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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습관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잠시라도 손에서 놓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1963년 4월 16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기가 남아 있다. “소년시절부터 습관이 안 되면, 늙어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게 독서다.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슬프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치욕이 뭔지를 모른다.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의사 말대로 하다 보니 며칠 간 독서를 못했다. 불안하다.” 초서의 성인(草聖)답게 붓글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마다 붓글씨를 한 점씩 써줬다. 돈은 받는 법이 없었다.
위유런은 수십 년간 고관을 지내면서 명예를 제일로 쳤다. 수중에 돈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만년에 병원비가 없을 정도였다. 85세 때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 3일 후 일기를 남겼다. “증세가 가라앉았다. 빨리 퇴원해야겠다.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 완치되기 전에 퇴원하는 바람에 병이 도졌다. 일기에 “의사 말 안 듣고 집에 온 게 잘못이다. 음식을 삼킬 수가 없다. 병원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썼다. 의료보험이라는 용어도 없을 때였다. 정 힘들자 문청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를 7폭 병풍에 쓰며 아픔을 달랬다. 최후의 대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64년 7월 말, 기관지가 퉁퉁 부어 올랐다. 푸단(復旦)대학 교우회 회장이 입원을 권했다. 위유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됐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국방부장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달려왔다. “제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위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징궈가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장징궈는 위유런의 부관에게 단단히 일렀다. “입원비 걱정을 하실 게 분명하다.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100원이라고 말씀 드려라.” 당시 감찰원장의 봉급은 5000원, 입원비는 하루에 1000원 남짓 했다.
생명이 다했음을 느꼈던지, 위유런은 몇 차례 유서를 작성하려 한 적이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제에 무슨 놈의 유서. 푸젠(福建)에서 개가 짖으면 타이완의 개들이 화답한다. 우린 개만도 못한 것들이다.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 소리 들을 생각하니 진땀이 난다.”
유서를 찾기 위해 감찰원 부원장과 감찰위원들이 위유런의 금고를 열었다. 만년필, 도장, 일기장 외에 대륙시절 조강지처 가오중린(高仲林·고중림)이 만들어준 헝겊 신발, 홍콩에 있던 손자의 미국유학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차용증서 원본이 들어있었다. 30여 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고관의 금고치곤 너무 초라했다. 다들 처연함을 금치 못했다.
훗날 비서 중 한 사람이 위유런이 가난했던 이유를 구술로 남겼다. “원장은 중국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청백리였다. 허구헌 날 같은 옷만 입었고 차도 싸구려만 마셨다.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학교 못 가는 애들에겐 빌려서라도 학비를 대줬다. 항상 쪼들렸다. 글씨를 팔자는 말이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청빈과 인자함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위유런의 소망은 단 하나, 시국이 변하고 고향에 돌아가 가오중린을 만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가오중린의 80회 생일이 다가오자 위유런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조강지처가 그리워 못살겠다. 생일을 쓸쓸히 보낼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융숭한 잔치를 베풀었다”는 답장을 받고 감동했다. 그날 밤, 꿈 속에서 가오중린을 만났다. “꿈에 옛 전쟁터를 찾았다. 부대를 이끌고 함양을 우회했다. 백발의 부부가 만나 흰머리가 눈물로 뒤엉켰다. 그래도 요염함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1964년 11월 10일 위유런은 타이베이에서 눈을 감았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가슴을 쳤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위유런의 서예 작품을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한 점도 유실되면 안 된다. 때가 되면 기념관을 만들어 보존해야 한다.”<계속>