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잡지 르네상스 시대의 주역
조갑제는 국제신문에서 해직된 것을 억울해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그 이유를 “그후로 내 인생을 망쳤으면 몰라도 오히려 잘됐는데 왜 원망하는가. 사실 그때 나는 부산이 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서울로 올라가서 큰물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면이 넓은 월간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10대 후반에도 생각해보지 않던 서울행을 그는 36세 때 단행했다. 월간중앙은 1980년 6월 정부 명령으로 폐간됐기 때문에 1981년의 월간지다운 월간지는 신동아뿐이었다. 그 전해 창간한 월간조선은 아직 미약한 존재였다. 그는 신동아 1981년 1월호와 5월호에 ‘르포 심장 기형 어린이의 삶과 죽음’ ‘르포 신체장애자의 실태’란 기사를 투고했다.
이러한 때 박정수씨가 새로운 개념의 월간지 ‘마당’의 창간을 준비했다. 그는 월간중앙을 나온 허술씨를 편집장에 임명했다.
당시의 월간지는 사진을 거의 쓰지 않고 교수와 원로 언론인의 글만 주로 게재했으므로 준(準) 논문집에 가까웠다. 이러한 월간지 제작은 일본 잡지를 모델로 한 것인데 박정수-허술씨는 이런 편집 관행을 깨뜨리려고 했다. 즉 월간지의 상징이던 세로쓰기를 하지 않고 가로쓰기를 하고 한글을 많이 쓰는 사실상의 한글 전용 잡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미국 잡지처럼 시각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을 세워 디자인과 사진파트를 강화했다. 표지에도 그림이 아닌 사진을 싣고 기사 속에도 큰 사진을 넣어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허술씨는 전문적인 필자를 확보하기 위해 조갑제씨 등 해직기자 출신을 채용했다.
아트디렉터로 안상수씨(현재 홍익대 미대 교수)를 임명해 미국식 잡지처럼 편집하도록 했다. 사진기자로는 윤평구(현 서울경제 사진부장)·정정현씨 등을 채용했다. 또 신입사원으로 김동현씨를 뽑았는데 김씨는 지금까지 조갑제와 함께 함으로써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진용을 갖춘 ‘마당’은 1981년 9월 소설가 박경리씨 손을 찍은 사진을 표지로 한 창간호를 내놓았다.
‘마당’은 발간 즉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조갑제는 여전히 르포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중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부산 김근하(金根夏)군 유괴 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기사였다.
1967년 부산에서 김근하라는 소년이 유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에 나선 경찰과 검찰은 해병대 출신의 건장한 청년 김기출씨를 범인으로 체포해 살인 유괴 혐의로 기소했다. 그런데 법정에 선 김씨는 범행을 부인하고 변호사의 노력으로 고문받은 사실이 밝혀져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사는 법원 판결이 있은 후 “재판 결과가 어떻든 범인은 피고가 틀림없다”고 주장해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석방된 김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므로 1982년은 김군 살해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였다. 이 사건의 진원지가 부산인 만큼 조갑제는 이 사건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김군 살해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기를 택해 이 기사를 작성했다. 그는 “공명심에 가득 찬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고문을 해 사건을 조작했는지가 내 관심사였다. 그 고문으로 인해 전과(前科)도 없는 건실한 한 젊은이의 인생이 어떻게 망쳐졌는지를 추적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검찰에서는 고문에 의한 무리한 수사의 사례로 종종 이 사건을 거론한다. 연극인 김동훈(작고)씨는 이 기사를 토대로 연극을 만들어보자며 ‘신화 1900’이라는 제목의 연극 시나리오를 써 공연에 들어갔는데, 이 연극이 그해 상을 휩쓸었다.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MBC 드라마 ‘수사반장’의 작가 윤대성씨도 이 기사를 토대로 드라마용 시나리오를 썼다.
![07](http://blog.donga.com/milhoon/files/2013/05/07.jpg)
조갑제씨는 허술씨에 이어 ‘마당’의 2대 편집장이 되었다가 1983년 10월 월간조선으로 옮겨간 허술씨를 따라 월간조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씨는 MBC 해직기자 출신인 오효진(吳?鎭·63·전 충북 청원군수)씨도 월간조선으로 불러들였다. 조갑제 후임의 ‘마당’ 편집장은 서울에 올라와 해운 관계 일을 하고 있던 정순태씨가 맡았다.
이때 부산일보에 근무하던 부인 임귀옥씨가 ‘경향신문’으로 옮겨옴으로써 그는 비로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장남이기 때문에 부산에서도 양친을 모시고 생활했는데 그의 부모도 함께 올라왔다.
그는 “조선일보에 들어온 후 취재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조선일보 입사가 나로서는 가장 소중한 날개를 단 격이었다. 지방지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할 때는 취재원에게 나에 대해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동아에만 있던 기자들은 누구를 만나자고 해도 무시당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월간조선 기자가 된 후 그는 르포 취재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생소한 영역이던 탐사보도 쪽으로 비중을 옮겼다. 탐사(探査)보도란 영어로 investigative report로, 수사기관이 수사를 하듯이 기자가 하나하나 진실을 추적해가는 것이다. 탐사보도를 하면 진실을 아는 사람은 기자 한 사람뿐이므로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이를 기사화한다. 따라서 기존에 알려진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뒤집기 기사’를 써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12월 신동아가 해낸 ‘수지킴 사건 진실’ 보도다.
