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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유런, 병원비 없어 ‘정기가<正氣歌>’ 쓰며 통증 달래다

淸山에 2013. 5. 12. 15:04

 

 

 

 

위유런, 병원비 없어 ‘정기가<正氣歌>’ 쓰며 통증 달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1>

김명호 | 제322호 | 20130512 입력

 

 

 

감찰원 전신인 심계원 원장 시절, 참모총장 바이충시(앞줄 오른쪽 넷째), 전 행정원장 웡원하오(앞줄 오른쪽 첫째), 중앙연구원 원장 주자화(앞줄 왼쪽 다섯째), 베이징대학 총장 후스(앞줄 오른쪽 셋째),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앞줄 왼쪽 둘째) 등과 함께 국립 중앙연구원 회의에 참석한 위유런(앞줄 왼쪽 여섯째). 1946년 11월 20일, 난징. [사진 김명호]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은 정통파 중국 지식인 중에서도 모범생이었다. 청년시절 형성된 인생관을 죽는 날까지 바꾸지 않았다. 사망 9개월 전인 1964년 1월 22일 밤 “나는 유가(儒家) 계통의 사람이다. 젊은 시절 지키려고 마음 먹은 것들을 이날 이때까지 유지했다. 무슨 일이건 중도에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는 일기를 남기며 흐뭇해했다.

생활습관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잠시라도 손에서 놓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1963년 4월 16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기가 남아 있다. “소년시절부터 습관이 안 되면, 늙어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게 독서다.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슬프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치욕이 뭔지를 모른다.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의사 말대로 하다 보니 며칠 간 독서를 못했다. 불안하다.” 초서의 성인(草聖)답게 붓글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마다 붓글씨를 한 점씩 써줬다. 돈은 받는 법이 없었다.

위유런은 수십 년간 고관을 지내면서 명예를 제일로 쳤다. 수중에 돈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만년에 병원비가 없을 정도였다. 85세 때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 3일 후 일기를 남겼다. “증세가 가라앉았다. 빨리 퇴원해야겠다.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 완치되기 전에 퇴원하는 바람에 병이 도졌다. 일기에 “의사 말 안 듣고 집에 온 게 잘못이다. 음식을 삼킬 수가 없다. 병원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썼다. 의료보험이라는 용어도 없을 때였다. 정 힘들자 문청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를 7폭 병풍에 쓰며 아픔을 달랬다. 최후의 대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64년 7월 말, 기관지가 퉁퉁 부어 올랐다. 푸단(復旦)대학 교우회 회장이 입원을 권했다. 위유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됐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국방부장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달려왔다. “제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위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징궈가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장징궈는 위유런의 부관에게 단단히 일렀다. “입원비 걱정을 하실 게 분명하다.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100원이라고 말씀 드려라.” 당시 감찰원장의 봉급은 5000원, 입원비는 하루에 1000원 남짓 했다.
생명이 다했음을 느꼈던지, 위유런은 몇 차례 유서를 작성하려 한 적이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제에 무슨 놈의 유서. 푸젠(福建)에서 개가 짖으면 타이완의 개들이 화답한다. 우린 개만도 못한 것들이다.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 소리 들을 생각하니 진땀이 난다.”

유서를 찾기 위해 감찰원 부원장과 감찰위원들이 위유런의 금고를 열었다. 만년필, 도장, 일기장 외에 대륙시절 조강지처 가오중린(高仲林·고중림)이 만들어준 헝겊 신발, 홍콩에 있던 손자의 미국유학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차용증서 원본이 들어있었다. 30여 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고관의 금고치곤 너무 초라했다. 다들 처연함을 금치 못했다.

훗날 비서 중 한 사람이 위유런이 가난했던 이유를 구술로 남겼다. “원장은 중국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청백리였다. 허구헌 날 같은 옷만 입었고 차도 싸구려만 마셨다.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학교 못 가는 애들에겐 빌려서라도 학비를 대줬다. 항상 쪼들렸다. 글씨를 팔자는 말이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청빈과 인자함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위유런의 소망은 단 하나, 시국이 변하고 고향에 돌아가 가오중린을 만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가오중린의 80회 생일이 다가오자 위유런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조강지처가 그리워 못살겠다. 생일을 쓸쓸히 보낼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융숭한 잔치를 베풀었다”는 답장을 받고 감동했다. 그날 밤, 꿈 속에서 가오중린을 만났다. “꿈에 옛 전쟁터를 찾았다. 부대를 이끌고 함양을 우회했다. 백발의 부부가 만나 흰머리가 눈물로 뒤엉켰다. 그래도 요염함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1964년 11월 10일 위유런은 타이베이에서 눈을 감았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가슴을 쳤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위유런의 서예 작품을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한 점도 유실되면 안 된다. 때가 되면 기념관을 만들어 보존해야 한다.”<계속>

 

 

 

 

 

 

 

 

 

 

 

 

 

위유런, 국·공 ‘인재쟁탈전’ 0순위에 오르다

 

 

위유런, 국·공 ‘인재쟁탈전’ 0순위에 오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0>

김명호 | 제321호 | 20130505 입력

 

 

1948년 5월 20일, 국민정부 관원들과 함께 총통 취임식장에 입장하는 감찰원장 위유런(오른쪽).

