魔(화마) 악몽 딛고 옛모습 되찾은 숭례문, 국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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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8년 2월 불의의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갔던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이 5년 3개월 만에 국민 품으로 돌아온다. ▶ 기사 더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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