3공 비화 추적
조갑제·오효진의 영입으로 1980년 4월에 창간된 월간조선은 신동아를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신문은 1979년과 1980년에 벌어진 엄청난 사건들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은 박정희가 통치했던 3공화국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과 비화(秘話)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5·16 때 총을 들고 일어났다가 10·26 때 총을 맞고 쓰러진 박정희만큼 흥미진진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월간지는 신문이 쓰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10·26사태 때 피고인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취재해 10·26사태를 재구성하는가 하면, 부마항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추적한 보도를 내놓음으로써 부마항쟁과 김재규 그리고 10·26사태 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월간지 기자들이 보도자료가 없는 공간에서 발로 뛰어가며 진실을 추적하는 탐사보도가 시작된 것이다. 1980년대라고 하는 ‘잡지 르네상스’가 열리는 전주곡이 울린 것이다.
잡지 르네상스는 해직기자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해직을 당해봤기에 탐사보도라는 위험한 취재에 도전할 자세가 돼 있었다. 이 시기 신동아에서 현대사를 추적한 대표적인 기자가 강성재(姜聲才·작고) 이경재(李敬在), 윤재걸(尹在杰), 김대곤(金大坤)씨였다. 이중 김씨를 제외한 세 사람이 해직기자 출신이다. 월간조선에서는 해직기자 출신인 조갑제와 오효진 기자가 주 공격수를 맡았다.
3공화국 비화를 추적한 1984년 후반부터 두 잡지의 판매율은 상승곡선을 그리다 1987년 정점에 올랐다. 이 시기 두 잡지를 이끌던 부장이 서울대 사학과 동기동창인 김종심(金種心·신동아), 유정현(劉正顯·월간조선)씨였는데,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3공 비사를 추적하는 탐사보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1987년 10월 두 부장은 이종각(李鍾珏)과 오효진 기자를 내세워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 인터뷰를 성사시켜 40만부 발매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다. 신동아는 이씨를 먼저 인터뷰했고 기사 양도 훨씬 많았으므로 이 보도로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3공 비화 추적과 관련해 조갑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기 전,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을 나온 원산 출신의 이모 여인과 동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 여인은 박정희와 헤어진 후 푸줏간을 하던 사람과 결혼해 살다가 작고했다. 이 여인과 박정희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와 결혼하기 전 고향(경북 선산)에서 부모가 맺어준 여인과 결혼해 딸을 낳고 이혼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다른 여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인·터·뷰 조갑제
“호남인은 김대중과 대한민국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조갑제씨는 화투와 당구, 운전을 못하지만 컴퓨터는 배워서 1999년부터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조갑제씨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다. 사람 눈을 마주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눈길을 피한다. 그는 스스로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마이크를 잡는 것은 체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 눈을 정시(正視)하건 하지 않건, 마이크를 잡았건 잡지 않았건 할말은 한다.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말을 들어보았다.
▶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언론인 출신인데 왜 대중 강연을 하는가.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달라도 사실을 알리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글을 못 쓰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반역 선언이라는 주장을 조선, 동아에서도 실어주지 않으니 강연을 통해 알리는 것이다.”
▶ 현역 기자들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김정일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위원장을 붙이면서도, 박정희는 그냥 박정희라고 쓰는 것이 우리 언론 아닌가. 왜 아무 검증도 없이 한총련을 진보라고 표현하는가. 노무현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수구좌파의 주장을 왜 우리 언론이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가.”
▶ 그렇다면 선배 기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지금 후배 기자들이 누리는 언론자유를 만들었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 이 자유를 쟁취했다. 자유는 절대 공짜가 아닌데 요즘 기자들은 Freedom is free, 즉 자유를 공짜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6·29민주화선언은 권력이 그냥 준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다.”
▶ 지금 언론 중에서 어떤 것이 잘못됐다고 보는가.
“한겨레, 오마이뉴스 같은 좌파 언론이 정부 지원(신문발전기금)을 받는 것이 가장 잘못된 것이다. 정부지원금을 받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 ‘정부 기관지’다. 담뱃갑에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경고문을 써 넣는데, 정부 지원을 받은 언론도 표지 옆에 ‘우리는 정부 지원으로 만들었으니 지나친 정독은 건전한 비판 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란 문구를 써 넣어야 한다.”
김영삼은 좌파의 宿主
▶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지 말라고 했는데, 조 대표가 좋아하는 박 대통령은 권력의지가 강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는 국민교육헌장 첫 문장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 문장이야말로 박정희의 권력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박정희에게 권력은, 생각한 것을 이루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바꾸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3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네 왕을 거치면서 병권(兵權)을 쥐고 있었는데도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통일만 생각했기에 왕들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김유신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생각을 박정희가 했다. 박정희는 서구의 민주주의를 그대로 도입하자는 김대중과 김영삼씨 등을 우습게 보았다. 경제성장 없이 민주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이론인데도, 두 사람과 학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바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야말로 사(士)자들이 갖고 있는 사대주의가 아닐 수 없다. 기자들은 이러한 것을 정확히 알고 기사를 써야 한다.”
▶ 김영삼씨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조대표가 만든 월간조선은 김영삼 후보를 밀어준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지금의 좌파를 키워준 좌파의 숙주(宿主)다. 우파이면서 좌파가 활약할 수 있도록 한 실패한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순수한 민주투사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로는 실패했다. 그는 중앙청을 부수고 청와대 구 본관을 부숨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부정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그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은 월간조선이다.”