 

 

1949년 초,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패배를 예감했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재덕을 겸비한 준재가 구석에서 썩는 경우가 많다. 애석한 일이지만, 사교성 외에는 쓸모라곤 한 군데도 없는 것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관건은 사람이다. 인재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며 타이완(臺灣)으로 이전시킬 사람들의 명단을 건넸다. 앞줄에 위유런(于右任·우우임) 석 자가 선명했다.

승리를 확신한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신신당부했다. “4년 전, 충칭에 갔을 때 위유런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대륙을 떠나지 말라고 연락할 방법을 찾아라.” 두 사람의 인연은 저우언라이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위유런은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자 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된 위유런은 노동자농민부장(工人農民部長)을 겸했다. 후보 중앙위원에 뽑힌 마오쩌둥에게도 선전부장 자리가 돌아왔다. 위유런 45세, 마오쩌둥 31세 때였다.

2년 후에 열린 2차 대회에서도 마오쩌둥은 후보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국민당 중진 위유런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마오는 14세 연상인 위유런을 잘 따랐다. 일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갈 정도였다.

타이베이 시절 서재에서 서예에 열중하는 위유런. [사진 김명호]
유희(遊戱)로 끝났지만, 항일전쟁 승리 직후인 1945년 8월 29일부터 43일간,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담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충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숙소를 찾았다. 마오는 평소 글로만 접하던 사람들을 원 없이 만났다.

위유런만은 예외였다. 8월 30일, 저우언라이와 함께 직접 찾아갔다. “청년시절 위유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앉아서 만날 수 없다. 못 만나도 상관없으니 미리 연락하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 당시 위유런은 흔히들 ‘민주의 집(民主之家)’이라 부르던 민주인사 셴잉(鮮英·선영)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따라 위유런은 샤오빙(화덕에 구은 빵, 맛은 별로 없지만 위유런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고향 특산물이라며 유난히 좋아했다) 사먹으러 나가는 바람에 집에 없었다. 소문을 들은 장제스의 비서실장은 그날 밤 열린 마오쩌둥을 위한 연회에 위유런을 초청했다.

위유런도 9월 6일 점심에 마오쩌둥을 초대했다. 위유런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시장을 잘 봐야 한다”며 며칠간 충칭 시내를 누볐다. 당일 날은 새벽 시장에 나가 갓 잡은 돼지고기와 신선한 야채를 골랐다. 요리사들과 주방에 들어가 중요한 요리는 직접 만들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위유런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붓글씨와 시(詩)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치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마오는 싱글벙글했다. 저우언라이에게 “위유런이 내 시와 글씨를 극찬했다”며 칭찬 받은 애들처럼 좋아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위유런의 사위 취우(屈武·굴무)를 불렀다. 취우는 장징궈,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등과 모스크바 유학 동기생이었다. 국·공 양당의 인사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덩샤오핑과는 “네 이름이 건방지다. 샤오핑(小平)이 없어도 작은(小) 평화(平)는 이룰 수 있다”며 놀릴 정도로 친했다. 장징궈와는 모스크바 시절, 여자친구들이 서로 가깝다 보니 덩달아 친해진 사이였다.

저우언라이는 취우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난징으로 떠나라. 장인을 찾아가 내 말을 전해라. 우리 군대가 양자강을 건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징이 점령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 드려라. 우리가 비행기를 보내 모셔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계시라고 해라. 마오 주석의 뜻이다. 명심해라.”

장제스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보다 동작이 빨랐다. 취우가 도착했을 때 위유런은 난징에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장제스가 파견한 4명의 특무요원들에게 정중하게 납치당한 위유런은 한동안 광저우와 홍콩을 떠돌았다. 상하이에 머무르는 동안,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월 26일 장제스가 보낸 비행기를 탔다. 눈 떠보니 충칭이었다.

충칭 도착 3일 후, 장제스의 저녁 초청을 받았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그날 밤, 장제스 부부와 함께 타이완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안(西安)에 있는 부인과 딸에겐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낯선 섬나라에서 고독한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