▶ 한국 월간지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면.
“1980년대 이전의 월간지는 일본 월간지 체제를 모방했다. 그러나 월간조선과 신동아가 경쟁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식 잡지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두꺼운 책에 다양한 내용, 특종 기사까지 실린 잡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다. 일본 잡지는 기자들이 기사를 쓰지 않지만 한국 월간지에서는 기자들이 직접 기사를 씀으로써 이러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신문 기준에 따르면 월간조선과 신동아는매월 특종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월간조선 편집장과 대표를 했지만 정작 조 대표의 기사는 월간조선에서 여러 번 빠진 것으로 안다.
“완전히 빠진 기사는 몇 개 안 된다. 그 정도면 쓰고 싶은 것 거의 쓴 셈이다.”
▶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가.
“기사 쓰는 것으로 푼다. 나는 기사를 쓰면 기획하는 재미, 취재하는 재미, 취재한 것이 인쇄돼 나오는 것을 보는 재미, 기사를 잘 썼다고 칭찬 듣는 재미, 그리고 그 책이 팔려서 봉급을 받는 재미의 여섯 재미가 있다고 본다.”
▶ 김대중씨를 비판하는 것은 호남 정서에 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김대중씨를 비판하는 것이지 호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씨가 국가 이익과 어긋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인간적인 감정을 빼놓고 비판한다. 호남사람들은 김대중과 대한민국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다. 호남인들도 대통령을 냈기에 이제는 여유가 있다. 비판을 수용하는 포용력을 갖고 있다.”
▶ 안보상업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것이 왜 나쁜가. 안보 기사 쓰고 많이 파는 것인데, 과장을 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좋은 일 아닌가.”
▶ 반김반핵 운동을 하면서 재벌그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몇 재벌의 언론 담당자들은 회장의 지시로 조 대표를 지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재벌들이 정부 눈치 안 보고 애국운동에 동참하는 열성이 있는가? 우리가 펼치는 애국운동에 동참하겠다며 지원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감사히 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反박정희에서 親박정희로
이 정보는 박정희와 육영수를 중매한 예비역 장군 출신 인사가 제공한 것이었다. 기자는 지난해 우연히 이 인사를 만나, ‘박정희와 이 여인이 동거하다 헤어진 이유와 그 사실을 조갑제에게 알려준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예비역 장군은 박정희 시절 투옥된 경력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박정희를 근대화를 이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조갑제가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면서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두 번 해직됐던 조갑제는 3공 비화를 취재하면서 반(反) 박정희에서 친(親) 박정희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이러한 변신에 대해 “박정희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수성을 느끼면서 그의 권력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로 간략히 설명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정순태씨 설명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그는 조갑제에 이어 월간지 마당 편집장을 하다 정경문화를 거쳐 월간중앙 부장을 하며 현대사를 추적한 기자다.
“기자가 된 직후인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를 해보곤 유신 내내 단 한 번도 대통령선거를 해보지 못했다. 유신이 선포됐던 1970년대의 박정희는 너무 강했기에 젊은 우리들은 심정적으로도 그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해직까지 됐으니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조갑제도 박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3공 비화를 추적하면서 박정희는 일본의 일류교육, 미국의 장교교육을 받은 실용적인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갑제는 ‘마당’에 있을 때 이미 박정희의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때 우리는 독자가 박정희 시대의 비화를 밝히는 것은 좋아하지만, ‘박정희는 여자를 좋아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면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볼펜을 들고 있는 ‘먹물’보다 시장에 있는 국민이 진실을 먼저 본 것이다. 하루 두 끼를 먹던 국민은 박정희 덕분에 세 끼를 먹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은 이러한 역사 발전은 박정희였기에 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조갑제는 후진국의 리더로서 박정희만한 사람이 없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박정희의 대변자가 돼갔다.”
1985년 양대 월간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두 특위가 열렸을 때 의원들은 두 잡지의 기사를 인용해가며 증인들을 추궁했다.
광주서 불매운동 당해
흔히 수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을 가리켜 ‘머리가 좋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갑제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신문사 조사부는 기사를 주제별로 분류해놓는다. 조씨의 부인으로 경향신문 조사부에 근무하던 임씨는 “기자들이 요구한 자료를 검색하다 찾지 못하면 할 수 없이 그 사건이 발생한 무렵의 신문을 뒤질 수밖에 없다. 이때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건이 언제 있었지?’라고 물으면 그는 ‘몇 년 몇 월에 있었다’고 대답해주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조씨의 말이다.
“1980년 5월 4일간 광주에 체류하면서 내가 확인한 사망자의 시신은 105구였다. 내가 빠져나온 후 다시 계엄군이 들어가 유혈사태를 빚으며 시위를 종식시켰으니 그때 또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정부는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내가 추정한 수치와 비슷하다. 그러나 1985년 각 월간지가 광주사태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국민은 광주사태 사망자가 2000여 명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사상자가 200여 명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로 인해 광주에서는 불매운동이 일어나 월간조선의 판매율이 크게 떨어졌다. 광주사태는 그후 여러 차례 재조사가 반복되고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실종된 사람에 대한 신고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숫자는 군경을 포함 200여 명이고 행방불명자는 50여 명이었다. 행방불명자를 더해도 희생자는 250여 명이 아닌가. 진실을 보도하고 판매에서 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랑스러운 패배였다.”
1980년대의 잡지 르네상스는 3공 비화와 광주민주화운동 추적 보도만으로 열리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라고 하는 5공의 비화를 추적하고, 아울러 미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기에 잡지 르네상스는 열릴 수 있었다. 3공과 5공, 미국에 대한 취재는 자연 군과 정보기관에 관한 취재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12·12 세력은 권력을 잡은 후 자신들의 대표인 전두환(全斗煥)씨를 홍보하기 위해 소설가 천금성씨로 하여금 ‘황강에서 북악까지’란 제목의 전씨 전기를 쓰게 했다. 5공은 인기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황강에서 북악까지’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조갑제는 천씨를 주목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천씨가 5공 세력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취재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2001년 기자는 해양작가이기도 한 천씨와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해외순항 훈련을 동행했는데, 이때 활달한 성격의 천씨는 조갑제씨가 어떻게 5공의 집권 과정을 취재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못 쓴 이야기가 많지. 전두환씨의 라이벌이 김복동씨인데 두 사람이 어떻게 경쟁했는지를 들었지만,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쓸 수 있나? 조갑제씨는 이러한 것을 많이 물어갔다.”
워커 주한 미대사의 분노
1986년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월호에 ‘한국 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리서치 유닛(Research Unit)이라는 이름의 미 CIA 한국거점이 어떻게 구성돼 있고 어떤 활동을 하며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이들의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밝혀버린 것.
주한 미대사관이 발칵 뒤집혔다. 이러한 정보는 CIA와 늘 접촉하는 안기부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것이다. 화가 난 워커 주한 미대사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다. 조갑제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남산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의 지하 조사실로 들어가 취재 경위를 조사받았다. 이때 대공수사단장이 현재 한나라당 의원인 정형근(鄭亨根) 검사였다. 조씨의 설명이다.
“영장 없이 임의동행한 것이라 48시간 조사를 받고 나왔다. 대공수사단의 조사는 부산 중정지부의 조사보다 훨씬 치밀했다. 경찰 수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사관들이 계속 교체돼 들어와 묻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 미진한 부분을 추려 다시 조사를 했다. 그들의 조사 속도는 매우 빨랐고 조사 태도는 열성적이었다.”
▶ 주로 어떤 것을 묻던가.
“취재원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는 취재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진술 조서는 많이 썼는데 그들은 그것을 재빨리 분석한 후 내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잠도 자지 않고 조사를 했다. 매우 효율적으로 수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 방어하기가 힘들었겠다.
“그들은 내 기사를 한 문장 한 문장씩 따지면서 캐물었다. ‘긴 기사를 썼기 때문에 고통도 세게 받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 수사관들이 안 잤으니 조 대표도 자지 못했겠다.
“작은 침대에서 자게 해주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안기부는 영장이 없음에도 노모(老母)가 혼자 지키고 있던 그의 집으로 수사관들을 보내 관련 자료를 몽땅 가져갔다. 부인 임씨는 “가족으로서는 그때가 가장 긴장됐던 때”라고 기억한다.
▶ 기자도 가끔 쓴 기사와 관련해 국정원과 기무사로부터 항의를 받아봤다. 그런데 그들은 취재원이 어디인지 알고 항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치밀하게 조사해서 여럿이 덤비는 수사관보다 내가 머리가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는가. 수사관들이 나를 봐줬다고 생각한다. 이미 기사는 나왔고 취재원을 찾아내봤자 또 골치 아픈 일만 생기니 찾아내지 못한 척 넘어가준 것으로 본다.”
한국 내 미 CIA를 완전히 까발린 것은 지금의 조갑제 관점에서 보면 국익을 해치고 북한을 도와준 것이 된다. 그는 치밀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눈여겨보면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조사 과정에서 조갑제와 정형근이처음 만났다. 정형근 의원은 조갑제와 동갑인 1945년생으로 경남고를 나왔다. 그러나 대학 학번은 1년 빠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 일부 인사들은 정형근 단장이 조갑제 기자의 뺨을 때리며 직접 조사했다고 말한다. 뺨을 때렸다는 데 대해 두 사람 모두 부인한다. 정형근 의원이 오래전 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정형근과 조갑제의 만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판단이 매우 정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북한의 실상과 한반도 안보상황을 정확히 알려주면 제대로 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후 조갑제씨에게 한반도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도록 했는데 이것이 그의 사상을 변하게 했다. 앤티(anti) 김일성이 된 것이다.
요즘은 좌파가 기득권을 가진 세상이다. 이러한 때 조갑제 대표라도 있으니 현실을 직시하는 보수 세력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좌파에 맞서 어떻게 싸웠다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조갑제 대표는 후대에 평가받을 것이다. 나와 조갑제는 시대를 앞서갔다.”
조씨는 안기부 간부 시절의 정 의원과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가란 질문에 “내 취재원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 그는 나와 비슷한 국가관(觀)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최고라는 생각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10·26사태 막전막후에는 군과 정보기관이 얽혀 있다. 광주사태의 앞뒤에도 군과 정보기관 권력이 깊게 개입해 있다. 그는 권력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내 CIA 거점 취재를 통해 안기부와의 ‘진한 만남’을 가졌는데, 이를 통해 그는 시야를 한국에서 한반도로 넓힌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로 돼가던 시절에도 이념에 어긋난 사실이 밝혀지면 이를 보도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실은 이념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인데 1989년 3월호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제하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수근은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하던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귀순했다. 그가 남쪽으로 넘어올 때 판문점에 있던 북한군은 그의 월남을 막기 위해 총격을 가했다. 귀순용사 이수근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여교수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나갔다 체포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1969년 7월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 그는 남쪽에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홍콩과 베트남을 거쳐 제3국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검거된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준 대로 연설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이러한 그가 검거되자 김형욱 중정부장은 조잡한 암호문 등을 만들어 그를 위장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지금 북한 위정자에게는 조갑제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북한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갑제를 보았다. 함영준씨는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내고 퇴직했다. 그는 조갑제의 ‘한국내 미 CIA’ 보도가 있은 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을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50대의 북한 ‘민주조선’ 기자와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
“조갑제는 스파이 50명보다 낫다”
“내가 조선일보 기자라고 했더니 ‘민주조선’ 기자가 자꾸 조갑제 선배에 대해 물어왔다. 아는 대로 이것저것 답변해주니 ‘참 대단한 사람이네… 스파이 50명 보다 훨씬 나아’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가 북한 인권탄압에 대해 많은 것을 보도한 199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 취재를 갔더니 북한 기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조갑제 선배를 비난했다.”
조갑제는 한국 문제에 관심이 많은 주한 일본특파원들의 관심도 끌었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와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카와 마사하루 기자가 그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한국 문제에 대한 견해를 넓혔다. ‘마당’ 시절의 조갑제씨를 만나 25년째 그와 교류해온 구로다 특파원의 말이다.
“10·26과 12·12, 광주사태 등은 매우 미묘한 사건인데, 조갑제 기자는 이념적인 오염 없이 탐사보도 형식으로 취재해 썼기에 우리는 그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할 수 있었다. 조갑제씨는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를 모델로 한국식 월간지를 만든 사람으로 본다. 그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항상 진지했다. 항상 자기 테마를 갖고서 집요하게 추적했는데, 이는 국적을 막론하고 스쿠프(scoop, 특종)하는 기자의 공통점이다.”
▶ 일본에서 유명한 잡지 저널리스트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66)인데, 그와 조갑제 기자를 비교하면 어떤가.
“1974년 ‘문예춘추’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그 금맥과 인맥’을 써서 그해 연말 다나카 총리를 낙마시키고 2년 후 록히드 사건을 터져나오게 한 다치바나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다치바나는 작가이고 조갑제는 저널리스트다. 다치바나는 주제를 정하면 광범위한 자료를 섭렵한 후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러나 조갑제는 먼저 사람을 만나고 나중에 자료를 취합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널리스트라고 하는 기자는 직접 기사를 쓴다. 그러나 다치바나는 직접 쓰지는 않는다. 그는 스태프를 거느리고 있어 스태프로 하여금 자료를 구하게 하고 이를 정리해 필요한 사람을 인터뷰한다. 그리고 다시 정리해 출판하는 작가적 에디터(editor)로 활동하고 있다. 조갑제와 비교할 만한 일본의 저널리스트는 ‘산케이’의 시바타 미노루(작고), ‘아사히’의 후나바시, ‘마이니치’의 고모리 기자 등이다.
특종 기자는 회사에 대한 충성보다는 ‘일에 대한 충성’ ‘기사에 대한 충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시간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차갑다’ ‘쌀쌀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차갑다는 느낌은 취재 잘하는 저널리스트, 잘 쓰는 작가, 똑똑한 정치인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자기 목표 달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것, 재미가 없더라도 상대 이야기를 들어주는 배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적은 경우가 많다.”
1980년에 활약한 잡지 기자 중에서 1990년대까지 활동한 기자는 조갑제와 정순태뿐이다. 왜 조갑제는 살아남았을까. 1970년대 그는 직장인 국제신문과 불화했으나 1980년대 조선일보사(社)에서는 화합할 수 있었다. 박정희를 이해한 그는 신문사 간부들의 세계도 이해한 것이다. 그의 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 기사로 인해 조선일보의 회장과 사장, 역대 출판국장과 ‘월간조선’ 부장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분들께서는 내게 외부에서 이러한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차단해주셨다. 젊은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로 언론사가 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기자의 힘보다는 간부들이 보이지 않게 쳐주는 방벽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본다. 나는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해본 기자가 될 수 있었다.”
제4부 보수를 주도한 ‘10년 편집장‘
언론사 생활 만 20년을 코앞에 둔 1991년 초 조씨는 월간조선 부장이 되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해온 기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는 “부장이 되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해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신문기자와 잡지기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자와 편집장(또는 부장) 사이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편집장, 특히 월간지 편집장은 기자와 외부필자들이 쓴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짧은 시간에 읽어내야 한다.
매달 월간지에는 단행본 3권을 만들 수 있는 3500매 정도의 원고가 게재되는데, 편집장은 이를 닷새 사이에 읽어내야 한다. 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의 부장이 한 달 동안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원고를 닷새 사이에 읽어낸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읽듯이 슬슬 읽어서는 안 된다. 문장을 바로잡아주고 기사가 안고 있는 오류도 잡아내는 정독(精讀)을 해야 한다. 편집장이 발견하지 못한 오류는 잡지가 발매된 후 그대로 소장(訴狀)이 돼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조갑제는 이 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냈다. 빨리 읽으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특한 독서 습관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부인 임씨는 조선일보 사보에 ‘남편은 새벽 1, 2시에 책, 신문, 잡지를 한 보따리 싸안고 집에 돌아와 화장실로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함흥차사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한바탕 하려고 전의를 불태우다가도 내가 먼저 지쳐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조씨는 사적(私的) 관계보다 공적(公的) 관계를 중시한다. 친구나 동창·동향(同鄕)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취재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는 공적인 관계가 사적인 관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1차 북핵 위기가 한창이던 1994년, 월간조선에 근무했던 기자는 유명 역술인과 무속인을 찾아다니며 김일성(金日成)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연월일(年月日)은 북한인명록에 나와 있는 것을 토대로 음력으로 환산했고, 시(時)는 모르는 상태에서 봐달라고 했는데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역술인과 무속인 모두가 ‘올해(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다’고 예언한 것.
기자는 이를 5월호 월간조선에 기사화하며 리드를 음력 5, 6월에 김일성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무속인 심진송씨 이야기로 잡았다. 그런데 그해 7월10일 김일성이 진짜로 사망했다. 북한은 다음날 ‘위대한 수령’의 사망을 발표했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김일성은 음력으로 5월30일 죽었고, 6월1일 사망 사실이 발표됐다. ‘신이 선택해준 특종’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심씨는 일약 유명인사가 돼 그를 만나려면 1년 반 전에 예약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후 추가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 때 만난 모든 무속인과 역술인에게 사무실로 나와달라고 했다. 그때 신문사에 처음 와봤다는 심씨가 눈빛으로 조 부장을 가리키며 “저 안쪽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장이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기가 센데, 저 사람한테서 나오는 기가 가장 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잡지는 신문과 내용이 확연히 구분되고 타깃을 분명히 정해야 이목을 끈다. 이를 증명한 것이 1980년대의 잡지 르네상스이다. 1980년대 월간지는 민주화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매진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87년에 나온 6·29선언은 이 목표가 달성됐음을 알리는 ‘반가운 종소리’면서 동시에 목표 상실로 인한 월간지의 퇴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조갑제는 민주화 달성이 초래할 잡지시장의 변화를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한 사람이 되었다. 부장이 된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북(對北)’을 주 취재 대상으로 삼았다. 다른 월간지는 그의 선택을 과소평가했다. 대북은 3공 비화나 5공 비화, 광주사태 등에 비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가 사라졌는데 대북을 타깃으로 설정한 조갑제의 선택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는 과거와 다른 방법으로 북한에 접근했다. 북한에서 나온 사람을 직접 취재함으로써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펼친 것. 그는 북한이라고 하는 넓은 주제 중에서도 인권 탄압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범 수용소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는 기자를 주로 투입했다.
시작은 북한군 최전방 부대에서 소대장을 하다 막 귀순한 김남준씨(작고)를 만나 그가 방문했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기사를 쓰게 했다(1991년 1월호 별책부록). 그러나 김씨의 정치범 수용소 경험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듬해 그가 바라던 탈북자가 들어왔다. 강철환씨가 한국에 온 것이다.
민주화를 대체한 타깃, 對北
강씨는 지난해 6월14일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평양의 어항’이란 책을 건넨 탈북자다. 북송 재일교포의 아들인 강씨는 부모와 함께 함남 요덕군에 있는 15호 수용소(일명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92년 안혁씨와 함께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다. 정치범 수용소 출신으로는 최초의 탈북자인데, 당시 언론은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기자는 조 부장의 지시로 두 사람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 후 이를 두 사람의 육성 수기로 정리해 보도했다(1992년 11월호). 그후 조 부장은 김용삼(金容三) 기자로 하여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게 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 언론이 북한의 심각한 인권 탄압을 거론하게 된 것. 그 결과 두 나라는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부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일보 기자가 된 강씨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대북 문제에 집중한 김 기자는 1997년 3월호에 북한을 탈출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 망명 직후, 그가 KLO 부대장 출신의 이연길(李淵吉)씨와 탈북을 위해 주고받은 편지와 논문을 공개함으로써 이목을 끌었다(이 시기 조씨는 잠시 부장 역을 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북 문제 보도로 인해 월간조선은 가장 보수적인 잡지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5월호부터 8월호까지 그는 여러 기자를 동원해 북한이 팠을지도 모르는 장거리 땅굴 관련 사실을 취재하게 해 이를 집중보도했다. 이른바 월간지식 ‘이슈 메이킹(issue making)’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와 육군이 땅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겸한 설명회를 열었다. ‘포항석유는 가짜다’라는 논문을 만들어 뿌릴 때와 유사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땅굴이 있다고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단정적인 보도는 하지 않았다. 통일이 돼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92년 9월호부터 12월호까지는 이선실 간첩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기자들로 하여금 안기부 대공수사국 수사관들을 직접 만나게 해 취재하도록 했는데, 이는 잡지가 신문을 리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땅굴과 이선실 보도는 안보상업주의적인 보도라는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1992년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땅굴과 이선실 간첩 사건 보도는 김영삼 후보에게 유리한 기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친YS’로 평가되던 조 부장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얼마 후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란 제목의 기사를 써가며 김영삼 정부를 비판했다(1993년 11월호).
이 기사에 대한 반발은 안팎에서 밀려왔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그해 10월29일자 ‘조선노보’에서 ‘기자가 어디까지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으며 특히 필자가 한 부서의 책임자인 경우 그 한계는 어떻게 되는가’란 의문을 던지며 이 기사를 비판했다. 월간중앙과 문화일보 경향신문도 이 기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논란을 계기로 조 부장은 ‘친(親) 박정희’와 ‘반(反) 북한’ 세력을 ‘월간조선’ 주 독자층으로 끌어들였다. 잡지 타기팅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긴장으로 불화를 잠재우다
그는 대식가(大食家)다. 그런데도 살이찌지 않는데 이는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긴장시키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리고 그 긴장으로 취재원과 후배기자를 긴장시켜 몰아붙인다. 빠른 시간 내에 그가 엑스(진액)를 뽑아 올리는 비밀은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선(善)하면 약(弱)’한데, 그는 ‘선하면서 강(强)하고 지독(至毒)’했다. 선하면서 지독한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후배기자들은 숨막혀했다. 반김정일, 친박정희 일변도로 잡지를 만드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화를 그는 성실이라는 긴장으로 장악했다.
잡지가 나온 후 그는 부원들을 끌고 단체로 영화 관람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영화보다는 감독이 그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클리프 행어’란 영화를 보았을 때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 영화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떠올려봐라. 앉아서 대화하는 게 아니고 걸어가면서 대화한다. 카메라맨도 카메라를 땅에 고정해놓고 찍지 않고, 들고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찍었다. 그로 인해 화면이 계속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 때문에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는데도 보는 사람은 긴장하게 된다. 잡지 기사도 그런 식으로 구성해야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살인자의 변호인을 만나서 변호사의 논리로 살인자의 살인 혐의를 입증하라’는 식의 요구도 했다. 이는 살인자가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확히 밝히라는 주문이었다. 살인한 이유를 밝힌 사람은 결국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야 깊이가 있고 독자도 읽어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당신은 살인자’라고 써도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층취재의 본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안기부도 속이는 담대함
그는 폭로기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폭로기사를 다룰 땐 대담하고 교묘한 트릭을 쓰기도 했다. 5공 시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낸 김성익(金聲翊)씨가 대통령의 언행을 기록하는 통치사료 비서관을 맡았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전두환씨는 백담사로 장기 유배를 갔다왔었고 이 시기 노 대통령은 6·29선언은 자신의 업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때 조 부장은 김씨를 만나 6·29선언이 있기 전 전두환-노태우씨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통치사료를 근거로 6·29선언 아이디어는 전두환씨가 낸 것이라는 기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기사를 준비하면 안기부가 작심하고 막아설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기사를 다룬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내부 보안부터 강화했다.
김씨가 쓴 기사는 다른 기사와 달리 여러 기자가 돌려 읽으면서 수정케 하지 않았다. 그와 권영기 차장 둘이서만 읽었다(덕분에 이 기사는 교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한때 안기부는 인쇄소에 들어가 인쇄 중인 잡지를 보고 윤전기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의식한 그는 이 기사가 실린 대지를 별도로 인쇄했다. 이 기사가 들어간 표지와 목차도 따로 만들게 했다.
그는 합본 단계에서 가짜 기사와 가짜 목차, 가짜 표지를 버리고 진짜 기사와 진자 목차, 진짜 표지를 합쳤다. 그리고 이 잡지가 교보문고 등 큰 서점에 배송된 것을 확인한 뒤 몸을 감췄다(1992년 1월호). 다음날 월간조선의 모든 기자는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상부에 보고라도 해야 하니 이 기사의 내용과 이 기사가 어떻게 해서 실리게 되었는지라도 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가 부장에 임명될 때만 해도 “그는 기자지 행정가가 아니다”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행정가로서도 역량을 보였다. 그가 부원들을 통솔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자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 불만이 있어도 따라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기자들은 편집방향 등에 불만이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월간조선에 이어 조선일보도 반북(反北)으로 돌아서면서 조선일보는 보수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한은 이를 적대시하며 조선일보 간부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1997년부터 1998년 사이 경찰은 몇몇 조선일보 간부의 집을 보호했는데 그중 한 명이 조갑제였다. 10년 전 북한 기자로부터 ‘스파이 50명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갑제는 이제 그들의 적이 된 것이다.
언론계에는 ‘10년 국장’이라는 말이 있다. 편집국장을 10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똑똑한 사람이 많은 언론계에서 ‘10년 국장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10년 편집장’을 해냈다. 그는 2000년 말까지 월간조선 편집장을 하다 분사(分社)해 월간조선사를 만들고 편집장 겸 사장을 하다 2004년 9월 김연광(金演光)씨에게 편집장을 물려주었다.
중간 공백이 있긴 하지만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13년간 잡지 편집장을 한 것은 전무후무할 기록이다. 그가 월간조선 사장에서 물러난 것은 과도한 시국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김정일, 반핵, 반김대중 집회에 앞장서면서 기자보다는 대중 운동가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했으니 회사측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는 과격한 발언으로 일부 좌파 단체로부터 내란선동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월간조선사를 퇴직했지만 그는 언론인임을 자임한다. 그는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취재한 것을 보도하는 ‘1인 언론사’의 기자다. 조선일보라는 거대한 울타리 밖으로 나왔음에도 대북, 대(對)좌파 투쟁의 불길을 사그라뜨리지 않고 있다.
김정일을 사탄, 김대중을 한국 현대사의 검은 그림자라고 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여적죄 혐의로 조사하라고 하는 그는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그는 기자인가 운동가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크기만 한 ‘그림자’를 갖고 다닌다. 몸이 크면 그림자도 크고, 작으면 그림자도 작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만큼 조갑제는 역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종요로운 시기에 보수적인 관점에서 주목되는 발언을 내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비판이 따라 붙는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그의 발언에 ‘귀’를 열어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비판이 많다는 게 아니라 그가 ‘아이쿠’하며 겁을 먹을 정도로 싸늘한 비판이 드물다는 점이다.
조갑제씨를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쓴 진중권씨(중앙대 독문과 겸임 교수)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강교수는 2005년 7월호 ‘인물과 사상’에서 ‘조갑제씨가 만약 직장을 운동권으로 옮겨서 그 환경 속에서만 살았다면 그는 극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조갑제 비판론
그는 이 글에서 ‘조갑제는 사실 또는 팩트라는 옹고집 방패가 있다’라며 ‘조갑제씨는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의 위험, 개개인의 보는 눈의 입장에서 세계를 생각하는 시각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며 조씨가 몸 담아온 조선일보를 주목했다.
강 교수는 ‘자동차(car)가 운전자를 감싸는 누에고치(cocoon)이 돼 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카쿤(carcoon)이라는 조어가 있듯이, 조갑제씨는 조선일보(chosun)라고 누에고치에 갇힌 초쿤(chocoon)이라고 표현했다. ‘조갑제=조선일보’로 보고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씨의 해석은 좀 다르다. 지난 4월 그는 정치웹진 다요기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
“조갑제씨는 옛날엔 꽤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는 게 황당하다. ‘쌀가마니를 매단 풍선을 북한에 보내자’는 수준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라’는 말이나 ‘강남 부자들이 친북 좌파들보다 못하다’는 발언을 보면 코미디언 비슷하게 돼 버린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도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조선일보도 이 분하고 거리를 두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이를 전체 보수진영 논리로 채색해, 보수 전체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교수는 ‘조갑제=조선일보’로 봤는데, 진씨는 조선일보와 조씨가 헤어졌다고 정리한 것이다.
일본 언론의 분석도 흥미롭다. 독도 문제를 놓고 한일간에 마찰이 컸던 지난 4월 조씨는 ‘부자 나라 일본과 대립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었다. 조씨는 친일파일까. 지난 2002년 봄 조씨는 일본에서 일어로 발행되는 ‘현대 코리아’ 지면을 통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주역인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교수와 논전을 벌이며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이 식민통치 기간 중 한국에 근대 기업, 교육, 관료 제도를 가르쳐주었고 도로, 철로, 공장, 댐을 지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제도와 인프라가 광복 후 한국이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감사할 마음이 없다. 식민통치하에서 이뤄진 건설과 교육은 일본의 국익과 식민통치의 편의와 영속(永續)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놓고,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 그 노예에게 음악을 가르쳐주고는 “너에게 정신적, 문화적 영향을 끼친 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글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은 ‘객관적으로 쓰는 저널리스트도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다’며 관심을 보였다.
기자인가 운동가인가
그가 쓴 ‘김대중의 정체’ 138쪽에는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될 때 김대중씨가 수첩에 남긴 다음과 같은 메모가 실려 있다.
‘나는 통일조국을 세계대국의 열(列)에 끌어올리며, 나는 세계의 새로운 내일의 방향을 위하여 미래상을 제시하며, 나는 약소국과 불행한 인류의 권리를 위한 선도자가 된다. 나를 위하여 매일 기구(祈求)하는 가족과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국민을 잊지 말자.’
1973년 김대중씨는 47세였다. 박정희와 맞붙은 대통령선거에서 패해 도쿄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심신이 대단히 고달팠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10월유신이 펼쳐졌으니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국민이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믿고 행동했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것이다.
납치 사건 이후 한국에 돌아와 오랜 연금 생활을 하던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자유를 맛보며 국민과 접촉했으나 광주사태 후 신군부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해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선거를 계기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대장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역정을 거쳐 그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상당수 국민을 실망시켰다.
1970, 80년대 김대중씨 뒤에는 청년들의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조갑제 기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은 주로 60, 70대의 노년층이다. 그는 이들을 ‘교양 있는 애국시민’으로 정의하고 궐기를 촉구한다. 그는 과연 김대중씨와 같은 대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가.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은 그가 싸울 궁극적인 상대가 아니다. 그는 김정일과의 일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조갑제 기자는 실수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명분을 놓치지 않았기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는 김정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잡아놓고 도전하고 있다. 워낙 명분이 좋아 어떤 행동을 해도 웬만한 것은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사탄’ 김정일과 궁극적인 승부를 준비하다보니 사실보다 이념에 투철한 기자가 돼가고 있다.
그가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제목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이다. 그는 ‘자기 무덤에도 침을 뱉으라’는 자신감으로 이념과 사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1. 안보 상업주의자? 구국의 논객? 조갑제의 비밀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1771
2. 조갑제, 5·18의 광주에 홀로 들어갔다가…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1782
3. “조갑제는 스파이 50명보다 낫다”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17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